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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심
박상륭 지음 / 문학동네 / 1999년 4월
평점 :
품절
“가을은 [....] 나무의 귀신들과 더불어 세월 어떻게 되는 줄도 모르고 자기의 여로와, 견문과, 사해(四海)를 얘기했다. [....] 사스락 사스락, 조락(凋落)의 한숨이 나무의 마을에서 멎을 날이 없었다.” - 227~228쪽, 「나무의 마을」 중에서
그래, 凋落의 한숨이 멎을 날이 없는 것이 인간세(人間世)라 해서 뭐 다를까. 아흔이 훌쩍 넘은 아버님과 어머님을 뵙고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서 여름의 열기 먹은 입술이 애무했던 잎들엔 무서리가 내리고, 해도 점점 짧아지고, 빛의 두께와 무게도 점점 엷어지고 가벼워져 가는, 하늘 또한 나날이 한 치씩은 높아가는 이 가을과 더욱 닮아있음을 생각했다.
박상륭은 육체라는 몸을 입은 정신, 이 인간 유정(有情)의 삶의 현상과 대상 모두는 대력(神)이 추는 ‘창조의 춤의 결과이자 한낱 꿈에 불과’한 것이라며, 이 환(幻)의 세계라는 속박으로부터 벗어나려는 자유(解脫)의 욕망에 불과하다 말하지만, 어디 이 실체적으로 느껴지는 오관을 지닌 존재가 한바탕 모진 꿈이라고만 돌려댈 수 있는 일이겠는가? 이 생생한 체험의 현실적 실(實)다움을 우주적 마음이라는 공(空)의 견성(見性)으로, 즉 아픈 것도 없으며 아프지 않는 것도 없는 것으로 여기기란 결코 간단한 것이 아니다.
연작 세 편을 포함하여 여덟 편의 단편으로 이루어진 이 소설집은 1999년 초판이 발행되었으니 햇수로 24년 된 작품집이지만 실제 문예지들에 게재된 년도는 1968년부터 다채롭다. 사실 박상륭의 소설은 이 햇수가 어쩌면 아무런 의미도 지니지 못한 그저 무의미한 숫자에 불과 할 것이다. 극히 긴 영겁(永劫)이란 우주적 시간으로 보면 그야말로 보잘 것 없는 촌각과 다름없는 까닭이다. 그러니 그의 소설 모두는 어느 때 읽혀도 무관한, 시간의 퇴색 영향 밖에 있는 것이라 해도 무방할 것이다.
아니나 다를까, 박상륭은 자신의 소설은 “법(法)을 실어 나르는 수레”이며, “글쓰기의 궁극적 목표는 한 편의 훌륭한 소설 쓰기가 아니라, ‘경륜(經綸)을 굴리는’ 데 있다”고 하였다. 즉 비유와 상징이라는 문학적 도구를 활용한 경전 쓰기라 해도 곡해는 아닌 것이다. 때문에 그는 전통적 소설의 형식에 얽매이지 않은, 그의 말로 표현한다면 “구차한 형식 따위에 얽매이지 않은” 글쓰기이며, 잡설(雜說)이라 이른다.
사설이 길어졌다. 아무래도 이 소설집의 맨 끝에 수록된 《월간문학》 1968년 12월호에 게재되었던 비교적 초기작인 상대적으로 읽어내기 수월했던 「나무의 마을」 부터 시작하는 것이 좋겠다. 서정적이고 시적 분위기가 너무도 앓음(앓다+아름답다)다웠던 작품이다. 주인공은 이년생 산배나무의 아직은 어린 귀신(나무의 영혼)의 생과 죽음에 대한 그 윤회의 깨달음이라는 성장의 얘기이다. “나는 왜 나무이어야만 하는가? 나는 왜 새이었다가 다람쥐이었다가 뱀이 될 수 없는가?” 이동의 자유가 불가능한 존재가 자유롭게 이동하는 대상들을 바라보며 갖게 된 궁극의 물음부터 시작해서, 우발이 필연화되고, 그 필연이 최악 혹은 최선으로 이어지는 곤혹스러운 세계, 게다가 병과 노쇠와 수없이 부딪게 될 생의 우연들, 그리고 죽음에 대해서.
