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떤 죽음이 삶에게 말했다 - 생의 남은 시간이 우리에게 들려주는 것
김범석 지음 / 흐름출판 / 2021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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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어떤 죽음이 삶에게 말했다

 : 김범석

 : 흐름출판

 : 2021/06/07 - 2021/06/17


내가 어렸을 때 우리 엄마는 애 실력은 생각도 하지 않고 나를 의사로 만들려고 했다. 

의대를 가라는 거다. 

의사가 되면 평생 환자만 보며 살아야한다. 이 생각을 하니 너무 끔찍했다.

수학을 좋아했지만 문과를 가게 된 이유중의 하나였다.

이 책의 저자는 의사선생님이다. 더군다나 종양내과 의사 선생님이다. 

맡는 환자들은 주로 암환자, 특히 말기 암환자가 많다. 

말기 암환자들을 살려 기적의 의사라는 소리를 들을 수 있겠지만 상당수 환자들은 사망한다.

책의 내용도 대부분 환자들의 사망이야기다. 

2개월 시한부를 받고 결혼청첩장을 가져온 신부의 이야기도 있고(당연히 결혼후 사망했다), 마지막으로 죽어가는 가운데 자기를 찾아온 동생에게 내 돈 갚으라는 유언을 남긴 남자의 이야기도 나온다. 

미국에서는 항암치료를 마치고 죽음을 준비하는 기간이 평균 6개월인데 우리나라는 평균 1개월이라고 한다. 심지어는 사망 2주전까지 항암치료를 받는 경우도 있다고 한다. 

존엄하고 담담하게 죽음을 맞이한다는 건 무엇일까?

죽음을 앞두고 삶을 정리하는 모습을 나도 보일 수 있을까?

수많은 사망 데이터를 보고 고객들의 니즈를 파악하며 회사에서 나는 암보험 상품을 만든다. 

책을 읽으면서 존엄한 죽음을 맞이하게 하는 상품이나 담보도 필요하지 않을까 생각이 든다.

아마 팔리지는 않고 오히려 고객들 화만 일으킬 것 같다. 

죽음을 어찌 받아들여야 할 지 생각하게 하는 책이다. 



2% 암으로 인해 기약된 순간이 환자에게 다가올 때 그것을 조금씩 뒤로 미루는 일, 그것이 나의 일이다

9% 남편분이 너무 열심히 사셔서 그런 거예요. 너무 열심히 산 죄로 죽을 때도 편하게 돌아가시지를 못하네요. 사람이 살아온 천성이라는 게 변하기가 쉽지 않아요. 그래도 죽기 전에는 한번은 변하기도 하는데... 남편분은 어렵네요

11% 결국 내 돈 2억 갚아라가 환자가 남긴 마지막 유언이 된 셈이다

39% 많은 환자를 봐야만 하는 의사에게는 0.1퍼센트의 예외적인 특별한 기적을 만들어내는 것보다 0.1퍼센트의 치명적인 실수를 하지 않는 것이 더 중요하다

44% 핏줄들은 하나같이 나를 괴롭혔지만 피가 섞이지 않은 사람들이 나를 많이 도와주었다

47% 나는 그때 알았다. 죽은 아이의 신을 버리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새로 사기도 한다는 것을

50% 극단적 장기 생존자. 말 그대로 암 환자임에도 극단적으로 오래 사는 사람들이 있다. 이런 사람들은 컨디션이 좋기 때문에 입원하지 않는다

53% 인생의 마지막 반년은 사랑하는 사람과 행복하게 불태운 셈이 되었다. 오래오래는 아니었지만 죽을 때까지 행복하게 살았습니다로 마침표를 찍었으니 그건 그것대로 아름다운 결말이었다고 생각하기로 했다

57% 600명 중 한 명과 단 한 사람, 이것이 그가 느낀 의사와 환자 사이의 간극일 것이다

61% 세상에는 겪어보지 않고는 이해한다고 말할 수 없는 일이 있다는 것을, 나는 눈앞의 환자와 같은 경험을 해보지 않았다는 것을, 그러므로 완벽히 그를 이해할 수 없다는 것을 이제는 너무도 잘 알기 때문이다

64% 교수가 함께 있는 수업인데도 문제가 될 거라는 인식 자체가 없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눈앞의 동료들과 대화하지 않고 문자로 토론하던 이들이 환자를 앞에 두고 어떤 의사가 될지 생각하니 두려웠다

66% 종양의 크기를 떠나 최대한 증상을 완화하며 시간을 버는, 완화 의료라고 불리는 이 전략을 좋아하지 않는다. 최신 표적항암제가 두달의 시간을 벌어들일 때는 열광하지만 완화 의료로 동일한 두 달의 시간을 버는 것에는 놀랍도록 냉담하다

68% 미국 사람들은 보통 사망 6개월 전까지 항암치료를 받는다. 즉, 그들은 삶을 정리하는 데 적어도 6개월 정도의 시간을 가진다는 말이다. 그에 반해 서울대병원 통계상에서 환자들은 사망 한 달 전까지 항암치료를 받는다. 삶을 정리하는 데 고작 한 달의 시간을 가지는 셈이다

79% 돌이켜 생각해보면 환자들에게 잘했던 때는 내가 푹 자고 푹 쉬고 스스로 편안했던 때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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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보, 역사의 명장면을 담다
배한철 지음 / 매일경제신문사 / 2020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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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국보, 역사의 명장면을 담다

 : 배한철

 : 매일 경제 신문사

 : 2021/06/07 - 2021/06/19


직업이 기자라는데 이정도로 조예가 깊고 다양한 국보이야기를 쓸 수 있다는 데 놀랐다.

부럽다. 

우리나라 수많은 유물중에서 나름 최고의 작품이라 할 수 있는 국보...

국보를 통해 역사를 바라본다니, 나름 신선하고 재미있었다. 

