옥스퍼드 세계사
펠리페 페르난데스아르메스토 외 지음, 이재만 옮김 / 교유서가 / 2020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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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옥스포드 세계사

 : 펠리페 페르난데스 아르메스토

 : 고유서가

읽은기간 : 2024/09/18 -2024/10/28


책의 두께가 있어서인지 오랜 시간을 들여 다 읽었다.

옥스포드라는 브랜드에 혹해서 책을 샀는데 책의 전개가 내가 읽던 내용과 달라 한참을 헤매면서 읽었다.

세계사 책은 맞는데 세계사의 구분을 꽤 큰 덩어리로 구분해서 진행되다보니 읽다가 보면 어느 시대 이야기인지 헷갈릴 때가 있다.

중단원이 나눠질 때마다 기후에 대한 챕터가 있다. 기후가 변함에 따라 호모 사피엔스와 인류가 어떻게 적응하고 이동하고, 변화했는지에 대해서 알려줘서 꽤 흥미있었다.

한번에 이해할 수는 없는 책이다. 내가 전문가도 아니고, 아마추어로서 평소에 읽던 방식과 내용이 다른 책이라 몇 번은 더 읽어야 그 의미와 깊이를 알 수 있을 것 같다.

최근에 나오는 세계사책은 전통적으로 왕조와 시대를 구분하는 방식이 아닌 책들이 많아 읽기가 쉽지 않다. 여러번 읽어야 이해할 수 있다는 단점이 있지만 재미는 있다. 

지식의 부족과 머리나쁨을 탓하게 된다.

좋은 책을 읽어서 기분이 좋다. 


p11 지구사 역사가의 문제는 ‘우주의 망대에 올라선 은하계 관찰자에게는 역사가 어떻게 보일까?’ 하는 것이다

p12 발산은 우리 종이 고고학적 기록에 처음 출연했을 무렵 호모 사피엔스의 한정되고 안정된 문화가 흩어지고 스스로를 변형하여 오늘날 우리가 서로 놀랄 만큼 엄청나게 다양한 삶의 방식들로 갈라진 과정, 지구상에 거주 가능한 모든 환경을 빠짐없이 채운 과정을 나타낸다

p14 유사 이래 대체로 발산이 수렴을 앞질렀다. 다시 말해 문화들은 상호 조우와 학습에도 불구하고 갈수록 다양해졌다(점점 더 서로 달라졌다)

p18 기술은 우리가 자초한 문제들로부터 번번히 우리를 구했지만, 그 결과는 더 크고 더 위험하고 더 값비싼 해결책을 요구하는 새로운 문제들뿐이다

p22 역사학은 변화에 관한 연구다. 그런 이유로 이 책은 연대기순으로 다섯 부분으로 이루어져 있다. 각 부분에서는 우선 환경사 전문가인 한 저자가 환경 배경을 짚으면서 인간과 환경의 상호 작용을 스케치한 다음 역시 자기 분양의 전문가인 다른 저자들이 해당 기간의 문화를 다룬다

p38 빙하시대의 인류는 건장했고 보통 몸집이 컸다. 더 호리호리하고 약한 골격은 한참 후에, 홀로세에 기후가 더 온난해지고 곡물과 녹말, 탄수화물을 소화하기 쉽도록 삶아 먹는 쪽으로 식단이 변한 무렵에 나타났다

p41 기근의 위험을 줄이고 지역의 선택압에 대응하는 데는 두 가지 전술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바로 이동과 공유다. 시공간 속 인간 집단은 이동함으로써 식량 자원의 변동에 적응한다

p43 지구의 공전궤도, 자전, 자전축 기울기의 변화가 기후에 영향을 준다는 사실은 오래전부터 알려졌다. 세 변화를 각각 이심률, 세차 운동, 지구 자전축 경사각이라고 한다. 천문학 데이터를 이용해 서로 맞물리는 세 운동의 주기를 알아낼 수 있는데, 공전 궤도(이심률)의 주기는 10만년, 자전축 경사각의 주기는 4만 1000년, 세차 운동의 주기는 2만 3000년이다

p44 초기 연구에서 지난 80만년 동안 간빙기-빙하기 순환이 지질학계의 주장처럼 네 번 완료된 것이 아니라 여덟 번 완료되었다는 사실도 밝혀졌다

p64 방사성탄소 연대에 관한 연구를 통해 알타이부터 알래스카까지 거의 7000킬로미터 거리를 인간이 빠름-느림-빠름 템포로 확산되었다는 것이 밝혀졌다. 전반적인 이주 속도는 연간 0.22킬로미터였다. 이 정착 경로에서 나오는 인공물들은 뚜렷한 단일 기준 집합을 이루지 않는다

p67 700만 명은 친족 관계, 사회적 집단화, 재료 저장에 힘입어, 그리고 자원 통제 방식을, 따라서 자원 재분배 방식을 바꾼 남성 간 협력에 힘입어 지구 전역에 당도했다

p71 쇼베 동굴-발견한 세 사람이 이렇게 부르기로 했다-이 세계에서 빙하 시대 예술 작품을 가장 많이 소장하고 있는 곳이자 가장 뛰어난 예술가들이 살았던 곳(그중 일부는 3만 년도 더 전에 살았다) 중 하나라는 사실이 곧 분명해졌다

p74 사냥감과 야생 식물 작물이 풍부했고, 에너지원이 풍족했으며, 대부분의 농경 사회보다 여가 시간이 많았고, 자연을 관찰하고 그 관찰에 관해 생각하고 그 결과를 예술로 기록할 시간이 충분했다

p92 호모 사피엔스는 친척 네안데르탈인과 언제나 모호한 관계였으며, 서로 공유하던 환경에서 우리 조상들은 살아남고 네안데르탈인은 멸종한 사실은 이론가들에게 곤혹스러운 문제였다

p97 일찍이 4만 년 전부터 현지에서 구할 수 없는 귀한 품목은 분명 먼 거리를 통해 거래되었다. 기원전 3500년 무렵 카스텔 메를의 장인들이 100킬로미터 넘게 떨어진 곳에서 상아를 공급받았는가 하면, 해안에서 300킬로미터 떨어진 곳에 사는 사람들이 조개껍데기로 치장을 하기도 했다

p119 앞서 간단히 말했듯이, 호미니드 계통의 대다수 종들은 전 세계의 더욱 다양한 생태계들을 향해 대담한 여행길에 오르지 않았다. 그렇지만 호모속 중 적어도 다섯 종은 어느 시점에 아프리카 밖으로 분포 범위를 넓혔으며, 다수의 개체가 유라시아 북부 냉대선에 도달해 동물을 사냥했고, 무엇보다 콩과식물과 외떡잎식물을 비롯한 다른 음식과 고기를 섞어 식단의 균형을 맞추었다

p127 바빌로프의 분석 이래 현장 조사에 나선 고고학자들은 여러 방법으로 농경 기원지의 폭을 넓혀왔다. 바빌로프는 중심지 여덟 곳을 제시했는데, 새로운 증거가 발견되어 중심지가 적어도 열두 곳으로 늘어났다. 게다가 방사성탄소 연대 측정법이 확산되고 적용됨에 따라 중심지들의 연대가 분산되고 변화의 속도가 또다른 쟁점으로 부각되었다

p133 세계의 기후가 홀로세 중 가장 온난한 단계로, 대략 9000년 전부터 5000년 전까지 최적 기후로 이행함에 따라 구세계와 신세계의 농경 기원 중심지 몇 곳에서 촌락, 타운, 도시 등 다양한 이름으로 불려온, 정교하고 빽빽하게 들어찬 건축된 공간이 출현했다.

p151 집약농업 단계에는 몇 가지 되풀이되는 테마가 있다. 우선 농민이 특정한 농지와 장기적이고 지속적인 관계를 맺게 되었고 물의 흐름, 토양, 동물, 몇몇 작물에도 지속적으로 헌신하게 되었다. 아울러 앞날을 내다보는 투자가 그 관계의 필수적인 부분이 되었다. 에너지의 측면에서 투자는 주로 생산적인 토양에 집중되었고, 축력 및 금속 기술과도 여러모로 관련이 있었다

p155 공동체들의 이동을 추동한 주요인은 작물이나 재화보다 가축에게 풀을 먹일 필요성이었을 가능성이 높다. 그들의 이동은 내륙 아시아 산악 회랑지대(알타이산맥부터 힌두쿠시산맥까지)를 따라 이루어졌는데, 이 지대에서 네트워크가 형성되어 이후 다양한 재화와 물품을 수송하는 데 쓰였고 결국 실크로드의 전신이 되었다. 이 네트워크의 여러 단계를 바탕으로 동물과 작물, 인공물의 확산을 추적할 수 있다. 또한 방랑자들의 정체성에 대해서도 생각해볼 수 있다

p169 문명 확산론을 믿는 사람들은 올메크를 아메리카의 모체 문명으로 찬양해왔다. 확산론의 요지는, 문명이란 재능을 타고난 소수의 사람들만이 만들어낼 수 있는 비범한 성취이며 모체 문명이 덜 창의적인 다른 사람들에게 (본보기를 보이거나 가르치는 방법으로) 확산되었다는 것이다. 확산론은 거의 확실히 틀렸다. 그럼에도 올메크의 영향은 메소아메리카에서 널리 퍼지고 어쩌면 그 너머까지 확산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p176 현존하는 메소포타미아 법전과 중국 문헌에 근거해 판단하지면, 여성은 갈수록 가족에 초점을 맞추어 재능을 발휘하게 되었다

