슬픈 궁예
이재범 지음 / 역사인 / 2011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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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말여초에 묻어 버리기에는
일제강점기보다도 긴 40여 년의 후삼국시대
한반도 기반 국가 중 몇 안 되는, 연호를 낸 나라의 왕인데
홀랑 나라를 뺏겨서 그런가
남은 향취가 고약한
‘슬픈’ 궁예

궁예의 경우도 그런 시각에서 재조명되어야 할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나는 궁예를 ‘치사한 놈‘이 아니라 신라의 구각을 깨뜨리고 새시대의 기틀을 다지려했던 사람으로, 견훤은 ‘나쁜 놈‘이 아니라 소외된 지역 백제를 대변하고 안정을 유지하려 한 사람으로, 그리고 왕건은 ‘좋은 놈‘이기 보다는 앞의 두 사람의 경험을 보완하여 통일을 이룬 인물로 이해하고 싶다.
만약 이 세 사람이 자신들의 이익과 패권만을 위해 투쟁한 것이라면 결국 좋은 놈에게 천하가 돌아갈 수밖에 없다는 결론에 이르러도 무방하다. 그러나 세 사람의 세계관이 달랐거나 세계관이 같았더라도 추구하는 바가 달랐다면, 이들의 행보를 세계관이 다른 세 지도자의 고민으로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궁예와 견훤은 왕건을 서술하기 위한 들러리가 아니라 그 시대의 문제를 해결하고자 했던 왕건에게 선험적 지식을 준 인물로 왕건과 동등한 지위에서 다시 평가되어야 하지 않을까? 따라서 후삼국 시대 또한 고려의 전사로서가 아니라, 그 시대 자체를 고뇌하면서 여러 영웅들이 공존한 대립과 동반의 시대로 다시 이해했으면 한다. - P2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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