경주의 황남대총에서 나온 금관을 통해 황남대총의 주인공을 유추하는 방법을 보니 유물과 역사가 어떻게 대화하는 지 알 수 있어서 좋았다. 

일제 강점기를 거치면서 일본인 연구가들에 의해 제멋대로 파헤쳐지고 왜곡되어온 우리 역사와 유물들.. 아직 제자리를 찾기엔 멀었지만 훌륭한 연구가들이 계속 나오고 있으니 올바르게 유물과 역사가 해석되기를 기대해본다. 

누군가는 우리나라 전 국토가 순례할만한 유적지라고 하고, 어떤이는 국보를 찾아 순례하는데, 난 이나이 먹도록 아직도 초보수준이니... 

나도 좀 열심히 살자.. 올해의 책 후보다. 



2% 필자에게 문화재를 찾아가 관람하는 것은 일종의 문화적 행위이다

5% 여러 달이 걸려야 하는 세심한 작업을 10시간여 만에 후딱 해치우고 말았던 것이다

5% 무령왕릉에서 출토된 유물은 108종 3,000여 점에 달한다. 이 중 가장 중요한 유물은 왕과 왕비 신분을 알려주는 지석 두 점이다

9% 이후 1,300여 년의 세월이 흐른 1993년 12월, 부여시 능산리 고분군에서 주차장을 건설하던 중 놀라운 유물이 우연히 세상에 드러나게 된다. 바로 대한민국 최고의 걸작 국보 중 하나인 백제 금동대향로다

14% 신라가 나뭇가지와 사슴뿔 형상으로 금관을 장식했다면, 가야에서는 풀잎이나 꽃잎 모양으로 금관을 꾸몄다

18% 고려는 한국사의 황금기이자 문화의 절정기였다. 삼국시대 불교가 탑과 불상 등 건출, 조형물 중심으로 발전했다면 고려의 불교는 참선과 수행을 통해 깨달음을 얻는 선종의 유행으로 회화가 발달했다

21% 고려청자 특유의 비색은 11세기를 거쳐 12세기 전반에 정점을 맞는다. 광택이 매우 우아하며 가마에서 구을 때 생기는 자기 표면의 미세 균열도 거의 없는 고품질 순청자가 쏟아졌다

31% 인쇄물이 아닌 목판이 온전한 채로 남은 것은 전 세계적으로 해인사 대장경판이 유일하다. 1251년(고려 고종 380 완성된 이후 800년이라는 오랜 세월 속에서도 손상 없이 보존된 것은 기적과도 같은 일이다

38% 국보 제24호 경주 석굴암 석굴은 우리 문화사에서 독보적 금자탑인 동시에 동양 전체의 건축, 조각 예술을 대표하는 불멸의 업적으로 아낌없는 찬사를 받고 있다

43% 알타이, 시베리아 등에서 나무와 사슴은 성스러운 상징이다. 나무는 하늘로 통하는 길이며 사슴은 하늘로 인도하는 전령사였다

43% 왕은 금관을 부장하는 전통이 채 자리 잡기 전에 사망해 무덤에 금동관을 묻었지만, 왕이 세상을 뜬 뒤 본격적인 금관의 시대가 열리면서 그의 왕비는 금관을 가질 수 있었을 것으로 추측된다. 그렇다면 황남대총 남분에 묻힌 왕은 바로 첫 번째 마립간, 즉 내물왕이 되는 셈이다

44% 통일신라는 한발 더 나아가 국토 중앙의 수도라는 뜻의 중원경으로 그 명칭을 바꾼다

47% 첨성대 위에 정자 등의 건물이 있었음을 추정할 수 있는 문헌은 설씨 세헌편 외에도 다수 발견된다

48% 한 번도 발굴 조사된 바 없는 첨성대 지하와 그 주변을 파보면 첨성대를 둘러싼 수많은 의문점도 풀릴까

49% 봉영기는 가람을 세운 사람이 다름 아닌 사택왕후이고 그 해가 639년(무왕 40)이라고 전한다. 639년은 무왕 사망 2년 전이다. 사택씨는 성왕의 사비(부여) 천도를 도운 백제 말기 최고 귀족 가문이다

51% 일제강점기에 수리하면서 타설한 185톤의 시멘트를 제거하는 데 오랜 시간이 걸렸다. 탑은 이제 안전해졌겠지만 탑이 갖고 있던 고색의 정취가 사라져 버린 것은 아쉽다

52% 고유섭은 석탑과 불교 조각 등 불교 미술을 연구해 시대별 양식의 변화와 특징을 처음으로 정리했다. 한국 회화사를 학술적으로 집대성했으며, 고려청자를 중심으로 한 도자기 이론도 체계화했다

54% 형상과 층수를 두고 여전히 논란이 분분한 경주 불국사 다보탑과 경주 정혜사지 13층 석탑(국보 제 40호), 화엄사 4사자 3층 석탑 등이 여기에 속한다

56% 의상의 사당인 조사당은 1377년 재건됐고, 일제강점기인 1916년에는 무량수전의 해체수리 공사가 진행됐다. 따라서 현재 무량수전은 고려 말 우왕 때의 건물이다

58% 불국사는 전 국민의 수학여행지이자, 경주를 넘어 우리나라 제일의 명소이다. 토함산 서쪽 기슭에 위치한 불국사는 "불국정토를 속세에 건설하겠다"는 통일신라인들의 야심찬 꿈이 드러난 절이다. 국내 사찰 중 치밀한 구성과 미적 완성도가 가장 뛰어난 절이기도 하다

60% 83호는 남산 어귀의 사찰 또는 무덤에서 수습한 것이 확실해 보인다

72% 종합적으로 현재 정족산본 1,181책(완질본), 태백산본 848책, 오대산본 74책, 기타 산엽본(흩어져 있는 것을 묶은 것) 21책 등 총 2,124책이 남아있다

