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흙 얼굴 문예중앙시선 4
송재학 지음 / 문예중앙 / 2011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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몸 속에 참 많은 게 들었거나 드나든다.

담쟁이가 딱딱하게 굳은 머리 속을 휘젓다가 기어들어온 흔적만 남기고 사라졌고(13), 개울이 흘러 물소리가 들리는 게 아니라 몸 안에 천 개쯤 되는 개울이 있어 개울물 소리가 나는 것이고(16), 사막이 몸에 터 잡고 있고(20), 얼굴은 흩어지는 모래를 감싸고 여민 흔하디흔한 비닐봉지인 셈이고(23), 분신을 준비하는 산벚나무보다 먼저 천둥소리가 화자의 안에서 먼저 북채를 잡는다(27). 연어 보호구역(50), 일몰(69), 짐승(74) 등이 또 들어있고, ‘내 몸의 간이역’이 있어 온갖 것들이 드나든다.

이명을 이렇게 얘기하기도 한다.
“귓속에서도 살림이 따로 차려지나 보다”

돈황과 그 서쪽 사막 여러 곳, 이탈리아 등지를 돌아다니고 쓴 시들이 여기저기 섞여 있는데,
제목이 가리키는, 권진규의 조각상과 더불어 잘 있다.
묘하게 이질감 없이 다양한 얘기들이 잘 구워져 있다.
진흙 빛으로

순수


오후 1시의 골목을 디딘 순간 내 등 뒤에서 먼저 문 닫는 소리, 그늘이 골목의 입구를 잠근 것이다 나른하다 보자기만 한 햇빛도 간결해서 내 몸은 명암으로 뚜렷이 나뉜다 창문 아래 순한 송사리 떼처럼 몰려 있는 햇빛이기에 맨드라미는 황금빛 꽃잎을 가졌다 흑백의 고요가 담넝쿨을 감아가는 골목은 유쾌해서 몇 번이나 같은 대문을 지나쳤다 달콤하고 씁쓰레하고 매콤하고 쓰디쓴 것들의 맛은 다시 나른하다 매번 향유고래의 회색 등을 디디는 순례자의 발자국을 따라가야만 했다 오후 1시의 긴시계팔이 삶을 부축해 나올 때 골목을 가까스로 빠져나왔다 흥, 나는 너무 복잡했구나 - P8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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