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들 사이에 꽃이 필 때 문학과지성 시인선 207
최두석 지음 / 문학과지성사 / 1997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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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에꽃> 다음 시집이다.
시인은 이 시집을 낼 때 마흔셋이 되었다.

‘도둑처럼 다가온 불혹의 나이를 심히 부끄러워하’며, ‘숨죽인 채 눈물 삼’키고 있고, ‘허무의 공터’에 있다.

그 까닭은 어린 아들이 뭉툭한 플라타너스를 보게 하고 싶지 않은 아비의 당연한, 순한 마음과 어찌 할 수 없는 무력함 때문이다.

“플라타나스를
가로수로 심지 말아요
가지분만 아니라 우듬지까지
마구잡이로 톱질을 하려거든

눈이 아프게
뭉툭한 플라타나스로 하여금
아이의 학교길에
통행하게 하지 말아요.” 13쪽 플라타너스

그러나, 아직 ‘난시’다. 분단 조국의 왜곡된 현실을 꼬나보고 있다.

“오욕의 땅
비탈에 뿌리박고 늘어져
따사로이 환한
새 세상 보이려는 듯
온몸의 숨구멍마다 꽃을 피우는
개나리 꽃잎엔 최루탄 가루가 묻어 있다
아니 화약 냄새가 스며 있다
다투어 피어나는 꽃송이마다
자신의 타는 가슴 문지르며
묵묵히 걸어들어가는 청춘 보인다.” 56쪽 개나리

이야기시도 여전하고, ‘항심’도 변함없다.

“울창한 참나무숲이었다
건조주의보를 아랑곳하지 않고 실시된
미군 사격훈련의 불똥은
겨우내 마르고 쌓인 가랑잎으로 튀어
단숨에 쇠목산을 덮쳤다
곳곳에 푸르던 소나무는 누렇게 뜨고
바야흐로 꽃술을 내밀던
진달래는 꽃잎째 탔다
재 위에는 숯이 된 도토리가 뒹굴고
불을 끄러 왔던 산림계장과 여섯 청년은
졸지에 영안실에 누워 절을 받고 있다
군사훈련 때마다 동네 앞길을 폐쇄당하는
쇠목마을 사람들 경운기 몰고 나와
미군 사격장 확장 반대를 외치는데
한국의 전투경찰이 방패를 들어 막고 있다
둥지를 태우고도 여전히
맑은 목청으로 우는 멧새야 오목눈이야
새로 지은 둥지에서는 아무쪼록
뻐꾸기 새끼를 기르지 마라.” 96쪽 동두천 산불

한강 하구에서

섣불리 북 치지 마라
엉겁결에 장구 치지 마라
기분에 취해 깃발 올리지 마라
밀물 썰물 오르내리는 한강 하구에서
금강산 폭포를 보고 오대산 여울을 보라
진심으로 깃발 올렸거든 항심으로 몸을 던지라. - P9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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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모 마스크스 K-포엣 시리즈 18
김수열 지음 / 도서출판 아시아 / 2020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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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가 30여 편밖에 실리지 않은 시집이다.
분량을 채우려고 했는지 시가 그치고 난 뒤에 시인노트, 시인 에세이, 해설, 김수열에 대하여 등이 딸려 있다.

이 시집은 르포다. 현실에 대한 고발적 기록이란 얘기.
자신의 서정보다는 다른 이들의 삶과 역사를 주로 다뤘다.
지하철 5호선 타는 사람들의 풍경, 베를린과 코펜하겐의 일상, 안중근, 세월호, 사북 동원탄좌, 광주민주화운동, 4.3 의인 문형순, 한국군의 베트남 양민학살과 4.3 당시 양민 학살, 김시종, 그레타 툰베리, 코로나로 죽은 아홉 살 소년 등.

당연히 가슴 먹먹해지고 눈시울 붉어지는 이야기가 많다.
“그럼 나는 누구인가?
어디서 무얼 하고 있나?” -60쪽

이슬비가 내렸어요
이십칠 일 새벽 두 시쯤이었을 거예요
아저씨들이 여긴 위험하니 나가야 한다고 해서
우린 밤참으로 빵과 우유를 나눠드리고
아침 식사 준비를 대강 마친 다음
뒷길로 도청을 빠져 나왔어요