82% 그는 "남자는 존귀하고 여자는 비천한 것이니, 어찌 늙은 할멈이 규방에서 나와 국가의 정사를 처리할 수 있겠는가. 신라는 여인을 세워 왕위에 오르게 하였으니 진실로 어지러운 세상에서나 있을 법한 일이다. 나라가 망하지 않은 것이 다행이었다"고 논평했다

83% 돌 다루는 기술이 앞섰던 백제는 전탑의 과정을 거치지 않은 채 목탑에서 바로 석탑으로 옮겨갔다. 목탑 형식으로 쌓은 돌탑인 익사 미륵사지 석탑(국보 제 11호)이 그 증거로 언급된다

91% 풍속도 화첩은 단오풍정, 월하정인, 주유청강, 청금상련, 상춘야홍 등 신윤복의 명작이 총집결된 화첩이다

93% 안견이 북종화(기술적 연습과 수련을 중시)를 수용해 높은 경지의 이상적 산수화를 구현했다면, 정선은 남종화(작가의 교양과 정신을 강조)를 받아들여 독보적인 진경산수화를 창조했다

95% 정선은 18세기 후반 이후에 행세하는 거의 모든 집안에서 그의 그림을 소장할 만큼 화가로서 위상이 높아졌다. 그의 그림은 한양의 좋은 집 한 채 값이었다고 한다. 조선 화가로서는 보기 드물게 성공한 화가였던 것이다

96% 에밀레종 전설은 근대 이후 서양 선교사들의 기록에서야 등장하며 일제강점기 자료에서 본격적으로 언급되기 시작한다. 조선 후기 유림의 세력이 강했던 경주에서 불교를 폄훼하고자 의도적으로 가공됐다는 주장도 제기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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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부터 다시 배우는 서양고대사 - 메소포타미아·이집트 문명부터 서로마제국 멸망까지
정기문 지음 / 책과함께 / 2021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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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처음부터 다시 배우는 서양고대사

 : 정기문

 : 책과함께

 : 2021/06/07 - 2021/06/16


청소년 이상이라면 편안하게 읽을 수 있는 서양고대사 입문서.

문체도 어렵지 않고 내용도 관심가질 수 있는 내용이라 쉽게 읽어나갈 수 있다. 

대신 최근 고고학에서 연구되고 발굴된 성과들은 아직 실리지 않았다. 

예를 들어 헝가리쪽에서 나왔다는 다하우 문명이라든가 스키타이 지역의 유물들에 대한 최근 성과는 없다. 

덕분에 어려서부터 읽었던 세계사의 내용과 잘 align되어 있어서 편안하게 읽었다. 

그리스 로마 문명이 서양문명의 원류라고 하는데 사실 메소포타미아 문명이나 미케네 문명이 원류 아닌가?

서양 문명이 동방에서 왔다는 걸 인정하고 싶지 않은 서양인들의 잘못된 우월의식이 그리스 로마 문명을 과도하게 띄운게 아닌가 싶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로마제국은 확실히 본받을 게 많다. 시오노 나나미의 로마인 이야기 때문에 로마제국의 모습이 많이 오염되긴 했지만 이런 책을 통해서 잘 보정될 수 있다. 

입문서로 더할나위 없이 좋은 책이다. 

 


p8 282개 조항을 꼼꼼하게 읽어보면 사람들의 신분과 경제 형편을 고려하여 규정을 만들고, 고아나 과부와 같은 사회적 약자를 보호한다는 개념이 뚜렷하게 관찰된다

p19 농사짓지 않는 사람들이 도시에 거주했다는 사실은 농사짓는 사람들이 그들을 먹여 살렸음을 의미한다. 그러려면 농업 생산성이 높아야 했다. 따라서 도시가 건설된 곳은 농업 생산성이 높아서 잉여가 풍부한 곳이었다

p21 메소포타미아인의 삶은 항상 불안했다. 자연재해와 전쟁에 시달리던 메소포타미아 사람들은 현세의 삶에 매달릴 수밖에 없었다. 그결과 메소포타미아인은 내세를 중요시하지 않는 현세 중심 세계관을 발전시켰다

p27 나중에 세밀한 조사를 해보니 우르 지역의 해안가 전체에서 이런 점토층이 발견되었다. 우르의 해안가 넓은 땅에서 소금기를 포함한 점토층이 발견되었다는 것은 대홍수가 해일이었음을 의미한다

p35 바벨탑은 바빌로니아인이 세운 거대한 건축물로, 바빌로니아 종교 생활의 중심지였다. 그런데 성경은 거대한 탑을 쌓은 것을 왜 신에 대한 도전이라고 규정했을까? 바벨탑이 다신교의 상징이었기 때문이다.

p41 사르곤의 정복 사업으로 메소포타미아에 최초의 통일제국이 건설되었다. 사르곤의 사후에 아카드 제국은 더욱 넓어졌다

p48 상위 지도자들만 철제 무기를 사용했던 히타이트인과 달리, 철제 무기 제작법을 개량하여 모든 군인을 철제 무기로 무장시켰다. 따라서 철제 무기 시대를 본격적으로 연 것은 아시리아였다. 그리고 앗수르나시르팔2세는 말의 품종을 개량하고, 달리는 말 위에서 활을 쏠 수 있도록 병사를 훈련시켰다. 그는 훈련된 기병을 기병대로 조직해 역사상 최초로 전투에 투입했다.

p51 기원전 612년 메디아 왕국과 신바빌로니아 동맹군이 아시리아의 수도 니느웨를 함락했다. 아시리아의 전 국토가 철저히 약탈당했고, 아시리아인은 모두 노예가 되거나 처형당했다. 약탈과 보복이 어찌나 철저했던지, 아시리아가 그 후 역사에 어떤 영향을 미쳤는지 찾아내기 불가능할 정도였다.