p188 아카드의 정복왕 사르곤은 고대의 위대한 제국 건설자 중 한 명이었다. 사르곤의 군대는 강 하류 지역으로 쳐들어가 그를 수메르와 아카드의 왕으로 추대했다. 현존하는 연대기 파편에서 사르곤은 “장대한 산맥을 나는 청동 도끼로 정복했다”고 선언하고 자신을 계승할 왕들에게 자기처럼 하라고 권했다. 그의 군대는 시리아와 이란까지 도달했다고 한다

p191 이집트는 메소포타미아와, 메소포타미아는 하라파와 접촉을 유지했다. 중국의 상대적 고립은 (신세계 여러 문명의 극단적인 고립과 비슷하게) 큰 강 유역 사회들이 모두 경험한 변화의 과정들 중 일부를 중국이 뒤늦게 시작한 이유일지도 모른다

p201 당시 위기의 원인은 쇠퇴하거나 실패한 국가들이 공유한 구조적 문제, 즉 생태적 취약성과 불안정하고 경쟁적인 정치에 있었다. 이 측면에서 당시 위기는 바다 민족이 이리저리 돌아다닌 지중해 동부의 문명들에 국한되지 않은 더욱 폭넓은 위기였다

p203 하라파 문명의 몰락은 기원전 제2천년기의 대규모 실패 가운데 가장 극적인 경우였다. 그렇지만 넓게 보면 하라파 문명은 히타이트나 지중해 동부 문명들과 본질적으로 같은 운명을 맞았다. 다시 말해 식량 부내 체계가 자원 기반을 넘어섰다. 그리고 권력 네트워크가 무너지기 시작할 때 침입자들이 들이닥쳤다

p213 앞서 말했듯이, 인류의 조건은 기후 최적기와 위기(청동기 시대 오랜 이후 최적기 이후 기원전 3000년경부터 시작되었다)가 번갈아 나타나는 대순환을 경험했다. 앞서 언급한 사회들은 모두 기원전 12000년경 전 지구적 위기로 고통받았을 것이다.

p217 기원전 800년경부터 흑해 북쪽 스텝 지대에서 중앙아시아와 깊은 연관이 있엇던 듯한 새로운 전사 문화인 스키타이 문화가 출현했다. 스키타이 전사는 기존의 장궁과 달리 말을 탄 채로 쓸 수 있는 짧은 복합궁을 휴대했다. 스키타이 문화는 유라시아 스텝에서 최초로 출현한 전사단의 문화였으며, 훗날 훈족과 튀르크족, 몽골족이 스키타이족의 뒤를 따를 터였다

p225 성장하는 교역은 포식성 제국이 다시 등장하도록 자극했다. 철과 강으로 만든 새로운 무기와 스텝 지대로부터 구입한 기마용 복합궁으로 군대를 무장시키고 키워간 신흥 세력들은 작은 교역국들에 공물 납부를 강요했다

p236 이 전염병은 수백 년간 창구러하고 잦아들기를 반복하다가 마침내 9세기에 사그라졌다. 유스티니아누스 역병은 홍해 교역도 덮친 것으로 보이지만, 이제는 이 역병이 가래톳 페스트였으며 중동부 아시아 스텝 지대에서 유전적으로 기원한 뒤 인도나 이란을 지나는 비단 교역로를 따라 전파되었다는 사실이 분명하게 밝혀졌다

p237 한왕조는 계절풍이 급격히 반전된 단기간에 속하는 기원후 9년부터 23년까지 잠시 전복되었지만 이내 천명을 되찾아 중국을 통치했고, 더 오래 지속된 또다른 기후 반전에 시달린 끝에 220년 결국 멸망하여 향후 400년간 이어질 전쟁과 분열의 시대를 열었다

p242 카롤루스 마르텔루스는 732년 투르-푸아티에 전투에서 군대를 이끌었고, 그의 손자 카롤루스 대제는 800년에 교황에게 대관을 받았다. 카롤루스 왕조는 사법 개혁과 카톨릭교회 지원을 통해 이후 수백 년간 이어질 중요한 발전의 토대를 놓았지만, 그 배경에는 고대 후기에 마지막으로 격렬해진 기후 변화가 있었다

p244 겨울 편서풍이 북쪽으로 이동함에 따라 지중해 지역 대부분이 훨씬 더 건조해졌으며, 중앙아시아도 마찬가지로 건조해져 14세기초까지 심각한 가뭄이 그치지 않았다. 이런 이유로 한때 중세 온난기라고 불렀던 이기간을 지금은 중세 기후 이상기라는 더 중립적인 용어로 부르고 있다

p252 중국 전체 인구는 1200년 최고치인 1억 2800만 명에서 1400년 7000만명으로 급감했다. 여진족과 몽골족 모두 특별한 기후 전환기에, 즉 중국에 한랭 건조한 겨울이, 북쪽 스텝 지대에 온난 다우한 여름이 찾아온 시기에 중국을 침공했던 것으로 보인다

p254 페스트는 1331년 중국을 강타했을 것이고, 1338~1339년 키르기스스탄의 도시 이식쿨을 덮쳤을 것이다. 오늘날 유전학적 연구에 따르면 페스트는 실크로드 네트워크 동단의 중심지에서, 즉 키르기스스탄과 황해의 중간쯤에 있는 칭하이-티베트 고원에서 발생했을 것이다

p259 논리적인 윤리 체계들은 초자연적 존재를 언급했고, 초자연적 계시를 믿는 사람들은 그런 계시를 합리적 사고와 조화시키려 했으며, 과학적 탐구를 하는 사람들은 마술적이거나 신화적인 설명을 배제하지 않았다. 예컨대 연금술은 화학의 어머니였으며, 점성술은 천체의 운행을 추적하려는 노력을 뒷받침했다

p261 이 여덟 가지 길은 서로 다르고 조금씩 겹치는 세 범주 또는 기둥으로 다시 나눌 수 있다. 첫째 기둥은 물질적 가치를 단념하고 자애롭고 비폭력적인 태도를 받아들이는 지혜와 관련이 있다. 윤리적인 둘째 기둥은 폭력, 거짓말, 도둑질, 성적 비행을 피하라고 조언한다. 셋째 기둥은 지혜와 통찰을 주고 궁극적으로 지각과 감정 너머의 상태로 인도하는 수행으 ㄹ요구한다.

p270 디오클레티아누스 황제는 북방 침입군에 맞선 로마 군단의 활약이 변변치 않은 이유가 기독교도 군단원이 전통적인 제물을 바치는 대신 성호를 그을 수 있도록 허락받아 로마의 신들이 노했기 때문이라고 확신한 뒤 한층 가혹한 박해에 나섰다

p278 전반적으로 이슬람은 바른 교리보다 바른 실천을 더 강조했다. 훌륭한 무슬림이라면 알라의 명대로 정해진 시간에 꼬박꼬박 기도하고, 자선을 베풀고, 신성한 달인 라마단 기간에 금식하고, 술을 삼가고, 옷을 수수하게 입고, 가능하다면 메카로 순례를 다녀와야 했다

p286 후원자로서 북위와 그 밖에 많은 개인들은 5세기 후반에 운강(현재의 산시성 소재)에서 주요 석굴 53개를 비롯한 수많은 석굴들의 벽을 5만 개 이상의 불상으로 장식하는 대업을 지원했다. 북위는 493년 수도를 남쪽 낙양으로 옮긴 직후 앞으로 400년간 이어질 또다른 기념비적 사업인 용문석굴 조성을 시작했다.

p301 다른 비전들은 전통에서 더 극적으로 벗어났는데, 그중 제일은 서유럽의 새로운 고딕 대성당일 것이다. 프랑스의 일부 건축가들은 반원형 아치와 궁륭을 석벽으로 지탱해야 하는 로마네스크 양식 대신 이슬람권 중동에서 몇몇 건축물에 적용된 적이 있는 첨두 아치를 채택했다. 이 선택으로 건축물의 나머지 형태도 크게 바뀌었는데, 건축물의 횡압력을 흡수하는 부벽의 버팀도리가 추가되었고, 그 덕에 반짝인 스테인드글라스를 측벽에 설치할 수 있게 되었다

p319 다이아몬드는 빙하시대 말에 순화될 가능성이 있는 동식물이 매우 불균등하게 분포했다는 부정할 수 없는 진실을 지적한다. 그런 동식물 중 절대다수는 운 좋은 위도대에서 진화했다 따라서 사람들이 어디서든 고만고만했음을 고려하면, 운 좋은 위도대의 사람들이 십중팔구 다른 장소의 사람들보다 동식물을 더 일찍 순화시켰을 것이다. 그저 운 좋은 위도대라서 그렇게 하기가 더 쉬웠기 때문이다

p330 성서의 이야기에는 여러 문제, 특히 그것이 예루살렘에서 밝혀낸 고고학적 세부 사실들과 합치하지 않는다는 문제가 있다. 모든 세부 사실을 놓고 논쟁이 벌어지긴 하지만, 많은 학자들은 솔로몬 시대로부터 수백 년 후에 성서를 쓴 저자들이 기원전 9세기와 8세기의 상황을 10세기에 투영하여 이스라엘 통일 왕국의 역략을 과장했다고 의심한다.