근데, 그분들, 조반은, 자셨나요? - P42

나무 한 그루 심는 일은
하늘로 오르는 신의 길목을 내는 일이며
우리의 내일을 하루만큼씩 이어가는 것이고
한 그루의 나무를 베는 일은
하늘에서 내리는 신의 길목을 끊는 일이며
우리의 내일을 하루만큼씩 줄여간다는 것이다
인간 없이 나무는 수천만 년을 살아왔지만
나무 없이 인간은 단 하루도 살 수 없는데
둘러보면 지구상에는 두 부류의 인간종이 산다
하나는 열심히 낭을 싱그는 인간종이고
다른 하나는 끊임없이 낭을 그치는 인간종이다 - P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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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작도 끝도 없는 모험, 『그림 동화』의 인류학
오선민 지음 / 봄날의박씨 / 2021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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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화는 ‘착한데 재주도 있는’ 친구가 짠! 하고 나타나서 ‘착한데 불쌍한’ 나를 돕는 이야기가 아니다. 동화에서는 서로 ‘다른’ 필요를 가진 존재들이 각자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어쩔 수 없이 함께 뭉치는 사건만 줄기차게 나온다. 더 흥미로운 점이 있다. 모든 연대는 특정 구간의 미션을 해결하고 나면 해체된다는 것이다. - P22

동화는 선악에 관심이 없을 뿐만 아니라 아예 사는 것은 카오스라고까지 말한다. - P12

죽을 수 있는 존재만이 살 수 있다. 죽음이라는 생명 고유의 한계 앞에서 내 삶은 너의 삶에 달려 있다. - P7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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캥거루는 캥거루고 나는 나인데 문학과지성 시인선 403
최정례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11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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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웃는 얼굴을 한 울음”! 44쪽

최정례는 어둡고 우울하다.
“머리에 꽃을 꽂고 북당나귀라는 별에 내리는 것
꿈이 현실과 스윙 댄스를 추는 것”이 소원이라면서 발랄하게 얘기하는 가운데에도 ‘모호한 뭉게구름 속’에 있다. 희미한 웃음기조차 없다.
“캥거루 주머니에 빗물이 고이면 어쩌나 하는 식으로
우리 애들이 살아갈 앞날을 걱정”하는, 따뜻한 어미이기도 하지만, 작가회의로부터 본인의 죽음을 알리는 문자를 받고도 ’회의에 참석한 적도 없고, 절친한 사람도 없‘는 자발적 고독을 선택한 시인이기도 하다.

그러나, 그게 무슨 상관. 그의 시는 건조하고 차가우며, 날카롭게 매혹적이다.
“무엇이 할퀴고 지나간 다음에야
그것이 무엇이었는지 묻게 된다”
하는 일상에서 길어낸 성찰.

“사람들이 뛰고 있었다. 나도 뛸 수밖에 없었다. 무슨 일인가요? 모르겠는데요. 남들이 줄 끝에 서기에 나도 섰어요. 무슨 줄인가요? 잘 몰라요. 얼마나 기다리게 될까요? 글쎄요. 몇몇 여자들이 뭔가를 들고 가면서 자기들끼리 떠들었다. 90%라고 하지요? 왜 그렇게 한대요? 모르겠어요. 저는 처음인데요. 몇 시간 기다렸어요? 무작정 서 있었어요. 오가는 말들의 저 끝에서 누군가 나를 향해 웃고 있었다. 나를 안다는 듯이 손을 흔들었다. 나도 손을 흔들어주었다. 어디서 본 듯한 사람이다. 지난번 만났을 때하고는 전혀 다른 모습이네요. 그가 알고 있다는 것이 누구인지, 무안할 정도로 그는 나를 잘 알고 있다고 했다. 얼마나 기다릴 거예요? 그냥 기다리고 있는 거예요. 무엇인데요? 글쎄, 기다려봐야 알 것 같아요. 그의 이름이 도저히 생각나지 않았다. 내가 누구에게 손을 흔들었던가 싶었다. 그때 사람들이 흩어지기 시작했다. 왜요? 끝났어요? 300명까지만 들어갈 수 있다네요. 무엇이었는데요? 앞쪽에서 누군가 물었다. 코끼리 삼겹살 아니었나요?”
- 줄. 23쪽

삶에 대한 우의. 아무것도 모르고 기다리다 흩어지는.

“구름이 변종 자기 복제자를 만들듯
그리움도 평생 자기 복제를 하면서
맹목적으로 불가항력으로 헤엄쳐 가지

수 금 지 화 목 토 천 해 명 그 너머까지
어디선가 만난 듯한 낯익은 세포에게로
유도미사일처럼
그리움의 꽁무니에 따라붙지

끈질기게 배 한 척이 노 저어 가듯이
아빠의 정자가 기를 쓰고 엄마의 난자에 도달하듯이
그것이
우리가 존재하는 이유가 되었듯이

그렇게
내 몸의 10의 15승의 세포 중
이상하고 야릇한 세포 한 무리가
말미잘처럼 해파리처럼 수축하고 뻗어가다가
엉뚱한 길로 접어들었지”
- 누가 칵테일 셰이커를 흔들어. 48-9쪽

사랑의 찬가를 부르는 듯하다 ‘엉뚱한 길‘이 결말인 냉소.

