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주 남산 문학동네 시집 27
정일근 지음 / 문학동네 / 2004년 4월
평점 :
품절


어둡고 무겁고 슬프다.
경주 남산 연작 내내 그 이후에도 삶에 낙이 없다.
시집에는 ‘젊어서 몸과 마음이 아픈 나’117 정도만 나오는데, 찾아보니 이 시집을 낸 마흔 무렵에 뇌종양을 앓았다고 한다.
남산과 불교에 기댄 1, 2부 시들이 무거울 뿐 부족하지는 않으나,
일상의 다채로움이 담긴 3부가 더 좋았다.

“불판 위에 남은 고기가
자신이 뿜어낸 기름 속에서 다시 타고 있다.” 120, 중년

퇴락해가는 항구와 시집 내내 가득했던 슬픔과 쓸쓸함이 잘 버무려진 데다 묘사가 신선하며 뛰어난, 아래 밑줄긋기 한 시가 가장 기억에 남는다.

구룡포 5리의 밤



파시는 오랜 전에 끝이 났고 항구는 더이상 잔치 음식을 담을 수 없는 이 빠진 낡은 사기접시 같다. 그 위로 얇게 고인 바다, 촉수 낮은 백열등 같은 파리한 조각달이 켜지고, 넘지 못하는 언덕과 나가지 못하는 바다 사이에 갇혀 그렁그렁 쉰 목소리를 내며 늙어가는 진퇴양난의 적산가옥들

늙어가는 것은 집들뿐만이 아니다. 이미 늙어버린 구룡포 5리의 길들, 그 길을 따라 찾아오는 아무도 불 밝히지 않는 어두운 저녁. 대처로 이어지는 큰길은 마을 밖에서 투덜거리며 우회하고, 한 번 우회한 사람과 길들은 다시 돌아오지 않는다. 떠날 수 없는 집과 집. 번지와 번지 사이 실핏줄처럼 숨어 숨을 쉬는 골목길을 불러 깨우는 저 메밀묵 장수의 발자국 소리

사라진다. 바다로 열린 창문들 밤새 알 수 없는 이 지역 방언으로 중얼거리고, 정박중인 녹슨 바다 안개가 찾아와 홑이불 밖에서 뒤척이는 내 불면과 몸을 섞는다. 폐경의 자궁 속에 갇혀버린 마을, 다시는 새벽을 해산하지 못할 것 같은 무거운 어둠이 내 몸 속으로 들어와 운다. 아프게 운다. - P1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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