p56 기원전 1세기에는 대롱처럼 불어서 유리잔을 만드는 기술도 개발했다. 흔히 로마가 만든 유리가 비단길을 통해 중국은 물론 한반도까지 전해졌다고 하는데, 로마 시대 유리 생산은 페니키아인이 주도했다

p61 구약성경에서 메소포타미아 문화의 영향이 강하게 관찰되는데, 이시기 성경을 저술한 유대 지식인들이 바빌론에서 메소포타미아 문화의 영향을 크게 받았기 때문이다.

p69 페르시아가 이렇게 여러 나라의 문화를 기꺼이 수용하는 것을 보고 헤로도토스는 "어떤 나라도 페르시아만큼 외국 관습을 기꺼이 채택하지 않았다"라고 말했다

p76 그는 타원형의 틀인 카르투슈 안에 파라오의 이름이 새겨져 있다고 믿고, 이름들을 수없이 비교하면서 이집트 문자가 소리를 기호로 나타낸 표음문자임을 깨달았다.

p78 나일강의 홍수가 시작되는 7월 중순부터 홍수가 끝나는 11월 중순까지는 충적평야 전체가 물에 잠겼다. 이집트인은 이 시기를 아케트, 즉 '범람의 계절'이라고 불렀다.

p86 그 스핑크스는 채석장에서 돌을 채취하고 난 후 남은 바위산을 다듬어 만든 것이다

p86 고대 이집트인은 약 120기의 오벨리스크를 만들었지만, 현재 27기만이 남아있다. 이집트를 침략했던 외국인들이 이 건축물에 매료되어 많이 약탈해 갔다. 로마에 13기가 있으며, 파리, 런던, 뉴욕, 이스탄불에 각각 1기가 있다.

p88 그들은 투탕카문의 무덤을 거의 원형 그대로 발견했다. 무덤이 얼마나 잘 보존되었던지, 죽은 왕의 관(세 번째 관)) 위에는 3200년의 세월을 이겨낸 수레국화 한다발, 나뭇잎, 과일이 얹혀 있었다

p99 기원전 2649년경 제3왕조 이후 500여 년을 고왕국 시대라고 한다. 제3왕조의 대표적인 왕인 조세르가 거대한 피라미드를 최초로 건설했다

p101 중왕국 시기에 거대한 피라미드는 건축되지 않았다. 대신 농경에 필수적인 수로와 관개 시설 등을 개량하는 공공사업이 활발하게 진행되었다

p103 지금 우리에게 익숙한 이집트의 이미지는 대부분 신왕국 시대에 만들어졌다. 고왕국과 중왕국 시기에 만들어진 유물이 거의 파괴된 반면, 신왕국의 유물은 많이 보존되었기 때문이다

p109 람세스 2세는 전투에 패배했지만, 이집트로 후퇴한 후 자신이 승리했다는 내용을 담은 비문을 만들어 전국 곳곳에 게시했다. 당시에는 언론이 발달하지 않았기에 나라 밖에서 왕이 승리했는지, 패배했는지 알 수 있는 사람은 거의 없었으므로 아무도 람세스 2세의 사기 행각에 시비를 걸지 않았다.

p115 그녀가 냉철하고 훌륭한 군주였는데도, 이렇듯 나쁜 이미지를 가지게 되었던 것은 그녀가 패배자이기 때문일 것이다. 그녀는 야먕이 큰 여자였다. 그녀의 이미지에서 간과되는 부분은 그녀가 이집트의 통치자였으며, 이집트는 그녀가 죽기 전까지 군사적으로 약했지만 지중해의 상업과 문화의 중심지였다는 사실이다.

p122 그리스인이 크레타인에게 공물을 바쳤고, 테세우스가 그것을 중단시켰다는 신화는 미노스인이 기원전 1400년까지 그리스 지역을 지배했음을 의미한다

p124 고대 근동의 예술품과는 달리 미노스의 예술가들은 살육과 약탈의 장면이 아니라 꽃이 활짝 핀 풍경이나 아름다운 여인의 모습, 운동 선수의 아슬아슬한 묘기나 축제의 모습 등 자유롭고 평화로운 정경을 그렸다.

p131 식량이 부족했기 때문에 인구가 늘어나면 해외로 진출할 수 밖에 없었다. 그리스인은 기원전 8세기 후엽부터 멀리 남프랑스와 북에스파냐까지 진출했다.

p132 그리스 일대가 혼란에 빠지면서 미케네 문명은 기원전 1100년경 멸망했다.

p151 이오니아학파가 최초로 인간의 이성을 이용해서 자연의 구성과 작동 원리를 설명해보려고 시도했다. 이 점에서 이오니아학파는 최초의 지혜를 사랑하는 사람들(철학자)이었다

p160 플라톤이 엘레이학파나 피타고라스학파의 영향을 받은 철학자라면, 아리스토텔레스는 이오니아 자연철학의 전통을 계승했다

p174 연극 공연이 형식을 갖춰가던 기원전 5세기에 디오니소스 축제는 아테네의 중요한 축제로 해마다 3월 말에 열렸다

p180 연극은 실로 그리스 문화의 정수라고 할 수 있다. 인간과 신, 사회와 개인에 대한 그들의 고민이 그리스 연극에 농축되어 있다

p182 그리스인의 이런 사유는 자기중심으로 다른 문명을 재단하는 오리엔탈리즘의 선구라고 볼 수 있다

p190 이러한 위기 상황에서 기원전 594년 귀족과 평민은 솔론을 조정자로서 아르콘에 임명하는 데 동의했다. 솔론은 귀족 출신이지만 상인으로서 성공한 사람이었다. 귀족은 그가 귀족이라는 사실이 마음에 들었고, 평민은 그가 고생하며 장사를 해봐서 평민의 상황을 잘 안다는 점이 마음에 들었다.