p339 유라시아 제국들은 각기 다르 ㄴ정도로 고가 모델을 향해 나아갔다. 고가모델은 귀족층을 효과적으로 우회하여 정부와 농민층 사이에 직접적인 연계를 확립한다는 점에서 저가 모델과 구별되었다. 이 방향으로 더 멀리 나아간 국가일수록(로마와 중국이 가장 멀리까지 나아갔고 파르티아 제국과 쿠샨 제국이 가장 적게 나아갔다) 엘리트층과 농민층을 가르는 구분선을 없애는 한편 농민들에게 토지에 대한 법적 소유권(소작인으로서 대지주의 토지를 보유할 권리가 아니라)을 주고 그 대가로 왕에게 납부하는 세금과 징집 의무를 요구하기 시작했다

p349 수나라 문제는 성공하고 유스티니아누스, 카롤루스, 알마문은 실패한 이유는 여전히 논쟁거리이지만, 문제가 거둔 성공의 결과는 분명하다. 바로 세계 조직의 중심축이 유라시아 서부에서 동부로 옮겨갔다는 것이다. 700년경 장안에는 100만 명이, 낙양에는 또다른 50만 명이 살고 있었다

p378 스와힐리 해안의 중심부를 지배하던 두 경쟁 항구 가운데 몸바사는 앞서 말했듯이 바스쿠 다가마의 선단을 멀리한 반면, 더 작은 항구 말린디의 무슬림 통치자들은 다가마의 선단을 말라바르 해안까지 안내할 도선사를 제공했다. 이때 베푼 호의는 7년 후에 보답을 받았는데, 강력하게 무장한 포르투갈 함대가 스와힐리 해안을 따라 북상하던 중 몸바사만 포격하고 말린디는 공격하지 않은 것이다.

p393 아프리카인 노예를 대규모로 사용한 것은 비용이 적게 들었기 때문이 아니다. 아프리카에서 노예를 구입해 실어오는 데에는 돈이 많이 들었다. 플랜테이션 체제가 확산됨에 따라 노예의 값은 올라갔는데, 어느 정도는 식민지에서 노예 수요가 많았기 때문이고, 어느 정도는 아프리카에서 노예를 구입하는 비용 역시 증가했기 때문이다.

p399 선박 의사의 보살핌, 최소한의 위생 준수, 충분한 식사 제공 등은 친절이 아니라 가능한 한 많은 노예를 살려서 수송하려는 노력이었다

p401 노예선으로 끌려온 사람들이 겪은 고통이야 전혀 과장이 아니지만, 노예 무역이 아프리카에서 초래한 피해는 한때 생각했던 것만큼 오래 지속되지 않았다

p413 통치자들의 권력 증대는 그 과정의 일부, 즉 한 가지 원인이자 결과였다. 하지만 그게 전부는 아니었다. 군주들은 신성한 목표를 선호했지만 어디까지나 속권과 경쟁하지 않거나 속권을 손상시키지 않는 한에서였다. 위협을 느낄 경우 국가들은 카톨리교든 개신교든 교회를 상대로 인정사정없이 한껏 권력을 휘둘렀다.

p431 과학과 종교가 서로 독립적이라는 관념은(비록 종종 주장되긴 했지만) 19세기 들어서야 비로소 널리 받아들여졌다. 그전에는 대담한 의문이 제기될 경우 이성과 실험으로 도출한 데이터와 계시를 받아 선포한 진리 사이의 대화가 서서히 오랫동안 이어졌다.

p434 영국 왕립학회는 1660년 건축가이자 천문학 교수인 크리스토퍼 렌 경이 의장을 맡은 모임에서 저명한 학자 열두 명이 물리-수학적 실험 지식을 증진하기 위해 발족했다. 그들이 모토로 채택한 호라타우스의 ‘누구의 말도 곧이곧대로 받아들이지 마라’라는 경구는 교권보다 경험의 신뢰도가 더 높다는 생각을 암시했다.

p443 페르시아와 오스만 제국도 유럽 소비자들에게 이국적인 이미지와 유럽 방식의 대안을 제공했다. 예컨대 몽테스키외의 페르시아인의 편지나 모차르트의 후궁 탈출은 전제정에 대한 비판과 동양의 관대함 및 명민함에 대한 찬사를 결합함으로써 19세기의 오리엔탈리즘을 예고했다.

p454 이븐바투타의 생애는 근대 초에 아프리카-유라시아 세계가 어떻게 연결되어 있었는지 보여주는 실례다.

p457 20세기 말에 이르러 역사가들은 유럽 중심주의를 포기하기로 합의했다. 유럽 중심주의에 따르면 근대 서양의 부상은 근대 초에 이상적인 모델 또는 기적이었고, 나머지 세계는 그 모델에 순응하지 못한 것이다. 이제 학자들은 서양의 부상을 아시아가 중심에 있는 이야기에서 일시적으로 벗어난 현상으로 재해석하기 시작했다.

p474 유럽부터 명나라와 청나라까지. 하나의 공통된 가닥이 근대 초 제국들을 연결했다. 이 제국들은 모두 역사가들이 말하는 군사 혁명. 가볍고 다루기 쉬운 화기의 도입을 계기로 일어나 혁명을 겪었다. 이런 화기의 사용법을 남자들에게 훈련시켜야 했으므로 군대를 유지하는 제도가 발전했다.

p476 발타자르 헤르비르와 앤서니 셜리 같은 사람들은 값을 치르기만 하면 어떤 후견인에게든 충성했다. 출생지, 문화적 정체성, 종교, 언어 등에 구속받지 않은 그들의 변화하는 충성은 정치적 대리인 또는 중개인이라는 직업의 직접적인 소산이었다.

p485 순교 열의와 제국에 앞서 영적 정복을 추구하려는 욕구는 십중팔구 카톨릭교도의 포부였다. 카톨릭적 맥락 밖에서 토착민이 질병으로 절멸하지 않았을 경우에는 종교적 수사가 질병의 역할을 대신했다. 극단적이되 전형적인 사례로는, 하버드에서 교육받은 역사가이자 종교 지도자로서 인디언 절멸을 지지하는 주장을 편 코튼 매더가 있다.

p493 카톨릭교와 개신교가 투쟁하는 가운데 유럽의 평범한 가정에서는 여성의 전통적인 역할-가정 일과의 수호자-이 새로이 중시되었다. 어머니는 소박한 신앙과 경건한 관행을 한 세대에서 다음 세대로 전해주는 난롯가의 복음 전도자였다.

p505 2000년 어느 학회에서 참석자들이 끊임없이 홀로세를 언급하는 데 짜증이 난데다 현대 사회들이 초래한 엄청난 변화를 잘 알고 있던 크뤼천은 불쑥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그만합시다! 우리는 더이상 홀로세에 있지 않습니다. 우리는 인류세에 있습니다”

p518 일자리는 조혼을 부추기고 출산율을 끌어올렸다. 에너지 부족, 캐내기 쉬운 석탄, 역동적이고 빠르게 성장하는 인구와 경제는 더 효율적인 석탄 채굴과 사용 방법 개발을 자극하는 강력한 유인이 되어 석탄 관련 산업에 대한 투자를 이끌어냈다.

p526 19세기 후반에 화석 연료 기술은 세계 각지로 전파되기 시작했다. 농업이 지구 구석구석까지 도달하는 데 거의 1만 년이 걸렸던 반면에 화석 연료 혁명은 두 세기 만에 세계를 일주했고, 부와 권력의 전 세계적 분포를 바꾸어 놓았다

p539 하버-보슈 공법은 공기 중 질소를 고정해 (비료의 원료인) 암모니아를 합성하는데, 질소가 워낙 안정적인 물질이라 반응을 일으키려면 에너지가 많이 필요하기 때문에 화석 연료 시대에 들어서야 비로소 실행할 수 있게 된 방법이다. 사실상 화석 연료(대부분 석유)를 음식으로 바꾸는 공법인 셈이다

p545 우리는 특히 다른 유기체들에 심대한 영향을 끼쳐왔다. 인류가 지구의 자원을 사용하면 할수록 다른 종들이 사용할 수 있는 자원은 그만큼 줄어든다. 그런 이유로 오늘날 생물의 멸종률은 지난 500만 년의 멸종률보다 1000배나 높게 나타나고 있다.

p551 프랑스 혁명이 무신론을 정치적 유행으로 만든 지 한 세기가 조금 더 지난 시점에 미래파는 신이 제거되었다며 축배를 들었다. 인간을 강력하게 그리는 이미지에서 신은 주변화된 반면, 기계는 세속화된 세계의 천사가 되었다

p556 메리 셸리는 소설 프랑켄슈타인에서 개인 과학자의 혼란한 정신에서 태어난 생명체를 묘사했으며, 근대 픽션은 대중을 마치 낭만주의적 프로메테우스의 해로운 버전처럼 구속에서 풀려나 세상을 파괴할지도 모르는 괴물로 그렸다.

p567 대중과 국가, 기술과 무신론. 이 네 기둥은 근대 후기를 지탱하는 동시에 한정해왔다. 신을 빼앗긴 세계. 비관주의와 니힐리즘을 포함하는 온갖 가능성에 열려 있는 듯한 세계라고 해서 부정적인 결과만 나타나는 것은 아니다. 무신론과 유물론은 긍정적이고 즐거운, 진정으로 에피쿠로스적인 철학을 증진할 수 있다.

