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카이브 취향 채석장 시리즈
아를레트 파르주 지음, 김정아 옮김 / 문학과지성사 / 2020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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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쓰기는 인류의 발명 이래 고귀한 문명의 장치로서 인간 역사의 부조리를 끊어내기 위한 공분의 기록이기를 멈추지 않았다. 이처럼 끊임없이 삶의 현장으로 소환하여 현실 개선과 미래기획의 통찰로서 그 기능을 다하려는 노력이 지속되었음에도 집요하게 자신들에게 유리한 의미로 왜곡, 장악하려는 세력의 시도 또한 그치지 않는 것 또한 사실이다.

 

이를테면 아우슈비츠의 끔찍한 가스실은 실재하는 입증된 역사적 사실이다,  그럼에도 특정 자료의 왜곡 배치를 통하여 가스실이라는 것은 존재한 적이 없다는 식의 역사를 쓰는 자도 있다.  고통과 죽음의 실재성을 제거하여 자신들의 도덕적 결함 없음을 퍼뜨리려는 악의적 역사가가 버젓이 활개치는 것 역시 현실이라는 것이다.   이에 프랑스는 1990년  "반인도적 존재의 규모와 회의를 표하는 행위를 불법으로 규정(122, 주석22)"하는 게이소(Loi Gayssot을 통과시켜 문화공동체의 기억을 왜곡시키는 역사 쓰기를 엄단하기 시작했다.

 

한국사회의 역사 쓰기 또한 이와 결코 다르지 않다. 자료의 출처와 해석, 그리고 그 배치를 자의적으로 배열하여 공동체의 기억을 방해, 훼손시키려는 자들이 그치지 않는다. 그렇다면 진실을 일그러뜨리고 더럽히면서 관련 사실을 기만적으로 이용하려는 역사 쓰기가 아니기 위해서는 역사는 어떻게 기술 될 수 있어야 하는가? 아카이브 취향이라는 이 작지만 밀도 높은 에세이는 바로 이러한 선택과 배제의 자의성에 의한 함정과 유혹의 벗어나기로부터 해석틀의 조건에 이르는 진정한 역사 쓰기를 성찰하고 있다.

 

"역사를 써야 하는 이유는 죽은 과거에 대해 이야기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죽은 과거를 이야기할 어법을 찾아내 '살아있는 존재들 사이의 대화'에 참여하기 위해서다." -152

 

세월의 먼지를 뽀얗게 뒤집어쓰고 있는, 누군가가 읽을 것을 전제로 하여 써지지 않은 채 저장되어있는 18세기 형사사건의 고발장, 재판 기록, 심문 기록, 수사기록, 판결문 등 자료 한 장 한 장을 읽고 필사하며 질문하고, 해석틀을 만들어 좀처럼 역사 언어의 조명을 받을 일 없었던 존재들의 언어에 숨결을 불어넣는 역사 작업자의 충실한 역사 서술의 이야기이다.

 

또한 지배 담론에 가려져 보이지 않던 '암살당했던 실재'를 규명하는 작업이며, 특히 공권력에 의해 강제된 진술에 의해 강요되어 끌려나온, 역사의 고려 대상이 된 적 없던 사람들의 파편화된 답변들이라는 실재로부터 의미와 특정 형상을 해독해내는 역사 기술자의 세부적 작업 방식에 대한 일종의 메타 역사서이기도 하다.

 

형사사건 아카이브는 그 자체로는 실재하지만 가공되지 않은 흔적일 뿐 아무것도 아니다.  과거의 무수한 흔적에서 한 번도 역사의 대상이었던 적이 없던 존재들의 삶과 운명을 좌우하던 세계의 특정한 형상을 해독해내는 작업에는 실로 엄청난 곡해와 왜곡의 함정과 유혹이 도사리고 있다.  이에 더해 연구 영역이나 방향의 선택과 배제가 야기하는 애초에 결여된 역사 쓰기를 할 수 도 있다.  예로서 일상생활과 감정 구조에 주목하여 여성의 역사를 쓰기로 한 역사가가 마르크스의 관점을 배제하기로 하였다고 할 때 여성사에서 계급적 차이에 관한 논의가 빠진 총체적 사회의 역사로서 역할을 하지 못하게 된다.  결국 특정한 타자들을 배제하는 날조된 역사가 되고 만다는 점이다.




 

"역사를 쓰는 일은 불화의 확인 조서를 작성하는 일이다." - 61

 

지배 계급의 당위성을 주장하려는 의도를 지닌 역사 쓰기의 경우 대중의 반감이나 저항과 같은 권력 관계의 충돌을 외면한다.  역사의 흐름을 왜곡 수정하여 항시 지배 엘리트 계급의 절대 사회가 당연했던 것으로 만들어 낼 수도 있다.  역사는 책임질 줄 알아야 한다고 한다.  충돌은 역사가 생기는 장소이며, 이 충돌을 성찰의 동력으로 삼는 역사가 될 때   "인간의 비사회적 관계", 즉 인간의 그늘진 측면, 불화와 비극적 충동의 실재를 드러낼 수 있다는 것이다.

