헤세의 여행 - 헤세와 함께 하는 스위스.남독일.이탈리아.아시아 여행
헤르만 헤세 지음, 홍성광 옮김 / 연암서가 / 2014년 7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1. 최근에 자주 접하는 출판사가 하나 있다. 바로 연암서가. 까페에 올라온 책중에서 가장 먼저 눈길이 가는 출판사중의 하나다. 소설인 경우에는 열린책들,문학동네,현대문학 등이 떠오르고, 사회과학도서인 경우에는 돌베개,후마니타스,개마고원 등을 떠올리듯이 이제 인문학에 관한 책이라면 <연암서가>가 가장 먼저 떠오를 것 같다. 이름은 들어봤지만 그 속은 제대로 접해보지 않았던 작가와 인물들, 그리고 그 시대적 배경들을 친절하고 재미있게 설명하고 있는 책들이 많기에...

 

2. 이번에 읽은 책은 헤르만 헤세와 함께 하는 스위스,남독일,이탈리아,아시아 여행이라는 부제가 달린 <헤세의 여행>이라는 책이다. 지금까지 읽었던 연암서가의 책들과 마찬가지로 편안한 디자인과 차분한 색채가 책장을 넘기기 전부터 마음을 차분하게 만들어주는데, 내용 역시 편안함 그 자체로 다가 온다. 물론 읽는 사람의 취향에 따라서는 조금 지루할 수도 있지만, 깊은 사유의 색채가 담긴 좋은 문구들을 천천히 따라가다 보면 어느새 헤세의 생각과 함께 하는 자신을 발견할 수 있게 된다. 정지된 시간속에서 사유하는 헤세의 머릿속을 들여다보고, 공간을 이동하면서 바라보는 헤세의 시선에 담긴 생각들을 함께 음미하다 보면 마치 한편의 다큐멘터리를 보는 듯한 느낌을 받는다. 지루하다기보다는 편안한고, 흘러가기보다는 전체를 아우르면서 채운다는 느낌을 말이다.

 

헤세의 여행에 관한 생각들이 참 좋다. 타인에게 보여주기 위한 여행, 그냥 일상이 무료해서 떠나는 여행, 회피와 도피의 여행이 아니라 속을 채우고, 배우면서, 진정으로 느낄수 있는 여행이 진짜라는 말이 인상깊었다. (물론, 직장인에게 재충전을 위한 여행이나 무작정 떠나보는 여행이 나쁘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나 역시 가끔씩 그런 경험을 통해 다가오는 월요일을 위한 힘을 얻기도 하므로. 아마도 헤세는 생각없는, 그리고 과시형 여행을 즐기는 일부 부르주아 계층에 대한 언급이었으리라.)

 

어떤 일을 할 때 그것만 하는게 아니라 아래위로, 왼쪽과 오른쪽을, 그리고 그 인과관계과 관련 배경지식까지 얻는 공부와 일과 경험이 자신에게 많은 도움이 되듯이, 진실로 가득찬 마음으로, 경치를 바라보는게 아니라 그 경치를 바라보는 눈을 가지는 것이 중요한 것처럼 말이다.

 

이렇게 보고 듣고 느낀 것들을 써내려가면서, 헤세는 하루의 일과를 그리고 머릿속의 생각들과 감정들을 정리해 나간듯 하다. 깊고, 또 진솔해서 그 글을 읽는 맛이 남달랐는데, 쉽고 빠르게 읽어나가기에는 그 문구들이 너무 좋았다. 물론 여기에는 역자의 글솜씨도 한 몫 했겠지만..

 

 

헤세의 여행

작가
헤르만 헤세
출판
연암서가
발매
2014.07.25

리뷰보기

 

3. 언제나 그렇듯이 좋은 책에는 좋은 문장들이 많다. 몇가지를 소개해 본다.

 

 

공간도 시간과 꼭 마찬가지로 시시각각 내적 변화를 일으킨다. 공간도 시간과 마찬가지로 망각을 낳는다. 공간은 인간을 여러 관계로부터 해방시켜주며, 인간을 원래 그대로의 자유로운 상태로 옮겨놓는 힘을 지니고 있다. 그렇다. 공간은 고루한 사람이나 속물조차도 순식간에 방랑자와 같은 사람으로 만들어버리는 것이다. 시간은 망각의 강이라고 하지만, 여행 중의 공기도 그러한 음료수인 셈이다. (8페이지, 역자의 글 중에서)

 

곳곳에서 보물들이 눈에 보인다. 모든 것은 눈요깃감을 보고 즐길 줄 아는 사람 몫이다. 백 달러를 주고 사든 만 달러를 주고 사든 나는 돈을 준 대가로 곧 나를 실망시킬지도 모르는 그 하나의 매력적인 물건을 얻기 때문이다. 잔뜩 쌓인 보물의 영상, 크고 다채로운 아시아 시장의 광채로부터 내가 서양으로 가져올 수 있는 것은 희미한 잔영밖에 없다. 나중에 집에서 중국과 인도의 물건이 가득 든 하나의 상자나 열 개의 상자를 풀어 놓는다 해도 그것은 한 병이나 스무 병의 바닷물을 떠온 것이나 다름없다. 수백 톤을 가져온다 해도 그것이 바다일 리는 없다. (178페이지)

 

이 모든 것이 이제 다시 왔다. 연녹색의 숲 골짜기에서 지칠 줄 모르고 뻐꾸기가 울음소리를 울린다. 초원의 풀은 첫 베어들이기를 해야 할 정도로 빨리 자라고, 거무스레한 토끼풀은 무성하게 자라고 있다. 씨를 뿌린 밭은 물이 올라 녹색으로 빛난다. 숲언저리에서는 오월의 하얀 꽃들이 넓은 잎사귀 아래서 반짝인다. 넓은 들판엔 유황색의 유채꽃이 피어 있다. 어른이 아이가 되고 삶이 다시 기적이 될 시간이다. 하루하루가 뜻하지 않게 새로운 것을 가져다주고, 잠깐 초원을 산책할 때마다 하나의 놀라움이자 동화기 때문에. 위엄 있는 계절, 여름이 다가온다. 낮엔 곡식이 익고 밤엔 뇌우가 친다. 자, 난 여태까지 겪지 못한 일을 또 한 번 체험하고, 과잉과 넘쳐흐르는 화려함의 날들을 볼 준비가 되어 있다. 난 단 하루도 단 한 시간도 소홀히 하고 싶지 않다. 농부가 너무 일찍 마차에 화환을 두르고, 탐욕스런 낫이 익은 곡식을 베며 사각거리는 소리를 내기 전에는! (92페이지)

 

습기 찬 산바람이 내 곁을 스친다. 건너편의 푸른 하늘은 다른 땅을 내려다보고 있다. 저 하늘 아래서 나는 때로는 행복하기도, 때로는 향수에 젖기도 할 것이다. 나 같은 부류의 완벽한 인간, 순수한 방랑자는 향수를 알지 못해야 하리라. 그런데 나는 향수를 알고 있고, 완벽하지도 않다. 또한 그렇게 되려고 애쓰지도 않는다. 나는 기쁨을 맛보듯 향수를 맛보고 싶다. (283페이지)

 


댓글(0) 먼댓글(0) 좋아요(6)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