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흔적
치하야 아카네 지음, 박귀영 옮김 / 콤마 / 2016년 11월
평점 :
절판
1. 이제 16년도 얼마 남지 않았다. 시간이 참 빨리 간다고 느껴지는 요즘이다. 연초에 해외로 발령이 날 뻔했다가, 현 팀으로 이동하여 일한 지 엊그제 같은데 말이다. 그래도 몇 개월 안되는 동안, 여기저기서 많은 일들을 했던 것 같다. 외근도 자주 갔었고, 행사 준비도 자주 했다. 보고서도 자주 만들었고, TF와 같은 임시조직에도 여러번 참가했다. 무엇보다도 여러 가지 일을 동시에 처리할 수밖에 없었던 게 제일 힘들었던 것 같고, 또 기억에도 남는 것 같다. 갑자기 예전에 한 번에 두 개 이상의 일을 해야 잘하는 거라고 꾸짖던 상사가 생각난다. 아이러니하게도, 그분은 한 개 이상의 업무를 하게 되면 종종 화를 내곤 했었지만.
2. 다이어리에 적힌 버킷리스트를 지우고 나니 몇 개가 남았다. 남은 일정상 내년에 이루어야 할 것들이다. 그중에 하나는 올해 꼭 했었어야 하는 건데, 그러질 못 했다. 아쉬움이 남는다. 어쩌면 가장 중요한 건지도 모르는데 말이다. 예전에, 내가 나중에 책을 쓴다면 제목을 흔적이나 일상으로 해야겠다는 생각을 한 적이 있다. 작지만 깊은 그 무언가를 이야기할 수 있을 것 같기 때문이다. 그냥 흘러 지나 간 생각이었는데, 우연히 이 책을 접하고 나니, 그 기억이 떠올랐다.
3. 책 속에 소개된 여섯 개의 단편은 서로 이어져 있다. 그리고, 서로 다른 사람들의 시선으로 스토리가 이어진다. 자살한 한 남자, 그를 바라보던 부하 직원, 직원의 아내, 그리고 그 아내와 관계를 맺는 한 청년. 청년의 사는 건물의 옆집에 살고 있는 한 남자와 동거하는 여자. 자살한 남자의 메이트(?)였던 여자의 소울메이트이기도 한 사람과 그와 이야기를 나누던 또 다른 청년까지. 자연스러운 대화 속에서 자연스럽게 관계를 맺는 사람들이다.
4. 하지만, 그 배경은 결코 자연스럽지 않다. 불륜, 자살, 무미건조함, 성매매와 원조교제와 무슨 차이점이 있는지 이해가 되지 않는 관계들. 너무나 자연스러워서, 비정상이 정상적인 걸로 보인다. 아니, 비정상이라고 느껴지지 않는다.
5.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모든 게 다 비정상은 아니다. 진솔하고 깊은 대화를 바라고 있고, 상처를 도닥여 주기도 한다. 무미건조함에서 벗어나기 위해 따뜻한 말 한마디를 건네기도 하고, 진짜 이야기가 필요한 누군가에게 그 이상의 관계를 맺게 도와준다. 서로가 서로에게 흔적을 남기고 있는 셈이다.
6. 책장을 덮으면서, 역자의 간단한 후기가 있었으면 좋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책을 번역하면서, 많은 생각이 들었을 해서다. 지금 이 순간이면 구태여 흔적 따윈 남기지 않아도 좋다고 생각된 순간이 몇 번이나 있었을까? 결국 그게 진짜 나의 흔적이었을 텐데 말이다.
자명종이 울리기 전부터 눈을 뜨고 있었다.
매일 아침, 같은 시간. 일어난다기보다 떠오르는 느낌.
파르스름하게 물든 새벽녘의 방은 물속 같아서
나는 언제나 눈을 뜬 순간, 수면으로 둥실 떠오르는 자신을 상상해 버린다.
(본문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