p196 귀족들은 자신들의 권위와 전통을 무시한 페이시스트라토스를 미워했고, 그가 잘못한 일이 있으면 과장해서 서술했다. 따라서 참주는 결코 포악한 지배자가 아니라, 귀족의 이익에 반해 평민을 위해 통치한 지배자였다

p202 그들의 병력은 약 30만 명이었다. 이렇게 하여 페르시아군은 전투 병력이 약 260만명, 전투보조원이 약 260만 명에 달했으므로 총 병력은 520만 명이나 되었다. 이러한 페르시아군의 병력 숫자는 역사가 헤로도토스가 제시한 것인데, 상당한 과장이 있었다고 해도 페르시아군이 역사적인 대병이었음은 틀림없다.

p209 인간관계에서 정의란 힘이 대등할 때나 통하는 것이지, 실제로는 강자는 할 수 있는 것을 관철하고, 약자는 거기에 순응해야 한다는 것쯤은 여러분도 우리 못지않게 아실 텐데요

p217 화려하게 꽃핀 아테네 민주정은 아테네의 제국주의 덕분이었다. 군사력을 앞세워 이웃 국가들을 위협해서 얻은 부를 자신들 내부의 자유를 확대하는 데 사용했던 것이다. 그 결과 기원전 5세기 중엽에서 4세기에 걸쳐 아테네는 그리스의 경제,문화 중심 국가가 되었다

p219 심지어 소크라테스는 자기는 아스파시아에게 매를 맞아가면서 수사학을 배웠으며, 페리클레스의 명연설문을 실제로 작성한 사람도 아스파시아였다고 명확하게 진술했다.

p250 테베레강 남쪽에 라티움 평야가 있었고, 로마느 ㄴ이 평야의 곡물을 이용할 수 있었다. 그리고 로마는 해안 지역에서 생산한 소금을 테베레강을 따라 이탈리아 중부 지역에 판매했다. 이렇게 로마는 교통이 편리하고 물산이 풍부한 곳이었다.

p258 로마에서는 가부장의 권위가 절대적으로 강했기 대문이다. 에트루리아 여성의 높은 지위에 격분한 로마인은 이들을 격렬하게 비난했다.

p268 로마는 귀족과 평민을 각각 대변하는 원로원과 민회를 양대 권력 기구로 만들고, 귀족과 평민이 서로 견제할 수 있게 했다.

p281 삼니움과의 싸움에서 로마인이 범한 최대의 실수는 조급했다는 것이다. 로마인은 전투를 너무나 자신하고 있었기 때문에 삼니움인을 쉽게 이길 수 있다고 생각했다.

p304 가장 인기 있는 옷은 중국산 비단으로 만든 것이었다. 비단옷을 입은 여인네들은 몸매가 원히 들여다보였다.

p307 로마 시민들이 농지에서 쫓겨나 도시로 몰려들고, 그 자리를 노예들이 대신하고 있는 것을 본 티베리우스 그라쿠스는 큰 충격을 받았다

p315 가이우스 그라크수의 곡물법은 세계 최초의 복지 입법이다. 로마에 거주하는 모든 시민에게 곡물을 싸게 살 수 있게 했기 때문이다.

p323 급료와 토지 외에 병사들이 기대했던 것은 전리품이었다. 반항하는 적을 물리치고 승리를 거둘 경우 장군들이 약탈을 허락한다면 단단히 한몫 얻을 수 있었다. 이런 연유로 병사들은 국가가 아니라 장군들에게 충성하게 되었고, 군대가 점차 사병화하는 경향을 보였다.

p331 갈리아 전쟁의 영웅인 베르킨게토릭스는 로마로 끌려가 죽었지만, 켈트족의 영웅으로 역사에 남았다. 근대 프랑스 사람들은 베르킨게토릭스가 전투를 벌였던 지역을 발굴해 유적지로 조성하고, 프랑스 곳곳에 그의 동상을 세웠다.

p344 아우구스투스는 권력을 원로원과 인민에게 넘겨주는 시늉을 했을 뿐이며, 실제로는 왕처럼 막강한 권력을 장악했다. 하여튼 원로원은 옥타비아누스가 시늉이라도 권력을 양보한 데 감사하여 그에게 '존엄자'라는 의미의 아우구스투스라는 칭호를 부여했다.

p348 아우구스투스 이후 디오클레티아누스가 전제정을 수립할 때까지 수많은 프린켑스가 존재했다. 네로, 트라야투스, 마르쿠스 아우엘리우스 등등. 흔히 이 사람들을 로마의 황제라고 부르는데 이것은 잘못이다. 그들은 결코 황제의 반열에 오른 적이 없다. 제1시민이었을 뿐이다.

p356 키케로는 라틴어로 글을 썼을 뿐 아니라 라틴어의 품격을 희랍어 수준으로 끌어올렸다. 그는 58권의 연설문, 웅변술에 관한 일곱 권의 저서, 20여 권에 달하는 철학서와 수많은 편지를 썼다. 그는 라틴어를 인간의 생각과 감정을 표현하는 뛰어난 언어로 만들었다

p361 로마는 다른 종족을 정복할 때면, 최후의 결전을 앞두고 다른 종족의 수호신을 초대했다. 로마인은 다른 종족의 수호신에게 로마에 그들을 위한 신전을 세우고, 로마인이 적절한 의례를 행하겠다고 맹세했다.

p380 기독교는 야훼가 종족의 구별없이 모든 사람을 사랑하고 보호해준다고 가르쳤다. 이 점에서 기독교는 고대 종교를 무너뜨리고 인류 종교사에 새 장을 열었다

p389 로마인들이 기독교 신자들을 고발한 이유는 그들이 로마의 다신교 의례를 방해했다, 황제 숭배를 적극적으로 비난했다, 로마의 전통적인 도덕을 무시했다 등이었다

p401 율리아누스를 폐위시키고 황제가 된 셉티미우스 세베루스는 임종 때 두 아들에게 "화목하게 지내라. 병사들을 부유하게 하고 나머지는 무시하라"라고 말했다. 이 말은 3세기가 군인들의 시대였음을 단적으로 보여준다

p406 동서로 갈릴 후 로마제국의 정통성은 동로마제국에 있었다. 그리고 흔히 비잔티움제국이라고 불리는 동로마제국은 어디까지나 로마제국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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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성곤의 중국한시기행 : 장강·황하 편 김성곤의 중국한시기행 1
김성곤 지음 / 김영사 / 2021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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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 김성곤의 중국한시 기행 

 : 김성곤

 : 김영사

 : 2021/05/07 - 2021/06/14


장강과 황하를 여행하면서 의미있는 여행지를 소개하고, 중국의 한시도 소개하는 여행책자.