p576 적어도 세계의 몇몇 큰 지역에서는 과거에 대한 체계적이고도 열렬한 관심이 증가하고 있다. 희망처럼 미래를 지향하는 개념들이 예컨대 버락 오바마의 2008년 대통령 선거 운동 등에서 이따금 다시 부각되긴 하지만, 미래를 통제할 힘은, 적어도 서구 세계와 서구화된 세계에서는 과학과 자유민주주의에 맡겨져 있다.

p586 움베르토 에코가 언젠가 말했듯이 묵시론적 인물들은 실은 체제에 가장 잘 융화되는 부류로 드러났다. 그들은 돈을 많이 벌었을 뿐 아니라 겉보기에 체제에 도전함으로써 체제의 정당성을 효과적으로 입증하기까지 했다.

p599 그러나 매우 중요한 이 위험 요인을 감안하더라도, 중국에서나 미국에서나 사람들은 본질적으로 동일한 물질문화를 바탕으로 그 문화를 조직하고 그로부터 이익을 얻는 가장 좋은 방법을 찾기 위해 경쟁하고 있었다

p619 소련에서 젊은 지도자 미하일 고르바초프가 새로 집권한 1985년부터 긴장이 완화되었따. 공산권을 강화하려던 고르바초프의 개혁 정책은 본래 의도와는 다르게 1989년 동유럽 공산주의 정권들의 몰락과 1991년 소련의 붕괴로 귀결되었다

p629 이 확산은 세계 도처에서 종족, 종교 분쟁이 부활하면서 급속이 허물어졌다. 1990년대에 정체성과 분쟁을 형성하고 표현한 것은 냉전기의 이데올로기적 분열이 아니라 지역 수준의 종족성이었다. 이 상황은 2000년대 들어 이슬람이 자유주의적 국제주의에 제동을 거는 새로운 국제주의를 제시하면서 더욱 심화되었다

p632 적어도 수렴이 발산을 밀어내는 일은 없을 것이고, 세계화의 외피 아래서 발산은 계속될 것이다. 설령 언젠가 단일한 세계 문화가 출현한다 해도 그것은 기존의 다채로운 문화들에 추가된 또하나의 문화일 것이다.

p636 현실 세계에서 구현한 유토피아적 비전에 가장 가까운 사례는 20세기에 볼셰비키와 나치가 건설한 국가다. 대다수 사람들의 궁극적인 유토피아는 적이 없는 세계이며, 그 세계를 구현하는 가장 빠른 길은 적을 몰살하는 것이다. 이상적인 사회를 찾는 것은 행복을 추구하는 것과 비슷하다. 목적지에 도착하고 나면 환상이 깨지기 마련이므로 희망을 품고 여행을 이어 가는 편이 더 낫다

p638 간단히 말해 과거의 특징을 이루어온 테마들의 전개 양상을 미래에 투영해보면, 암울한 미래가 다가올 것으로 예측된다. 미래학의 수정 구슬은 울적하리마치 뿌옇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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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 그림으로 본 조선 3 : 경기, 충청, 전라, 경상 - 과연 조선은 아름다운 실경의 나라 옛 그림으로 본 시리즈
최열 지음 / 혜화1117 / 2024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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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옛 그림으로 본 조선 3

 : 최열

 : 혜화 1117

읽은기간 : 2024/10/08 -2024/10/17


이런 책이 있는지 처음 알았다. 꽤 여러 권이 나왔는데도 몰랐다.

역시 서점에도 가고, 도서관에도 가면서 책을 찾아보는 즐거움을 꾸준히 가져야 한다.

책은 매우 두껍지만 그림이 많아 읽기가 어렵지는 않다.

다만 그림과 책의 내용이 어떨 때는 앞에, 어떨 때는 뒷페이지에 있다보니 왔다갔다 하면서 읽는 것은 좀 힘들었다.

조선의 실경을 그린 그림이 이렇게 많다는 데 놀라고, 또 그 그림이 매우 정교하다는 데 또 놀랐다. 

정교하다고 해서 사진처럼 그렸다는 말은 아니다. 그런데 그림을 보면 그 고을이 그려진다. 

중요한 건물이나 길, 강은 다 그려져 있고, 내가 볼 때는 그 고을이 또 정겹게 그려져 있다.

오래 보게 된다.. 

다른 책들도 조만간 빌려서 봐야겠다.. 좋았다. 


p31 조선시대 이루어진 유람 가운데 가장 희귀한 경우를 꼽자면 강원 원주 사람 김금원의 유람이다. 여자인 그는 남장을 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시동을 비롯해 갖출 것은 다 갖추었는데 모두 집안에서 마련한 것이다. 그의 유람 사실을 지금 알 수 있는 까닭은 바로 그가 호동서락기라는 유람기를 남겼기 때문이다.

p58 송악산은 경기 5악의 으뜸가는 산이었다. 경기 5악은 송악산과 더불어 연천의 감악산, 포천의 운악산, 가편의 화악산, 안양의 관악산이다

p61 땅은 그곳과 인연을 맺은 유명한 사람 때문에 후세에 전해지는 것이지 다만 경치가 빼어나서 전해지는 것은 아니다

p72 수도에 가까우나 섬이서 멀리 떨어진 강화는 권력에서 밀려난 학자의 은신처로 제격이었다. 하곡 정제두를 중심으로 하는 강화학파는 성리학 일변도의 학풍에서 양명학의 계보를 이어 기라성 같은 사상가를 배출했다.

p82 남쪽의 감악산은 신령한 산이다. 봉우리 정상에 높이 170센티미터의 감악산비라는 비석이 서 있어 신비를 더하고 있다.

p126 김시습이 수락산에 머물며 읊은 수락산에 남은 노을의 마지막 구절은 그리도 서글프다. “하늘 끝이 가없으니 뜻오 어찌 가 있을까. 붉은 빛 머금은 노을에 밝은 빛 흔들리네”

p137 용문사 은행나무는 후손도 가지고 있다. 오늘날 서울 노원구 중계동 은행사거리에 서 있는, 나이 600살 넘은 바로 그 은행나무다

p160 안산의 성호 땅과 단원 땅은 특별한다. 단원은 단원구 일대를 말하고 성호는 지금 경기도립미술관 앞 호수를 가리킨다. 이곳에서 두 사람이 태어났다. 성호 이익과 단원 김홍도다. 그들은 자신의 아호를 그 땅 이름에서 취했다.

p196 단양팔경은 그 아름다운 땅의 하나일 뿐 예부터 사람들은 충북 전역을 일러 맑은 바람 밝은 달이라는 뜻을 담아 청풍명월의 땅이라 하였다

p214 옛 그림 속에서 옛사람을 만나는 즐거움은 빼놓을 수 없다. 실경화에는 거의 모두 유람객이 등장한다. 하지만 숨은 그림처럼 아주 작다. 그래서 자칫 놓치기 일쑤다.

p297 전쟁이란 더욱이 약소국가가 치르는 전쟁이란 왕족과 대신이 아니라 백성들에게 가장 참혹하다. 임진왜란, 병자호란은 물론 일제를 상대로 하는 의병들의 독립전쟁 그리고 한국전쟁을 돌이켜보면 그때마다 왕족과 대신, 대통령과 국회의원 같은 통치자들은 더욱 번창했고 백성과 민인은 더욱 비참했다.

p350 북쪽의 만경강과 남쪽의 동진강 사이에 펼쳐진 김제만경 너른 들은 한반도에서 유일하게 지평선을 볼 수 있는 벌판이다. 한눈에 천리를 본다는 일목천리의 땅이라고 부른다.

p355 이매창으로 말미암아 부안에 자주 내려온 교산 허균은 이곳에서 위대한 소설 홍길동전을 지었는데, 그와 함께 이매창이 읊은 시편은 조선문학사를 비단처럼 아름답게 물들이고 있다.

p367 8킬로미터에 이르는 강천계곡 구비마다 기암괴석이 즐비하다. 1981년 최초의 군립공원으로 지정되었는데 강천사며 귀래정, 합미성, 홀어미산성 그리고 삼인대가 있어 이 땅이 아주 오랜 세월 사람의 역사가 쌓인 곳임을 알려주고 있다

p399 온화하고 평화로운 나루터라는 뜻을 품은 강진은 북으로 달빛 월악산이 하늘을 향하고 남으로 쪽빛 탐진강이 바다로 들어간다. 기름진 땅이라 곡식 또한 기름진데 그 흙으로 빚은 청자가 아름답다

p407 처음에는 몇 명에 불과했지만 이후 16명에 이르는 국사를 배출할 정도의 대가람으로 거듭났다. 불가의 세 가지 보물인 부처, 경전, 승려, 다시 말해 삼보를 갖춘 절을 삼보 사찰이라고 하는데, 16국사를 배출한 송광사는 부처의 진신사리를 모신 통도사, 최고의 경전인 대장경을 지닌 해인사와 더불어 이른바 승보 사찰로서, 삼보 사찰의 하나로 우뚝 섰다

p438 20세기까지 거의 모든 강에는 이처럼 아름다운 모래톱이 참 많았다 하지만 양쪽에 도로를 내고 뚝을 쌓는가 하면 심지어 이명박 정부 때 4대강 사업이라며 수수만년을 흐르던 강물을 가로막는 보를 여기저기 설치해놓고보니 저 금모래 은모래는 거의 다 사라지고 말았다.

