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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데란 ㅣ 미래의 문학 11
데이비드 R. 번치 지음, 조호근 옮김 / 폴라북스(현대문학) / 2025년 2월
평점 :
이 소설은 자신의 증오에 완전히 먹혀버렸거나, 적어도 그것에 그대로 사로잡힌 한 존재의 증오가 “차가운 바람처럼, 모든 것을 불사르는 화염처럼, 인간의 모든 시도와 포부를 녹여 없애는 독액을 질질 흘리는 산성 물질의 구체처럼 이야기 속”을 휘감아 돈다. 인간과 인간이 만들어 낸 세계에 대한 불신, 그들이 자초한 조잡하고 기만적인 허구의 세계가 기어코 초래한 종말적 실체에 대한 이가 빠드득 갈리는 증오와 분노, 무한한 살육과 파괴가 지면을 흥건히 적시는 이야기다. 그렇다고 선혈이 낭자한 그런 이야기는 아니다. 『모데란(Moderan)』은 1960년대 발표된 40편 남짓한 장,단편(掌,短篇)으로 하나의 서사적 연결을 하고 있는 작품들이 엮인 일종의 우화적 사변(思辨)소설이다.
이 작품의 감상을 시작하기 전에 작가 ‘데이비드 R.번치’가 1965년 《에메이징 스토리즈》 6월호에 남긴 유명한 선언은 그가 쓰고자 한 이야기의 의도를 이해하는 데 좌표가 되기에 짧게 소개하는 것이 도움이 될 것 같다.
“저는 뭔가를 서술하거나 설명하거나 즐거움을 제공하려고 이 업계에 뛰어든 것이 아닙니다. 저는 독자들을 생각하게 만들려고 여기에 섰습니다. 우리가 온전히 끔찍한 세계를 만들어버린 대가로. (...) 제가 원하는 독자는 저 높은 곳으로 올라가서 커다란 흑십자에 올라갈 독자입니다....”
자, 그가 묘사한 끔찍하다는 지옥같은 세계는 소설의 주인공인 신금속으로 교체된 강철인간 10번 성채에게는 기쁨이요, 삶의 이유이자, 쾌락이니 오히려 지옥이 아니라 천국에 가까운 세계라는 것이 맞을 것이다. 세계는 지독한 오염과 잔혹하고 무참한 전쟁으로 종말을 맞이했다. 신세계 모데란은 독성 물질로 오염되고 파괴된 폐허를 로봇들이 단단하게 평탄 작업을 하고, 그 위에 무균 플라스틱 층으로 매끈하게 덮어버리고, 오염된 공기를 날려버리기 위해 대기층을 파괴하고는 증기 방어막을 월별로 쏘아올리는 인공의 세계다. 사실 소설의 배경인 모데란의 세계는 오늘 우리들이 망가뜨리고 있는 이 지구 생태계의 모습과 다르지 않아 보인다. 대양과 대륙 어디에든 넘쳐나는 플라스틱 쓰레기와 매일 대기오염도가 발표되어야 할 지경에 이른 대기의 악화는 어쩌면 이들과 같은 무한한 과학기술의 낙관성, 그 임기웅변과 매우 닮아있다.
이야기는 이미 또 다른 종말에 이른, 세계에서 가장 위대한 자임을 증명하겠다고 울부짖었던 존재, 신금속 인간 10번 성채가 남긴 테이프를 발견한 그네들의 후손이랄 수 있는 일종의 ‘빛줄기’인 미래 종족이 그 테이프를 해독해 전하는 형식을 취하고 있다. 이 존재 역시 “인간이란, ‘체제를 무너뜨릴’ 방법을 찾아 헤매는 행위를 멈출 수 없는 존재”로 규정하고 있듯, 인간이라는 꾸러미는 자기 파괴성이 그 요소라고 설명한다.
