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나리꽃 하나가
송만철 / 시와사람사 / 1999년 5월
평점 :
절판


랩에서 가난, 사진에서는 절경. 소재주의로 가끔 공격당하는, 작품화하기 쉬운 것이 한국 현대시로 치면 개발독재에 사라진 농촌으로 대변되는 고향 아닐까. 건드리면 어느 정도의 작품성을 담보하는. 가난 코스프레가 문제지, 제 삶이 그렇다는 것이 무슨 문제가 되랴.
송만철의 첫 시집이다. 시집에 나온 약력에는 고흥 출생, 보성여자중학교 근무로 나온다. 시집에는 선생으로서의 일상은 전혀 나오지 않는다. 시집 내내 화자는 바닷가와 농촌이 같이 있는 보성에 있다. 퇴락한 고향 속에.
글이 거칠다. 매끄럽지 못할 정도를 넘어 어설플 정도. 그러나, 소재가 먹히는지라 종종 가슴에 와 닿는 얘기들이 있다. 첫 시집인 만큼 내놓고 싶은 말이 많았겠으나, 당연히 정서며 말을 절제한 시가 좋았다.

김喪家에서

묵힌 전답에 일어선 잡풀이 수런거린다
서랍쪽에 세워둔 만장이 펄럭이고
푸른 별 하나 대 끝에 걸려 떨었다
평생 농투사니로 억울하게 살았다
타지에서는 개새끼 하나 오지 않고
상주는 취해 쓰러졌다
자식의 등을 내려다 본 망자가
들배밭같은 쓸쓸한 아들의 등짝을 두들겼다
나이든 아들은 큰 울음을 터트리고
거친 삶의 그림자가 들썩거리며 밤이 일어섰다
만장 위 푸른 별이 뚝 떨어지며
죽창으로 살아라 화살촉으로 돋아라
눈발이 마당에 떠다니며 가라앉을 줄 몰랐다
서라 섰거라 이 험한 들판에 살을 섞어라
펄펄 끓는 국솥의 불길이
나를 꿰어차고 타올랐다. - P70

빈 집 풍경


칡넝쿨이 집을 반쯤 덮었다
삭은 마룻장을 뚫고 나온 대나무가
뜯겨진 벽지에 눌렸다

혼자 피고지는 오동나무 자색꽃이
마당 가에 시름시름 앓고
깨진 항아리에 물은 고여
청개구리 한 마리
슬프게 몸을 숨겼다 - P72

봄새벽

창호지 문에 대그림자 어른거린다
봄새벽에 낙숫물 소리를 듣다
비 들이치는 마룻깃에 앉아
한때의 딱새가 분분히 꽃을 날리던
담장 옆 자두나무를 본다
축축늘어진 가지의 꽃잎이
한순간의 생처럼
비바람에 떨어져
빗물에 흘러간다

적적한 뒷산에서
산안개가 몰려왔다. - P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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