햇빛 속에 호랑이 아침달 시집 12
최정례 지음 / 아침달 / 2019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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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은 길이란 길은 다 멀고 캄캄했습니다 25

날마다 발이 푹푹 빠져요. 모래 아이들이 극성이고 모래를 씹는 일이 쉽지 않아요. 언제쯤 이곳을 건너게 될까요. 47

어떻게 불지옥 속을 빠져나갈지 깜깜했는데
… 갇혀 있었다 웅크리고 있었다 82

시인의 삶은 힘들고도 괴로웠나 보다. ‘불지옥’이라니.
표현에 있어서는 알 듯 모를 듯 흐릿한 내용이 가득하다. 자주 꿈을 얘기하는데, 현실을 그리기보다는 현실 바깥을 얘기한다.

백 년이나 산 것처럼 늙은 얼굴의
시, 시시껍절의 시
실패한 유괴범이 되어 눕지는 말자 66

라고 한 것처럼 기존의 틀을 벗어나기로 작정했다.

바람을 향해 달리면
목을 휘감고 아우성치던
하루가 있었다
모자를 갖고 싶었,
말도 못했다 바람이 모자 밑을
흘러 뒤로 달아나게 달려야 했다
모자를 사달라고 며칠을,
울어야 아무도 모자를 사주지 않,
모자 같은 건 아무려면 어떠냐는 식,
이었다 내가 세상에서 원하는
것은 모자뿐인데
왜 내게 모자를 사주지 않,
왜 영 모자 올려놓는 것을 금지했,
이제 그들이 모자를 사주겠다고 88

이 하루를 이해하기는 어렵다. 멈춘 문장들이 비처럼 죽죽 긋고 있어 독특하다. ’모자를 쓰면 울 것 같,‘다니 그만한 감격이 시인에게는 무엇일까? 이제 묻지 못하니 안타깝다.
그곳에서는 ’오랜 목마름 잊고‘ 평안하시기를 빈다.

없는 나무


그 나무의 이름은 깜깜하다
나무 속에서 타던 해만
잠깐 보았다
번개처럼 스쳐갔다
백탄나무 천상나무 허공나무
없다
그들 속에 그 이름 없다

태양이 죽죽 떠오른 다음
만상이 흘러간 다음
왔다
구름을 건너 건너 왔다

잠의 지하도를 막 빠져나와
머리 위에
물보라를 뿜은 다음
잠깐
서 있었다

그 나무
언젠가
손끝에서 타던 별이었으나
목젖에서 끓던 맹수였으나
내 몸의 가뭄 끝에 날려 보낸 새였으나 - P9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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