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은 어떤 흐름을 거스를 수 없는 파도 위의 작은 돛단배쯤 된다는 말인가. - P64
작아서 주머니에 쏙 들어간다.알차게 정보를 담고 있어서봄이 오면 훑어 보곤 한다.자꾸 잊어먹으니 끼고 살 수밖에.
살아남는 것이 승리라면주인공 시메온은 자신의 말대로 ‘세상의 왕’이 되었으니최고의 승자다.원작자우리가 익히 아는 그 레프 톨스토이 아닌알렉세이 톨스토이도 여러 방식으로 그를 없애 버리려고 했으나 매번 살아남았다는바퀴벌레그런 것들의 후예다. 우리는.
내 나라의 옛날이라 하더라도 옛날은 외국이나 다름없다. 어떤 문법책의 예문에 그런 말이 있었다. 물론 이 옛날은 3백 년 전이거나 천년 전의 옛날, 역사책에서나 읽을 수 있는 그런 옛날을 말할 것이다. 그러나, 20년 전이나 30년 전, 내가 철들어 보고 느끼며 살았던 나날이라고 해서 다른 나라의 시간이 아니라고 말하기도 어려울 것 같아 문득 몸이 떨린다. 기억이 내 존재의 일관성을 보증해준다고는 하지만 과거의 어느 시간 속으로 내가 찾아내려 간다면, 나는 거기서 다정하고 친숙한 물건들을 다시 만나기보다, "나는 여기서 산 적이 없다"고 말하게 될 것만 같다. - P145
사실은 공허하게, 움직일 수 없이 거기 있기에 다른 것이 된다고 말할 수 있는 힘이야말로 사실주의 예술의 뛰어난 미덕이다. - P163
덜 끔찍하다는 것은 사실 더 끔찍하다는 말이다. 봉천동의 마지막 작은 집이 허물어지고, 정릉의 고층 아파트들을 둘러싼 원주민촌이 이주를 마저 끝내기 전까지는, 저 빈집의 두터운 빗장이 다 삭기 전까지는, 우리가 제사상 앞에서 울리는 절이 아직 허망하지 않다. 그러나 없는 신에게 절을 하는 것보다 없어질 신에게 절을 하는 것이 덜 끔찍하다고 말하기는 어렵다. 불안은 슬픔보다 더 끔찍하다. - P172
일기를 찾아보니 2018년에 이 시집을 읽고 이렇게 썼다.“뭐랄까 내면으로 너무 침잠한달까. 모호하다. 또렷하지 못해 아쉬움. 감정을 지나치게 지움, 세월호 침몰을 배경으로 쓴 <고래의 눈물>마저 슬픔이나 분노가 1도 없음. 생기없는 무채색”이전 시집들에 가득했던, 삶의 구체가 완전히 사라졌다. 14년 만에 낸 시집인데, 그 사이 시인은 보일러공 생업을 유지하면서, 방통대를 거쳐 문창과 대학원을 졸업했다. 그래서일까. 시집 내내 당신을 호명하고 당신에게 얘기하고 당신을 노래한다. 그리고, 특이한 것은 의문문이 넘실대고 시의 끝을 그렇게 맺는 것도 잦다는 것.잘 만든 증류주는 재료의 향이 알콜과 조화를 이룬다. 지나친 증류는 그저 순도 높은 에틸알콜에 이를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