이 발랄한 산배나무는 이웃하는 늙은 참나무의 경륜을 통해, 또한 죽기로 한 어느 겨울을 지내고 벼락처럼 스치운 “백년도 수유(須臾)일 뿐”이라는 깨우침의 여정, 으름덩굴이 손을 놓아버려 떨어진 씨앗들의 소리에 놀라 깨었던 시절의 사랑과 관능의 시간들이 우리네 인생과 더불어 사무치게 마음을 파고든다. 어쩌면 박상륭의 소설을 초지일관 관통하는 주제인 몸과 말(육신과 정신)의 존재인 인간의 현실 세계가 고해라는 피치 못할 저주이지만, 한편 이 육신을 근본으로 한 유정에게는 바로 이 몸뚱아리의 입음이 곧 삶이란 것의 모든 희망이자 복음이며 은총임을 아는 것, 그것일 테다.
이 소설집 『평심』 뿐이겠는가마는 박상륭의 모든 작품은 예외없이 종교적 즉, 형이상학적인 구도(求道)의 길, 우주적 마음이라는 그의 인간 진화론의 마지막 여정에 대한 말 아닌 말이라는 불가능을 상상하는 것이다. 그의 캐나단가 미국인가에서의 생활시기에 쓴 것으로 짐작되는 「로이가 산 한 삶」, 「왈튼 씨 부인이 죽은 한 죽음」, 「미스 앤더슨이 날려보낸 한 날음」 세 편 또한 예외없이 현생의 삶과 죽음의 쳇바퀴, 그 끊을 수 없는 윤회의 저주, 이를 끊어내는 영원한 자유를 꿈꾸는 구원에 대한 사색일 것이다. 그래서 책의 처음을 장식하는 「로이가 산 한 삶」의 주인공격인 살이 축축 늘어질 정도로 거구인 로이를 지켜봐왔던 책 방 주인의 이 무용한 인간에 대한 생과 사의 의미해석은 TV화면에 0.5초 동안 비쳐졌던 것에 그토록 자부심 가득 환희 웃던 모습과 겹쳐지며, 무위(無爲) 그 자체였다고 결론을 내린다. 사실 이 작품은 내겐 여러 비판적 믿음을 내포하고 있어, 그의 일관된 우주적 마음으로 향한 진화론에 대해 의문을 던졌다.
그의 진화론이란 ‘몸->말->마음’ 이라는 ‘뫎’(몸+말+마음의 합성어)이론이란 것으로 마음의 우주를 똥닦이 해버린 뒤 몸의 우주에 전락을 면치 못한 인간에 대한 연민이거니와, 이를 인간의 생의 소용이라는 가치 측면에서 무용을 지적하는 것인데, 이를 토대로 인간 복지사회와 사회적 약자에 대한 비난을 가하는 것이다. 프라브리티라는 상극(相剋)의 투쟁, 고해(苦海)라는 이생은 작가에게는 고착된 철칙이기에 이 철칙을 위배하는 인간세계의 이러한 배려는 우주법칙의 무지한 왜곡이 되어버리는 것이기 때문일 것이다. 그런데, 나는 여기에 의문을 던질 수밖에 없는데, 그는 분명 몸과 말의 우주라는 인간세는 그 관점에서 보아야하지 이를 마음의 우주, 즉 공의 관점에서 보면 모두 허무의 공에 빠지고 만다고, 소위 하향식 관점을 자신의 믿음이라 얘기까지 했다. 그러니 이런 모순이 어디 있나?
세 편의 연작(총 일곱 편의 연작 중 세편이 『평심』에 실려 있음)인 「두 집 사이」의 첫 편인 ‘ 제일의 늙은 아해(兒孩) 얘기’의 늙은네가 저승길에 꼭 가져갈 소중한 것, 그것은 사랑일 것이라고 말하기까지 하는데, 과연 이 사랑의 정체란 무엇일까? 물론 작가가 말하는 해골동산에 깊숙이 박혀 세워진 십자가, 그 음양의 합일, 상승에로 향한 해탈의 토대이겠지만, 이것은 우주적 마음의 관점에서 그러한 것 아닌가?
