붉은 백합의 도시, 피렌체 여행자를 위한 인문학
김상근 지음, 하인후 옮김, 김도근 사진 / 시공사 / 2022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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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붉은 백합의 도시, 피렌체

 : 김상근

 : 시공사

 : 2022/08/06 - 2022/08/12


이탈리아 시리즈를 쓰고 계신 김상근 교수님의 세번째 책..

이번에는 피렌체다.

르네상스의 도시이고, 메디치가로 유명한 곳.

도시는 작지만 볼거리가 풍성하고, 미켈란젤로 언덕에서 바라보는 뷰가 멋있었던 곳.

다시 한번 가보고 싶은 도시가운데 하나..

김상근 교수님은 내가 알고 있는 이런 피렌체의 모습에 피렌체의 역사를 더해주었다.

메디치가가 권력을 잡기 이전의 피렌체의 역사를 상세하게 써내려갔다.

생각보다 심각하게 권력투쟁이 있었다는 걸 알았다.

평민과 귀족, 그리고 부르주아라고 이야기할 수 있는 세력까지...

다른 도시와 달리 왜 이렇게 권력투쟁이 강했을까? 압도적인 세력이 없기 때문일까?

주변의 도시국가의 힘을 빌려야 도시를 유지할 수 있을만큼 연약한 도시가 내부적인 권력투쟁은 어마어마하게 강하게 진행했다는게 아이러니...

권력을 잡고 나서는 다시 억압의 모습을 보이는 걸 봐서 권력의 속성이 억압이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든다.

다음에 피렌체를 방문하게 되면 르네상스 이전의 투쟁의 현장도 들려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p11 2011년, 삼성경제연구소가 매년 발표하는 SERI CEO 여름휴가 추천도서로 선정되어 순식간에 베스트셀러가 도었다. 책을 쓰고 돈을 벌 수 있다는 사실을 그때 처음 알게 되었는데, 아쉽게도 그런 일은 다시 일어나지 않았다.

p17 그가 우리에게 들려줄 피렌체 이야기는 피렌체 사람들의 일상이다. 한 조각 빵을 얻기 위해 부자들의 밥상 밑에 앉아 있었던 가난한 사람들의 이야기, 넘쳐나는 부를 주체하지 못했지만 어떻게든 세금을 적게 내려고 온갖 꼼수를 부렸던 귀족들의 이야기, 죽어도 귀족들의 지배를 받지 않겠다고 절규했던 평민들의 이야기, 질투와 배신으로 마음에 상처를 입은 사람들이 그 분노를 다른 사람들에게 쏟아내다가 결국 자신이 망가지는 이야기 등이 적나라하게 펼쳐질 것이다.

p41 베키오 다리 위에서 벌어진 이 암살사건은 장차 피렌체를 두 진영으로 분열시키는 계기가 되었다. 강남을 대표하던 교황파 부온델몬티 가문과 강북을 대표하던 황제파 우베르티 가문의 반목이 시작된 것이다.

p60 곧 보게 되는 것처럼, 이 행정장관직이 바로 귀족의 몰락을 초래한 원인이 되었다. 왜냐하면 평민들은 이런저럭 구실들로 귀족들을 행정장관직에서 배제했고, 결국 귀족들은 아무런 존중도 받지 못하고 파멸했기 때문이다.

p74 단테는 자신의 많은 책과 저술에서 아내 젬마의 이름을 한 번도 언급하지 않은 것으로 유명하다. 9살 때 만난 동갑내기 첫사랑 베아트리체는 자신을 천국으로 인도하는 천사로 묘사했지만, 불쌍한 아내의 이름은 단 한 번도 언급하지 않았다.

p96 두 사람의 예상치 못한 죽음에서 피렌체 시민들은 교훈을 얻었다. 도시의 분열, 귀족과 평민의 갈등이 결국에는 모두에게 손해를 입힌다는 것이다. 귀족들의 피렌체 입성을 막은 평민들이 속 좁은 판단으로 귀족들의 피렌체 입성을 막고 외국의 왕을 모셨는데, 그것이 그들을 커다란 고통으로 몰고갔다.

p120 이런 일들이 벌어지는 동안, 대기근이 피렌체를 덮쳤고, 귀족과 하층민의 불만은 함께 높아졌다. 왜냐하면 귀족들은 평민에게 밀려 위엄을 잃었고, 하층민들은 식량 부족으로 굶주림에 시달렸기 때문이다.

p133 성당 내부에는 천재들의 무덤이 즐비하다. 단테를 위시해 미켈란젤로, 마키아벨리, 갈릴레이, 건축가 레온 바티스타 알베르티, 레오나르도 브루니, 작곡가 조이카노 로시니 등의 영묘가 안치되어 있다. 이탈리아 영광의 성전으로 불리기도 한다.

p137 세계사적 맥락에서 볼 때 피렌체는 단순히 르네상스의 도시나 천재들의 도시가 아니라 근대적 계몽의 도시이며, 자유와 평등을 지향한 인류 최초의 도시였다.

p173 지배하려는 자들이 사라진 곳에서 피렌체 사람들은 자유를 누렸다. 그 자유의 열매가 르네상스다. 이 시기에 피렌체는 르네상스라는 아름다운 꽃의 만개를 목격하게 된다. 미술사가들은 1400년 로렌초 기베르티와 필리포 브루넬레스키가 성 세레자 요한 세례당 청동문 제작을 놓고 경쟁했던 때를 르네상스의 시작 지점으로 잡는다.

p174 그의 눈에 비친 피렌체는 지배하겠다는 욕망을 절대로 포기하지 않는 귀족들의 거만함, 금력과 권력의 경계선에서 계산기를 두드리기 바빴던 그란디들의 욕심, 지배하는 방법은 모르지만 어쨋든 지배받는 것을 죽도록 싫어했던 하층민들의 어리석음이 뒤섞이 곳이었다.

p205 도시 여러 곳에서 확인되는 메디치 가문의 예술 후원은 피렌체 시민들의 심리를 경계심에서 경외감으로 전환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엄청난 권력과 부를 가진 사람이 예술과 공공 건축물들을 위해 아낌없이 돈을 투자하면, 대중들은 일종의 부채 의식과 기대감을 갖게 된다.

