퇴계와 고봉, 편지를 쓰다
김영두 옮김 / 소나무 / 2003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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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명종과 선조 대의 두 사림(士林)간의 성리학 논쟁으로 사단칠정(四端七情)논변(論辯), 줄여서 사칠논변(四七論辯)’ 또는 두 사람의 호를 따서 퇴고(退高)논변이라 일컫는, 본체(혹은 실재)()’와 현상인 ()’의 근본이 하나인가 둘인가를 두고 나눈 퇴계(退溪) 이황(李滉, 1501-1570)과 고봉(高峯) 기대승(奇大升, 1527-1572)의 서신집이다.

 

고봉 기대승은 이조 정랑, 승정원 좌승지, 홍문관 부제학, 성균관 대사성, 공조 참의를 지냈으며 비교적 이른 나이인 46(1572)에 병사했다, 퇴계 이황 또한 성균관 대사성, 예문관 대제학, 공조판서, 이조판서, 예조판서를 두루 지낸 사림의 거두로 70세에 노환으로 생을 마감했다. 두 인물의 나이 차이는 26, 아버지와 아들 세대의 차이이며, 고봉이 문과 을과에 1등으로 합격하던 1558년 명종 13년에 퇴계는 성균관 대사성(오늘날 국립대학 총장)이었으니 그 지위의 차이는 결코 작지 않았다. 이처럼 연령과 그 지위가 같지 않은 두 사람이 퇴계가 사망하는 1570년까지의 13년에 이르는 편지 일백여 통이 이 책이다. 이들 편지 글은 안부와 정사(政事)에서의 고충에 대한 서로의 위로와 조언, 정치적 처신에 대한 논의를 비롯하여, 압도적으로 많은 분량이 바로 사칠논변(四七論辯)에 대한 상호 존중을 바탕으로 한 비판적 논구(論究)의 글이다.

 

오늘날의 정치적 논쟁(論爭)’이 보이는 이전투구(泥田鬪狗)의 싸움으로 인해, 두 대척하는 의견이 서로 상대의 주장을 거꾸러뜨리기 위한 말싸움을 떠올리기 십상이다. 더구나 조선조 붕당(朋黨)의 폐해를 아는 우리들은 이 논쟁을 정치적 세력간의 싸움을 대리한 표면적 학문 싸움으로 이해하기도 한다. 때문에 성리학이라는 조선조 독자적 철학의 기초가 되는 학문연구의 기틀이었음을 간과하기도 한다. 모두 그 논변의 내용과 과정을 알지 못하기 때문에 발생하는 오해일 것이다. 나 또한 퇴계가 동인(東人)의 시조로 불리게 됨으로써, 특히 이 사단칠정 논변에서 비롯된 훗날의 우계 성혼과 율곡 이이의 극한의 대립이 조선 후기 동인과 서인의 참혹한 정치적 파당으로 이어진 것에 대한 무모한 책임을 덮어씌우는 어리석음을 면치 못하기도 했다. 사실 이 서신집을 읽기 전에 두 사람간의 연령과 지위의 차이로 인해 유교 질서가 팽배한 사회에서 이미 기울어진 논쟁이 아닐까하는, 즉 한쪽의 고압적 자세와 겸허 또는 굴종의 자세가 빚어내는 비정상적인 일방적 논의가 아닐까하는 우려를 가지고 있었다.

 

이것은 기우에 그치고 말았는데, 퇴계가 고봉에게 보낸 사단칠정을 이와 기로 나눈 변론(四端七情分理氣辯)에 대한 퇴계에게 보내는 반론의 글에 무릇 학자라면 자기 마음속에서 스스로 터득하려고 해야지, 한갓 이미 만들어진 이론을 대략 이해하고서 진리는 바로 이것일 뿐이라고 해서는 안 됩니다라는 대찬 고봉의 지적 질을 보았을 때 이것이 그저 물렁물렁한 논쟁이 아니구나! 라고 여기게 되었다. 그렇다고 고봉이 퇴계를 한낱 논쟁의 상대로만 여긴 것은 아닌데, 깍듯한 예의와 겸양의 언어, 선학(先學)을 대하는 낮은 배움의 자세와 진심의 안위를 걱정하는 태도는 상대를 향한 공경(恭敬)이상의 덕목을 보여준다. 학문 연구자로서 고봉의 글은 날카롭고 준엄하지만, 일상의 인간관계에서는 더없이 겸손과 존경의 자세로 일관한다. 해가 거듭될수록 두 사람의 편지 내용은 정치적 동지이자 학문적 벗, 인간적 이해를 축적해 온 신뢰가 두터워지고 있음을 보게 된다.

