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해 여름더위를 피해 옥상에 올랐을 때 우리는 그 밤의 피해자처럼 굴었지 구석에 숨어 울음을 흉내 내던 사람은 분명 너였고 낄낄대며 웃었던 것은 나였고 그제야 가을이 찾아왔는데, 생각해보면 가을이 찾아온 것이 아니라 우리가 가을을 찾아간 것이었지만 노랗고 빨갛게 번진 우리는 버릇처럼 말했다 이 잔만 비우고 일어나자 그 잔 속에 가득 찬 것이 기름 같은 우리의 수치여도 - P59
묘합니다.잔잔한 서정시들인데저는 오직 3부만 좋아요.< 점점 커지는 기쁨을 아느냐>가 절창으로 다가옵니다. <미련스럽게>의 따뜻함, “닭의 바깥에서 뾰조록이 더 올라오는 어린 봄”, “파밭에는 매운 맛이 새살처럼 돋았다” 같은 표현과 마무리도 좋습니다.
천장지구(天長地久)어떻든 세상은 정상이다.주 오일제가 되고도 송아지 다리는 넷이고죽니 사니 해도 주말이면사람들은 벌떼처럼 맛집을 찾아나선다.얼마나 외로우면 댓글주의자가 되었겠니.•••생은 대부분 우연이고사람은 사람에 대하여 아무것도 아니다.내가 알던 사람들은 어느날 죽기도 했지만그들도 어쩔 수 없었을 것이다.오죽하면 컴컴한 노래방에 들어가 춤을 추겠니.살아보니 집은 작은데 비밀번호가 너무 많다.어떻든 세상은 오래되었고그래도 삶은 계속된다. - P78
흰 고무신에 대한 소고윗집 죽산댁 할머니가댓돌 위에 눈부시게 닦아놓은 남자 흰 고무신 한 켤레 영감님 쓰러져 신발 한번 신어보지 못한 몇 년 동안도가신 지 몇 년이 지난 오늘도늘 그 자리바람이 신어보는 신발가끔 눈발이나 신어보는 그것에무슨 먼지와 흙이 얼마나 묻었다고마루를 내려서기도 힘든 노구를 움직여없는 남편 신발을 닦아 당신 신발 곁에 놓으시네 저 신발 신고꿈결에 오셨을라나 후생의 먼 길을 걷고나 계실라나 주인 없는 신발을 닦는,신을 일 없는 신발을 놓아두는 저 마음 헤아릴 수 있다면바위를 깎아 석가탑을 세우는 일을 알 수 있으리작은 쪽배 같은 신발 한 켤레로이생과 후생이 이웃 같은 시간이 이렇게 있네 - P4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