버지니아 울프, 문장의 기억 (양장본) - 그 누구도 아닌 '자기 자신'으로 살아가기 위하여
박예진 엮음, 버지니아 울프 원작 / 센텐스 / 2024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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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은 버지니아 울프의 에세이, 소설은 물론 일기에 이르는 출간된 대다수의 망라된 작품으로부터 북큐레이터 박예진이 발췌 인용한 212 꼭지의 문장(sentence)과 해당 작품에 대한 생각의 실마리를 이끌어내는 섬광같은 해설로 구성되어 있다. 하나의 소설 작품을 몇 개의 문장으로 이해하려 한다는 것은 어불성설이다. 하물며 버지니아 울프의 작품들처럼 연대기적 서사라기보다는 의식과 현실과 가상의 혼합된 흐름을 형식으로 하고 있는 경우에는 더욱 그러하다.

 

그럼에도 박예진 작가의 말처럼 버지니아 울프를 기억하는 사람들을 위한 책으로서, 아마 이 말은 한 인간 생의 단독성에 대한 탁월한 성찰을 감히 전체적 시선으로 조망하는 문학적 접근이 될 수 있을 것이다. 버지니아의 소설을 비롯한 에세이들은 다채롭게 엮여 많은 독자들에게 소개되어왔지만, 그 모두를 두루 읽는다는 것은 전문 연구자가 아니고서는 사실 현실이 허락하지 않는다. 또한 읽기는 했지만 작품 속으로 마냥 뛰어 들어가지 못했던 부분도 있을 것이다. 아마 여기에 인용된 문장들과 해설은 해당 작품들의 의미를 다시 새기게 되고, 그럼으로써 그 작품으로 다시 달려가는 계기가 되어 줄 터이다.

 

오랜 역사의 시간동안 사회적 구조와 규율, 성차별, 타인의 시선에 고통받아왔던 사람들의 창조력이 그 갇힌 벽에 모두 스며들었다, 그 한계에 이미 이르렀으니, 이제부터 펜과 붓으로 정치와 사업과 사회의 전면에 나서야 한다는 웅변인 자기만의 방이나 3기니에 울려 퍼지는 새로운 세상을 만들기 위한 에세이가 책의 도입부를 장식하는 것도 어쩌면 이 책의 하나의 의지일 수도 있을 것이다. 무엇보다 이 책의 미덕은 버지니아 울프의 소설 작품들 개개의 면모를 살펴 볼 수 있다는 점이다. 자기 발견과 표현을 통해 독립된 개체의 성숙한 인간으로의 성장과정을 담아낸 초기작 출항에서부터 50년에 걸친 중산층의 연대기로서 생의 유한과 영속성을 말하는 세월에 이르는 10편의 소설에 대한 엮은이 박예진만의 고유한 해석은 독자와 감상을 나누는 좋은 기회가 되어준다.

 


일례로 결혼과 배우자 선택을 고민하는 사람들에게는 낭만적 열정이나 우아한 감수성의 로맨스인가 아니면 이성과 분별이 담긴 관계인가를 밤과 낮의 등장인물을 따라가며 더불어 사유할 수 있으며, 삶과 기억의 형성과 변화를 통해 인간의 성장이란 무엇인지를 발견하거나 새로운 여성성의 정체를 확인코자 하려면 등대로 읽어보아야만 할 것 같은 어떤 강한 촉발, 유혹을 느끼게 된다. 이미 읽어본 작품은 물론 알지 못하는 작품에까지 은근한 열망이 독서 애호가의 마음에 피어나게 하는 것이다.

 

너무도 뻔해서 시선을 주지않고 그저 넘겼던 문장이 새롭게 눈에 밟혔는데, 제이콥의 방의 문장이다.

 

“The strange thing about life is that though the nature of it must have been apparent to every one for hundreds of years, no one has left any adequate account of it.”

인생에 대한 이상한 점은 수백 년 동안 모든 사람에게 그 본질이 분명히 드러나 있었지만, 누구도 충분히 설명을 남기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이 작품에 대해 인간의 내적 복잡성과 심리적 상태를 경험해보는 훌륭한 독서가 되어 줄 것이라는 엮은이의 해설은 이 작품을 새로이 다양한 각도에서 다시금 읽도록 유인했다. 아마 여러 소설들에서 보아오던 익숙한 형식이 아니어서 읽다 덮어둔 작품이었다는 기억 때문이었을 것이다. 이처럼 다시 혹은 새로이 손에 들어야 할 작품들을 상기하거나 발견하는 계기가 되기도 했는데, 순종 코커스 스패니얼 혈통의 개인 플러시가 등장하는 소설 플러시의 발견이다.

 

극작가 미트포드가 자신의 개에게 계급에 어울리는 대우를 해주기 위해 시인 엘리자베스 바렛 브라우닝에게 주면서 시작되는 이야기라 한다. 비타 색빌웨스트로부터 버지니아가 선물받은 강아지 핑카와 관련있는 작품으로 여겨지는데, 인간과 동물이 나누는 섬세하고 충직한 감정의 교류가 표현되었다고 하니 관심이 동한다. 결국 이 책을 읽으며 나는 세 권의 소설을, 두 권은 책장에서 다시 꺼내서 읽으면 될 것이고, 한 권은 새로 구매하는 결정을 하게 되었으니, 이 책은 단지 기억하는 자를 위한 선물을 넘어 강력한 독서의 자극이 되어주었다고 해야겠다.

 

어쩌면 이 책은 독자로 하여금 버지니아의 세계에 보다 친근하게 다가가는 계기가 아니라 버지니아의 세계로 아예 침몰케 하는 강력한 도취제 같다. 버지니아 울프를 애호하는 사람들에게 이 책은 작은 선물이 될 것 같다. 책장에 꽂혀 있는 버지니아의 책들 곁에 꽂아둔다. 소설 속 액자극(額子劇)에 들어가 끝없는 상상과 자유로운 감상을 떠오르게 하는 소설 막간의 한 문장으로 감상을 맺어야겠다.

 

거울이 깨지고, 이미지가 사라지고, 숲속 깊이의 녹색을 가진 낭만적인 모습이 더 이상 존재하지 않고, 다른 사람들에 의해 보이는 그 사람의 껍질만 남는다고 가정해 보세요. 그러면 그곳은 얼마나 답답하고 천박하며, 황폐하게 벗겨졌으며, 눈에 띄는 세상이 되는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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