함머클라비어
야스미나 레자 지음, 김남주 옮김 / 뮤진트리 / 2016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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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의 소소한 일상 순간순간의 조각 이야기들이 모여 시간 속에서 사라져버리는 세계에 대한 비가(悲歌)라 해야하나? 아니, 그저 시간에 무릅을 꿇을 수 없는, 죽음이라는 "포기의 쓴맛을 가만히 기다릴 수 없는" 어느 여인의 시간과의 싸움에 대한 '감동의 기록물'이라는 편이 합당한 정의이리라.

딸아이 앞에서 베토벤의 소나타 '함머클라비어'를 연주하려하지만 깊게 드리운 죽음의 그림자만을 드러낼 뿐이었던 돌아가신 아버지와의 일화(逸話)로부터, 이젠 시간의 강을 건너버린 것들에 대한 40여편의 기억 편린들이 모여 "살아있는 자들, 과정 한가운데 있는 존재자"로서의 그 찬란한 감동을 음미하게 한다.

 

문득 거실의 서랍장위에 진열된, 카메라 앞에서 이를 드러내고 함박 웃는 천진난만한 두 아이가 있는 사진 속 시간을 매양 그리워하며 미소짓는 내 표정을 느끼게 된다.  잃어버린 줄 알았던 자신의 딸이 그리고 썼던 일기장 '투덜이 소녀'를 찾아내곤 "사라져버린 하나의 세계", 시간 속에서의 그 가치를 이야기 할 때의 소설 속 '야스미나 레자' 와 이렇게 공명한다.

"얼마나 사랑에 넘치는 마음으로 귀여워했는지,...얼마나 사랑스러운 눈길로 바라보았는지, 얼마나 완벽하게 그 애를 소유했는지,...한때 내가 얼마나 충만하게 그 애의 모든 것이었는지, 이게 심술궂은 시간이다. 시간이란, 그런 것이다."

그래, 우린 시간에 저항 할 수는 없다. 그렇다고 시간이라는 논리와 이성(理性)에 굴복할 수 만은 없는 것 아닌가?

 

다음의 일화를 옮기면서 살며시 웃는 '야스미나'의 모습을 그리게 된다. 발자크와 그의 아내가 목적지에 가는 길로 싸운 에피소드인데, 합리성이라는 논리와 비이성적이라는 감성과의 부딪침에 대한 이야기다. 아내의 말을 무시하고 길을 찾던 발자크는 빙빙돌아 많은 시간이 지체되었다. 아마 머리에서 불이 활활 타올랐을 것이다. 아내가 토라진 것은 뻔한 일, 발자크는 아내에게 뒤늦은 사과를 했지만 자기 논리에 대한 그의 완강함은 그녀를 실망시키에 넘쳐흘렀다. 그녀는 무엇을 기대했을까? "세상보다 나를 우선해줘!" 라는 '하나의 실존적인 시험'을 한 것이다. "나에게 맞서 세상을 옳다고 하지 마." 비합리에 맞서는 이성, 사랑에 맞서는 오만만큼 삶을 황폐하게 하는 것도 없다. 삶을 지탱하는 것, 우리가 살아있게 만드는 것, 그것은 바로 "비이성적인 낙관의 순간들"이라는 것이다.

 

작가만큼이나 나 또한 베워야 할 것들을 이미 배운 나이 이다. 그래서 더 많은 삶의 진실을 터득했다는 말이 아니다. 이런데 진실이 있는 것은 아니라는 것을 알아야 할 만큼 살았다는 것이다. 그래서 "차가운 침대와 허무외에 그 어떤 전망도" 남아 있지 않다고, 더이상 욕망하는 일도 시들하기만 하다. 그럼 더이상 뭔가가 되는 일에서 관심을 거둬야 하는 것일까? 발자크는 아내에게 눈부신 선언을 한다. "나는 싸우는 게 좋고, 널 사랑해!" 라고.

그래 "나는 더 길을 잃고 싶다."는 야스미나의 또 다른 선언은 시간의 강(江)을 어떻게 건너는지에 대한 빛나는 요령으로 와 닿는다.

"나는 시간 앞에 무릎을 꿇을 수가 없다....나는 평화를 원하지 않는다....나는 전투의 운명을 원한다. ~ (中略) ~ 너로 하여금 좀더 나아가게 하소서. 오늘을 음미하게 하소서. 포기의 쓴맛을 가만히 기다릴 수 없는 나로 하여금"

삶이란 앞니가 모두 빠진 빈 공간을 드러내며 활짝 웃는...앞니 빠진 소녀의 기막히게 매력적인 미소..., 눈물이 날 정도로 우리를 감동시키는 그것이라고. 역설적이게도 죽음 앞에 선 비가(悲歌)가 돌연 삶의 의미 가득함이 되어 돌아오는 그런 작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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