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저께 보낸 메일 문학과지성 시인선 580
김광규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23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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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반에는 화자가 노인인 줄 몰랐다. 어찌나 담백한지 바싹 말라 이것이 시인가 일상의 기록을 행갈이만 한 것인가 헷갈릴 정도.

“아득한 전생의 어느 가을날
내 앞에 떨어진 나뭇잎들인가
돌아가자고 이제
그만 돌아가자고
귓전에 속삭이는 듯”
- 가랑잎 76쪽

이 정도로 70대 후반과 80대 초반의 노년을 담박하게 그려내는 듯싶었는데, 4부에 몰려 있다. 외로움과 죽음과 슬픔이 즐비하다.

“안국역에서 3호선 전철을 타고 떠나가는
늙은 친구들 배웅하고 돌아서니
갑자기 눈물이 핑 돌았다
그들을 다시 만나지 못할 것 같아
슬퍼진 것이 아니었다 내가
혹시 앞서가게 되더라도 제각기
살아남아 각종 세금과 건강보험료에 시달리며
지저분한 잔반殘飯을 치워야 할 그들이
문득 불쌍해져서 남몰래
홀리는 눈물이었다”
- 남몰래 흘리는 눈물 90쪽

그러나, 아마도 김광규는 ‘문이 없는 시간 속으로 사라져버’릴 그 순간까지 끝내 시를 쓸 것이다. 아래와 같은 사람이니까

바로 그런 사람


맞아
방금 떠올랐던 생각
귓전을 스쳐 간 소리
혀끝에 감돌던 한 마디
그것이 과연 무엇이던가
그래
그것이 맞아
틀림없어
참으로 기막히지 않은가
하지만 그것을 뭐라고 해야 할지
달리 바꾸어 말할 수도 없고
글로 옮겨 쓸 수도 없는
바로
그것을
어떻게 되살려낼까
궁리하다가 평생을 보낸 사람 - P32

기억은 언제나 혼자서 펴보는 앨범
홀가분하게 가을철 맞고 싶어
자디잔 걱정거리 씻어버리려 해도
마음은 뜻대로 비우기 힘든 그릇 - P18

가물거리는 그저께 기억
수첩을 꺼내 보지 않으면 누구를
만났는지 얼른 떠오르지 않네
손을 뻗치면 곧장 닿을 듯 가까운
어제의 하루 전날
안타깝게도 되돌릴 수 없네
그저께 보낸 메일 - P31

온 세상 모든 사물에 스며들어
혼자서 귀 기울이고 중얼거리며
그 속에 숨은 뜻 가까스로 불러내는
그런 친구가 곧 시인 아닌가 - P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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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alstaff 2023-02-24 06:0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늙은 남자 시인의 시편들은.... 나이 든 소프라노들 특유의 비브라토처럼 어떻게 생각하면 귀결점이 있는 거 같더라고요. 얘기하신 것처럼 담백하고, 생활 주변에 널린 것들에 애정을 갖고, 특별하지 않은 것들을 노래하고, 그리고 추억들. 시도 나이 들면 테스토스테론이 빠지는 모양입니다.

dalgial 2023-02-24 09:06   좋아요 1 | URL
네, 무뎌진다고 할까요 원만해진다고 할까요. 김광규 특유의 날카로움이 전혀 없더군요. 자연스러운 것이겠지요. 어째 사랑하던 시인들이 이제 다 상노인이네요. 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