p210 코시모의 탁월함은 관후함에서 출발했다. 모름지기 권력과 부를 가진 사람은 관후함을 잃지 말아야 한다. 부자의 인색함보다 졸렬한 것이 없다. 권력을 가진 자의 옹졸함보다 더 볼썽사나운 것은 없다.

p228 200년간 피렌체는 그야말로 격동의 정치 일정을 소화해냈다. 13세기 말 귀족의 통치가 자멸로 끝난 다음, 귀족과 평민, 평민과 평민, 평민과 하층민, 하층민과 하층민 그리고 다시 평민과 그란디가 충돌했던 피렌체는 그야말로 공화국의 실험 부대와도 같았다.

p235 정치적 계산에 능수능란하고 자인한 성품을 가진 아들 필리포 마리아 비스콘티는 1423년부터 피렌체를 포함한 이탈리아 중북부에 대한 공격을 개시했다. 이 전쟁을 롬바르디아 전쟁이라고 부른다. 필리포는 이탈리아반도 전체를 통일하기전, 자기 안마당부터 확실하게 장악하려고 했다.

p249 약 100여년 전 흑사병이 피렌체를 초토화했을 때, 보카치오는 산타 마리아 노벨라 성당에서 데카메론을 쓰기 시작했다. 그러나 코시모는 약 100년 후에 바로 그 성당에서 메디치 가문의 이야기를 본격적으로 시작하게 된다. 앞으로 그 가문에서 교황이 2명 탄생할 것이며, 프랑스 왕비가 2명 탄생할 것이고, 무엇보다 르네상스라는 유럽 역사의 전환점을 메디키 가문이 이끌 것이다.

p266 그러나 무엇보다 마키아벨리가 반복적으로 칭찬하고 있는 그의 덕목은 신중함과 관대함이었다. 그는 경제적으로 어려운 사람을 만나면 신분의 고하를 막론하고 경제적인 도움을 주었다.

p283 신 성구실의 하이라이트는 미켈란젤로가 건축한 메디치 영묘실과 그 안에 전시된 조각 작품들이다. 방문객들은 그 좁은 공간에서 예술이 영혼과 극적으로 소통하는 경험을 하게 된다. 이 작은 영혼의 공간과 조각을 처음 주문한 사람은 교황 레오 10세였다.

p302 피에로의 통찰력 덕분에 메디치 가문은 교황을 배출하고 또 왕족의 반열에 올라갈 수 있었던 것이다.

p323 전설적인 용병 대장이 등장하자 볼테라 시민들은 즉각 항복을 선언했다. 싱겁게 전쟁이 끝나고 말았다. 그러나 몬테펠트로가 이끌고 온 우르비노와 밀라노 연합 용병대들은 성문 앞에서 공격을 멈추지 않았다. 12시간이나 계속된 볼테라 침공으로 도시는 쑥대밭이 되었고, 수많은 볼테라 시민들이 죽임을 당했다.

p328 수많은 피렌체 예술가들의 작품들이 성당의 내부와 외부를 장식하고 있었지만, 현재는 대부분 복제품을 전시해놓았다. 진품은 성당 광장 뒤쪽에 있는 두오모 박물관에 소장되고 있다. 기베르티의 청동문 2개와 도나텔로의 조각 작품들 그리고 미켈란젤로의 피렌체 피에타가 전시되어 있는 곳이다.

p352 그를 놓아주기에 앞서 왕은 온갖 종류의 친절과 애정의 표시로 로렌체의 마음을 얻으려 애썼으며, 공동의 이익을 유지하기 위해 그와 영구적인 협정을 맺었다. 그 결과 로렌초는 몇 달 전 한 위대한 인물로서 피렌체를 떠났지만, 이제 자신의 목숨을 걸고 조국의 평화를 회복했으므로 훨씬 더 위대한 인물이 되어 피렌체로 돌아왔다.

p362 그는 옛 애인 루크레치아 도나티에게 사랑의 시를 바치기도 했지만, 마키아벨리의 점잖은 표현대로, “베누스의 일에 지나치게 빠져 있던” 바람둥이이기도 했다. 그는 관능적인 삶을 살면서, 동시에 진중한 삶을 살았다. 그래서 마키아벨리는 그를 조합이 거의 불가능한 전혀 다른 두 인간이라고 평한다.

p407 이 책의 들어가며에서 잠시 설명한 대로 마키아벨리는 이곳에서 피렌체의 젊은 지성인들과 정치인들을 가르치면서 로마사 논고와 전쟁의 기술과 같은 명저를 남겼다. 루첼라이 정원은 단순한 고전 강독 모임이 아니었다. 피렌체의 현재 모순을 타파하고 미래의 개혁을 추구하는 정치적인 모임으로 발전해갔다.

p416 싸움을 이어갔지만, 로마는 논쟁을 거쳐 모두가 합의할 수 있는 법을 만들었다. 피렌체는 한쪽의 압도적인 승리를 갈구했지만, 로마는 양보를 통해 양쪽의 승리를 도모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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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령왕, 신화에서 역사로
정재윤 지음 / 푸른역사 / 2021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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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무령왕, 신화에서 역사로

 :정재윤

 : 푸른역사

 : 2022/08/02 - 2022/08/13


몇 번 빌렸으나 시간이 안맞아 읽지 못했던 책을 이번 여름에 읽었다.

역시 여름은 독서의 계절이다. 

백제역사는 밝혀지지 않은게 너무 많다. 우리나라 백제 문화의 진수라고 할 수 있는 무령왕릉을 발굴했지만 정작 무령왕에 대해서 우리는 잘 모른다.

특히 개로왕 이후 무령왕때까지 백제는 매우 혼란스러운 시기를 거쳤다. 

무령왕은 전임 동성왕이 시해를 당한 상태에서 왕이 되었고, 혼란스러웠던 백제를 매우 잘 안정시켰다.

과연 영동대장군이라는 칭호를 받을만하다. 

이 책은 우리에게 잘 알려지지 않은 무령왕의 출생부터 죽음까지를 역사서와 유물, 그리고 상상력을 동원하여 채워나간다. 

