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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귀신의 노래 - 지상을 걷는 쓸쓸한 여행자들을 위한 따뜻한 손편지
곽재구 지음 / 열림원 / 2013년 11월
평점 :
품절
1.
참 곱다..... 몇일 전 <골든 스핀 오브 자그레브>에서 본 김연아 선수의 경기 말이다. 부상에서 복귀하고 오랜만에 출전한 그녀의 - 약간은 긴장한 듯한 - 연기는 수수한 의상과도 잘 어울렸고, 안무 역시 선택한 음악들과 잘 어울렸다. 무엇보다도 가느다란 선이 은반 위에서 노니는 느낌이 참 고왔던 것 같다. 선천적으로 타고난 몸매와 피겨와 잘 어울리는 표정 연기, 가볍고도 화려한 점프 기술 등에 의한 것도 있었겠지만, 어렸을적부터 쉴틈없이 노력한 그녀의 땀방울들이 바로 그 고운 느낌의 원천이 아닐까 하고 생각했다.
참 곱다.... 주말에 읽었던 곽재구 시인의 산문집 <길귀신의 노래> 말이다. 포도를 먹으면서 영혼이 부드러워지고 따스해짐을 느낌다는 저자의 표현도 그렇거니와 길 위에서, 그리고 지금까지 살아왔던 인생의 나날들 속에서 이렇듯 따스한 기억의 조각들을 부서지지 않게 하나 하나 끄집어내는 문구들이 말이다. 추운 날씨로 차갑게 식어버린 손바닥을 비벼가면서 책장을 넘기다가 어느덧 내 손이 따스해지는 걸 느꼈을 때, 그리고 그것이 책속의 따사로운 문장들 때문이라는 걸 알았을 때, 지금 내가 참 고운 글을 읽고 있구나라고 생각했다.
이 고운 느낌 역시 영혼없는 글이 아니라 저자의 젊은 날부터 꾸준히 이어져 온 감성들의 총체이기에 지금 이글을 읽으면서 그 느낌을 공유할 수 있는게 아닐까란 생각을 해 보았다.
2.
책장을 넘기면서 문득 든 생각은 "필사를 해야겠다." 였다. 그냥 소소한 순간의 기억들이 저자에게는 금방이라도 눈물이 맺히게 만들만큼의 애잔한 삶의 조각처럼 남아 있음이 놀라웠다. 비록 겉으로는 정지한 듯이 보여도, 속으로는 사물의 처음과 끝을 여행하고, 이야기하고, 헤어짐을 반복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무엇보다도 섬세하고 따사로운 필체와 마침표에서 묻어나는 겸손한 마음을 배우고 싶었다. 이 책을 읽다보면, 그리고 계속해서 쓰다보면 나도 그런 마음을, 그런 시선을 갖게 될것만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ㅇ 서점은 인간의 영혼을 파는 가게이다. 인간의 삶과 사랑과 예술에 대한 체취들이 깊게 고인 그 공간들이 지금은 하나둘 사라져간다. 집을 나서면 제일 먼저 마주치는 가게가 서점이었으면 싶고 낯선 여행지의 가장 고요하고 아름다운 장소에 자리한 가게가 서점이었으면 싶다.
ㅇ 새봄이 왔습니다. 만나는 풍경 모두에게 따뜻하게 마음을 모아 안녕, 하고 말할 수 있는 우리 모두가 되었으면 하고 생각해봅니다. 사랑의 마음과 눈빛을 모아 누군가의 손을 붙잡고 복 받으시오, 하고 인사하는 것만으로 세상이 조금은 살만한 것으로 바뀌지 않을까, 생각하는 것입니다.
ㅇ 막차는 좀처럼 오지 않았다라는 <사평역에서>의 첫 행은 그 당시 내가 바라본 세계의 꾸밈없는 표현이었다. 좀처럼 오지 않는 희망. 그것을 기다리는 사람들. 눈곱이 끼고 손금이 닳아지고 희망 없이 꾸벅꾸벅 조는 사람들. 그들이 지닌 시간 속에 따스하고 설레는 불꽃의 춤 같은 것을 새겨주고 싶은 마음이 있었다.
ㅇ 욕 할 때 시원하게 욕하면서도 자신의 일에 최선을 다하는 사람. 자신보다 강한 사람에게 굽실거리지 않고 당당하게 맞서는 사람. 그러면서도 다른 사람의 입장을 속 깊이 배려하고 삶속에 깃든 의미를 스스로 존중할 수 있는 사람.
ㅇ 해 저물 무렵 아름다운 가정 마을의 길 위에 서서 나는 문득 아름다움이란 흘러가는 것이라 생각한다. 그렇지 아니한가? 세월이 흐르고 종소리가 흐르고 당신의 차와 눈물이 흐르고 비와 바람과 눈보라가 흐르고. 문득 꽃이 피고.
ㅇ 스무 살의 나는 길위에 섰다. 바람과 햇살과 꽃향기가 좋았다. 그것들은 시가 지니고 있는 본능적인 악습들이 없었다. 평화롭고 따스하고 자유로웠다. 길 위에 서서 그들을 만날 때 나는 심호흡을 했고 등에 멘 배낭에 작은 꽃 한 송이를 꽂기도 했다. 의식하지 않아도 숨 쉴수 있는 존재가 있다니.
3.
정적이지만 차분한 느낌이 좋다. 롤러코스터같은 삶의 연속일지라도 우리에겐 때론 정지된 시간도 필요하다. 쉬기 위해서도 필요하지만, 멈춰서서 나와 주변을 바라보기 위해서라도 필요하다. 차분하고 정돈된 마음이 정지된 순간들 속에서 하나하나 채워질 때, 세상 역시 그리 변하진 않을까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