캥거루는 캥거루고 나는 나인데 문학과지성 시인선 403
최정례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11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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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웃는 얼굴을 한 울음”! 44쪽

최정례는 어둡고 우울하다.
“머리에 꽃을 꽂고 북당나귀라는 별에 내리는 것
꿈이 현실과 스윙 댄스를 추는 것”이 소원이라면서 발랄하게 얘기하는 가운데에도 ‘모호한 뭉게구름 속’에 있다. 희미한 웃음기조차 없다.
“캥거루 주머니에 빗물이 고이면 어쩌나 하는 식으로
우리 애들이 살아갈 앞날을 걱정”하는, 따뜻한 어미이기도 하지만, 작가회의로부터 본인의 죽음을 알리는 문자를 받고도 ’회의에 참석한 적도 없고, 절친한 사람도 없‘는 자발적 고독을 선택한 시인이기도 하다.

그러나, 그게 무슨 상관. 그의 시는 건조하고 차가우며, 날카롭게 매혹적이다.
“무엇이 할퀴고 지나간 다음에야
그것이 무엇이었는지 묻게 된다”
하는 일상에서 길어낸 성찰.

“사람들이 뛰고 있었다. 나도 뛸 수밖에 없었다. 무슨 일인가요? 모르겠는데요. 남들이 줄 끝에 서기에 나도 섰어요. 무슨 줄인가요? 잘 몰라요. 얼마나 기다리게 될까요? 글쎄요. 몇몇 여자들이 뭔가를 들고 가면서 자기들끼리 떠들었다. 90%라고 하지요? 왜 그렇게 한대요? 모르겠어요. 저는 처음인데요. 몇 시간 기다렸어요? 무작정 서 있었어요. 오가는 말들의 저 끝에서 누군가 나를 향해 웃고 있었다. 나를 안다는 듯이 손을 흔들었다. 나도 손을 흔들어주었다. 어디서 본 듯한 사람이다. 지난번 만났을 때하고는 전혀 다른 모습이네요. 그가 알고 있다는 것이 누구인지, 무안할 정도로 그는 나를 잘 알고 있다고 했다. 얼마나 기다릴 거예요? 그냥 기다리고 있는 거예요. 무엇인데요? 글쎄, 기다려봐야 알 것 같아요. 그의 이름이 도저히 생각나지 않았다. 내가 누구에게 손을 흔들었던가 싶었다. 그때 사람들이 흩어지기 시작했다. 왜요? 끝났어요? 300명까지만 들어갈 수 있다네요. 무엇이었는데요? 앞쪽에서 누군가 물었다. 코끼리 삼겹살 아니었나요?”
- 줄. 23쪽

삶에 대한 우의. 아무것도 모르고 기다리다 흩어지는.

“구름이 변종 자기 복제자를 만들듯
그리움도 평생 자기 복제를 하면서
맹목적으로 불가항력으로 헤엄쳐 가지

수 금 지 화 목 토 천 해 명 그 너머까지
어디선가 만난 듯한 낯익은 세포에게로
유도미사일처럼
그리움의 꽁무니에 따라붙지

끈질기게 배 한 척이 노 저어 가듯이
아빠의 정자가 기를 쓰고 엄마의 난자에 도달하듯이
그것이
우리가 존재하는 이유가 되었듯이

그렇게
내 몸의 10의 15승의 세포 중
이상하고 야릇한 세포 한 무리가
말미잘처럼 해파리처럼 수축하고 뻗어가다가
엉뚱한 길로 접어들었지”
- 누가 칵테일 셰이커를 흔들어. 48-9쪽

사랑의 찬가를 부르는 듯하다 ‘엉뚱한 길‘이 결말인 냉소.

“우리는 계속해서
가던 길이나 가는 거겠지

종이컵에 빨대 꽂아 커피나 주스를 빨면서
빈 컵 바닥을 빨대로 더듬다가
마지막 공기 빠지는 소리 들리면
컵 구겨 내던져버리면서”
- 얼룩덜룩. 39쪽

시리도록 쿨한 해후 이후.

그리고, 이 건널 수 없고 닿을 수 없는, 심연

당신을 이해해


그들은 방아를 찧고 있었다
닭은 부리를 내밀고
강아지는 주저앉고
오리는 엉덩이를 흔들며
여인의 방아 찧는 장단에 맞춰
고개를 주억거리고 있었다

꼭 국어책 크기만 한 흙 마당이었다
개와 오리와 닭과 여인
맷돌과 디딜방아
그들은 한식구가 되어
소꿉장난처럼 지내고 있었다
한나라 때의 무덤에서 나온 토우라고 한다
맷돌에서 곡식 가루는 쉬지 않고 흘러내리고

침묵은 그 세상에서 어떤 말보다 적합한 노래
이해란 제 속에서 솟는 샘물을 길어
서로에게 부어주는 것
개와 닭과 여인과 맷돌이
이 모든 것 죽어서야 이해하게 되었다는 듯이 - P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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