사마(무령왕)가 일본에서 건너와 왕이 됐다는 의미를 깊이 생각해보지는 못했었다. 

많은 백제인이 일본으로 건너가 무리를 이루고 있었고 왕족까지 가서 그들을 관리했다는 주장은 충분히 검토해보고 연구해볼만한 내용으로 보인다. 

아직은 유물이나 자료가 부족하지만 계속해서 많은 연구가 이루어지면 백제에 대해서 더 많은 걸 알 수 있지 않을까 싶다.

세계문화유산으로 등록된 백제문화인데 정작 우리는 너무나 모르고 있다는게 부끄럽다.

우리 아이의 역사책에는 더 풍부한 백제사가 담기기를 소망해본다. 

재미있었다. 


p36 새 국립공주박물관은 걸어서 무령왕릉에 이를 수 있을 정도로 인접한 곳에 있어서 무령왕릉을 위한 전시관이자, 수장고로서의 역할을 하는 듯하다.

p57 묘지석을 통해 무령왕이 525년, 그 뒤를 이어 왕비가 529년에 왕릉에 안장되었음이 밝혀졌다. 즉 두 번에 걸쳐 유물이 부장된 것이다. 부장품의 절대 연대 확인은 유물 편년의 기준을 제시해주었다. 상대적인 편년차가 심한 고고학계에 기준점이 제시됨으로써 고고학 연구가 발전할 수 있는 계기가 된 것이다.

p74 백제 왕력 기사도 자주 등장하는데, 이는 시기를 파악하는 기준점으로서의 의미가 있다. 시대가 불분명한 여러 기사를 기술하면서 백제 왕력을 중심으로 배치하였기 때문이다.

p88 백제인들이 집중적으로 정착한 곳은 규슈일대와 가와치 지역이었다. 규슈 일대는 무령왕이 탄생하고 성장한 곳이며, 가와치 지역은 동성왕의 탄생과 성장지였다.

p135 사마는 백제와의 해상 교류를 매개한 유력 세력가인 외가에서자란 것으로 보인다. 확언할 수는 없지만, 최소한 사마는 규슈 일대에서 자랐고, 그가 백제계 도왜인들의 세력을 바탕으로 성장하였던 것은 분명하다

p146 장수왕의 전술이 돋보인다. 기다렸다는 듯이 군사를 넷으로 나누어 협공하면서, 마침 불어온 바람을 이용하여 불을 질러 성안을 불바다로 만들었다. 이에 민심이 흉흉해지고, 탈출하려는 자도 속출하는 등 초반에 기선을 제압한 것이다.

p170 웅진 천도 직후 정국은 한성 시기처럼 해씨오 ㅏ진씨의 대결 양상으로 치닫고, 왕은 무력한 존재로 전락했다.

p197 실제 동성왕이 정치를 하면서 사람을 믿지 못하고, 중용된 인물도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나면 지방으로 내친 것이 이를 분명하게 보여준다. 동성왕이 무도하고 포악했다는 평도 그의 정치 운영 방식을 엿볼 수 있는 기록이다

p210 이처럼 동성왕 집권 후반기에 추진된, 사비에 대한 적극적인 정책에 대해 한성에 기반을 가졌던 진씨와 해씨 등 남래귀족들은 반발했을 것이며, 또한 웅진 부근 지역에 세력 기반을 가진 백가 등도 불만을 가졌을 것이다.

p229 정변의 원인으로 백제신찬은 동성왕의 무도와 백성들에 대한 포학을 들고 있다. 이에 반해 삼국사기에서는 백가의 개인적인 불만으로 서술하고 있어 그 내용이 다르게 나타난다

p236 이러한 상황을 이해하면, 백가는 정변에 참여했고 실질적으로 동성왕을 시해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지만, 정변을 주도한 인물이 아니었다는 점이 분명해진다. 오히려 정변 주도 세력에 의해 밀려났으며, 억울하게도 동성왕 시해의 주범으로 몰린 것이다.

p249 주서에 보이는 관리의 복색에 관한 규정이 고이왕 때 기사로 나오지만, 학계에서는 후대에 완비된 규정이 고이왕 때로 소급, 정리된 것으로 보고 있다.

p254 무령왕 대 22담로의 설치와 파견을 생각하면 번쩍 눈이 뜨일 것이다. 22담로에 자제와 종족을 파견한 것은 전국적인 지방 통치의 실현이며, 그 결과 토착 세력의 경제적 지배력이 약화하는 현상이 생겼다고 볼 수 있는 것이다

p291 양직공에 보이는 주변의 소국은 실제 상황이 아닌 백제가 양나라에 과시하기 위해 열거한 나라임을 알 수 있다

p293 양직공도에 보이는 방소국은 대국이 된 백제가 거느린 부용국으로 설명되었다. 한반도에서 고구려에 필적할 만한 대국이 되었으며, 그에 걸맞은 대우를 해달라는 백제의 요청에 양나라는 빠륵 화답했다. 양나라 황제가 동쪽을 편안하게 했다는 영동대장군이라는 작을 내려준 것이다.

p298 무령왕이 공들인 갱위강국 선언의 이면엔 주변 나라와의 관계가 뒤틀어진 양면성을 엿볼 수 있다. 이를 고뇌한 무령왕은 죽음을 앞두고 마지막까지 한성으로 순무하여 고구려의 침입에 대비하고자 했다. 얼마나 무령왕이 노심초사하였는가를 보여주는 실례이다

p299 무령왕의 묘지석 첫 구절이 바로 영동대장군 백제 사마왕이라는 점은 영동대장군이라는 작호에 대한 그의 애착을 보여주는 것이다

p305 내용을 구체적으로 살펴보면 검소하되 누추하지 않고 화려하되 사치스럽지 않다는 말은 서로 대구가 된다. 검소를 강조하였으나 누추하지는 않아야 된다는 점을 이야기하고 있다. 이는 백제 문화가 소박함을 지향했음을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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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럽 도시 기행 2 - 빈, 부다페스트, 프라하, 드레스덴 편 유럽 도시 기행 2
유시민 지음 / 생각의길 / 2022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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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유럽 도시 기행2

 :유시민

 : 생각의 길

 : 2022/07/31 - 2022/08/07


유시민 아저씨의 유럽 도시 기행기..