 

아카이브라는 날 것의 자료를 읽고 필사하는 인내의 작업 속에서  "기존 형태의 자료를 재활용, 재조립하여 실재를 다른 방식으로 서사화할 가능성을 타진하는 작업(81)"'껍질 벗기기(depouiller)'라 부른다.  그리곤 비슷한 내용으로 모으거나 특별한 것을 분리하기도 한다. 또는 자료축적을 통해 어떤 형태 속에서 디테일을 연구할 수 있으며, 실재를 향한 특정 시선을 만들어내기도 한다.  도박범의 죄를 연구하다가 경찰과 유흥계, 귀족층과 금융업 사이의 관계를 이해하게 될 수도 있으며, 가난과 고통의 문제로 확대되기도 한다. 역사적 사료의 선택과 연구 영역의 설정은 동질적 자료들의 수집으로 시작되어 연결 목표로 이어지기도 하며, 때론 이질적인 것에서 촉지각을 깨우는 선물같은 사료를 접하기도 한다.

 

그러나 아카이브와의 거리를 상실하는, 흘러넘치는 삶을 이야기하는 문장들에 몰입하다보면 아카이브에게 질문하는 법을 잃어버리는 함정에 빠지는 경우도 있는 모양이다.  여기서 우려해야 할 것은 역사가 자신이 세워놓은 가설을 뒷받침해줄 것들에만 주목하는  '동일화(Identofication)'에 빠져 가설을 반박하는 자료나 아예 인지하지 못하는 경우가 발생하여 상상력과 사고력이 마비되어 터무니없는 역사가 출현할 수도 있다는 것이다.

 

역사가는 자칫 아카이브를 자신의 욕망의 대상으로 삼을 우려가 상존한다는 것이다. 이와 달리 아카이브가 연구 테마에 넘치도록 정보를 내줄 때가 있어 그대로 역사책이 되는 경우도 있는데, 이는 아카이브의 사본에 불과한 무미건조한 역사가 되고 만다고 지적한다. 비평이라는 체에 걸러지지 않은 실증주의적 주석에 불과한 것이 아니고 무엇이겠냐고 재검토, 비평의 거리가 요구됨을 지적하기도 한다. 이 과정이 오늘 첨예한 역사적 갈등을 야기하는 지점이 아닐까를 생각게 된다. 인용은 결코 증거가 될 수 없다는 것이다.   "이미 찾은 인용문과 정면으로 배치되는 인용문을 찾는 것은 거의 항상 가능하다(94)"는 것이다.

 

"역사는 아카이브 베끼기가 아니다. 역사를 염두에 두면서 아카이브를 철거하는 것,

아카이브 앞에서 불안을 감추지 않는 것이다." -95

 

아카이브에서 선택한 것에 머물고 싶은 충동, 골라낸 것들을 하나로 엮고 싶은 마음, 픽션을 쓰고 싶은 마음에 포획되기 일쑤란다. 안다고 해서 피해지지는 것도 아니기에 아카이브에 집어 넣은 상황들, 상황을 둘러싼 일상의 어둠을 정밀하게 세공하는 작업을 위해서 역사가의 자기 경계는 세계에 대한 책임자로서의 역사가로서 절대 필요의 태도일 것이다.

 

"역사는 대립과 충돌의 결과를 공평하게 정리한 이야기가 아니다. 상호 이질적인 

논리들의 충돌 속에서 드러나는 실재의 불균질함을 감당하는 일이 역사다." -106

 

형사 사건 아카이브는 다른 어떤 아카이브보다 복잡한 담론을 휘두르는 공권력에 저항하는 보통 사람들의 운명을 두드러지게 드러내준다. 애써 짓누르려는 힘, 이를 떨치고 일어나려는 힘의 갈등과 대립의 이야기, 그리고 이들 진술 문장의 이면에서 말하고 있는 개인적, 사회적 전략들이 숨 쉬고 있다. 역사가의 해석틀이란 바로 이러한 것들을 현재의 가치 기준에 따라 재해석하는 관점이다. 역사가는 바로 이러한 자료들을 어떻게 읽었는지, 어떻게 선택하고 분류했는지 그 해석틀을 설명하여야 한다. 이를 투명하게 설명하지 않거나 못하는 역사 쓰기는 역사가 아니라는 것이다.

 

진실이 좌초해 있는 아카이브의 베일을 찢고 앎의 불투명을 해쳐내어 가려져 있던 것을 드러내는 역사 쓰기의 과정을 세밀화로 그려낸 이 책은 지혜와 논리 사이, 감정과 혼란 사이에 난 좁은 길을 역사가가 어떻게 모색해야 하는 가에 대한 고귀한 사유이다. 실재하는 아카이브를 현재의 실재로 재배치하여 삶의 새로운 관계를 이해하고 포착하며 규명하는 역사 쓰기 작업에 대한 재치와 진지함이 어우러진 농축된 메타 역사 에세이이다. 역사를 바라보는 대중의 시선을 한 단계 성숙시켜 주는 책이라 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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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대지기 2022-07-23 19:26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표지만 봤을때는 밀도있는 책일거라 생각못했는데 필리아님 덕분에 기대되는 책이 생겼네요 ^^ 잘 읽었습니다

필리아 2022-07-23 19:39   좋아요 2 | URL
책은 저자의 도서관 자료 열람과 관련한 지극히 사적인 인상들과 역사 쓰기에 대한 신념을 교차하면서 짐짓 진지함의 무게를 덜어내려는 의지가 엿보이는 에세이라 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저도 예상치 못했던 작지만 쏠쏠한 배움이 있는 책이었답니다. 등대지기님, 댓글 감사드립니다. 유쾌한 주말 보내세요~~

그레이스 2022-07-23 23:0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좋을 듯요.♡

필리아 2022-07-24 08:57   좋아요 0 | URL
역사가는 자신의 해석틀을 밝혀야 한다는 말이 마음에 남네요, 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