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린
안윤 지음 / 문학동네 / 2024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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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에 흔들리는 나뭇잎을 자주

바라봅니다. 흔들리고 있는 것들에

어쩔 수 없이 마음이 갑니다.

수필집 수기 手記를 썼습니다.“

-안윤, 물의 기록에서

 

이 작품집을 한 문장으로 설명하는 것이 가당치 않은 것이겠지만, 수록작 단편 의 한 구절이 아마 어느 만큼은 대표하리라 생각되어 옮겨본다.

 

일기를 쓰듯, 때로는 수행을 하듯 성실하게 셔터를 눌렀다. 황량하고 덧없는, 무위에 가까운 풍경을, 자신의 내면과 어딘가 닮은 대상들을 포착했다. (...) 사희는 철저히 관찰자가 되었다. 자신이 이 세계에 속해 있는 것이 아니라 건너다보고 있다는 감각이, (...) 형용할 수 없을 만큼의 위안을 줬다.” - 단편 , 240쪽에서

 

그래, 소설집은 철저한 관찰자, 인생을 조망하는 시선들, 다시 말해 자기 인생의 궤적과 곡절을 바라볼 수 있을 정도의 시야와 거리를 가짐으로써, 의 사희 말처럼, 인생에서 열기 두려웠던, 여전히 열지 못한 문 앞에 있는 사람들의 모습과 감정과 대화를 나누도록 독자를 텍스트 안으로 이끄는 느낌을 갖게 한다. 어쩌면 한 번도 상상해 본적 없는 자기 내면의 그 변덕스러운 실체를 마치 다른 이의 시선으로 바라보는. 내 마음이나 행동 또는 그 주체라고 여기는 나라는 존재는 결코 불변하는 무엇이 아님을 알면서도 우리는 바람에 흔들리는 나뭇잎처럼 흔들리는존재임을 망각하곤 한다.

 

표제작인 단편 모린은 시각장애인을 위한 낭독 봉사를 하는 미란과 장애인 영은의 반걸음 만큼 떨어진 사랑의 이야기가 흐른다. 이 작품의 독특함은 요제프 코발스키라는 무명의 작가가 쓴 보이지 않은 것들 Invisible things이라는 수필집의 문장들이 인용되고 있는데, 이것은 서술자인 미란 혹은 영은의 목소리이기도 하고, 인생 조망자의 시선이기도 한 듯하다. 그 가운데 한 사람이 자신을 넘어서는 어떤 감정을 처음으로 마주하는 순간이었다.”라는 문장을 접하게 되는데, 이것은 그 강렬한 아픔 때문에 아름다울 수밖에 없는 순간이라고 말한다.

 

자신을 넘어서는 감정을 마주하는 순간들이란 주의깊고 세밀하게 총동원된 감각의 종합이다. 시각장애인을 안내하기 위해 영은으로부터 배우는 팔꿈치를 내어주는 반걸음 앞선 자연스러운 동작, 왼쪽 빗장뼈 손바닥만큼 내려오면 깨알 같은 두 개의 점을 스쳐가도록 자신의 몸을 하나의 텍스트로 내어주는 마음, 어느 일방적인 보호와 의지가 아닌 있는 그대로의 사랑이란 무엇인지를 보게 된다. 유일한 사람을 사랑하는 일은 그를 제외한 나머지 모든 것을 그럭저럭 견딜 수 있게 된다는 의미다.” 는 첫 문장은 마지막 문장까지 읽고 남으로써 비로소 해독되는 소설이다.

 

작가 안윤은 이 세계에 펼쳐진 야만적 문제들을 배경으로 삼아 그것에 내재된 현재의 실상을 노출하면서도 그보다는 그것들과의 상호작용 속에 내면화된 인간성을 관찰하게 한다. 단편 핀홀 Pinhole은 단란한 가정과 무관했던 어린 시절을 보낸 보라가 스스로 인정하지 못했던 훼손 된 자신의 마음과 마주하기 일 것이다. 그녀는 동거하는 승원의 가족과 자신을 위한 결혼선물로 천에 수를 놓지만 자신의 얼굴만은 빈 공간으로 남겨놓고 주저한다. 누군가를 아는 일에 그 대상을 두고 앎의 정도를 따져보는 일에 사실 나도 서툴다. “(당신은 그를 혹은 그녀를) 얼마나 안다고 생각하세요?”라는 물음은 참으로 심사를 복잡하게 만드는 물음이다.