정치하느라 고생 많으셨는데 이제 이렇게 편안한 책을 쓰시면서 사는 모습을 보니 참 좋다.

누군가는 더 정치로 봉사해야 한다고 하지만 난 반대다.

문재인 대통령 정치하는 것도 반대였다.

그만큼 수고했으면 이제는 자신의 삶을 즐겨야 한다. 

이번에 방문한 도시는 빈, 부다페스트, 프라하, 드레스덴이다.

드레스덴을 빼고는 내가 갔었던 곳이다. 특히 빈과 프라하는 여러번 방문했었고, 다시 가고 싶고, 살고 싶은 도시다.

돈만 있으면 이런 도시에서 어슬렁거리며 살고 싶다.

겹치는 동선도 있고, 나에겐 생소한 곳도 있다. 

다음에 가게 된다면 방문해야지 하고 스크랩을 해놓은 곳들도 있다.

같은 곳을 방문했는데 이렇게 다르게 보는구나 하는 생각도 든다.

역시 아는 만큼 보인다...

여행가고 싶다. 


p14 텍스트를 보지 않은 사람은 콘텍스트의 가치를 알기 어렵다

p33 2021년 기준 1인당 국민소득 5만 달러를 넘은 오스트리아는 제약,엔진,석유화학을 비롯한 제조업이 GDP의 30%를 생산하는 강소국이며, 금융, 유통, 의료, 복지 등 서비스 산업 선진국이다

p35 알프스의 겨울 추위를 견디지 못해 철수한 적군의 요새에서 청동 대포를 3백 개 넘게 노획한 빈 사람들은 그것을 녹여 18톤짜리 종을 만들었다. 그게 빈의 대표 볼거리 가운데 하나인 폼메린이다

p48 성벽을 해체한 이후 50년 동안 빈의 인구는 네 배가 넘는 200만 명으로 급증했다. 소수의 왕족과 귀족, 신흥 자본가들과 그들을 위해 일하는 사람들이 살았던 중세도시는 없어졌다

p51 제1차 세계대전 패전과 혁명, 제정 철폐와 공화정 수립, 독일 합병과 제2차 세계대전 패전 등 정치적 격변이 벌어질 때마다 심한 우여곡절을 겪은 끝에 국립시설이 된 예술사 박물관은 호프부르크 구왕궁의 보물 전시실과 노이에부르크 신왕궁의 에페소스 박물관 등과 묶어 운영한다

p57 예술사 박물관이 더러 오아시스를 만날 수 있는 광할한 사막이었다면 제체시온은 제 성정대로 자란 오솔길 같았다. 예술사 박물관에는 견줄 수 없을 정도로 작은 공간이었지만, 어느 작품도 다른 것과 같지 않아서 그런지 내가 느낀 감정은 훨씬 더 풍성했다. 예술사 박물관에서 수백 년 동안 빈을 지배했던 낡은 문화를 보았고, 제체시온에서는 19세기 후반 등장한 새로운 예술과 사상을 만났다

p65 물론 빈 시민들만 시씨를 사랑하는 건 아니다. 오스트리아 국민, 심지어 이웃 헝가리 사람들과 발칸 지역 사람들도 시씨를 사랑한다. 시씨는 프란츠 요제프 황제의 부인 엘리자베트 아말이에 오이게니 또는 엘리자베트 폰 비텔스바흐의 애칭이다

p82 확실히 축제라는 건 어디서나 모여서 먹고 마시고 떠들고 춤추는 행사임이 분명하다. 모듬 생선구이, 감자볶음, 연어 철판구이와 치킨을 안주 삼아 맥주와 적포도주를 마시며 마지막 밤을 보냈다

p89 그 조형물이 공화국 수립을 기념하는 데 적합한지를 두고 격렬한 찬반논쟁이 벌어졌다는 사실과 찬반논리의 요지를 알리는 텍스트였다. 더 특별한 것은 그 안내문을 만든 것이 시의회의 결정에 따른 조처임을 알리는 마지막 문장이었다. 빈 시의회는 다수파의 지배를 승인하면서도 그런 방식으로 소수파의 주장을 존중한 것이다. 이런 것을 가리켜 성숙한 민주주의라고 하던가? 부러우면 지는 거라지만, 그래도 부러운 건 어쩔 수 없었다

p92 훈데르트바서는 자연의 곡선과 자연의 색을 존중했고, 흙, 숯, 돌, 벽돌과 같은 자연의 재료를 사용해 예술적 감정을 표현했다. 인간이 만든 직선의 경계를 버리고 자연의 곡선에 녹아들도록 집을 지었으며 지붕에 숲을 만들고 발코니에 나무가 자라게 했다

p104 머저르 민족주의와 기독교 문화를 상징하며 예나 지금이나 부타페스트에서 가장 높은 건물이다

p108 지하철 M1은 대중교통 수단이라기보다는 문화유산 또는 관광상품이었다. 언드라시 거리는 지금도 교통체증이 없는데 그 옛날에 왜 굳이 지하철을 만들었는지 모를 일이다. 하지만 노선길이가 4킬로미터 남짓밖에 되지 않는 M1은 요즘 보기 드문 저심도 지하철이라 타고 내리는 재미가 있었다

p117 동유럽에서 독일 번호판을 단 자동차는 절도단의 표적이라는 말을 들었지만 그렇게 낡아빠진 차까지 가져갈 줄은 몰랐다. 찻값은 나중 보험사에서 받았지만 빈의 제체시온에서 산 클림트 그림 포스터, 치킨전문점 비너발트 본점에서 어린이 손님 선물로 준 헨젤과 그레텔의 과자 오두막, 부다페스트 리스트 기념관에서 구입한 클래식 음악 CD, 여행 내내 찍었던 사진 필름은 되잦을 길이 없었다

p120 리스트는 헝가리에서 태어났지만 헝가리 사람이라 하기 어려웠고 음악도 헝가리 음악이 아니었다. 빈, 파리, 런던, 로마 등 유럽 전역의 여러 도시에 장기 거주하면서 다양한 장르의 음악을 섭렵하고 자신만의 음악 세계를 구축한 유럽인이었다