이 살아있음의 실체감으로 매양 고통과 번뇌에 시달리는 몸을 지닌 인간에게 그 몸의 우주를 버리라 말하는 것은 황망한 몽상가의 변이 아니겠는가? 어찌 우주적 마음이라는 공의 관점으로 자아(自我)를 완전하게 깨어 부수라거나, 환상에 불과한 것이니 그저 통과하여야 하는 것이라는 무책임한 말이 가능하겠는가? 자, 그래서 말인데, 박상륭의 잡설은 그 가능성의 세계로, 혹은 궁극에 이르러야 할 경지, 견성(見性)의 지점으로 마음에 두는 것이 좋겠다. 어쩌면 이것이야말로 내겐 글(言)의 협소한 의미의 경계로부터 풀려나는 길일지도 모르겠다. 해서 문학적 향취에 젖어 읽기로 선회한다.
표제작인 단편 「평심」은 ‘동화(童話) 한 자리’라는 부제를 달고 있다. 아마 싯다르타의 깨달음을 향한 구도의 길이라는 하나의 어리숙한 은유일 것이다. “불두덩이며 코밑에도, 먼지 털 좀 쇤 것들 몇 오라기가 삐죽삐죽 돋아 오르”는 왕자는 어느 날 아바마마와 어마마마에게 자기가 용타고 돌아 올 때까지 살아계시라 말하고는 표표히 괴나리봇짐 하나 달랑 메고 어디론가 떠난다.
“‘젊은네여, 뭣이 그리도 살맛나는 일 있어,
번들거리는 눈을 해각고시나, 어디로 가는다?’
‘나, 나는 말이지요, 마음이라는 것을 찾아, 길 떠나고 있거든요.‘“ -95쪽에서
마음을 찾는다? 이것은 마음을 길들이거나 자기 뜻대로 어거할 수 있는 경지를 터득한다는 말과는 다르다. 마음 자체를 찾는 여정이다. 정말이지 “그 탐색은 어렵고도 어렵겠는다.“ 이렇게 스승네를 거치며 마음을 찾는 그 방법적 토대에서부터 마음의 모양새(體), 그리곤 마음의 체와 용(用)이 다르지 않음을, 중단 없이 변용하며 끊임없이 흐르는 체와 동시에 용이며, 용이 또한 체 자체임을, 나아가 마음의 원상(原相)을 찾아 헤맨다. 왕자가 마지막에 이르러 길을 막은 바다, 바다는 물 알갱이 하나, 거품들, 한 주름의 물살, 모든 개심(個心)의 집단적 마음, 즉 전심이자 평심이란 이 모든 것들의 고요이자 평온이지만 그렇다고 무위(無爲)이기만 한 것은 아닌 그것, 우주적 마음이라는 도를 깨우친다는 동화다.
이 작품은 그 스토리인 구도의 여정에서 나누는 대화와 압축적 시간의 묘사도 재미를 한 몫 하지만, 문체의 토속적 위트를 만끽하는 즐거움은 무시할 수 없는 새로운 쾌락이다. 특히 이 작품은 그의 작품들의 중추적 사유 배경인 프라브리티와 니브리티의 설명과 같은 말 뼈다귀(言骨)를 주울 수 있으며, 소위 또 하나의 근간인 체용론(體用論)을 이해하는 중요한 소설이기도 하다, 더불어 박상륭의 문체에 빠져드는 계기가 되어 줄 법륜 굴리기의 대표작이라 해도 무방하리라. 아마 이로부터 시작해서 그의 작가로서의 위업이라 할, 『죽음의 한 연구』나 『칠조 어론』 에 등장하는 그 독특한 칠조(七組)의 ‘~입지’라는 종결어미의 밉살스런 어투에 매혹되는 건 시간문제일 것이다.
어쩌면 이 소설집의 가장 빛나는 작품인지도 모르겠다. 연작 「두 집 사이」의 늙은 아해(兒孩)들의 얘기는 ‘잠과 꿈’이라는 마음의 우주, 해탈에 이르는 길의 말 아닌 말을 통해 잠(껍데기, 몸)을 남기지 않고 모두 깨워내는 한 바탕의 꿈 이야기다. ‘제일의 늙은 兒孩 얘기’는 아파트단지 내 산수유 꽃빛의 담요로 포근히 감싸주는 공원 벤치에 쇠잔해가는 노구의 무거움으로 쭈그려 앉아 조금씩 졸음 속으로 내려가며 꾸는 늙은네의 몽상이다. “산수유 꽃빛의 볕의 바다에 잠겨, 그 바다를 왼통 뻐금여들이는, 한 마리의 작은 물고기, 한 바다가 왼통 한 마리의 물고기이다.” 물속에 휩싸인 물고기, 물과 물고기의 경계가 사라진, 있는 것도 없는 것도 아닌 전체에의 체험, 전체가 개아(個我)이고, 개아 없는 전체인 무(無)에의 긍정적 체험의 이야기다. 아니 이에 이르는 삶과 시간의 모순, “뒈져 눕기도 한사코 싫으며, 살아 시간을 견뎌내기도 권태로운 살아있음의 투덜댐”이다.