“우리는 계속해서
가던 길이나 가는 거겠지

종이컵에 빨대 꽂아 커피나 주스를 빨면서
빈 컵 바닥을 빨대로 더듬다가
마지막 공기 빠지는 소리 들리면
컵 구겨 내던져버리면서”
- 얼룩덜룩. 39쪽

시리도록 쿨한 해후 이후.

그리고, 이 건널 수 없고 닿을 수 없는, 심연

당신을 이해해


그들은 방아를 찧고 있었다
닭은 부리를 내밀고
강아지는 주저앉고
오리는 엉덩이를 흔들며
여인의 방아 찧는 장단에 맞춰
고개를 주억거리고 있었다

꼭 국어책 크기만 한 흙 마당이었다
개와 오리와 닭과 여인
맷돌과 디딜방아
그들은 한식구가 되어
소꿉장난처럼 지내고 있었다
한나라 때의 무덤에서 나온 토우라고 한다
맷돌에서 곡식 가루는 쉬지 않고 흘러내리고

침묵은 그 세상에서 어떤 말보다 적합한 노래
이해란 제 속에서 솟는 샘물을 길어
서로에게 부어주는 것
개와 닭과 여인과 맷돌이
이 모든 것 죽어서야 이해하게 되었다는 듯이 - P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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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나리꽃 하나가
송만철 / 시와사람사 / 1999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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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랩에서 가난, 사진에서는 절경. 소재주의로 가끔 공격당하는, 작품화하기 쉬운 것이 한국 현대시로 치면 개발독재에 사라진 농촌으로 대변되는 고향 아닐까. 건드리면 어느 정도의 작품성을 담보하는. 가난 코스프레가 문제지, 제 삶이 그렇다는 것이 무슨 문제가 되랴.
송만철의 첫 시집이다. 시집에 나온 약력에는 고흥 출생, 보성여자중학교 근무로 나온다. 시집에는 선생으로서의 일상은 전혀 나오지 않는다. 시집 내내 화자는 바닷가와 농촌이 같이 있는 보성에 있다. 퇴락한 고향 속에.
글이 거칠다. 매끄럽지 못할 정도를 넘어 어설플 정도. 그러나, 소재가 먹히는지라 종종 가슴에 와 닿는 얘기들이 있다. 첫 시집인 만큼 내놓고 싶은 말이 많았겠으나, 당연히 정서며 말을 절제한 시가 좋았다.

김喪家에서

묵힌 전답에 일어선 잡풀이 수런거린다
서랍쪽에 세워둔 만장이 펄럭이고
푸른 별 하나 대 끝에 걸려 떨었다
평생 농투사니로 억울하게 살았다
타지에서는 개새끼 하나 오지 않고
상주는 취해 쓰러졌다
자식의 등을 내려다 본 망자가
들배밭같은 쓸쓸한 아들의 등짝을 두들겼다
나이든 아들은 큰 울음을 터트리고
거친 삶의 그림자가 들썩거리며 밤이 일어섰다
만장 위 푸른 별이 뚝 떨어지며
죽창으로 살아라 화살촉으로 돋아라
눈발이 마당에 떠다니며 가라앉을 줄 몰랐다
서라 섰거라 이 험한 들판에 살을 섞어라
펄펄 끓는 국솥의 불길이
나를 꿰어차고 타올랐다. - P70

빈 집 풍경


칡넝쿨이 집을 반쯤 덮었다
삭은 마룻장을 뚫고 나온 대나무가
뜯겨진 벽지에 눌렸다

혼자 피고지는 오동나무 자색꽃이
마당 가에 시름시름 앓고
깨진 항아리에 물은 고여
청개구리 한 마리
슬프게 몸을 숨겼다 - P72

봄새벽

창호지 문에 대그림자 어른거린다
봄새벽에 낙숫물 소리를 듣다
비 들이치는 마룻깃에 앉아
한때의 딱새가 분분히 꽃을 날리던
담장 옆 자두나무를 본다
축축늘어진 가지의 꽃잎이
한순간의 생처럼
비바람에 떨어져
빗물에 흘러간다

적적한 뒷산에서
산안개가 몰려왔다. - P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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