p122 자기네가 당했던 부당한 억압의 역사는 분명히 드러내면서도 이중제국 시절 크로아티아를 비롯한 발칸 민족들의 독립투쟁을 오스트리아와 손잡고 짓밟은 일이나 영토를 회복하려는 욕심에 나치 독일과 손잡았던 사실은 입에 올리지 않는다. 개인이든, 집단이든, 과거사를 일관성있는 태도로 소화해 내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p130 합스부르크제국의 수도였던 빈과 헝가리왕국의 수도 부다페스트가 그렇게 다를 줄은 몰랐다. 빈이 정장을 입고 반듯하게 걷는 신사라면 부다페스트는 청바지에 티셔츠를 걸치고 아무데나 앉아서 노는 청년 같았다

p134 언드라시는 10년 넘게 총리직을 수행한 후 일선에서 물러나 의원으로 활동하다가 1890년 세상을 떠났고 두 아들이 뒤를 이어 정치인이 되었다. 그는 유럽의 정치정세에 큰 영향력을 행사한 최초의 헝가리 사람이었고 머저르공화국의 기초를 만든 정치인이었다. 미학적으로는 칭찬하기 어려울 정도로 큰 언드라시 기마상은 그가 헝가리 국민의 마음에 심어준 민족 자부심의 크기를 반영한 것이다

p139 1989년 6월 부다페스트에서 치른 너지 총리의 뒤늦은 장례식에는 수만 명의 시민이 참석해 애도했다. 햇빛을 받아 하얗게 빛나는 국회의사당 마당에서 아무 걱정 없는 얼굴로 도나우를 구경하는 관광객들을 보면서 김춘수 선생의 시를 떠올렸다. 내가 태어나기도 전에 벌어졌던 그 정치적 참극을 나는 그 시로 배웠다

p145 부다페스트에는 바실리카보다 높은 건물이 없어서 도시 전체를 볼 수 있는 데가 없다. 부다페스트 전체를 조망하고 싶은 사람은 반드시 치터델러에 가야 한다

p158 궁이라고 하고 성이라고도 하지만 괴델레는 궁도 성도 아니었다. 황후가 즐겨 찾은 시골 별장이라고 하는 게 적당할 법했다. 집도 가구도 정원도 호프부르크나 쇤부른 궁전에는 비할 수 조차 없을 정로도 작고 소박했다

p160 그 도시는 스스로를 믿으며 시련을 이겨내고 가고자 하는 곳으로 꿋꿋하게 나아가는 사람 같았다. 1천 년 전 말을 타고 거기 왔던 머저르의 후예들이 지난 150여 년 동안 무엇을 성취했는지 보여주었다. 나는 부다페스트에서 대한민국의 현대사를 보면서 느끼는 것과 비슷한 감정을 맛보았다. 부다페스트는 슬프면서 명랑한 도시였다. 별로 가진 게 없는데도 대단한 자신감을 내뿜었다. 오늘의 만족보다 내일에 대한 기대가 큰 도시였다. 나는 그런 사람 그런 도시가 좋다.

p172 브라헤는 망원경이 없던 시대에 천문학자로 활동하면서 믿기 어려울 정도로 정교한 관측 자료를 작성했다. 브라헤의 조수였던 요하네스 케플러는 그 자료를 활용해 태양계 행성의 타원형 구조, 공전속도, 공전주기에 관한 이론을 정립함으로써 보편적 물리법칙을 세운 뉴턴의 시대를 예비했다. 지구가 우주의 중심이라고 믿었던 카톨릭의 세계관을 무너뜨린 외국인 과학자를 왕실 성당에 안장했으니, 프라하 사람들은 확실히 남다른 데가 있었다고 해야 마땅할 것이다

p176 후스의 동상은 보헤미아 민족주의와 더 나은 세상에 대한 민중의 열망을 담고 있다. 그는 스스로 옳다고 믿는 방식으로 살았고 죽음 앞에서도 신념을 버리지 않았다. 그럴 의도가 있었는지는 확실하지 않지만, 그의 삶과 죽음은 보헤미아와 유럽의 역사를 바꾸었다

p182 19세기 후반 보헤미안의 뜻이 달라졌다. 유럽 사회의 주류로 지위를 굳힌 부르주아 계급의 틀에 박힌 도덕 규범이나 행동 양식을 거부하고 스스로 선택한 가치관에 따라 자유분방하게 활동하는 지식인과 에술가를 가리키는 말이 되었다

p186 13세기에 초기 고딕 양식으로 지은 이 시너고그는 유럽에 남아 있는 유대 예배당 중에서 제일 오래되었다. 여러 차례의 화재와 박해, 추방, 재개발, 나치 점령 등의 시련을 견디고 살아남았다. 박물관으로 바뀐 다른 예배당과 달리 지금도 프라하의 유대인들이 여기서 예배를 본다

p193 카렐교는 다리가 아니라 광장같았다

p195 굴라쉬는 두껍지 않게 토막 친 쇠고기를 졸인 음식으로 으깬 감자와 함께 먹는데 매운 파프리카를 넣고 국물을 넉넉하게 만드는 부다페스트의 굴라슈와는 이름만 같을 뿐 완전 다른 음식이었다

p199 바츨라프의 기마상을 광장에 세운 것은 그가 대단한 업적을 남긴 위대한 군주여서가 아니라 고대 신화에 나올법한 비극의 주인공이었기 때문이다.

