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용헌의 동양학 강의 1 - 인사편
조용헌 지음 / 랜덤하우스코리아 / 2010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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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창하게‘동양학’이라는 표제를 달고 있으나, 강호를 두루 두루 돌아다니면서 저자의 뻥도 좀 세진 것 같다. 그 1권인 인사(人事)편으로 시시콜콜한 인간만사를 통해 삶의 그러해야 함에 대한 대략 100여개의 단상을 풀어내고 있으니 예서 기대할 수 있는 것은 심오한 학문적 성취라기보다는 그야말로 독만권서(讀萬卷書)하고 행만리로(行萬理路)한 내공으로 버텨내는 입담이라 하여야 할 것이다.
바람을 먹고 이슬을 덮고 자는“풍찬노숙(風餐露宿)의 과정을 거쳐야만 강호학(江湖學)을 할 수 있다.”라면서 인생의 시름과 깊이를 알아야 비로소 제대로 된 구라도 칠 수 있다는 것은 일견 설득력있어 보인다. 게다가‘강호의 4대 학파’까지 운운하면서 대개들 알법한 인물들로 구성된‘다석, 간송, 장일순, 야산학파’를 들먹이면 이건 그럴듯함을 넘어 지고한 경지로부터 솟아난 뭔가가 있을 것이라는 기대를 하게 한다.

‘사마천’은 세계의 구라꾼으로 장엄하고 아름다운 중국 천지를 여행함으로써 인생을 알고 속세를 초월하는 상상력의 산물인『사기(史記)』를 쓸 수 있었다는 것이나,“이야기는 건달이 만드는 것이고, 건달이 되면 춥고 배곯으며 천하를 돌아다녀야 한다. 건달의 궁극적 관심은 주역의 건(乾)괘에 통달(達)하는‘건달(乾達)이 되는 경지다.”하면, 정말 강호를 주유천하(周遊天下)해야지만 인생의 참맛을 이해할 수 있을 것만 같다. 그래서 이의 의미를 되새겨보게 되는데 유유자적 산천을 거닐며 만나는 사람들과 자연에서 삶의 이치를 깨닫는 느림의 철학과 다르지 않음을 발견케 된다.
그렇다보니 강호를 주유하며 사람 사는 모습을 들여다보고 그네들의 이야기 속에 담긴 진한 삶의 향기에서 인간의 도리와 인생의 그러해야 함에 대한 지혜를 온 몸으로 받아들인 이 강호학을 말하는 저자의 설레발이 그리 밉지는 않다.

1만2천석 대지주집 도령이 하인에게 건넨 정감 있는 말 한마디가 후일 목숨을 건지게 해주었다는‘봉소당 피화담(避禍談)’얘기에서 “논리(論理)위에 정리(情理)”가 있음을 확인케 하고, 조선 선조 조일전쟁의 의병대장이었던 고경명을 비롯하여 구한말 의병대장 고광순, 고광문에 이르기까지 세대를 이어가며 의로움으로 노블레스 오블리주를 실천한 고씨 가문이나, 가난한 민중들을 의식하여 굴뚝을 낮게 하여 위화감을 없애려하고 사랑채 옆 쌀뒤주에서 쌀을 퍼가게 눈을 감아주는 사대부의 아량 넘치는 미덕에서 어느덧 잃어버린 고귀한 정신들을 일깨워주기도 한다.
여기에“자신에게 이로우면 남에게도 이로워야 오래간다.”즉, 자리이타(自利利他)라는 인생의 보람 있는 무의식이자 양심의 세계를 통해 바로 이 무의식이 염라대왕의 장부책, 인간 양심의 블랙박스임을 설파하는 글이 더해져 나눔의 사회에 대한 정의를 더욱 맛깔스럽게 한다.

한편 깊은 인상을 준 글로, 고택(古宅)에 대한 인식인데, 오늘에까지 무너지지 않고 수백 년을 계속해서 유지될 수 있는 것은‘역사의 검증’에서 살아남았음을 증명하고 있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 주변의 민중들에 덕을 베풀어 적을 만들지 않았으며, 학문적 성취도 존숭(尊崇)받는 집안으로 자손 대대로 이를 긍지와 자존심으로 지켜낼 수 있었음을 의미한다는 것이다. 한갓 잔류하고 있는 사대부들의 고택이 민속가옥의 전통적 가치이외에 무어가 있을까 했던 시선이 순간 부끄러워지기도 한다.
또한 오늘날 의전(儀典)의 문제가 대두하면 왼쪽이 상석이냐 오른쪽이 상석이냐 하며 자리배치에서 신경전을 벌이는 현상의 이면에 있는 좌(左),우(右)가 지니고 있는 의미를 공부(工)와 입구(口), 양과 음으로 바라보는 전통적 사고의 뿌리 깊은 인식으로 풀어내어 퇴계학파를 모시는 호계서원의 학봉과 서애의 위패 자리다툼시비가 400 년 만에 학봉 자손들의 양해로 마무리되었다는 미담은 슬며시 미소를 짓게 한다.

어쨌거나 산다는 것이 무엇이겠는가. 나와 너 어울려 고통 없이 즐겁고 평안하게 살다가는 것 아니겠는가. 그러자니 밝은 마음, 이웃에 대한 배려와 같이 덕과 선함의 의지와 풍요로운 자연과 교감하면서 천천히 그리고 행복하게 사는 삶, 그 이상 무어가 있을까.
‘소동파’가 정했다는 시원하면서 즐거운 그 무엇인‘상심16사(賞心十六事)’, 즉 “시원한 비오는 밤 죽창(竹窓)옆에서 이야기 나누기, 여름밤 시냇물에서 발 씻기, 제방길 산보하기, 강 건너 산사의 종소리 듣는 것, 등나무 베개 베고 낮잠 자기,..등등”이나, 맹자의 군자삼락은 아니더라도 소인인 내게 있어 소인삼락(小人三樂)으로 저자가 꼽은, “지리산 천은사 뒤의 눈 덮인 소나무 숲에서 장엄한 광경을 보며 세상사의 때를 씻어내고, 오래된 벗과 사랑을 이야기하고 남은 인생의 유한함에 대해 이야기를 나눌 수 있다면, 그리고 그곳에 맛있는 음식이 있다면” 정말 인생이 즐겁지 않겠는가!

민간에 자리 잡은 전해져 오는 민담에서, 지나가다 만난 의외의 강호의 고수에게서, 그리고 소소한 삶의 자투리와 장엄한 자연 모두에게서 배워내는 삶의 지혜들을 익숙한 고사에 먹음직스럽게 버무려낸 보편적 도덕과 사회정의를 말하는 도덕사회학이라 해야 할까. 아무튼 중년의 나이에 책을 읽고 그 소감을 쓰고 있는 내게 그것이 바로‘상팔자’아니냐고 하는 저자가 고맙기도 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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