이 소설과 병행하여 읽던 책이 『계급의 숨은 상처』였는데, 나와 너로 위계의 등급을 만들어내기 위해 능력이란 해괴한 가치체계를 사회화하고 다수에게 상처를 주며 권력을 독차지하는 끈질긴 인간 세계의 파국적 현상을 규명하는 저술이다. 그 책에는 손상된 자기 존엄과 억압된 자유로 고통스러워하는 인간들의 세계가 있다. 이를 위해 사용되는 경쟁의 심리는 곧 모데란 최고의 전사인 10번 성채가 「망치와 인간에 대하여」에서 읊조리는 “매일이 경쟁으로 구성, 서로에게 고약하게 구는 일”이 “진실의 시대를 살아가는 교양인의 일과”라 말하는 것과 흡사하다. 소설은 양심의 경향성, 도덕관념을 정신적 장애물이라 일컫기까지 한다. 그래서 “최선을 다해 성채를 부수거나 이웃의 머리를 망치를 내리치는 것이야말로 쾌락”이라고 부르는 세계이다. 작가가 부여한 ‘10번 성채’라는 존재는 바로 오늘의 인간들과 이 세계의 소수 엘리트들이 주장하는 능력주의, 경쟁주의, 과학중심주의의 화신으로 보인다. 그래서 그는 전쟁이 교양인의 가늠자이며 파괴는 곧 창조의 다른 이름이라고 외친다.

소설은 작가의 선언처럼, ‘설명하거나 즐거움을 제공하려는 것이 아니라’는 말을 완전히 배반할 만큼 서사적이고 블랙유머로 무장된 재미가 넘쳐흐른다. 10번 성채가 되어 모데란 최고 전쟁의 신이 되는 존재의 외관도 주목할 필요가 상당한데, 그가 아홉 달에 걸친 신체 훼손수술을 통해 92.5%의 신금속과 결합한 7.5%의 살점을 너덜거리며, 그 살점이 바로 인간성, 인간으로서 존재를 유지할 수 있게 해주는 최소한의 존재론적 의미임을 말하는 것은 정말 괴기스럽고도 우스꽝스럽다. 여기에는 “과학은 인간을 만들었다! 신금속 인간을!”하며 과학에 대한 무한한 찬양의 의미에 못지않게 일말의 완전성인 7.5%로 의미되는 인간성이란 것에 대한 의구심이 남아있다. 외전의 한 작품인 「언제나 조금씩」에서 “내구성은 강철보다 견고해졌지만, 그럼에도 증오하고 기쁨을 누리는 능력에서는 그대로 인간이었다.”는 금속인간의 자긍심 어린 선언은 역설적으로 과학실증주의의 낙관성에 대한 은밀한 의심과 조롱으로 보이기까지 한다.
사실 이 소설 40여 편의 작품들 면면을 관류하는 사유의 제안들은 인류의 존재론적 재앙을 만들어낼 위험들에 대한 현재라는 시간에서의 이해에, 삶의 경쟁에 매몰된 우리들이 얼마나 멀찌감치 떨어져 있는지, 마치 내일도 오늘처럼 삶을 이행할 수 있을 것이라는 믿음이 환상에 불과한 것임을 각성(覺醒)케 하려는 물음들의 연결인 듯하다. 그 첫째는 충동조절에 실패하기 일쑤고, 각종 질병과 부상에 취약하며, 제한된 환경 조건에서만 살아갈 수 있으며 늘 죽음이 따라다니는 조잡한 내재적 조건을 지닌 ‘인간의 탈신체화의 욕망’, 이에 편승한 극단적 실증주의에 심취한 기술자본주의의 지향성에 대한 선견적인 소름끼치는 인간 욕망의 현주소를 일깨우는 것일 게다.
「한때 붉은 양탄자가」에서 “과학은 지저분한 흙덩이 구체에 플라스틱을 입혀 매끈하게 만들어 신금속 인간이 딛고 설 자리를 마련했노라.”라고 외치는 것이나, 「신금속」에서 “궁극의 물질, 신금속, 플라스틱...시간을 뒷전으로 몰아내 우리의 꿈이 살아 움직이는 물질이었다.”라거나, “마음 약하고 망설임이 심하며, 감상적이고 불안하며, 죽기 직전까지 모든 시간을 겁에 질려 보내며 쉽사리 감상에 빠지는....그들이 감내해야 했던 꿈틀거리는 공포를, 불안을, 위험을, 죽음을! ....”이라고, 살점 인간에서 금속 인간으로 거듭남을 긍정하는 「과거에의 일별」 등이 그러한 과학기술 실증주의에 대한 역설, 혹은 반어적 조크일 것이다.