 

소설은 어느 중증장애인이 자신의 온 몸을 투쟁하듯 더디게 완성하는 문장으로 시작된다. 떨리는 집게손가락 끝을 문자판 글자에 가리키고 그리고 비로소 원하는 글자에 멈춰 톡, 한 번 건드리며 완성하는 문장, ‘하 여 행 복 을 산 다 오 로 지. 이것은 승원이 싱크대 밑, 소파 밑처럼 아무 곳에나 처박아놓아 집쥐처럼 보이는 양말뭉치의 무신경처럼, 삼십일 년을 중증장애인 거주 시설에 갇혀 있다가 석연치 않은 죽음을 한 승원의 형, 정원의 존재를 알게 됨으로써 보라와 승원은 결코 이을 수 없는 존재임을 암시하는 듯 보인다. 내 앞에 나타난 이 구멍들은 무엇으로 이어야 해, 할머니?” 보라가 죽은 정원이 갇혀 지내던 폐쇄된 시설을 찾아들고, 정원이 남긴 쉴 새 없이 떨리며 남긴 불운의 증명, 행복의 위치 이동을 쫓는 글과의 대면은 자신과의 만남과 다름 아니었을 것만 같다.

 


담담은 양성애자를 자신의 정체성이라고 생각하는 혜재의 자신 안에 도사린 의심과 불안의 실체 마주하기라 해야 할까? 스스로 설명하거나 증명하려고 안달하는 자기 존재에 대한 멀리서 보기, 철저히 관찰하기의 또 다른 판본이다. 결혼과 출산 생각은 없다고 못 박은 자신에게 묻는다. 결혼은 내 정체성을 부정하는 일일까, 나는 약속이 싫은 건가, 조금도 손해 보거나 희생하고 싶지 않은 것일까, 사랑은 믿지도 않으면서 욕망만 채우는 것뿐일까에 대한 이 모호한 자기 불일치에 대한 응답을 향한 여정이다.

 

혜재는 은석과의 첫 만남에서 저는 바이예요라는 무심한 발설에 그게 가장 중요한 정체성인가요?’라는 예상치 못한 응답으로 둘은 가까워진다. 이 두 문장에 이미 오랜 시간이 지난 후의 깨달음이 모두 있다. 대체 정체성이라는 것, 뭔가 고정된 불변의 근본이 있다는 생각처럼 인간에 대한 몰이해도 없을 것이다. 혜재는 은석과의 만남, 동행을 통해 잔잔하게 흘러들어오는 그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인다.” 그래서 둘이 마주한 설렁탕의 맛을 은석이 담담한 맛이라고 할 때, 그것은 곧 삶의 형식이며, 내용의 실체에 대한 깨달음일 것이다.

 

작은 눈덩이 하나는 눈 내리는 어느 겨울 밤, 사랑하는 이의 집 앞을 서성거리다 이내 돌아서는 사람의 서글픈 허기, 울적한 공허감을 상상하게 했다. 지난 시절 한 때의 아련하게 남은 기억, 그래서 쓸쓸하지만 아름다웠던 이미지로 남아있다고 자기위로를 삼는 씁쓸한 기억. 첫 장편으로 해외 영화제 수상을 한 영화감독이 된 친구 세진, 전문대를 졸업해 세진보다 일찍 직장생활을 시작한 의선이 함께 살았던 대학시절의 시간이 흐른다. 사년 제 대학을 다니는 세진의 영화동아리 일원들은 세진으로 인해 의선의 집을 아지트로 삼아 어울린다.

 

의선은 영화 앞에서 울고 웃는 날것의 활기를 뿜어내는 그들의 열기와 함께하면서도 은근한 소외감을 떨어내지 못한다. 표현하기 어렵고 정량화가 불가능한 내면화된 계급의 주관적인 정신적 상처는 실로 복잡하면서 더러운 사회적 감정이다. 세진의 동아리 선배인 준수는 단편 영화 한 장면을 촬영하기 위해, 해 질 때 여기 빛이 마음에 든다는 이유로 의선의 자취방을 찾아오고, 둘은 적당한 거리를 두고 몇 차례 만남을 갖는다. 준수의 궁핍을 발견한 의선은 이백만원을 꾸어주고 그가 단편을 마무리하도록 성원한다. 그러나 준수는 단편을 마치지 못하고 학업을 그만둔 채 소식이 끊기고 만다. 의선에게 갚지 않은 돈, 훗날 세진의 수상 축하연에서 아르바이트를 하는 준수를 보지만, 둘은 그저 조심스러운 몇 마디만을 주고받은 채 헤어진다.

 

오랜 시간이 지나고 서울숲 근처에 카페를 냈다는 소문을 듣고 의선은 찾아가지만 카페는 문을 열지 않았다. 의선은 스스로의 행동을 미학적 영상미를 흉내 내듯, 몇 발짝 뒤로 물러난 닫힌 카페 문과 유리창 너머에 고인 짙은 어둠을. 그 어둠 속에 희미하게 비친 내 얼굴을본다. 즉 관찰자의 시선으로 의선 자신을 보는 것이다. 그녀는 첫눈을 봉하여 지인의 집 앞에 갖다놓는 약이(藥餌)’의 옛 이야기를 따라한다. 묶인 듯 사로잡힌 정신을 풀어놓는 일에는 오랜 시간의 흐름이 필요하다. 관찰자의 시선을 얻기까지.