p474 화폭 맨 아래쪽 물길은 바위까지 쓸어내릴 듯 엄청난 기세다. 겸재 정선은 뒷날 개성의 박연폭포, 한양의 청풍계와 인왕산을 그렸는데 마치 그 예고편처럼 보인다. 아무래도 이런 기법이 아직 숙성한 건 아니어서 거친 붓질과 흩어진 구도가 드러나는 건 어쩔 수 없다.

p521 통영은 고난에 빠진 이 난민 화가를 따스하게 품어준 고장이다. 전쟁의 참화속에서 병든 아내와 어린 두 아들을 일본으로 보낸 아픔과 굶주림에 시달리던 난민 이중섭이 이곳 통영에 왔다. 통영 나전칠기기술원양성소에 근무하고 있던 공예가이자 절친한 벗 유강열의 권유에 의한 것이었다. 통영은 외로움에 방황하던 이중섭에게 숙식과 더불어 작품 제작에 필요한 물품을 안겨주었다. 그 사랑에 힘입은 이중섭은 도원은 물론 들소 연작을 비롯해 숱한 걸작을 탄생시킨 뒤 홀연히 진주로 떠나갔다.

p526 물금이란 이름은 신기하다. 아닌 것이 없을 뿐만 아니라 금지하는 게 없다는 뜻을 지닌 물금의 유래는 신라와 가락국이 대립할 때에도 믈굼나루에서만큼은 자유롭게 왕래하는 것으로부터다. 막힘 없는 낙동강변의 자유무역 지대인 물금역은 뜻을 알아서인지 아름다운 기차역으로 여겨진다.

p561 그동안 내가 깨우친 건 이 나라 조선은 실경의 나라요, 실경의 천국이라는 점이다. 조선에 불었던 유람 열풍이 그것을 가능케했다. 이름난 산하를 찾아 훌쩍 떠나는 탐승 열풍이 일어난 건 18세기였다. 이에 호응해 유명한 명승지를 그린 그림을 방안에 걸어두고 누워 서 유람하는 와유가 커다란 인기를 끌었다. 화가들마다 앞을 다퉈 금강과 관동, 단양을 향해 발걸음을 재촉했다. 토대가 마련되자 빼어난 화가들이 혜성처럼 나타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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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럽 책방 문화 탐구 - 책세상 입문 31년차 출판평론가의 유럽 책방 문화 관찰기 책방 탐구 시리즈
한미화 지음 / 혜화1117 / 2024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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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유럽 책방 문화 탐구

 : 한미화

 : 혜화 1119

읽은기간 : 2024/09/28 -2024/10/06


이런 책 너무 좋다.

유럽을 여행하는 데 한가지 주제로 다닐 수 있게 만든다.

우리나라를 여행할 때도 가능하면 그곳의 동네 책방을 들리곤 하는데 유럽에 있는 동네책방을 들러볼 수 있는 가이드라서 더 좋다.

사실 동네책방이라고 하기엔 너무 유명하고 큰 곳이 많다. 그만큼 역사가 있는 곳이라는 뜻이리라. 

유럽도 아마존의 등장이후 동네책방이 쇠락을 겪고 있다. 그래도 잘 버텨주고 있어서 참 좋다.

없어지기 전에 방문해보고 싶은 생각뿐...



p20 긴 역사를 듣고 나면 세실 코트는 어떤 곳일까 기대되지만 막상 가보면 좀 놀란다. 아주 좁고 작은 골목에 자리한 앤티크 상점 거리다.

p43 책 좋아하는 이들이 대책 없이 빠져드는 공통 품목이 있다. 연필, 펜, 노트 등의 문구류다. 하나를 더하면 에코백이다. 정확히는 캔버스 가방이다. 그래서인지 책 관련 상품으로 많이 나온다

p49 울스틴 크로프트는 대형 체인서점 매대는 출판사의 입김으로 만들어지지만 돈트북스는 직원들의 안목과 단골 고객의 리뷰로 꾸며진다며 자부심을 내보였다. 그는 또한 돈트북스의 멤버십 회원들이 쓴 리뷰는 일반 고객들의 흥미를 이끌어내는 데 매우 유용하다고도 했다.

p66 구텐베르크 이후 500여 년이 넘는 동안 책방은 값비싼 사치품인 책을 파는 곳이자 귀족이나 부유한 사람들이 드나드는 엄숙한 지식의 전당이었다.

p82 파리에서는 말로만 그치지 않았다. 파리 시청은 정말로 두 곳의 지베르 죈을 매입했다. 미국보다 어쩌면 더한 자본주의 국가가 된 한국에 사는 나로서는 이게 과연 현실적으로 가능한 일인지 선뜻 이해하기 어려웠다

p84 작고 개성있는 가게들은 모두 임대료를 감당할 수 없어 거리를 떠나고, 그 자리에는 어디에서나 흔히 볼 수 있는 프랜차이즈 상점이 들어선다. 정겨운 골목길 풍경은 사라지고 그저 그런 동네가 되고 만다

p90 3개 층을 모두 책방으로 사용하고 있었다. 바스와 에든버러에 있는 토핑은 일부러 시간을 내서 가볼 만한 멋진 곳이었다. 궁극의 책방을 만난 느낌이었다. 보르헤스의 말을 써먹자면 책방의 천국이 있다면 바로 바스와 에든버러의 토핑이다

p107 프랑스에는 독일처럼 민족도 없고, 영국처럼 구심점이 될 여왕도 없다. 프랑스에는 오직 피를 흘리며 만들어온 공화주의 전통만이 있을 뿐이다. 공화주의 전통의 핵심은 사회 정의다. 프랑스 사람들은 사회 불의보다는 차라리 무질서를 택한다는 말이 있다

p113 자본주의가 탄생한 나라 영국에서 서비스를 결정하는 건 돈이다. 모든 가치를 돈에 따라 정확하게 결정한다. 우리나라에서는 간혹 가격은 싸지만 품질 좋은 물건이나 맛있는 음식을 접할 때가 있다. 영국에서 이런 기대는 접는 편이 좋다. 지불한 돈만큼만 서비스를 받는다.

p126 이때 실비아 비치가 나선다. 책방을 운영하던 그는 겁도 없이 이 원고를 직접 출판하기로 결심한다. 세익스피어앤드컴퍼니와 제임스 조이스는 이렇게 역사에 기록된다

p127 조지는 숙박계 대신 책방에서 하룻밤을 묵으려는 이들에게 각자의 인생에 대한 글을 쓰게 했다. 일종의 창작연습을 시킨 셈이다. 책방을 거친 이들이 쓴 약 3만 편의 글은 2016년 3대 사장인 실비아 휘트먼이 ‘내 마음의 넝마와 뼈의 책방’이라는 회고록으로 출간했다

p139 레 되 마고와 이웃한 카페 드 플로르는 1885년 시작했다 드 풀로르의 단골 명단은 어마어마하다. 생택쥐베리, 앙드로 말로, 피카소, 헤밍웨이, 기호학장인 롤랑 바르트, 대통령이 되기 전 미테랑도 있다. 영화배우 알랭 들롱이나 디자이너 라거펠트도 이곳을 좋아해 무시로 드나들었다.

p155 에든버러의 책방 중에는 조앤 롤링과 관계가 있는 곳은 없을까. 그럴리가! 로열 마일 남쪽의 주택가에 있는 에든버러 북숍에 종종 조앤 롤링이 나타나 책을 산다고 한다. 가디언은 “이런 책방이 바로 우리 동네에 있었으면 좋겠다”는 말로 이 책방의 진가를 명쾌하게 표현했다.

p184 글래드스턴 도서관은 영국에서 유일하게 잠자리를 제공하는 곳이다. 우리도 책방에서 운영하는 북스테이는 여럿 있다. 나 역시 해본 적 있지만, 도서관 스테이는 처음이었다. 방에는 텔레비전이 없고 대신 검박한 침대와 나무 책상이 있다.

p204 파리 사람들은 부키니스트가 없는 파리는 곤돌라가 없는 베네치아와 같다고 여긴다. 그런 프랑스 사람들이니 안전은 명분으로 몇백 년 동안 파리 중심부에 자리잡아온 부키니스트에게 내려진 올림픽 기간 폐쇄 명령을 가만히 보고 있을 리 없었다. 르 몽드에 곧장 실린 반박 칼럼의 첫 문장은 알베르 카뮈의 말로 시작한다. “문화를 타락시키는 모든 것은 노예의 길을 앞당긴다”

p223 긴 세월동안 블랙웰스를 사랑한 사람도 많다. 반지의 제왕을 쓴 톨킨은 블랙웰스에서 외상으로 책을 산 적이 있다. 그는 외상값을 시로 갚았다. 고블린 발이라는 톨킨의 첫 시는 이런 이유로 블랙웰스 출판사에서 발표됐다. 옥스퍼드 대학교수로 재직하며 반지의 제왕과 나니아 나라 이야기를 쓴 톨킨과 루이스를 기념하는 코너가 블랙웰스에 별도로 있다.

p237 문을 열고 들어가면 무척 넓은 메인홀에 입이 벌어진다. 네 벽에 손으로 짝 서가가 높이 서 있다. 서가가 높으면 독자는 책 속에 파묻힌 기분이 든다. 현실과 거리를 둔 은밀하고 비밀스러운 공간, 책들의 신전이다.

p251 기차역 말고 마터북스에는 유명한 게 또 있다. keep calm and carry on 이라고 쓴 포스터다. 우리말로는 침착하게 계속 나아가자 정도로 해석할 수 있겠다. 이 문구가 새겨진 머그잔이나 열쇠고리는 우리나라에서도 볼 수 있는데 그 시작이 이곳이다.