마치 여행 다큐멘터리를 읽는 느낌이다.

이름만 들어도 대단한 소동파, 두보 및 이백의 시가 멋진 풍광의 사진과 함께 어우러진다.

어디를 가든 술과 시가 빠지지 않는다.

이거야말로 풍류가 아닐까 싶다.

서양이 장소와 신화가 어우러진다면, 중국은 시와 장소가 어울린다.

이 책에 나온 곳 중에 가본 곳이 한 군데도 없지만 술한잔에 시를 읊으러 가고 싶은 맘이 절로 든다.

이런게 답사여행의 묘미가 아닐까 싶다.

미국도 그렇지만 중국의 풍광은 대륙의 기상을 느끼게 한다. 부럽다.



p19 약 6,300킬로미터의 길이로 중국에서 가장 긴 강인 장강은 청장고원의 탕구라산에서 발원하여 티베트, 운남, 사천, 중경, 호북, 호남, 강서, 안휘, 강소, 상해를 거쳐 동중국해로 흘러간다

p20 침상 머리 밝은 달빛 땅에 서리 내렸나 했네 고개들어 밝은 달을 바라보고 고개 숙여 고향을 생각하네

p25 당나라와 송나라를 통틀어 가장 글을 잘 쓴 여덟 사람을 일컫는 당송팔대가에 이 삼부자가 들어 있으니 이 얼마나 대단한 집안인가

p38 모택동의 초서는 워낙 개성이 강해서 한눈에 알아볼 수 있는데 필체가 얼마나 활달한지 금방이라도 비문 밖으로 날아갈 기세다

p48 이 지역 사람들은 새로 차량을 구입하면 무조건 이곳으로 달려와 안전 무사고를 기원한다. 뱃길보다 더 험한 것이 자동차 길이요, 자동차 길보다 더 험한 것이 인생길이니 그저 이런저런 신령의 도움을 빌고 빌면서 조심조심 안전제일로 나아갈밖에

p66 가장 눈길을 끄는 것은 무릉도원을 찾는 관광객들을 맞이하는 가게들이 줄지어 있는 풍경이었다. 이건 도연명의 설계도에는 없는 풍경이다

p70 악양루가 명루로 천하에 이름을 알리게 된 것은 한 편의 명시와 명문이 존재한 까닭이다. 당나라 시인 두보의 시 등악양루와 송나라 정치가요 문장가인 범중엄의 글 악양루기다

p77 조정에 있어 뜻을 펼칠 때에는 물론이고, 실의하여 강호에 머물 때에도 온통 나라에 대한 걱정뿐이니 자신의 처지를 비관할 틈도 좋은 풍경을 찾아 즐길 여유도 업다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북송시대 지식인들이 보여준 시대에 대한 우환의식이다

p90 청풍과 명월이라는 조물주가 허락한 무진한 보배를 누리는 삶은 결코 누추하지도 않고, 가난하지도 않다는 것이다

p96 여산의 진면목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우선 그 여산으로부터 벗어나야만 한다는 것, 어떤 일이나 상황에 대해 객관적이고 전면적인 이해를 얻기 위해서는 그 일이나 상황에서 물러나서 거리를 유지해야 한다는 것이다

p104 서문을 보면 마치 낙서처럼 두서없이 쓴 것 같지만, 이 음주 시들이야말로 도연명 시 중에서 최고의 작품으로 인정되고 있으니, 과연 명작은 '취여불취지간'에서 나온다고 하는 말이 도연명에게서도 실증되고 있는 것이다

p117 갱상일층루, 즉 '다시 한층 더 오른다'라는 뜻으로, 당나라 시인 왕지환의 시 <등관작루>의 마지막 구절이다. 천 리 끝까지 바라보고 싶어서 다시 한 층 더 올라간다

p122 항우가 이렇게 된 것은 천명과는 아무런 관계가 없다. 그가 하늘을 원망한 것은 그릇된 것이다

p132 비탄과 절망의 노래 항우의 해하가와 쌍벽을 이루는 것이 환희와 자부심으로 가득한 유방의 대풍가이다

p143 어양선 요리의 내력에 대해서는 천하를 주유하던 공자가 먹을 것이 없는 처지에서 개발한 요리라는 설도 있으나, 한신의 고향 마을에서는 한신의 레시피로 전해지니 그려러니 하고 맛을 보지 않을 수 없다

p148 강소서의 성도인 남경은 중국의 오랜 고도로, 춘추시대에는 오나라에 속하였고 전국시대 초반에는 월나라에, 후반에는 초나라에 속하였다

p155 자신의 마음의 깊이를 강물에 비교하는 식의 표현은 이백의 증별시(이별할 때 주는 송별시나 유별시)에 흔히 등장하는 표현이다

p184 이야기 끝에 장건이 만난 견우와 직녀가 황하와 은하수가 이어지는 이 근처 어딘가에서 살았을 것이니 이 부근에 살고 있는 지금의 장족들은 어쩌면 견우와 직녀의 후손들일지 모른다는 즐거운 추론을 덧붙였다

p195 아들을 낳으면 흉한 일 딸을 낳아야 외려 길한 일이라네 딸은 이웃에 시집이라도 갈 수 있지만 아들은 죽어 잡초에 묻힐 뿐이라네

p199 그녀가 던진 일월보경은 두 쪽으로 갈라지면서 하나는 일산이, 하나는 월산이 되어 마침내 일월산이 솟아오르게 되었다느니, 거울이 떨어져 거울처럼 영롱한 청해호가 되었다느니 하는 전설이 마구 생겨나게 된 것이다.