p202 카렐 4세가 실제적 국가 창설자라면 성 바츨라프는 정신적 국가 창설자이다. 생일이 확실치 않아서 사망한 날을 정신적인 국경일로 삼았다. 통치자로서 거론할 만한 업적오 없고 재위 기간도 짧았지만 도덕적 정치적 비난을 받을 일을 하지 않았다는 게 중요하다. 게다가 보헤미아의 자존을 지키려고 외세에 대항하다가 사악한 동생의 손에 목숨을 빼앗겼다

p204 두브체크와 개혁파 지도자들이 모스크바로 잡혀가고 체코슬로바키아공산당이 굴복했는데도 끝까지 무기를 들고 싸운 시민 백여 명이 목숨을 잃었다. 밖에서 응원한 것은 동독 시민들뿐이었다. 소련의 침략을 규탄하고 체코슬로바키아 시민들을 응원하는 시위를 하다가 1천 명이 넘게 체포 구금되었다

p231 프라하의 마지막 일정은 블타바 재즈보트였다. 저녁 여덟 시 반, 아직 어둡지 않은 시각에 시내 선착장에서 출발한 재즈보트는 우리나라의 관광버스 비슷했다. 아래층 선실에서 밴드가 두 시간 반 내내 공연을 했다

p241 누구나 알지만 아무도 내놓고 말하지 않는 사건이야. 우린 그보다 더 못된 짓을 훨씬 많이 했거든. 홀로코스트만 있었던 게 아니야. 코번트리 같은 곳도 한두 군데가 아니었어. 혹시라도 그 사건 가지고 막 떠드는 사람 만나면 조심해야 해. 올드나치거나 네오나치일지 모르니까

p256 2005년 2월 13일 성모교회느 ㄴ공식 부활했다. 안에서는 60년 전 그날의 폭격 희생자 추모 행사를 열었고 광장에는 6만여 명의 시민이 모였다. 전쟁의 참상을 증언하던 폐허가 시민의 자유와 독일의 통일을 상징하는 교회로 다시 태어난 것이다

p261 문화궁전의 외벽에는 사회주의체제의 유산임을 바로 알아볼 수 있는 초대형 벽화가 있었다. 1969년 동독의 저명한 예술가들과 드레스덴 미술대학 학생들이 그린 벽화의 제목은 <1849-1969: 드레스덴혁명 세력의 진보와 사회주의를 향한 120년의 투쟁>인데, 노동계급의 해방은 노동계급 스스로만 할 수 있다든가 우리가 역사의 승자라는 등 마르크스주의자들이 암송하던 문장을 적어두었다

p271 1871년 통일할 무렵부터 나치가 집권한 시기까지 독일은 과학 분야의 세계 최강국이었다. 나치가 사상과 학문 연구의 자유를 극단적으로 억압하고 유대인을 학살함으로서 걸출한 과학자들을 미국으로 망명하게 하지 않앗다면 지금도 그럴지 모른다

p279 드레스덴은 공정왕 아우구스트 시대에 바로크 도시 또는 엘베의 피렌체라는 별칭을 얻었다. 그때는 엘베 양안에 화려한 바로크 스타일 집이 빼곡했다. 하지만 구시가지의 역사적 건축물과 볼거리를 만든 지배자는 다른 아우구스트 1세였다. 프리드리히 아우구스트 데어 슈타르케, 원조 아우구스트 1세다

p291 도대체 무슨 축제인지 알 수가 없었다. 모두가 남이 뭐라 하든 제 하고 싶은 것을 하는 듯했다. 여긴 독일인데 이럴 수가, 독일 사람들이 질서와 규칙이라고는 그림자도 비치지 않는 행동을 하다니! 놀라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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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상이 고고학, 나 혼자 가야 여행 일상이 고고학 시리즈 3
황윤 지음 / 책읽는고양이 / 2021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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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일상이 고고학, 나 혼자 가야여행

 : 황헌

 : 책읽는 고양이

 : 2022/08/01 - 2022/08/05


가야관련 역사서는 처음 읽어본 것 같다.

역사책에서는 삼국시대에 대해서 많이 배우지만 사실 삼국시대에 대해서 우리는 아는게 거의 없다. 

역사서 자체가 전해오는 게 적고, 유물이나 유적도 제대로 발굴된 것이 없다보니 해석도 제각각이다.

그러다보니 국뽕에 취한 내용부터 시작해서 일제강점기때 내려온 해석까지 천차만별이다.

그중에서도 가야는 더더욱 모른다.

기껏해야 김수로왕 이야기, 우륵의 가야금 이야기, 금관가야와 대가야의 멸망이야기, 김유신 이야기 정도가 내가 아는 가야이야기의 전부다.

이 책은 가야국 초보인 나에게 가야국의 고분군과 유적에 대해서 잘 알려주고 있다.

가야의 역사에 웬 고구려.. 이렇게 생각했었는데 왜 광개토대왕의 이야기가 나와야 하는지, 가야국의 유적유물을 이야기하면서 왜 경주 유적들을 봐야 하는지도 설명해준다. 

삼한의 한 축을 담당했던 가야에 대해서 너무 몰랐다는 게 미안할 정도다.

우리나라 역사에 더 관심을 가져야겠다.


p77 어쨋든 이처럼 목곽묘가 주로 만들어지는 2세기 후반~4세기까지 한반도 남부에서 최고의 문화를 자랑하는 곳은 김해 지역이었다. 특히 3~4세기에 최고의 문화를 향유한 집단은 대성동 고분의 주인들이다.

p92 삼국지의 기록에 따르더라도 적어도 3세기 전반에 김해가 일본과 연결고리에 있었던 것은 분명해 보인다. 그리고 그 연결고리는 중국, 일본 세력도 함께 사용하는 해로였기에 더욱 다양한 교류가 가능했던 것이다.

p115 이처럼 항구 도시에 도사리고 있는 여러 위험을 방어하기 위해서는 군대가 조직될 수밖에 없었다. 금관가야는 이를 위해 이른 시점부터 철제 무기와 말 등 상당한 무력 기반을 갖추고 있었던 것이다.

p123 4세기 시점을 보면 무장 기반은 금관가야에 비해 100년 정도 뒤지고, 국가 시스템 역시 정치적 권력자가 아니라 제사장 권위의 지배자가 더 중요시되던 곳이 일본이었음을 알 수 있다.

p143 391년 왜가 백제, 가야, 신라를 함락하고 신민으로 삼았다는 내용은 앞서 이야기했듯 과장된 이야기였다. 당시 일본은 오히려 백제, 가야로부터 고급문화를 받기 위해 줄을 서는 모습이었고, 신라 정도만 공격 대상으로 싸우고 있었다.