p267 서점 일기와 귀한 서점에 누추하신 분이를 읽어보면 손 비델의 위트를 느낄 수 있다. 영국 코미디를 보고 있는 듯하다. 가까운 동네책방 주인 중에 책방의 민낯을 약간은 시니컬하게 드러낸 서점 일기를 재미있게 읽었다는 이도 있었다.

p267 헤이온와이가 성공한 것은 왜일까. 헤이온와이에 가보기 전에는 특색 있는 책방들이 이루어내는 조화 덕분일 거라고 막연하게 생각했다. 막상 가보니 책도 책이지만 평온한 자연 환경이 한몫을 단단히 하고 있었다. 책을 읽으려면 여유가 필요하다. 바쁜 현대인에게 책 읽는 시간은 휴식과 같다. 아름다운 자연 아래 책방을 거니는 시간을 만끽하는 것. 그것이야말로 사람들이 이곳에 오는 이유가 아닐까

p288 P&G 웰스에는 못 갔지만, 상상의 나래 덕분에 새로운 제인 오스틴을 만났다. 200여 년 전 빅토리아 시대를 살았던 제인 오스틴의 작가의식은 어떻게 만들어졌을까. 제인 오스틴이 자신을 작가로 여겼다는 사실 자체가 놀라웠다. 그도 그럴 것이 제인 오스틴은 여성을 가정의 꽃 정도로 여겼던 빅토리아 시대를 살았고, 여성이 돈을 벌 수 있는 길이 없어 결혼이 필수인 시대를 살았다.

p304 이 책은 1791년 9월에 집필을 시작해 1792년 충분한 퇴고 없이 서둘러 출간되었다. 문법적 오류가 많고 완성도가 부족하다는 비판이 많았다. 이런 지적에 대해 울스턴 크래프트는 이렇게 말했다. “시간이 좀 더 있었더라면 더 나은 책을 쓸 수 있었겠지만 상업적인 용도로 글을 쓰는 작가로서는 다른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p317 당시 부모들은 어린이가 재미있는 이야기가 담긴 책을 읽으면 버릇없고 난폭해질 거라며 질색했다. 이 쓸데없는 걱정을 200년도 훨씬 더 지난 요즘 부모도 한다.

p335 정말로 대단한 건 따로 있다. 포터는 이렇게 벌어들인 돈으로 개발 위험에 처한 레이크 디스트릭트의 땅을 사들이고 이를 모두 내셔널 트러스트에 유증했다. 1943년 77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날때까지 사들인 토지는 농가 15채와 농장 20곳을 포함, 약 1,750만제곱미터, 530만 평이 이른다. 1,75만제곱미터란 얼마나 넓은 땅일까. 경기도 고양 일산 신도시가 1,551만 제곱미터다. 레이크 디스트릭트 국립공원으로 보호되는 지역은 모두 포터의 땅이라고 여겨도 된다. 이토록 넓은 땅을 개발위험으로부터 지켜낸 것이다. 그가 해 낸 일이 이렇게나 크고도 넓다

p339 성당에는 중요한 유물이 여럿 있다. 하나는 1217년 마그나카르타 사본이다. 또 1300년 경 만들어진 세계지도 마파문디도 남아있다. 할딩햄의 리처드라고 불리는 무명의 성직자가 송아지 가죽에 세계 지도를 새겼다. 우리가 지금 보는 세계지도와는 많이 다른, 그래서 중세 기독교인들이 세상을 어떻게 이해했는지 보여주는 귀중한 자료다.

p357 당시 서적상이 그렇듯 래킹턴 역시 출판을 겸했다. 1818년 래킹턴은 무명 작가 메리 셀리의 소설을 500부 정도 출판했다. 그 소설이 프랑켄슈타인이다. 뮤즈의 신전은 19세기 영국 출판업과 서적 유통업이 정점에 올랐음을 보여주는 신호다

p363 1812년 존 머레이 2세는 바이런의 장편 시집 차일드 헤럴드의 순례를 출간해 자신의 책방에 진열했는데, 단 5일만에 매진되었다. “자고 일어나니 유명해졌다”는 바이런의 말이 여기서 나왔다. 바이런은 뭇 여성에게 환호를 받았던 문학계 최초의 아이돌이자 우상이었다.

p381 구텐베르크는 인쇄술을 발명했지만 가난헤 허덕였다. 푸스트와 쇠퍼는 발명가는 아니지만 수완이 좋았고, 결정적으로 인쇄술 발명으로 생긴 사업 이익을 충분히 얻었다. 역사의 아이러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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향문천의 한국어 비사 - 천 년간 풀지 못한 한국어의 수수께끼
향문천 지음 / 김영사 / 2024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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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향문천의 한국어비사

 : 향문천

 : 김영사

읽은기간 : 2024/09/23 -2024/09/27


매우매우 흥미로운 책을 읽었다. 사실 한번도 생각해보지 못했던 분야다.

한국어의 어원을 찾아본다라는 주제..

내용이 쉽지는 않다. 일단 매우 낯설다. 

우리나라 언어와 일본, 거란, 중국, 여진의 언어를 비교하다니... 

더구나 현대어도 아닌 고대 한국어를 찾기위해서... 

단순히 발음이 비슷하니 이 단어가 이 단어에 영향을 받았다는 수준이 아니라 음운의 규칙성과 문화교류에 따른 음원 변화를 고려하여 찾아가는 길이라 더더욱 어려웠다. 

더구나 거란어까지 한국어의 영향을 주었다는게 신기할 따름..

사실 옆에 있는 나라들인데 영향이 없을 것이라고 생각하는게 더 이상할 수 있겠다.

전혀 생각해보지 않았던 영역이다보니 이해하기 어려운 부분도 있고, 따라가기 어려운 부분도 많았다.

역사란 정말 다양한 흥미를 끄는 분야다. 


p32 고려는 신라가 아닌 고구려를 계승한 국가였기 때문에, 고려 시대에 확립된 한국어의 뿌리는 어쩌면 고구려어에 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p43 한국어 계통론에 대한 국어학계의 전통적인 통설은 고구려어, 백제 귀족어를 부여계 언어로, 신라어, 백제 대중어를 한계 언어로 분류하는 것입니다

p54 백제가 고대 일본에 미친 문화적 영향을 잘 알려진 그대로이며, 고대 일본어가 백제어로부터 많은 어휘를 차용한 것 또한 맞습니다. 하지만 차용어는 계통적 동원어가 될 수 없습니다. 동원어는 친족 언어들 사이에서 태생적으로 가지고 있는 단어들의 집합입니다. 하지만 차용어는 원래는 없던 단어를 어느 시점에 다른 언어에서 받아들이면서 발생합니다.

p75 고대 일보넝의 위와 거란어의 우이는 무척이나 닮았습니다. 그리고 각각의 언어와 천연 관계에 있는 다른 언어에서는 이 단어가 나타나지 않습니다. 이는 곧 위와 우이가 고유어가 아니라 차용어임을 시사하며, 실제로 고대 일본어와 거란어의 사용 지역은 모두 한반도와 가까워 고대 한국어와 언어 접촉이 일어나기 쉬운 지역이었습니다.

p85 고구려의 지배를 받았던 거란인의 언어는 고대 한국어와 오랜 기간 접촉했지만, 한국어족에서 유래한 불교 관련 단어가 나타나지 않습니다. 이는 거란인이 한반도가 아닌 대륙을 경유해 불교 문화를 수용했기 때문일 것입니다.

p89 한국어족 집단은 역사적으로 숙신, 읍루, 물길, 말갈, 여진, 만주로 이어지는 한반도 인근의 퉁구스어족 세력 및 선비, 거란, 몽골 등의 선비, 몽골어족 세력과 오랜 세월 상호 언어적 영향을 주고받는 관계에 있었습니다.

p120 한국어족은 일본어족으로부터 자연과 농경에 관한 어휘를 차용했습니다. 반면 일본어족은 한국어족으로부터 기술과 문명에 관한 어휘를 차용했습니다. 이처럼 언어 접촉에 의한 영향은 쌍방향으로 발생합니다.

p143 조선의 대외전략은 큰 나라를 섬기고 이웃 나라와 화친하는 사대교린이었기에, 외국어 교육은 중대한 국책 사업이었습니다.

p148 노걸대는 몽골어, 만주어, 그리고 현전하지는 않지만 일본어로도 번역해, 흡사 전근대 동양의 로제타석이라고 불러도무방할 정도로 학술 연구에 큰 도움을 주고 있습니다.

p169 이사금은 자비로운 지배자라는 뜻이었지만, 앞서 설명한 [네세] > [노세] “자비롭다”의 음운 변화에 따라 이러한 어원 의식이 상실되었고, 대신에 발음이 같은 “이의 금”을 통해 ‘이사금’의 의미를 설명하려고 한 것입니다. 한편 일부 학자는 이사금을 현대 한국어의 임금과 관련 짓곤 하는데 ㅅ이 ㅁ으로 변화할 개연성이나 동기가 전혀 없으므로 둘은 별개의 단어로 보는 것이 옳습니다.

p175 이란국립박물관장을 역임했던 역사학자 다르유시 아크바르지데가 페르시아의 대서사시에서 극적으로 발견한 신라, 페르시아 해상 교류의 증거는 한국을 떠들석하게 했습니다. 설화상의 인물인 아비틴 왕자가 중국을 거쳐 신라로 망명한 내용을 담고 있는 영웅 서사시 쿠시나메에는 베실라라는 섬나라가 등장하는데, 베실라 왕 태후르, 왕자 카람, 공주 프라랑이 주요 인물로 등장합니다.

