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마의 침묵
최승호 지음 / 열림원 / 1998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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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당집>, <선문염송>, 선어록들의 번역서에서
짧거나 긴 글을 하나 골라 왼 쪽에 싣고
오른 쪽에다 그것과 관련 있는 이야기를 풀어내는 구조로 된 책이다.

그는 시인이니 언어를 버리라는 선불교와 근본적으로 대치할 수밖에 없는데,
때론 선사들의 깨달음을 부연하기도 하고, 자신의 삶에서 새로운 얘기를 하기도 하고, 상관없는 소리를 하기도 한다.

애초에 선사들을 이길 생각도 안 했겠지만,
선사의 이야기에서 최승호 자신의 얘기가 자연스럽게 이어지는 부분이 좋았다.

가래침


친절한 가르침은 가래침 같다. 가래침을 뱉듯이 가르친다. 아무것도 받아먹을 수 없도록. - P13

대대로 이으면서 전해진 것


보이지 않지만 내가 무슨 끈에 묶여 있는지 <시간>은 아마 알고 있을 것이다. 개처럼 묶여 있지만 내가 왜 미치지 않고 울부짖지 않는지를 적어도 사육당한 개들은 알고 있지 않을까.
대대로 이어지면서 나에게 전해진 것은 시간이며 개들이 물려 받은 것은 개끈이다. 개가 죽어도 개끈은 남고 내가 죽어도 시간은 남는다. 부질없는 것인 줄 알면서 나는 때로 시간을 물어 뜯고 개는 묶인 채 개끈을 씹는다. - P25

식은 재를 뒤적거리고 식은 재를 뒤적거리며 추운 한 생이 간다. 욕망의 불씨는 점점 재에 파묻히며 사위어간다. - P57

그 너머


장대 끝에 빨간 고추잠자리 한 마리 앉아 있다. 그 너머는 두루 맑은 가을 하늘, 구름 한 송이 없다. - P111

내가 죽고 봄이 오면
봄에 녹은 한 숨결이
제비꽃 그늘 밑을 한숨쉬며 지나갈까.
물 위를 발가락도 없이 지나갈까. - P1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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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늘의 발달 문학과지성 시인선 350
문태준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08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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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는 소린지 웃는 소린지 알 수 없다”
화자는 그늘져 있고
운다.

“방이 어두워지자
밤이 밤의 뜻으로 깊어지자
눈물이 뚝뚝 떨어졌다
아무 까닭도 없이” 23

“더 좋은 내일이 있다는 말은 못하겠다”면서

“나의 슬픈 시간을 기록해요
나의 일기에는 잠시 꿔온 빛” 을 잠간 비칠 뿐이다.

문태준은 아마 말수도 적고
침울해 보일 정도로
조용한 아이였을 것 같다.

쉽게 따라 하기 어려울
이 미묘한 순간의 포착과 묘사가
깊다.

꽃잎 지는 시간


겨우 밥술 뜰 만한 힘으로
늙은 손목에서 뛰는 가녀린 맥박과도 같이

가가이 아주 가까이에서,

나의 생각과 생각이 나를 어루만지다 잠시 떠나듯이

말려야겠다는 생각이 오기도 전에 - P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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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때 휘파람새가 울었다 시와시학사 시인선 12
고재종 지음 / 큰나(시와시학사) / 2001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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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아직도 세상의 평화를 믿는 사람.” 118

“이제는 찾는 이도 몇 안 되는 정자“를 지키며, <젖은 생>을 ’그렁그렁‘ 지난다.

그러나, 겨울 마른 삭정이처럼 잦아든 것이 아니고
얼음장 밑을 콸콸콸 흐르는, 시냇물처럼 굴하지 않는다.
때론 격랑으로 범람하며.