 

거듭, 반복의 의미를 지닌 부사가 제목인 단편 는 유효기간이 육년인 행복주택 계약기간이 일 년 남짓 남은 시점부터 도수진에게만 들리는 불신과 의혹을 가득 품은 듯한 소리다. 수진은 연인이었던 치완과의 이별에 일말의 미련도 죄책감도 없었다고 말한다. 그러다 삼년 반이 지난 시간, 아마 소리가 들리고부터인가? 혹은 터져 나오는 울음을 간신히 참으며 휴가계를 내던 직장 동료 강주임이 겪는 전세 사기의 고통을 알고 나면서부터인가, 사람들은 자신이 비로소 유사한 불안에 맞닥뜨려야 감응의 심장이 작동하는 존재인지도 모르겠다.

 

이 작품에도 작은 눈덩이 하나에서 내면화된 계급사회의 언어가 스치듯 준수에 의해 발설되어 배경이 되듯, 에서도 인간에 대한 무심코 저지르는 모멸의 장면이 배경처럼 반복되어 출현한다. 도수진 대리는 대리로, 강주임은 주임으로 부르는 직장 상사인 과장이 있다. 직원의 성을 된소리로 발음함으로써 상대방을 은근히 멸시하는 기만적이고 흉측스런 괴물같은 계급권위를 으스대는 행위 말이다. 물론 소설은 이를 말하고자 함은 아니지만 작가는 이러한 던적스러움을 배경에 삽입하며 이 사회에 만연한 민낯을 풍경처럼 풀어놓는 듯하다. 전세사기로 인한 대출금을 갚기 위해 퇴직금이 필요해 나타난 강주임이 자신의 짐을 정리할 때 그 순간 들려오는 라는 소리는 와 함께 삶의 곤혹스러움에 대한 그들 내면의 소리인 것만 같다. 두 사람이 동시에 , 라는 서로의 소리를 듣는 이유일 것이다.

 

단편 하지 夏至는 어느 순간 자신이 운영하던 일인(一人)빵가게를 접고, 타향인 서울과 삼십대와 이별하는 수림이 오랜 벗 지언과 함께하는 이별 캠핑에서의 나지막하지만 삶에 대한 강렬한 깨달음의 목소리들이 깊은 여운을 지닌 작품이다. 자기 성찰이란 상상력이라는 저 밑바닥에 연원을 지닌 무의식과의 만남인지도 모르겠다. 시간이 흐르면서 적당한 자기로부터의 거리가 주는 시차는 타인의 행위가 의미하는 투영으로서의 자신을 돌아보는 상상력, 진실에 가까이갈 수 있는 시야를 제공하는 것 같다. 어쩔 수 없는 인간이네” “인간은 모순 그 자체 내라며, 허상인 이유를 쫓으며 자신을 보호하는 인간의 조금은 서글프고 그래서 아름다운 것이라고 말 할 수 있게 된다.

 

나는 수림이 고향 부안의 바닷가에 낮춰 앉을 수밖에 없는 캠핑용 의자에 앉음으로써 더 높은 하늘을 보며 흩날리는 하얀 가루 입자의 반죽과, 컨벡션 오븐 유리에 맺힌 물방울들을 상상하며 그 모든 게 전생처럼 아득하다.”고 말 할 때, 그 이미지의 힘들이 발산하는 부드러운 걸음과 평온함의 강렬한 물성이 수림의 마음 깊숙이에서 스며든 것을 불현 듯 본다. 살아있음, 현존을 실감함으로써 삶의 활력을 느끼는 감응의 시간을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어떤 충만한 안정감을 공유케 하는 작품으로 기억될 것 같다. 치유와 세상과의 연결을 상징하는 킨츠기 공예와 사진 작업이 어우러져 조각조작 깨진 마음의 상처와 충동이라는 가면 뒤에 숨은 채 자신을 속여 왔던 인물이 마침내 자신의 진짜 얼굴과 마주함으로써 그 깨어짐의 실체를 말하는 은 아마 수록된 일곱 편의 소설을 모린과 함께 대표하는 시대의 작품이라 해도 될 것 같다.

 

나만의 기억으로 삼기 위해 내 너절한 감상은 여기서 맺는 것이 옳을 것 같다. 어느 한 작품도 소홀히 읽을 수 없는 정화되고 고귀한 느낌이다. 작가의 책()으로는 네 번째이다. 책을 사놓고는 몇 개월의 뜸을 들였다. 냉큼 읽어버리기에 아까워서였다. 이 작품집 또한 내게 소중하게 간직될 것이다.


고이거나 흐르거나 때로는 나를 넘어 범람하던 말들,

당신에게 무자비하게 뱉거나 묵묵히 삼가던 말들,

내게로 쏟아지거나 증발하던 말들,

나의 언어는 형태를 갖기에 희미하거나 무르다.“

- 안윤, 물의 기록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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