p199 삼국사기에 따르면 미추왕이 김 씨로 최초 신라 왕이 된 인물이기에 그만큼 시조로서 그의 무덤 역시 중요한 공간으로 인식하고 있기 때문.

p203 이미 광개토대왕릉비를 보아서 알겠지만 삼국 시대 역사는 문장 그대로 읽고 끝내기보다 여러 부분을 세세히 검증 확인하면서 봐야 할 과대 포장과 재해석 부분이 많다.

p210 신라는 새로운 왕비 가문과 결합할 때 족보를 재구성하든지 신화를 새로 만드는 작업을 했다. 현대인의 눈으로 보면 이해가 안 될 수 있으나 당시 시대에는 지배자의 위대한 권위를 상징하기 위해 반드시 필요했던 것이 다름 아닌 신화 작업이었기 때문이다.

p228 아랍의 지리학자 알 이드리시가 그동안의 여러 정보를 취합하여 1154년에 펴낸 천애횡단 갈망자의 산책이라는 지리서에는 신라의 지도와 함께 “신라를 방문한 여행자는 나올 생각을 하지 않는다. 금이 너무 흔하다. 심지어 개의 쇠사슬이나 원숭이의 목테도 금으로 만든다”라 기록하고 있다.

p234 신라 국왕 김진흥을 사지절 동이교위 낙랑군공 신라 왕으로 삼았다라는 기록이 남는다. 이렇게 김진흥이라는 이름으로 등장했으니 이것이 다름 아닌 객관적으로 교차 검증이 가능한 한국에서 김씨 성을 활용한 첫 기록인 것이다.

p246 6세기 중반 경주 진골들이 거칠부가 쓴 국사라는 책을 통해 계보를 정리했듯이, 6세기 후반 금관가야인들도 신라에 비록 흡수되었으나 개황력을 통해 자신의 계보를 정리하여 당대 혈족 중심의 흐름 변화를 함께 했음을 의미한다.

p283 이처럼 왕가의 족보를 알리는 것은 고구려의 광개토대왕릉비 때도 그렇지만 왕이 중심되는 시대에는 아주 중요한 문화였던 것은 분명해 보인다.

p287 신라에 존재했던 설화를 거의 똑같은 구조로 복사하여 왕건의 조상에 입혔음을 알 수 있다. 이런 방식으로 신라 말 지방 호족들은 자신의 선조를 부각시키는 이야기를 만들 때 종종 신라에서 유행하는 이야기를 가져온 것이다.

p292 고대부터 지금까지 남아 전해지는 난생 설화를 비롯한 수많은 이야기는 각각의 시대와 지역에 따라 꾸준히 변화하며 살아남은 흔적일 뿐이며, 이에 현재 남은 표현을 바탕으로 과거의 의미도 마찬가지였을 것이라 예단하는 것은 무리가 있다는 점

p296 사실 수로부인에 나오는 용은 용왕이고 거북이느 ㄴ육지와 바다를 연결하는 매개체이며 수로부인은 토끼였던 것이다. 즉 별주부전의 이야기 구조를 바탕으로 실제 역사인물을 넣어 새롭게 재조합한 전설이니 수로부인 이야기는 다름 아닌 8세기 버전의 별주부전이었던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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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상이 고고학, 나 혼자 백제 여행 - 황윤 역사 여행 에세이, 개정증보판 일상이 고고학 시리즈 1
황윤 지음 / 책읽는고양이 / 2020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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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일상이 고고학, 나 혼자 백제여행

 : 황헌

 : 책읽는 고양이

 : 2022/07/18 - 2022/07/31


재미있는 답사책이 나와서 요즘 읽고 있다.

일상이 고고학 시리즈... 이번에는 백제다. 

백제라고 하면 공주와 부여만 생각하는데 사실 한성백제 시절이 제일 길다.

온조왕부터 시작해서 개로왕까지 있었으니 백제시대의 대부분은 한성시절이다.

그렇지만 한성백제는 유물이 그리 많이 남아있지 않다.

70년대 강남 개발과 함께 대부분 아파트 밑에 있기 때문이다.

그나마 몽촌토성 등이 남아 있어 그 흔적을 추정할 수 있다.

백제여행이다 보니 몽촌토성, 풍납토성을 비롯하여 서울에 있는 고분군등을 먼저 답사한다.

이후 공주를 방문하고, 부여를 방문하고, 이후에 익산도 방문한다.

아무래도 익산은 무왕의 흔적이 있기 때문이리라. 더구나 미륵사지 석탑이라는 멋드러진 탑도 있으니 백제여행이면 빼놓을 수 없는 곳이다.

대중교통을 이용하여 다니는 것도 이 책의 특이한 점이다. 대중교통을 이용하다 보니 백제답사에서 불편한 교통수단에 대한 투정도 책에서 튀어나온다.

사진이 좀 부족한 것이 흠이지만 나름 재미있는 답사책이다.

아직 백제유물을 보러 여행을 가본 적이 없다보니 더 흥미가 갔다.

재미있다. 


p5 그 실체적 모습을 반드시 전문가라야만 그려낼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백제 수도가 있었던 곳을 따라 서울에 위치한 한성백제박물관, 공주에 위치한 국립공주박물관, 부여에 위치한 국립부여박물관, 익산에 위치한 국립익산박물관, 그리고 각 지역에 산재된 유적지를 쭉 방문하다보면 누구나 쉽게 백제를 읽어낼 수 있기 때문이다

p9 313년, 고구려 미천왕이 드디어 낙랑군을 한반도 밖으로 쫓아내면서 그 명성은 사라진다. 그런데 때마침 한강 이남의 백제가 낙랑토성 규모 이상의 거대한 성을 만들었으니, 이는 동시대 삼국 수도인 고구려 국내성, 신라 월성과 비교해도 훨씬 더 큰 규모였다

p12 게이타이 덴노 이전까지는 실존 인물과 가공 인물이 섞여 있기 때문에 정말 조심스럽게 일본서기를 살펴볼 수밖에 없는 것이다

p15 백제 왕이 낙랑 태수가 되었으니 낙랑과 대방의 지배권을 백제가 가져왔음을 공식적으로 알린 것이다. 또한 이 일은 나름 큰 의미가 있으니 이 뒤로는 중국의 군현이 아닌 한반도 국가가 직접 중국, 한반도, 일본 간의 무역을 통제하기 시작했다. 물론 이후로도 통일신라, 고려, 조선까지 이런 방침은 쭉 이어졌다

