숨살이꽃 문학과지성 시인선 505
최두석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18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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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것은 식물도감인가. 아마 한국어 시에 처음으로 등장할 식물마저 많이 나온다. 가까이는 감나무, 도토리부터 두메부추, 솔나리, 야고, 금괭이눈, 눈빛승마, 앉은부채에 이르기까지 아주 많은 푸나무들을 다룬다.

“다른 나무를 감고 올라가는 것은
능소화 같은 덩굴나무의 생태이니
조물주를 탓할 수밖에 없겠지마는
정원을 가꾸면서까지 신의 뜻을 시험해보는 원예의 취향에는 공감하기 힘들다” 55
무슨 교술장르인가. 운문에 기댄 정보와 주장 정연한 산문도 꽤 많다.

그럼에도
“숨구멍이 막힌 씨는 썩는다네
말에 숨구멍 만드는 이가 시인이라면
곳곳에 은밀하게 숨구멍이 있는 시라야
오랜 세월 움틀 날 기다리는
씨가 되리라 생각하네” 47
숨을 틔우는 시를 지으려 한다.

무엇을 어떻게 해 보겠다는 것이 아니라
“이름이야 어떻든
사람들에게 쓸모가 있든 없든
송이마다 부처로 피어나 봄을 부르는 꽃들
함부로 짓밟아서는
이 땅에 자비가 없다는 것을
한없이 낮은 목소리로 읊조릴 뿐.” 71
이다. 그의 저음은 누가 귀기울이든 말든 오랫동안 ‘돈에 눈먼 자의 탐욕과 검은 권력’이 지배하는 세상을 울릴 것이다.

족도리꽃은 찾지 않는 애호랑나비
족도리풀만 먹는 애호랑나비 애벌레

도대체 지상의 아름다움은
봄날의 환상 같은 애호랑나비처럼
무엇을 먹고살며 어디에서 생겨나서
어디로 사라지는 걸까. - P105

짚신나물


예전에 씨앗이 짚신에 붙어
산길을 걸었다 하여 얻은 이름 짚신나물
예전에 염소가 먹는 풀잎
사람도 먹어 얻은 이름 짚신나물

걸어서 고개 넘는 대신
질주하는 차로 터널 지나가기 바쁜 세월
달콤하고 기름진 음식 좋아해
살찌는 게 걱정인 나에게

나물아 나물아 짚신나물아
너는 새삼스레 무슨 말을 하려
병아리 혀 같은 꽃 피우고
고개 넘는 산들바람에 하늘대느냐

속도와 재물의 신을 외면한 채
어느 누구도 탐별 일 없는 소박한 꽃 피워
그냥 천성대로 살아갈 뿐이라는 너의 말
이파리 뜯어 씹으며 되새겨본다 - P58

단풍나무에 기대어


아무리 잘 물든 단풍나무라도
낱낱의 잎사귀를 들여다보면
흠없는 잎은 없다
멀리서 보면 눈부시게 휘황하지만
가까이서 보면 상처투성이다

하지만 구태여
가을날 잘 물든 단풍나무를 찾아
기대어 서는 것은
상처 많은 삶을 위로 받기 위해서가 아니라
우중충하게 늙지 않기 위해서다

때 맞추어 잎 떨구지 못하고
얼어붙은 잎 잔뜩 매달고 있는 나무는
얼마나 추레한가. - P1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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