p266 중국에는 소비자들에게 조금이라도 더 좋은 인상을 남기기 위해 ㅇㅇ리하게 음역된 기업명이 정말로 많습니다. 가구를 제조하고 판매하는 스웨덴 기업 이케아는 “가정이 화목하다”는 뜻의 이자로, 프랑스의 소매 기업 까르푸는 “집이 즐겁고 복스럽다”는 뜻의 자러푸로, 대한민국의 소주 브랜드 처음처럼은 “처음 마시는 첫 즐거움”이라는 뜻의 “추인추러”로 음역되었습니다.

p278 중화요리 이름에서 보이는 현대 중국어의 ao와 ai가 한국어의 ㅗ와 ㅐ에 대응되는 것이 흥미롭습니다. 이는 중국을 통해 한반도 북부를 거쳐 들어온 성경 속 고유명서 파라오와 시나이산이 한국어 성경에서 바로와 시내산으로 옮겨지는 원인이 되었습니다

p293 우리가 문학 작품에서 접하는 관용구, 신문과 텔레비전에서 날마다 접하는 굳은 표현들 가운데 어느 것이 한국어 고유의 것이고 어느 것이 일본어의 표현을 빌려온 것인지 가려내기란 문자언어로 된 정보가 모든 방면에서 흘러넘치는 이 시대의 일반 언중에게는 불가능한 일입니다

p302 이것 말고도 일본어의 영향을 받기 전의 전통 한자어 혹은 한국어 고유의 신어가 많이 기록되었습니다. 이들이 한국어에서 더 이상 사용되지 않게 된 것은 단순히 아쉽다는 감상으로 끝날 만한 사건이 아닙니다. 한국어가 품고 있는 옛 전통과의 단절을 통렬히 실감하게 해주는 역사언어학적 증거인 셈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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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르투갈은 블루다 - 느릿느릿, 걸음마다 블루가 일렁일렁
조용준 지음 / 도도(도서출판) / 2022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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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포르투갈은 블루다

 : 조용준

 : 도도

읽은기간 : 2024/09/16 -2024/09/22


포르투갈에 여행을 가려고 도서관에서 책을 뒤지다가 우연히 발견한 책이다.

500페이지가 넘는 책이다보니 언제 다 읽나 이런 생각을 하며 읽기 시작했는데...

너무 재미있다.

유명한 포르투와 리스본뿐만 아니라 여행책에는 나오지도 않는 작은 지역까지 알려주고 있어서 포르투갈을 자세히 여행하는 느낌이었다.

한때는 강대국이었으나 이제는 옛날의 영광의 흔적만 가지고 있는 나라를 아줄레주로 엮어내는 글솜씨가 빼어나다. 

생각지도 못한 동네를 가보고 싶어지고, 거닐고 싶어진다. 

포르투갈의 에스프레소를 마셔보고 싶고, 양조장에서 만들어진 포르투갈 맥주를 마시고, 포투와인은 들고 석양을 즐기고 싶다. 

여행책이란 자고로 이래야지.. 


p28 유럽 열강들은 세우타를 정복하기 위해 경쟁했지만 포르투갈 아비스 왕종의 넷째왕자 엔히크가 선수를 쳤다. 싸움은 아침에 시작해 환홍 무렵에 싱겁게 끝났다. 포르투갈이 무려 238척의 배에 4만 5,000여 병력을 실어 지브롤터 해협을 건넜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사건이 세계사의 흐름을 갈랐다. 바로 이때부터 유럽이 주도하는 대항해시대와 지리상의 발견, 식민지 건설 경쟁이 봇물처럼 터졌다.

p42 이렇게 알코올 도수는 올라갔지만 발효를 도중에 막았기 때문에 포도즙 본래의 과일향이 나는 단맛이 느껴진다. 주로 적포도주가 많고 단맛 때문에 디저트 와인으로 애용된다. 반면 스페인 셰리 와인은 발효를 끝내고 브랜디를 첨가하기 때문에 굉장히 드라이하다. 주로 화이트 와인이고 아페테리프로 애용한다.

p50 도루 관광의 중심지답게 피냥 역은 그 자체로 매우 훌륭한 볼거리를 선사한다. 포르투갈은 거의 모든 역들이 아름다운 아줄레주로 장식하고 있지만 포르투의 상 벤투 역을 제외하면 아마도 피냥역이 포르투갈 전체에서 가장 아름다운 역으로 꼽히지 않을까 싶다.

p70 포르투는 포르투갈에서 제일가는 아줄레주 야외 전시장이다. 리스본의 명품 아줄레주가 잘 드러나지 않은 실내에 숨어 있는 반면, 포르투의 걸작들은 야외에 위풍당당한 풍채를 드러내놓고 있다.

p87이제 히베이라 지역의 대성당으로 가보자. 정식 명칭은 성 클라라 성당이지만, 포르투에서 가장 큰 성당이라서 그냥 대성당으로 불린다. 1387년 주앙 1세가 영국의 공주 랭커스터의 필리파와 결혼하고, 그들의 아들인 항해왕 엔히크 왕자가 세례를 받은 곳으로, 역사적으로 매우 중요한 장소다

p163 리스본 파두가 서민들의 애환과 눈물, 이별의 슬픔 등을 절절하게 노래하고 있다면, 코임브라 것은 대학 도시의 노래답게 철학적이면서도 매우 시적이거나 낭만적인 주류를 형성한다.

p176 당시는 포르투갈이 식민지 확대로 부를 누리던 시절이었다. 그 덕에 도서관에는 탐험가 페드루 알바르스 카브랄이 브라질에서 대량으로 가져온 금이 아낌없이 쓰였다. 아울러 귀중한 자단과 흑단 나무의 섬세한 목공 조각이 곁들어지고 중국풍의 금세공에다 화려한 프레스코 천장화가 입혀졌다. 금과 대리석, 정교한 프레스코 천장화로 휘황찬란하게 꾸민 도서관의 화려함에는 그 누구라도 압도되고 만다.

p218 미학적 완결성과 자연스런 형태를 비교하자면 주제파의 것에 비교할 바가 아니다. 주제파의 이 그림이야말로 가슴을 드러내놓은 마돈나, 성모 마리아의 가장 완벽한 구현이다. 오비두스 산타 마리아 성당에서도 주제파의 그림을 당연히 볼 수 있다. 성당 제단화가 바로 그녀가 그린 그림들이다. 산타 마리아 성당은 열 살의 왕 아폰수 5세가 여덟 살의 사촌 이사벨과 1444년 결혼식을 올린 유서 깊은 곳이다.

p226 이처럼 유럽 기독교 문명의 상징은 조각상에서부터 술집 간판에 이르기까지, 시간과 공간을 뛰어넘어 매우 광범위하게 일치해서 나타난다. 이게 바로 문화의 힘이다.

p238 켈트족 언어로 달을 뜻하는 신트라는 켈트족들이 달의 여신을 숭배하는 성지였고, 북아프리카 무어인들의 정착지였다. 또한 중세에는 수도사들의 은둔처였으며, 19세기에는 유럽 낭만주의 건축의 실험장소였다.

p243 물의 소중함을 알기에 요란하고 장중한 폭포보다는 소박하고 잔잔한, 고요한 연못을 좋아했다. 분수도 높이 솟구치는 것이 아니라 물줄기가 졸졸졸 흘러내리는, 그야말로 아기자기한 것들이 대부분이다. 폰치 무리스카 황동 꼭지에서 나오는 물은 너무 맑고 시원하다. 정말 약수 같다. 주변의 파란 계열 타일때문에 더욱 그런 느낌을 준다

p248 포르투갈로 돌아온 그는 신트라 왕궁을 스페인 아줄레주로 장식하라고 명령을 내린다. 그래서 레콩키스타 이후 포르투갈의 첫 아줄레주는 스페인 세비야에서 수입한 타일로 장식됐다. 어떤 백과사전에서 신트라 아줄레주는 포르투갈에서 처음으로 제작한 타일이라고 잘못 기술해놓는 바람에 많은 사람들이 이를 잘못 알고 있다.

p259 이 장식은 하늘의 별을 형상화한 문양으로 이슬람 장식 가운데 가장 미학적 완성도가 높아서 이슬람 왕궁의 특징을 가장 잘 나타내주는 요소다. 그런데 그것이 이토록 버젓이 카톨릭 군주가 거의 매일 사용하는 예배실의 제단 뒤 천장 장식으로 자리를 잡고 있다니.

p269 페나 궁전은 양파 모양의 돔, 무어식 문, 돌로 만든 뱀, 분홍색과 레몬색의 탑 등 뭔가 전체적으로 잘 조화되지 않아서 기묘하다. 여기저기 독특한 부분만 끌어다 쓰다 보니 라스베가스나 디즈니랜드처럼 놀이공원에 온 것 같고 전체적으로 일관된 특징이 없고 매우 어수선하다. 전체적인 외관도 어떻게 보면 예쁘기도 하고, 또 어떤 때는 유치한 레고 조립물 같아 보인다.

p279 호카 곶을 더욱 유명하게 만든 것은 황량한 벌판에 세워진 십자가 탑의 글귀다. 바로 카몽이스의 서사시 우스 루지아다스에서 표현한 ‘여기에서 땅이 끝나고 바다가 시작된다’는 구절이 새겨져 있는 것이다.