 

그 신뢰의 면목이 드러나는 글들이 있는데, 그대처럼 저와 지극히 각별한 사이에 있는 이조차 제가 해야 할 행동에 대해 너그럽게 헤아리지 못하니 다른 사람들에게 무엇을 바랄 수 있겠습니까?”, 관직을 받들지 않고 조정에서 물러나 고향에서 학문연구를 하고자하는 퇴계의 소망을 이해하지 못하고 조정에 붙들어두려는 고봉에게 서운한 마음을 전하는 내용이다. 고봉을 칭하는 표현도 급제 후에 관직을 받기 전의 고봉에게는 기선달로, 그 후로 최초의 관직을 받자 기정자로, 이후 정3품 관직에 오르자 영공(令公)으로, 잠시 관직을 버리고 고향에 내려와 있을 때에는 고봉의 자()인 명언으로 부르며, 관직의 오름에 따른 칭호와 친근함이 더해진 자로 부를 만큼 두 사람은 가까워진다.

 

그런데 또 한 번 고봉이 선의의 실수를 저지르는데, 그대는 아직도 나를 모릅니까?”라며, 퇴계 자신을 추켜세워 임금께 아뢴 고봉을 강하게 힐난한다. 앞으로는 사람을 보내 서로 안부를 묻는 일도 다 그만두어 주면 편하겠다는 절교의 편지를 보낸다. (물론 이 단교의 표현은 친근한 이에게 할 수 있는 화의 표현일 것) 이런 상황에서 임금에게 그 같은 말을 하는 것은 공정하다고 믿기 어려운 것 아니겠냐며, 고봉의 섣부른 행동을 나무란다. 두 사람이 얼마나 밀착된 인간관계를 가지고 있었는가를 가늠할 수 있는 내용 중 하나이다.

 

위와 같은 해인 선조 원년, 1568년에는 퇴계가 고봉에게 영공께 아룁니다, 병환이 어떤지, 근자에 소식이 막혀 그리움이 간절하다는 편지를 보낸다. 두 사람은 서로 웃으며 보아주시기 바랍니다 라며 우스개 이야기도 전하고, 부채, 서책과 약, 꿩고기 등을 보내 마음 속 정성을 보내기도 한다. 사실 퇴계는 고봉의 정치적, 학문적 후견인이자 스승이었으며, 고봉은 퇴계의 학문적 벗이자 정치적 동지이며 자신의 부친 묘비 갈문을 부탁할 정도의 신망을 지닌 아들같은 사람이었을 것으로 보인다. 특히 두 사람이 주고받는 논변은 당대 고관대작들은 물론 유생들의 관심을 집중시키는 서신이었기에 이들의 편지는 여느 선비들의 것과는 다른 무게를 가진 것이었던 것 같다. 붕당정치의 싹이 자라기 시작할 즈음해서 정국의 혼란스러움이 더해지는 상황이 빈번하게 등장하기 시작하는데, 퇴계가 고봉에게 서신을 절대 다른 사람에게 보여주지 말 것을 당부하는 내용은 당시 말 한마디가 생사를 가르는 살엄음판 같은 것이었음을 짐작케 한다. 세대와 지위를 뛰어넘는 두 사람의 학문적, 인간적 우정의 깊이를 통한 삶의 고귀한 모습을 보는 것만으로도 이 책은 그 품격을 완수하고 있다고 할 수 있겠다.

 


사단칠정논변으로 얘기를 이어가면, 그 발단은 이러하다. 사단은 이에서 발현되므로 언제나 선하고, 칠정은 기에서 발현되므로 선악이 있다.”고 이와 기를 나누어 둘이 있다고 주장한 퇴계의 글이 온당치 못하다는 고봉의 논박으로 시작된 것이다. 이를 말하기 위해서는 성()과 정()에 대한 이해의 전제가 필요한데, 무릇 아직 발현되지 않은 사람의 마음을 성()이라 하고, 이미 발현 된 것을 정()이라 하는데, 성은 언제나 선하고, 정은 선악이 있다는 것이다. 이것이 당연한 이치라는 데 두 사람은 의견을 달리하지 않는다.

 

여기서 고봉은 성과 정이 다른 까닭에는 네 가지 단서인 사단(四端; 측은지심(惻隱之心), 수오지심(羞惡之心), 사양지심(辭讓之心),시비지심(是非之心))과 감정인 칠정(七情: (), (), (), (). (), (), ())이라는 구별이 있을 뿐, 칠정의 바깥에 사단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니기에, 이와 기를 나누어 둘이라고 하는 것은 의심하지 않을 수 없다는 것이다. 이에 퇴계는 사단의 발현은 순수한 이이므로 언제나 선하고, 칠정의 발현은 기를 겸하므로 선악이 있다고고 고쳐 쓰지만, 이 역시 사단과 칠정의 연원이 다르다는 분리의 전제를 하고 있기에 불만스럽기는 마찬가지라고 논박한다. 무릇 이는 기의 주재자요, 기는 이의 재료라고 구분을 하지만 실제 사물에서는 완전히 섞여 나눌 수 없다는 것이다. 고봉은 사단은 칠정과 다르지 않은 연원을 지닌 것으로 단지 발현되기 전의 성()일 뿐이라고 말한다. 다시 말해서 이와 기는 그 연원이 하나라고 말하는 것이고, 퇴계는 이와 기는 다른 연원을 가진 둘 이라고 주장하는 것이다.