둘째는 모두에서 잠깐 언급했던 경쟁과 계급을 만들어내는 능력주의 신화에 도사리고 있는 그 신념의 반도덕적 무양심적 사회적 무의식의 관성에 대한 자성일 것이다. 모데란의 일상이란 끊임없는 전쟁이다. 「영원을 마주하며」에는 “이웃 사람을 찍어 누르고 우리의 주도권을 확장할 수 있다면, 우리는 뭐든 할 수 있었다.”고 말하기도 하고, 이 불멸의 존재가 된 금속 인간은 영원을 마주하기에 실패하지 않는 수단으로서, “여전히 신선하게 느껴지고 보상이 되는 일거리는 단연 계속되는 전면전이라는 결론에 도달”하기에 이르기도 한다. 특히 「반구형 거품 주택」이라는 수백만의 평범한 인간이 살아가는 단독 거주공간을 설명하는 단편에서는 이들 “연약한 존재들의 비위를 맞추는 일은 모두 낭비일 뿐”이며, “이 얼마나 한심한 낭비인가! ”라고, “풉! 번쩍! 하고 검은 얼룩으로 변할 것이다, 강철 관리인이 한번 쓸어버리면 간단히 사라질 것이다.”라며, 고작 신체 교체술로 최강의 능력을 지녔을 뿐인 자신을 망각하고, 다수의 존재들을 일거에 쓸어버려도 될 사회적 잉여로 취급하기도 한다.
여기에는 인간, 생물학적 신체를 지닌 인간에 대한 지독한 염오(厭惡)가 내면 깊숙이 자리하고 있다. 그래서였는지, 「망치와 인간에 대하여」에서는 올데란, 즉 구세계의 살점 인간인 구도자가 “삶의 의미를”, 소문난 위대한 불멸의 전사로서 그 의미를 현현하는 10번 성채의 초상화로 마무리하기 위해 찾아들지만, 10번 성채의 모습을 확인하는 순간 좌절하고 이내 왔던 길로 돌아간다. 그런데 더욱 악취미인 것은 그가 폭탄에 맞아 사망하자 “개들에게 구도자에 보내는 선물이라고 적힌 플라스틱 뼈다귀를 물게” 하여 조롱하기까지 한다. 아마 “양심에서 해방되고 도덕을 말끔히 씻어낸”, 현대의 내면화된 계급주의의 교활하고 기만적인 인간성을 환기하려는 의도처럼 보인다.
셋째는 과학실증주의자들의 그 낙관적 실체가 실현되어 불멸의 존재가 되었을 때, 인간의 실존성에 대한 물음일 것이다. 낡은 살점을 버리고 새로운 불멸의 존재가 되었을 때, 그 영구히 지속되는 매일 매일의 삶이란 것은 대체 무엇일까 하는 것이다. 물론 이 소설은 전쟁이라고 선언했다. 그런데, 「재회」라는 200년이란 시간이 흐른 강철인간이 옛날 살점인간이던 시절의 신앙과 자립심을 키우고 약속을 신뢰했던 옛 친구의 방문을 걱정하는 장면이 나온다.
”플라스틱으로 뒤덮인 대지를 폄하하는 논리에 반박하려면“, 그리고, 자기 신체를 버리고 강철로 교체된 존재에 대한 의심에 답하기 위해 고심하는 것인데, 그를 폭사시키면 해결될 것이라 생각하기도 하지만, 기억은 결코 사라지는 것이 아님을 알기에, 더욱이 모데란이라는 ”신공정 땅 전체는 기억에 의존해 세워진 곳이다. 그렇다! 신공정은 과거로부터, 기억하는 온갖 것들로부터의 도주 과정이고, 그 안에는 기억자체로부터의 도망이라는 뜻“이 내포되었다는 생각에 이르러, 자신의 가치에 대한 의심, 비교를 견딜 수 있을까하는 의심에 빠지기도 한다.