p335 대학은 폐쇄 당시로부터 214년이나 지난 1973년 다시 문을 열었지만, 오늘날 에보라의 인구는 중세 때보다도 더 적다.

p339 이 성당에는 안토니우 아센상이라는 이름을 가진 한 신부의 다음과 같은 시문도 내려온다. 여행자여, 어딜 그렇게 급히 가는가. 멈추어라. 더 나아가지 말아라. 지금 네 시선에 보이는 이것보다 네가 더 관심을 기울여야 할 것은 없다.

p344 프란시스코라는 이름이 주는 청빈함과는 정반대로 이 성당은 한창 잘나가던 시절 포르투갈 해외 팽창의 기념비적인 상징이기도 하다. 그래서 성당에는 주앙 2세와 마누엘 1세의 문장이 그려져 있다. 벽의 장식도 대항해시대를 찬양하는 항패 관련 모티프들로 채워져서 번영에 대한 기대감으로 들떠 있던 당시의 분위기를 반영하고 있다.

p365 베자 수녀원의 아줄레주는 포르투갈이 독자적으로 장식 타일을 생산하기 이전의 것이라는 점에서 가치가 더 있다. 이 타일은 리스본 인근 신트라 궁전의 것과 함께 포르투갈에 남아 있는 15세기 마니세스타일로, 정작 스페인에서는 찾아보기 힘든 귀중한 문화유산이다. 포르투갈이 수입산이 아니라 독자적으로 만든 타일로 아줄레주 작품을 만들기 시작한 것은 1503년께 한 기념비가 시초라고 한다.

p378 포르투갈의 레콩키스타는 1242년 알가르브의 타비라 전투로 마지막 남은 무어인들이 축출되면서 종료되었다. 타비라는 모로코에서 가장 가까운 항구이기 때문에 자연스레 무어인들의 포르투갈 진출의 교두보 역할을 했다. 그러나 무어인들이 쫓겨나자 이번에는 북아프리카로 향하는 원정대의 전초기지가 되었다. 대항해시대에 이 도시는 탐험대의 식료품을 보급하는 병참기지 역할을 담당했다.

p382 엔히크와 포르투갈의 도전이 현실적으로 매우 수익성 높은 무슬림 노예무역에서 확고한 기반을 챙기고, 서아프리카의 금과 상아를 독점하는 무슬림 사하라 카라반과 경쟁하기 위한 것이었다고 해도, 엔히크 원정대의 성적이 이교도와의 전쟁으로 확고하게 규정된 것은 너무나 당연한 일이었다. 엔히크 왕자가 출범시킨 모든 포르투갈 범선의 돛에는 항상 십자가가 크게 그려져 있었던 것도 그 때문이다.

p395 엔히크는 청교도적 삶을 산 인물은 아니었다. 사생아도 있었다. 그러나 그에게는 열정이 있었다. 권력에의 유혹을 뿌리치고 오로지 부국에의 열망과 종교적 신념에 의한 자신의 목표가 분명히 있었다.

p415 실브스는 정말 예쁜 곳이다. 왜 아일랜드 사람인 캐서린과 영국 사람이 로제가 이곳에 왔는지 충분히 공감이 간다. 날씨 화창하고 살기 좋은 곳이면 이렇듯 기후 조건이 열악한 섬나라 출신 사람들이 모여든다. 프랑스 코트다쥐로 해안의 니스나 칸도 이렇게 영국 사람들의 휴양지로 시작해 지금처럼 커진 도시다.

p434 그 구슬픈 기타하 선율과 목소리를 듣다 보면 포르투갈은 왜 슬플까라는 생각이 든다. 그런데 리스본에 와보면 그 모든게 다 저절로 이해된다. 한때는 영롱한 빛깔로 반짝반짝 빛났을 다채롭고 때깔 좋은 아줄레주로 장식한 거리와 성당과 집들. 그러나 지금은 때가 끼고 금이 가고 이빨이 빠져서 광택을 잃은 처연한 모습으로 벽을 덮고 있을 뿐이다.

p443 알파마를 얘기하면서 처음으로 손꼽아야 하는 것은 단연 파두다. 알파마야말로 파두의 자궁, 탄생지다. 파두의 출생지라서 아말리아 로드리게스의 알파마, 리카르도 히베이루의 파마 드 알파마 등 이곳에 바쳐진 곡들이 많다. 파두는 알파마의 거리, 술집과 사창가에서 처음으로 불려졌다.

p477 정작 스페인에서는 스위스의 미늘창병이 이처럼 예술작품의 대상으로 묘사돼 있는 것을 아직 본 적이 없다. 그런데 이들을 고용했던 스페인이 아니라 싸움을 벌였던 포르투갈에서 오히려 아름다운 아줄레주로 만났다.

p485 이렇게 공을 들인 성당이니만큼 중세 포르투갈의 역사에 있어매우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고 여러모로 성당의 권위를 인정받고 있다. 포르투에 대성당이 있다면, 리스본에는 상 비센트가 있다. 12세기에 상 빈센트의 주검이 알가르브에서 이곳으로 옮겨졌고, 브라간사 가문의 가족 묘지가 모셔진 신전도 있다

p494 포르투갈도 마찬가지로 어디를 가든지 파케에 서서 비카 한 잔 홀짝 마시고 자리를 뜨는 사람들을 수없이 만날 수 있다. 그 비카가 시작된 곳, 고향이 바로 카페 브라질레이라다. 그러니 리스본 여행을 제대로 즐기려면 브라질레이라에서 비카 한 잔쯤은 마셔봐야 한다.

p499 트린다드 맥줏집은 말이 맥줏집이지, 고품격의 레스토랑이면서 포르투갈에서 가장 오래된 첫 번째 맥주 양조장이다. 일단 이 맥줏집의 위치나 건물이 갖고있는 역사부터 장난이 아니다. 1294년에 세 명의 수도승이 세운 산티시마 트린다드 수도원이 대지진 이후 한동안 버려졌다가 1836년 맥주 양조장으로 변했고, 최종적으로 레스토랑이 된 것이기 때문이다.

p506 이 혼혈 효모는 와인 저장고 낮은 온도에서 발효하여 새롭고 감칠맛을 가진, 차고 신선한 새로운 맥주를 만들어냈다. 오랜 기간 동안의 상면발효 방식에 종지부를 찍게 된 것이다. 이렇게 해서 맥주라고 하면 그 유명한 옥토버페스트와 함께 가장 먼저 이름이 떠오르는 도시인 뮌헨이 있는 바이에른이야말로 하면발효 방식의 출발지가 되었다

p509 그 옛날에 수백 명의 장인들을 동원해 예배당을 조각조각 만들어 이를 무려 3척의 배에 실어 나른 다음 다시 맞추었으니 가장 많은 돈을 들인 예배당으로 전해지고 있다. 그러나 이렇게 다시 짜맞춘 탓에 성당의 구석구석을 자세히 보면 비례와 구도가 잘 맞지 않는 부분들이 많다

p517 오늘날 설탕과 담배의 글로벌화 역시 출발점이 포르투갈이다. 지금은 두 물품 모두 건강을 해치는 주범으로 지탄을 받지만, 한때 설탕과 담배가 낭만주의의 발흥에 얼마나 이바지를 했던가. 설탕은 연인과의 달콤한 사랑에, 담배는 지식인의 사색과 낭만적 고뇌에 빠져서는 안 되는 기호 품목이었다

p518 사회적 자본과 인프라 구축을 통해 부가가치를 창조했어야 할 재화들이 온통 수도원과 성당 건립, 내부의 치장에 들어가고, 그것마저도 온통 수입품으로 대체했으니 국내 문화에술의 발전은 물론이고 정치 경제 전 분야에서 낙후성을 면치 못했다

p524 시아두 옆 동네 바이후 알투는 저녁 때 가야한다. 바이후 알투는 밤에 빛나는 밤의 거리다. 좁을 골목마다 바와 비스트로가 즐비하고 흥겨운 파티가 끊이지 않는다

p528 운 좋으면 이곳에서도 제대로 된 파두를 들을 수 있지만, 격이 떨어지는 파투 공연을 볼 확률이 훨씬 높다. 그래서 파투 공연장을 찾기 전에 적당한 알코올 섭취를 권장한다. 취기가 좀 오르면 감정에 취해 싸구려 파두도 싸구려로 들리지 않을 테니까

p538 정원을 한눈에 조망할 수 있는 위치에 아주 안락한 소파를 갖다 놓은 사실도 너무 마음에 들었다. 집주인이 평소 사는 모습 그대로인 것이다. 그곳에서 차한잔 마시며 오후의 따뜻한 햇살을 받으며 편안하게 졸고 싶었다. 이곳의 이름을 포른테이라 궁전이다. 이 궁전, 엄격하게 얘기해서 사냥을 위한 별장은 17세기 리스본 근교에 지은 궁전 가운데 당시의 모습으로 유일하게 남아 있는 건축물이다.

p549 그렇게 10여 년 동안 포르투갈 여행을 다녀본 경험으로 볼 때, 포르투갈을 다섯 가지 오브제로 정리된다. 파두, 정어리, 포트와인, 블루 아줄레주 그리고 아프리카다. 이 다섯 오브제가 포르투갈을 대표하는 상징이다. 이 다섯 가지를 알면 포르투갈을 어느 정도는 파악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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