p203 감숙성 남부의 황토고원 지대 670킬로미터 구간을 굽이굽이 흘러오면서 엄청난 양의 토사를 함유한 조하가 바로 이 유가협으로 흘러들어 황하 본류와 섞이면서 황하가 본격적으로 그 이름값을 하게 한다

p212 국물이 맑긴 했어도 간이 너무 세서 좀 느끼하다 싶었는데, 과연 일행 중에 두어 사람은 배탈이 나서 고생을 했다. 그래도 난주에 와서 중화제일면 란쩌우라멘을 먹어봤다는 자랑은 할 수 있게 되었으니 그만하면 됐다고 스스로 위로했다

p231 서하는 탕구트족이 세운 나라로 1038년부터 189년 동안 중국의 서북쪽인 지금의 감숙성, 영하회족자치구와 청해성의 동북부, 섬서성과 내몽고 일부 지역을 통치했다

p236 친생공주를 보낼 수는 없으니 후궁 중에서 한 명을 골라 보내기로 한 것이 바로 왕소군이었다. 아마도 추하게 그려진 초상화를 보고 아깝지 않다 여긴 까닭이었을 것이다

p239 재색이 뛰어난 왕소군은 덕망과 재능이 출중한 충신과 인재요, 그 왕소군을 추하게 그린 모연수 화공은 충신과 인재의 길을 막는 조정의 간신들이고, 그림만을 믿고 미인을 방치한 황제는 조정 간신배들의 참언을 믿고 충신과 인재를 멀리하는 어리석은 혼군이라 할 수 있다

p274 이름만 임금이었지 일반 백성들의 살아가는 모습과 별반 다를 바 없었던 것이다. 웅장한 건물 속 거창한 요의 동상은 권력으로 백성에게 군림하는 후대 제왕의 모습으로 요임금을 채색한 것일 뿐이다

p292 굽이굽이 유유하게 흘러오던 황하가 이곳에 이르러서는 일순간 표변하여 완전히 다른 모습이 된다. 좁고 깊은 협곡으로 앞을 다투어 쏟아져 들어가는 물줄기들이 저마다 내지르는 함성으로 귀가 먹먹할 지경이다.

p322 소사와 농옥의 사랑 이야기 때문에 화산은 애정의 산이 돼 수많은 청춘남녀가 험한 길도 마다하지 않고 손을 맞잡고 오르는 것이다.

p324 낙양은 황하문명 발상지 중 하나로, 4,000년 전에 미이 도시가 건설되었으며, 1,500년의 긴 역사 속에서 수많은 왕조가 수도로 삼은 유서깊은 고도이다

p329 안녹산의 난으로 동생들과 헤어진 뒤로 난리를 피하여 살길을 찾아 낯선 타향을 전전하며 늘 고향으로 돌아갈 날을 꿈꾸었던 두보, 인구에 회자되는 그의 수많은 명편은 고향에 대한 그리움이 빚어낸 것들이 대부분이다

p339 역대로 봉건적인 문화 속에서 측천무후에 대한 평가는 부정적이었지만, 지금은 그녀가 일군 정치, 경제, 문화적인 업적이 정당하게 평가를 받으며 대중들의 인식도 변하고 있다.

p341 이 멋진 시에서 특히 유명한 구절은 "들불이 태워도 태워도 다 태우지 못하니 ,봄바람이 불면 풀은 또 살아난다"라는 '야화소부진, 춘풍취우생'이다. 초원의 풀은 이별의 정서가 아닌 고난을 이겨내는 강인한 정신으로 읽혀 들불과 같은 고난 속에서도 인내하며 봄바람 속의 부활을 기다리는 희망의 노래로 대중에게 수용되었다.

p346 안녹산의 난이 일어나고 당나라가 내리막길을 가게 된 데는 당시 황제인 현종과 최장수 재상 이임보에게 무한책임이 있다고 해야 할 것이다

p354 시를 따라 떠도는 우리의 긴 여행길에 충실한 반려자가 되어준 소동파가 아닌가. 파란만장한 삶을 접고 편히 안식하고 있는 그의 무덤에 들러 시 한 수 낭낭하게 으류어 고마운 마음을 전하는 것이 마땅한 도리일 것이다

p363 왕옥산 입구에는 우공과 가족들이 산을 옮기는 현장을 묘사한 커다란 동상이 서 있는데, 그 동상 기저에는 우공이산, 개조중국이라는 모택동의 휘호가 새겨져 있다

p381 이원광이 얼굴색 하나 변하지 않은 채 곧장 붓을 들어 판결문이 적힌 공문서 여백에 다음과 같이 글자를 썼다. 남산가이, 차판무동. "종남산을 옮길 수는 있어도 이 판결은 바꿀 수 없다"

p391 일행들에게 내가 잡은 작은 붕어를 보여주며 말했다. "이런 자잘한 붕어 잡는 재미에 빠지면 강태공처럼 큰 낚시를 할 수 없는 겁니다"

p395 주의 무덤 뒤에는 그와 함께 주지육림의 환락을 즐기며 나라를 패망의 길로 이끌었던 달기의 무덤이 있다

p414 동방의 예루살렘으로 불리는 곡부는 세계 곳곳에서 오는 관광객들로 붐비고 있었다. 공자를 모신 사당 대성전이 있는 공묘로 갔더니 마침 공자께 올리는 팔일무 춤이 한창이다

