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매일매일 문학과지성 시인선 351
진은영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08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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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읽는 시집들은 구면인데 초면인 듯한 경우가 많다. 최승자 때문에 읽게 됐을 진은영. 2008년에 나오자마자 읽었겠으나, 읽었다는 기억만 있을 뿐 생면부지로 다시 읽었다.
당나라 손과정이라는 서예가가 쓴 <서보>에 이런 구절이 나온다. “처음 글씨의 배치를 배울 때는 다만 평이하고 바르기를 바라고, 그것을 터득한 뒤에는 험하고 독특하기를 추구하는 데 힘쓰며, 그 험하고 독특하게 되어서는 다시 평이하고 바른 데로 돌아간다.” 대개의 예술이 그렇다. 습작의 시기는 모범을 모방하는 시기이고, 기술을 익히게 된 뒤에는 남들과 달라야 하니 험절의 세계, 그저 다른 스타일에 집중하기 마련이다. 그러나, 나이가 들면, 대개의 예술은 평이해지고 유순해지며 그윽해진다. 아직, 진은영의 세계는 험절의 시간에 있다.
‘불명료함의 심장에서 솟구치는
무언가‘로 가득차 있다. 1930년대 모더니즘인가 낯선 단어, 이질적인 이미지가 속출한다.

그 속에는
“우리는 너무 오래 생각했다
틀린 것을 말하기 위해
열쇠 잃은 흑단상자 속 어둠을 흔든다” 34
에서 볼 수 있듯 그가 성장한 세계를 꼬나보는 시각과

“너무 삶은 시금치, 빨다 버린 막대사탕, 나는 촌충으로 둘둘 말린 집, 부러진 가위, 가짜 석유를 파는 주유소, 도마 위에 흩어진 생선비늘, 계속 회전하는 나침반, 나는 썩은 과일 도둑, 오래도록 오지 않는 잠, 밀가루 포대 속에 집어넣은 젖은 손, 외다리 남자의 부러진 목발, 노란 풍선 꼭지, 어느 입술이 닿던 날 너무 부풀어올랐다 찢어진” 45 <나는>
낭패에 가까운 우울이 깔려 있다.

철학은커녕 내용이고 의미 따위보다 오직 스타일에 훅 꽂힐 때가 있는 법이고, 그게 문제 될 것도 없다. 다만, 나는 이제 그렇지 못하다는 것일 뿐.

아래와 같은 부분에서 나는 진은영을 주목하고 좋아한다.
“학살자의 나라에서도
시가 씌어지는 아름답고도 이상한 이유를.” 91 <러브 어페어>
“진동의 발명가가 돼라/
마지막 시를 달라
이 사물은 미학적으로 낡았지만 마음을 이동시킨다
저곳에서 이곳으로“ 59 <나에게>
시를 사랑하는 마음.

“별과 시간과 죽음의 무게를 다는 저울을
당신은 가르쳐주었다.
가난한 이의 감자와 사과의 보이지 않는 무게를 그리는
그런 사람이 되라고.” 77 <나의 친구>
약한 것들에 열려 있는 시인의 마음. 이 망해 가는 세상에서 우리는 어디로 가는가?

Quo Vadis?


울던 아이들은 어디로 갔나
이제 바람도 멈추었다네
우리의 녹색 비밀을 묶어둔 노끈들
처음으로 숫자를 적은
작은 공책은 어디로

물에 빠진 고양이털 하얗게 얼어가는 추위

나무 실로폰은
먼 마을의 저녁 종소리는
어디로

낡은 선반 위에서는
여수 출입국 보호소 화재로
사과와 별을 싼 종이냄새가 났었다
이주노동자 10명 사망, 17명 부상
사과와 별을 싼 종이냄새가 났었다
보호 외국인의 도주를 우려해
숨겨놓은 얇고 구겨진 파란 종이를 풀며
쇠창살 문 개방 지연, 감금된 채
숨겨놓은 얇고 구겨진 파란 종이를 풀며
노동자들 연기에 질식 사망

사탕에 그려진 달콤한 회오리를 따라 혀를 내밀었는데
어린 우리는 높은 담장 넘어
이웃의 마당에 빗방울로 떨어졌는데
과일나무 가지들은 빨간 열매 달고
우리를 계속 따라오는데

서리 낀 창유리로 물방울
맑은 얼룩의 길을 내며 흘러내린다
연기에 그을린 고양이털
지폐처럼 빳빳하게 얼어가는 추위

우리가 모아놓은 잿빛 구름이
밀빵처럼 부풀어오른다
갇힌 사람들의 피로 젖은 빵을 뜯으며
저녁은 몹시 어두워지는데, 이제 어디로? - P8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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