 

사실 이에 대한 세세한 철학적 논구들, 이에따라 부속되는 철학적 논변들이 이들이 5년에 걸쳐 주고받는 논변들의 내용이다. 그 철학적 함의들을 논구하는 것은 책에 맡기기로 하고, 두 사람이 얼마나 조심스럽고 주의 깊게 상대의 논변을 연구하고 있는지를 보는 것은 그네들 학문의 자세에서 오늘 우리들이 잃고 있는 것들을 상기하게 된다. 스승은 권위를 앞세우지 않고, 후학은 학문적 겸허를 잃지 않으면서 선학의 가르침을 경청하는 가운데, 그 날카로움은 잃지 않으면서도 서로 배움에 성심을 다하는 모습이다. 최근에 그대가 찾아낸 서너 조항을 김이정이 전해주었습니다. (...) 비로소 제 견해가 잘못되었다는 사실이 두려워지기 시작했습니다. 이에 옛 견해는 남김없이 다 씻어버리고, 마음을 비우고 주의를 기울여 라며 자신의 그릇된 이해를 숨김없이 드러내고 철회하는 퇴계의 학문적 자세는 숭고한 전율을 일으키기도 한다.

 

한편 고봉 역시 기운을 드러내고 변론을 마음대로 하여 남을 업신여기고 꺾어버린다는 자신의 고질병과 공부의 소홀함에 대한 경계를 다짐하거나, 선생님께서 꾸짖지 않으시고 이렇게까지 자세히 답해주시니, 제 평생 이보다 큰 은혜는 없었습니다.”라며 거듭하여 자신의 소견을 깨우쳐 주신데 대한 고마움을 표시한다. 나는 이기일원론을 주장하는, 고봉의 사유에 귀 기울이는 편이어서 고봉 중심의 독해를 하였는데, 퇴계의 후학에 대한 성심의 인물됨을 발견한 것은 하나의 큰 수확이기도 하다. 이기이원론을 주장하는 후일 동인(남+북인)의 갈라치기, 그 분리의 원천이 되기에 붕당정치의 파멸성 이전에 고봉의 이기일원론의 사변은 오늘 다시 재고되고 심층 연구되어야 할 가치가 있다고 여겨진다.

 

사실 퇴고(退,)논변은 조선 중기까지의 훈구파에 대항한 사림간의 논구라는, 다시 말해 같은 왕권수호 세력의 일원이었기에 반목이 심하게 충돌하지 않았던 것인지 모르겠다. 그러나 인간중심주의적 이원론이 파기되고 객체지향의 존재론이라는 일원론적 모색으로 전환되는 오늘에 고봉의 일원론적 접근은 다시금 우리들이 주목해야 할 사유가 될 수 도 있을 것 같다. 어쨌거나 조선조 성리학 두 거두의 인간적 우애와 학문적 교감의 성숙된 면모를 읽어 볼 기회가 되었음은 내겐 예기치 못한 감응의 시간이 되었다. 인간 존재자를 비롯한 우주 만물의 존재 자체에 선악의 구별이 어디 있겠는가. 다만 그것이 형체라는 보이는 것의 간섭과 마주치면서 비로소 드러나는 실체에 대해 구별하려는 인간의 습관인 것 아니겠는가. 고봉 사후 82년이 지난 1654년 효종이 고봉을 기리기 위해 월봉 서원을 내렸는가 보다. 언제 시간을 내서 한 번 찾아 봐야 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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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시우행 2026-05-21 09:0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멋진 도서네요. 조만간 저도 읽어보려 합니다. 감사합니다.

비의식 2026-05-21 09:53   좋아요 0 | URL
퇴계의 후학에 대한 사랑과 존중에서 대학자의 모습을 보게됩니다.
한편 강직함으로 인해 곤란을 겪는 고봉이지만 퇴계선생에게만은 깍듯한 품성에서도 선학에 대한 깊은 공경심이 묻어나고 있어요.
또한 두 사람의 사단칠정 논박을 비롯한 궁궐 예에 대한 글들은 그들 사변의 깊이와 폭넓은 독서와 지적 역량을 엿보게 됩니다.
호시우행님 댓글 고맙습니다. 당시 영남과 호남이라는 지리적 거리와 인편에 의한 서신 왕래라는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서로의 그리움과 학문적 우애가 이 물리적 한계를 뛰어넘은 것이지요. 두 사람의 서로에 대한 신뢰와 존중의 깊이를 가늠할 수 있는 증거라 하겠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