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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두산 등척기 - 정민 교수가 풀어 읽은
안재홍 지음, 정민 풀어씀 / 해냄 / 2010년 10월
평점 :
품절
민세 안재홍 선생은 민족 운동가로, 언론인으로, 역사가로, 정치인으로 일제 강점기 전후 9차례에 걸쳐 7년 3개월의 옥고를 치르면서도 꺽이지 않는 그의 '민족지성'은 우리 현대사에 흔치 않은 민중지도자의 한분으로 남기에 부족함이 없다. 그런 분이 4차의 옥고를 치른 뒤에 조선일보 부사장 자격으로 조선 오천년 역사와 자긍심을 굳건히 간직하고 있는 백두산에 1930년 7월 23일 밤 11시에 경성역을 출발하여 8월7일 오후 5시 기차로 북청역을 떠나기까지 16일간에 씌어진 기행문을 조선일보에 연재되었고, 또한 1931년에 유성사서점에서 <백두산 등척기>로 간행되었던 책을 정민선생님의 한문투의 안재홍선생님의 글을 풀어쓴 것이다.
옛 사람들은 산에 들어가는 것을 입산이라 하였다는데 안재홍 선생님은 일제 강점기에 국내에서 독립운동을 하며 국내에서 민족을 일깨우는 일을 하던 와중에 일제의 민족혼 말살에 맞서 일어난 당시의 순례 열풍을 통하여 겨레의 성소(聖所)를 통하여 민족혼을 다시 일깨우며, 백두산정계비나 졸본등의 기록을 통해서도 역사학적으로나 지리학적으로도 유용한 가치가 있는 기행문이다. 그가 백두산을 오르면서 만나게 되는 민족들에 대한 여린 감수성들을 만나면서는 어느만큼 서민들의 애환을 아프게 가슴에 담고 있었는지를 간접적으로 느낄 수 있는 대목이 되기도 한다.
2천 2백여 미터의 고지대이지만 평평한 등성이로 관목조차 거의 없다. 풀과 이끼가 두터운 곳에 한 조각 정계비(定界碑)가 서 있다. <중략> 보기에는 대단치 않지만 이 한 조각 돌이 갖은 비바람, 219년의 슬픔과 근심, 부끄러움과 원한, 분노와 회한의 한복판에서 외로이 쇠망한 조선의 운명을 짊어지고 온 것임을 생각하면 실로 값싼 비분을 터뜨릴 겨를도 없다.
-10장 「정계비 곁 산해의 슬픔」중에서, 81페이지-
그는 이처럼 짚고 넘어가야 할 부분에 대해선 이렇게 거리낌 없이 표출해냈다. 그는 말한다. 불을 피워 장막을 치고 우마는 풀에 놓고 우러러 하늘을 살피던 이 세상의 주인인 그네들의 유유히 이 언덕을 내려온 지 몇천 년인가? 오늘날 이 강역을 돌아보건대 맑던 눈에 이슬이 엉기는 것을 뉘라서 말리겠는가. 오! 온 세상이 모두 자니 누가 큰 꿈을 꾸는가.
-8장 「무한히 비장한 고원의 밤」중에서 , 69페이지-
9차례나 옥고를 치르면서도 그의 민족계몽운동과 독립운동에는 변함이 없었다. 분단이 점차 심화되는 그 상황에서도 체제의 이질화를 바로잡자는데 누구나 동의햇지만 그 방안을 놓고 정치적 입장에 따라 서로 다른 주장을 폈던 때에도 편향성을 극복하고 대립을 넘어서는 노선을 찾기 위해 힘썼던 사람들 그들을 일컬어 '민족지성'이라고 부르는데 안재홍 선생이 그 대표적인 예라고 서울대 명예교수이며, 국문학자이신 조동일 교수님은 말한다.
옛 선비들이 산에 입산하여 세속과의 경계를 긋고 그 속에서 자연을 시로 노래하고, 인간사에 정화를 위해 산에 들어갔던것에 비해, 민세 안재홍선생님의 백두산 등척기는 일제강점기에 민족혼을 말살하기 위한 그들의 속내에 투쟁하여 오천년 민족혼이 깃든 백두산을 통하여 우리 민족에게 외치고자 했던 소리와 함께 이 책안에 담겨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