둘은 서로 만나 눈물만을 주고받고는 바로 이별의 걸음을 걷는다. 돌아서는 친구의 입이 무언가를 말하는 것 같지만 들리지 않는다. 그는 말한다. ”200년 강철의 시대가 흘러간 지금, 그의 길이든, 나의 길이든 전부 슬픔과 의심으로 이어질 뿐이라고 말하려던 것일까?“라고. 어쩌면 그의 삶은 고작 ‘희망찬 죽음학’에 불과한 것이 아니냐는 반문(反問)인 것만 같다. 의심이나 유령이나 공포가 들어앉을 자리를 조금도 남기지 않기 위해 매일매일 벌이는 극한의 살육과 전쟁. 종말에는 전조(前兆)가 있다. 사랑과 자기 의심의 상실, 무한 폭력, 금속에도 내려앉는 금속세균의 점진적 침투, 그리고 아주 작은 우연의 돌발성이 그 어떤 불멸도, 쾌락도, 의미도 확신해주지 못한다. 이 강렬하고 독특한 이야기 속 지성의 웅변에 집중하다보면 작가의 말처럼 저 높은 흑십자의 고지에서 인간 세계의 그 흉물스러움을, 그 던적스러움을 옴팍 뒤집어쓴 것 같은 느낌에 빠졌다 나오는 기분이 든다.
이 세계는 이대로는 괜찮지 않은 것인데, 왜 우리는 아무렇지도 않은 듯 살아가는 것일까? 뒤틀린 계급의식과 감정을 내면화시켜 합리적으로 인간의 존엄을 짓밟는 세계, 기술자본주의의 지향성에 기초한 인공지능과 탈신체화의 욕망으로 치닫는 과학실증주의의 세계, 보편적 심원한 사색에 매진한다는 지식인들의 편협성 등 파국의 한계까지 몰아붙이며 인간의 실존적 문제에 대한 근원적 물음으로 내모는 소설이다. SF계의 혁명적 작품으로 불리는 이 소설은 경험의 지대를 벗어나 우리의 선험적 이성, 그 도덕의 근원을 헤쳐 보게 한다. 이대로 우리들의 인간성은 손 댈 필요가 없는 것인지, 이 사회에 내재된 가치들은 신뢰할 만한 것인지를 자성해보라고 외치는 것만 같다. 60여 년 전에 쓰인 작품이라 할 수 없을 정도로 21세기 현재를 사는 우리들에게 더욱 가깝게 다가온다. 정말 문제작이다. 이제라도 읽게 되었음에 감사하는 마음이 들게 하는 그런 작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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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附 記:
이 작품을 왜 이처럼 증오로 가득한 전쟁놀이에 광분한 세계로 창조해야만 했을까하는 대목에 대한 생각이다. 인류의 역사를 보면 말세의 징후(오늘의 전지구적 극우정치화, 전쟁과 민족주의의 부활, 자기이익 우선주의 등 극단적 탐욕과 같은)가 보일 때, 이 같은 현실에 대해 심판 증후군이나 데카당스, 어떤 극단적 형태의 돌발적인 사건을 성찰케 하는 시선들이 있어왔다는 점이다.
철학자 이광래 교수가 『미술철학사』에서 지적하였듯, 아마 16세기 60세의 노구를 끌고 6년여 천장화에 매달려 《최후의 심판》을 그렸던 미켈란젤로가 성스러운 제단에 굳이 벌거벗은 인물들의 저승을 적나라하게 보여줌으로써, 현실세계에 광란하는 인간들의 무분별한 욕망을 심판하려했듯 '가학적피학애(sadomasochism)'를 숨기지 않은 것은 적절한 예가 될 것 같다.
이러한 관점에서 데이비드 R.번치가 창조한 신금속 인간 10번 성채가 읊조리는 극단적 폭력성이나 그의 신체는 바로 인류와 인류사회에 대한 하나의 강박적 치유과정의 역설적 상징으로 이해되어야 할 것 같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는 얘기다. 아마 21세기 바로 지금, 우리는 성큼 인류 종말의 시간에 다가가고 있는지도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