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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해지지만 않는다면 괜찮은 인생이야 - 삶의 본연을 일깨워주는 고요한 울림
세스 지음, 최세희 옮김 / 애니북스 / 2012년 10월
평점 :
품절
매일 아침, 메일함을 확인하며 하루 일과를 시작하는 반복적인 일상속에서, 가끔씩은 스치듯 만나게 되는 순간들이 있다. 평소와는 다른 아침 공기, 눈으로 덮인 서울 시내, 기분이 좋아지는 따뜻한 메일과 댓글, 그리고 좋은 책들까지. 이번에 만나게 된 세스의 책은 바로 이런 우연속에서 발견한 삶의 여운이었다. It's a good life, if you don't weaken. 약해지지만 않는다면 괜찮은 인생이라는 말. 모모에게 시간을 뺏으려는 회색 신사와 파우스티언맨들의 압박 속에서 매일같이 뜀박질을 강요당하는 우리들에게 조금은 낯설은 조언이었다. 평범한 삶, 보통의 연애 만큼 어려운 것이 없듯이, 괜찮은 인생이라는 말 역시 쉽게 정의내리기 어려운 것이기에 "약해지지만 않는다면.." 이라는 말은 무슨 의미일까 하고 고민하게 했다.

이 책의 저자인 세스는 캐나다 출신의 만화가인데, 인터넷을 검색해보니 자신만의 독특한 삶에 대한 가치관과 탄탄한 독자층을 보유하고 있었다. 평범한 삶 속에서 끄집어내는 기억들과 일상에 관한 대화, 그리고 과거에 대한 회상 속에서 발견되는 삶의 흔적들을 가지고 자연스레 풀어나가는 이야기는 화려하진 않지만, 따뜻한 손길처럼 다가왔다.
세스와 가족들간의 대화로 시작되는 내용은 독백과 혼자만의 생각, 그리고 켈로라는 만화가에 대한 이야기로만 가득 차 있다.
잠결에 깨어 거실로 나와 TV를 켜둔채 잠들어 버린 어머니를 바라보는 장면과 문득 창을 열었을때 얼어버린 호수에서 하키 게임을 즐기는 학생들의 모습, 멀리서 바라본 어린날의 집. 그냥 아무것도 아닌 지극히도 평범한 일상의 찰나이지만, 그 순간 마음속에서 차오르는 뜨거운 감정의 온도와 흑백사진처럼 뿌옇게 흐려지는 기억의 프레임은 말로는 설명하기 힘든 감동의 순간이었다.
맞다. 누군가는 말했다. 과거는 과거일 뿐이라고. 더군다나 머릿속에 자리잡고 있는 단편적인 기억들을 간직하고 있어봤자 무슨 의미가 있을까. 미래를 위해 열심히 뛴 것도 아니고, 정말로 기쁘거나 너무나도 아팠던 기억들도 아니다. 그냥 떠오른 기억일 뿐이다. 그런데 정말 특이하게도 그런 장면 하나하나가 머릿속에 남아 이유도 없이 마음을 아프게, 또 따뜻하게 만들기도 한다. 평소에는 무심코 흘려보내었던 나의 부끄러운 마음과 타인에게 상처를 주었던 행동들이 가슴 한구석을 찌르곤 하는 것이다.
.........자신에게 솔직하지 못하다는 것이 문제다. 나의 자기기만이 어느 정도인지도 모르고 있으니. 스스로를 직시한다는 것은 참 어렵다. 마침내 자신에게 정직해졌다고 느끼는 순간에도, 마음 저 깊은 곳에 내가 외면한 진실이 남아 있는 건 아닐까하는 의심이 생긴다. 신기할 따름이다. 뭔가에 대해 생각하는 동시에 그걸 회피할 수 있다는 게.......
그는 왜 켈로를 찾아가려는 걸까. 같은 만화가로서의 존경심, 그냥 호기심, 아니면 원래 독특한 인물이어서... 아니다. 누군가에게 잊혀졌던 기억을 떠올린다는 것, 타인의 삶을 이해한다는 것은 그 어떤 목적보다도 더 의미있기 때문이 아닐까. 그 사람이 태어난 마을을 돌아보고, 그가 만났던 사람들과 이야기하고 그의 작품을 사심없이 바라보는 것. 섣부르게 판단하고 정의내리는 게 아니라 그냥 지켜봐주는 것. 그리고 인정해 주는 것. 어쩌면 세스는 켈로를 통해 진짜 여행을 했고, 진짜 친구를 만난 건지도 모른다. 사심없이, 진심으로 다가갔기에 말이다.
우연히 만난 켈로의 작품을 통해 전개되는 이야기. 그의 작품들과 삶의 사소한 기억이라는 조각들로 맞춰가는 켈로의 인생. 공감만으로도 누군가에게는 진실한 치유가 될수 있음을 알게 해준 이 책은 그동안 읽었던 그 어떤 책보다도 강렬했고, 따스했다. 그리고 이러한 공감을 통해 지금 나에게 당면한 문제와 함께 더 좋아질 미래에 대해 생각할 수 있었다. 소중함과 치유, 극복해야 할 것들과 미래를 향한 행동에 영감을 주었다고나 할까. 비록 만화속 그림과 글은 나에게 어떠한 해답도 조언도 주진 않았지만 말이다.
..............어느 평범한 날의 내 모습이다. 거실 쇼파에 누워 책을 읽고 있는 나. TV가 켜져 있고, 부엌에선 엄마의 목소리가 들려오고, 모든 게 태평했던 시절. 어쩌다 우울한 기분이 들 때면 난 이런 기억을 찾아 도망친다.........
어느 날 본 우연한 거리의 기억, 아무 의미없지만 나이가 들어서도 잊혀지지 않는 어린날의 어느 오후, 아버지와 함께 올랐던 산에서 본 토끼 - 노루인지 토끼인지 지금도 헷갈리지만 - 의 눈망울까지. 시간이 지날수록 또렸해지는 사소한 기억들이 마음속에 남아있다는 것은 어찌보면 정말 신비로운 일일지도 모른다. 문득 영화 해바라기의 엔딩컷의 대사가 떠오른다. "사랑이라. 사랑 뭐 별건가. 행복했던 시간, 짧은 기억 하나면 충분한거지. 기억하고 있다면 사랑은 변하지 않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