p21 고구려는 처음 시작할 때 졸본부여라 칭했고 백제는 나중에 남부여라 자신을 칭했으니, 이처럼 부여를 뿌리로 둔 두 국가가 한반도를 대표하는 국가로 성장했음을 알 수 있다

p22 청자는 기본적으로 차를 마시기 위한 그릇으로 개발된 것으로 완벽하게 청자의 미감을 즐기려면 당연히 차를 마시는 단계까지 가야 한다. 눈으로 보고 손으로 만지고 입으로 먹어봐야 완성되는 감각이다. 한때 옥으로 차를 마시던 중국인들이 옥과 비슷한 푸른색을 지닌 그릇에 집착한 결과가 바로 청자이기 때문이다

p29 흥미로운 점은 고분마다 1호부터 10호까지 숫자가 매겨져 있는데, 입구 왼쪽으로 4기는 각기 1호, 2호, 3호, 6호이고 오른쪽 4기는 각기 7호, 8호, 9호, 10호이다. 즉 방이동 고분 안에는 4,5호가 존재하지 않는 것인데, 본래 있었던 4, 5호 고분 위치에는 현재 빌라가 들어서 있다. 흔적도 없이 사라진 것이다.

p31 목표한 대로 장수왕은 개로왕을 비롯하여 백제 왕족 대부분을 죽이고, 남녀 8000명을 잡아 포로로 삼아서 고구려로 돌아간다. 8000명의 상당수가 백제 고위층이라 볼 때 백제는 지배층이 완전히 무너지는 상황을 맞이한 것이다. 충격적인 결말이었다

p33 그리고 1400여 년이 지나 일제강점기인 1917년, 일본은 이곳을 세밀히 조사하여 고분 분포도를 도면으로 남겼다. 그 결과 당시만 해도 총 290기의 무덤이 자리잡고 있었으니 왕의 능과 그 외 왕족 및 귀족의 무덤 등이 위계에 따라 구분된 채 배치된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현재는 불과 8기만 남긴 채 모두 사라지고 말았다

p43 이곳에는 고분 내부를 비어 있는 상태로 보여주는 곳 외에도 백제 시대 닫혔던 무령왕릉 문을 처음으로 열었을 때 내부에 유물이 어떻게 자리잡고 있었는지도 실제 크기 형태로 모형을 만들어 전시해두고 있다

p52 2018년 1월, 당간지주에서 불과 150m 떨어진 곳에 신식 한옥을 만들려고 땅을 팠는데, 이곳에서 대통이라 새겨져 있는 기와 등 2만 여 유물이 쏟아져나온 것이다. 뿐만 아니라 당시 목탑 내 중심 기둥을 가리기 위해 장식되었던 나한상 조각의 일부가 출토되기도 하였으니, 즉 과거에 이곳에는 목탑이 존재했을 가능성도 크다 하겠다. 더해서 일부 기와에는 붉은 색의 단청 흔적이 발견되기도 하였다.

p55 현재 공산성은 대부분이 돌로 만들어진 성이지만, 백제 시대에는 서울의 풍납토성처럼 토성이었다. 조선 시대에 돌로 성을 개축하면서 현재 모습으로 바뀌었다고 한다

p60 전장을 책임지는 태자를 지원하기 위해 성왕이 태자가 있는 곳으로 직접 이동하다가 그만 매복된 신라군에게 공격당하면서 사로잡혀 목이 베이고 만다. 성왕은 이렇게 위대한 백제의 꿈을 마저 완성시키지 못하고 서거하고 말았다.

p66 정림사지는 유명한 곳이기는 하나 여전히 비밀이 많은 백제 옛 사찰 터로 언제 누구에 의해 세워졌는지 전혀 기록이 없다. 다만 부여의 딱 중심부에 위치하고 있는데다가, 국보 9호 정림사지 5층 석탑이 있어 백제 시대에 중요한 절로 자리매김했던 것은 분명해 보인다.

p70 평양에 낙랑이 있던 시절부터 낙랑-가야-일본으로 연결된 루트가 이어진 것이다. 그래서 일본서기를 보면 유독 가야와의 관계에 집착하는 일본을 만날 수 있다. 무엇보다 철을 생산하지 못하던 일본에게 가야는 중요한 철 공급처이기도 했다.

p74 부여로 수도를 옮긴 뒤로부터의 왕들이 묻힌 곳인데, 유물은 이미 도굴된 상황이라 거의 남은 것은 없지만 고분군과 부여 외곽 성벽이었던 나성, 그리고 백제금동대향로가 발견되었던 능산리 절터가 함께 자리잡은 장소다

p77 김제평야 하니까 330년 백제가 만들었다는 벽골제가 생각나는 걸. 기로강 한국에서 가장 오래된 저수지와 제방으로 그 위치가 현재의 김제평야이다. 지금도 벽골제는 유적으로 남아 있으며 그 옆에는 벽골제민속유물전시관이라 하여 박물과도 있으니 혹시 관심 있는 분은 가보도록 하자

p82 석탑의 조상 중 조상이 있었으니 그것이 바로 미륵사지 석탑이다. 미륵사지 석탑 이후 돌로 탑을 만드는 것이 하나의 문화가 되었기 때문이다.

p85 정리하면 1. 무왕은 익산으로 천도하여 국가를 운영했고 2. 639년 제석사라는 절에 번개가 쳐서 화재로 타서 사라졌으며 3. 초석 안에 보관해두었던 사리도 사라져 있었다. 4. 이에 왕이 승려를 불러 참회하고 다시 사리병을 열어보니 사리 6개가 나타났고, 5. 절을 지어 이를 봉안했다라는 내용이다

p87 여러 자료가 더 쌓이면서 최근에는 백제 탑으로 왕궁리 석탑을 보는 이가 크게 늘어났다. 물론 통일신라~고려 초 주장도 약해졌지만 여전하기는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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