p417 공자의 축원대로 공급은 훌륭한 학자가 되어 공자의 사상과 학문을 맹자에게 전해줌으로써 유학 도통의 전승 과정에서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p421 구몽정 서북쪽 산봉우리에 높이 218미터, 폭 198미터의 거대한 수성노인을 조각해놓았는데, 길게 늘어진 귀, 툭 불거진 이마, 흰 수염이 허리까지 흘러내리는 노인은 한 손에는 지팡이를 들고, 한 손에는 선도를 들고 산을 찾는 모든 관광객들을 환한 미소로 맞고 있다

p429 언젠가 저 산꼭대기에 올라 자그마한 산봉우리들을 한번 굽어보리라

p435 황하와 장강의 황톳빛 탁류만 늘 보고 자라서 그런지 중국인들에게 표돌천의 맑은 샘물이 주는 감동이 적지 않은 듯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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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악이 좋아서, 음악을 생각합니다 - 음악이라고 부르는 모든 것들에 대하여
정경영 지음 / 곰출판 / 2021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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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음악이 좋아서 음악을 생각합니다. 

 : 정경영

 : 곰출판

 : 2021/06/01 - 2021/06/13


초보자용 책은 아니다.

음악을 듣거나 즐기는 사람을 위한 책이 아니라, 음악을 분석하고 생각하려는 사람을 위한 책이다. 

내가 읽기에 수준이 높다. 

중간중간 악보를 분석해서 풀어 썼는데 무슨 소린지 하나도 모르겠다. 

예시로 나온 멜로디를 그려놓고 화성악적으로 왜 틀렸는지 설명하는 부분은 읽기는 했지만 글자들이 눈을 스칠뿐 이해할 수가 없었다.

저자는 음악을 생각하는 것도 재미있겠는데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한명만 있어도 족하다고 했는데, 일단 난 그 한 명은 아니었다. 

전혀 준비를 안한 상태에서 음악을 분석하는 책을 읽으니 당연히 재미가 없었다. 

QR코드에 연결된 음악도 시끄럽기만 하지 생각을 자극하는 음악이 아니었다. 

오죽 했으면 우리 애가 왜 소음을 틀어놨냐고...

이렇게 어려운 내용은 수준높은 독자들에게 맡기고 난 가볍고 말랑말랑하게 음악의 얕은 물가에서만 놀아야겠다. 

언젠가는 음악이 무릎에까지 올라와도 견딜 수 있겠지..



p11 우리가 생각하는 음악이라는 것이 인간이 의도를 갖고 만든 아름답고 질서있는 소리 예술 작품이라면 말이죠 p33 네가 뭔대? 네가 무슨 자격으로?라는 물음에 대한 답인 것죠. 저는 이 그레고리오 성가의 탄생이 서양 음악사에서 표준어와 사투리가 나뉘는 것과 같은 흥미로운 순간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레고리오 성가가 표준어가 되면서 다른 성가들(암브로시안, 켈틱, 갈리칸, 모자라빅 등)은 사투리가 되는 거죠

p44 판소리 <춘향가> '쑥대머리'의 한 대목을 서양악보로 그려 '도레미'로 읽어내면 쉽게 배우고 익힐 것 같지요? 하지만 그것만이 가진 특징이 사라져서 우리 음악과 서양 음악 사이의 어정쩡한 음악이 되어버리고 맙니다

p53 그렇다면 과여 어떤 소리가 상황과 문맥 안에서 소음으로 여겨질까요? 바로 의미를 부여받지 못한 소리입니다.

p55 주인공의 자리에서, 중심에서 밀려난 '나머지'가 소음이 된다는 것이죠. 이렇게 생각해보면, 결국 소음을 사투리와 닮았습니다.

p66 고등학교 2학년 때 음악사 책을 사서 읽기 시작한 건, 솔직히 말하자면 잘난 척을 체계적으로 하기 위해서였습니다.

p83 바흐는 칸타타 140번 1곡에서 프랑스의 부점 리듬과 독일 전통의 코랄 선율, 그리고 이탈리아의 형식을 동시에 사용하고 있지요. 바로 이것이 바흐 시대 독일 음악의 독특한 특징이었습니다.

p107 연주나 공연에는 연주자의 개별적 맥락과 취향, 나름의 역사가 포함되므로 작곡가의 순수한 의도가 그런 것들에 의해 훼손된다는 거죠

p111 악보를 읽을 수 없으니, 악보를 음악과 동일시하는 일은 아예 없는 거죠. 음악은 악보 같은 사물이 아니라 항상 하고 있는 무엇인 겁니다.

p116 페달포인트로 머물러 있는 으뜸음 위에서 딸리화음의 반음 올려진 3음이 만드는 장7도 불협화음으로는 앞에서 말씀드린 그 긴 이야기를 다 설명할 수 없거든요. 일단 그 불협화음이 입과 코 중간쯤에 머금은 듯한 소리를 통해서 연주되지 않아다면 그날의 그 기분이 들지 않았을 겁니다.

p178 작곡을 배울 때 제일 먼저 하는 일이 뭘까요? 대체로 클래식 음악 작곡을 배우러 가면 제일 먼저 연필 깎는 법을 배웁니다. 진짭니다. 글씨 쓸 때처럼 원뿔형으로 뾰족하게 깎는 것이 아니라 끌 모양으로 깎는 법을 배우죠

p184 오히려 그 시대나 문맥의 한계를 넘어 창조적으로 틀린 음악은 새로운 가능성, 새로운 시대, 새로운 양식을 연다고 할 수 있겠네요

p204 '따따따딴'은 18세기 청중들이 늘 그렇게 하듯 '산만하게' 들으면 재미가 하나도 없다는 얘깁니다. 이 음악은 레고 블록처럼 블록과 블록이 어떻게 연결되는지, 그 과정을 듣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p210 그러나 혹시라도 이 책을 읽으면서 "음악을 생각하는 것도 나름 재미있는데?"라고 생각하신 분들이 한 명이라도 있다면 저는 만족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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