제이의 늙은 아해는 산을 ‘타며(오르고 내린다는 이 관능적 언어)’ 한 바탕 낮의 잠에서 노구(老狗;늙은 개)를 만나 윤회의 영겁, 끊어내지 못한 자아(自我)로 인한 바르도의 세계를 나누며, 축생(畜生)도와 자연(自然)도의 모든 유정이란 인간 유정의 그것임을, 우주 만물에 대한 연민을 이야기하고, 제삼의 늙은 아해는 드디어 한 여인의 죽음을, 그 주검의 우주적 의미를, 육신이라는 그 껍데기의 벗어남과 다시금 복귀해야만 하는 윤회의 저주에 대한 제의적 형상을 그려낸다.
“주검의 신분이, 그 껍질이며, 머리털까지 깨끗하게 벗기워지는” 장례의 그로테스크한 정경은 그래, 앓음답다. 작가는 육신으로 하늘 하늘 걸어올라가는 영혼을 하느랋음답다고 말한다. ‘하늘하늘(부사)+하늘(명사)+앓음+아름다움’이 복합적으로 결합한 쉽사리 개념이 열리지 않는 이 언어는 아마도 상승의 열정과 고통과 아름다움을 말하고자 함이었을 것이다. 가섭의 미소를 나는 결코 짓지 못할 것이다. 머리로 이해한다고 내 육친의 죽음, 그 몸의 소멸에 어찌 미소로, 그 승화를 기릴 수 있겠는가? 내 꽉 막힌 이생에 고착된 말과 마음은 어쩌면 늙은네가 지껄이는 “또 한자리 씨부(詩賦)랄 소리요, 개좆글 읊어내기의 풍류” 이상임을 듣지 못한다.
내 마음을 맴도는 글은 여전히 몸의 우주를 떠나지 못하는 변명에 멈추어 있는지도 모르겠다. 아니 이 소설의 무늬를 한 경전은 몸이야말로 유정의 해탈을 위한 필수 조건이라 하지 않았던가? 육신이 겪는 고통이야말로 진화의 원동력이며, 도약대라 했으니, 이 몸의 우주에 집착하는 나야말로 가능성의 한 단계는 이룩한 것이라며 위안 삼는다. 더욱이 공(空)을 색화(色化)하는 원동력이 곧 사랑이기도 하기에(色卽是空!), 어쩌면 우리 인간 유정들 앞에는 저 우주적 마음이라는 자아로부터의 완전한 벗어남, 해탈의 천로(天路)를 오르리란 가능성만을 향유하련다. “마음의 우주의 적멸(寂滅), 자아 분쇄라는 체(體)의 무화에서 드러나는 해탈”은 이번 생에서 아무래도 내겐 오르지 않을 사다리일 것이다. 혹 누군가는 이 작품을 읽으며 죽음은 다음 단계의 삶을 위한 하나의 계기, 침몰해 버린 소멸이 아니라 부활에의 희원(希願)임을 발견하고(그 껍데기가 인간이라는 보장은 없는다! 쿨 쿨 )는 그 모짐을 지속할지도 모를 일이겠는다.(박상륭 문체를 나도 한 번 써봤다.)
이 작품집을 읽다보면 아마도 생의 앓음다움을 강설하는 인물들의 낮 잠 속 몽상에 빠져있는 자신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각 작품이 발설하는 숨가쁘고 치열한 사유의 격전장을 헤매다보면 법열(法悅)과 같은(감히 이르지는 못하겠지만) 어렴풋한 깨달음에 매혹되는 시간이 되어 줄지도 모른다. 이번 가을은 수십여 차례 반복되었던 여느 가을과 확연히 달리 느껴진다. 박상륭이 원인인 것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