난 다시 꽃구름에 홀리고 새목청에 자지러져선, 우두망찰, 먼 곳을 보며 눈시울 함뿍 적신다. 그러다 또 애기쑥국에 재첩회 한 접시로 서럽도록 맑아져선, 저 산 저렇듯이 사람들의 그리움으로 푸르러지고, 저 강 또한 사람들의 슬픔으로 그렇게 불었던 것을 내 아둔패기로 새삼 눈치라도 채는가 마는가. 시방은 눈감아도 저기 있고 눈떠도 여기 있는 한세상 굽이굽이다. - P106

세한도


날로 기우듬해 가는 마을회관 옆
청솔 한 그루 꼿꼿이 서 있다.

한때는 앰프방송 하나로
집집의 새앙쥐까지 깨우던 회관 옆,
그 둥치의 터지고 갈라진 아픔으로
푸른 눈 더욱 못 감는다.

그 회관 들창 거덜내는 댓바람 때마다
청솔은 또 한바탕 노엽게 운다.
거기 술만 취하면 앰프를 커고
천둥산 박달재를 울고 넘는 이장과 함께.

생산도 새마을도 다 끊진 궁벽, 그러나
저기 난장 난 비닐하우스를 일으키다
그 청솔 바라보는 몇몇들 보아라.

그때마다, 삭바람마저 빗질하여
서러움조차 잘 걸러내어
푸른 숨결을 풀어내는 청솔 보아라.

나는 희망의 노예는 아니거니ㅘ
까막까치 얼어죽는 이 아침에도
저 동녘에선 꼭두서니빛 타오른다. - P44

푸른 자전거의 때


말매미 말매미 떼 수천 마력의 전기톱질로
온 들판을 고문해대어선
콩밭에서 콩순 따는 함평택의 등지기 위로
살 타는 훈짐 피어오르는 오후 술참때

저기 신작로 하학길을
은륜을 반짝이며 달려오는 막내 녀석,
그 씽씽 그 의기양양
문득 허리를 펴다 가늠한 함평 댁의 입이
함박만하게 함박만하게 벌어질 때

때마침 목덜미를 감아오는 바람자락과 함께
푸르고 푸른 풋것들이
환호작약, 온갖 손사래를 쳐대는 것이었다. - P51

목화송이 같은 눈이 수북수북 쌓이는 밤이다

이런 밤, 가마솥에 포근포근한 밤고구마를 쪄내고
장광에 나가 시린 동치미를 쪼개오는 여인이 있었다

이런 밤엔 윗길 아랫길 다 끊겨도
강변 미루나무는 무장무장 하늘로 길을 세우리 - P6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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밤이 선생이다
황현산 지음 / 난다 / 2013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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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의 다단한 문명을 만들기까지에는 권태에 대한 두려움이 큰 몫을 담당했다. 권태롭다는 것은 삶이 그 의미의 줄기를 얻지 못해 사물을 새롭게 바라볼 수 있는 감수성을 잃었다는 것이다. 유행에 기민한 감각은 사물에 대한 진정한 감수성이 아니다. 오히려 그 반대다. 거기에는 자신의 삶을 구성하는 온갖 것들에 대한 싫증이 있을 뿐이며, 새로운 것의 번쩍거리는 빛으로 시선의 깊이를 대신하려는 나태함이 있을 뿐이다. 우리가 사물을 바라보며 마음의 깊은 곳에 그 기억을 간직할 때에만 사물도 그 깊은 내면을 열어 보인다. 그래서 사물에 대한 감수성이란 자아의 내면에서 그 깊이를 끌어 내는 능력이며, 그것으로 세상과 관계를 맺어 나와 세상을 함께 길들이려는 관대한 마음이다. 제 깊이를 지니고 세상을 바라볼 수 없는 인간은 세상을 살지 않는 것이나 같다. - P19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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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른 길 (반양장) - 박노해 사진 에세이, 티베트에서 인디아까지
박노해 지음 / 느린걸음 / 2014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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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 사진이 많다.
그에 어울리는 짤막한 글도 좋다.
내용이 형식을 따라가지 못하던, 그의 시보다 좋은 느낌이다.

예술의 한 문제. 소재주의
바라봄의 문제. 관음증
을 고민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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