옥스퍼드 세계사
펠리페 페르난데스아르메스토 외 지음, 이재만 옮김 / 교유서가 / 2020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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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옥스포드 세계사

 : 펠리페 페르난데스 아르메스토

 : 고유서가

읽은기간 : 2024/09/18 -2024/10/28


책의 두께가 있어서인지 오랜 시간을 들여 다 읽었다.

옥스포드라는 브랜드에 혹해서 책을 샀는데 책의 전개가 내가 읽던 내용과 달라 한참을 헤매면서 읽었다.

세계사 책은 맞는데 세계사의 구분을 꽤 큰 덩어리로 구분해서 진행되다보니 읽다가 보면 어느 시대 이야기인지 헷갈릴 때가 있다.

중단원이 나눠질 때마다 기후에 대한 챕터가 있다. 기후가 변함에 따라 호모 사피엔스와 인류가 어떻게 적응하고 이동하고, 변화했는지에 대해서 알려줘서 꽤 흥미있었다.

한번에 이해할 수는 없는 책이다. 내가 전문가도 아니고, 아마추어로서 평소에 읽던 방식과 내용이 다른 책이라 몇 번은 더 읽어야 그 의미와 깊이를 알 수 있을 것 같다.

최근에 나오는 세계사책은 전통적으로 왕조와 시대를 구분하는 방식이 아닌 책들이 많아 읽기가 쉽지 않다. 여러번 읽어야 이해할 수 있다는 단점이 있지만 재미는 있다. 

지식의 부족과 머리나쁨을 탓하게 된다.

좋은 책을 읽어서 기분이 좋다. 


p11 지구사 역사가의 문제는 ‘우주의 망대에 올라선 은하계 관찰자에게는 역사가 어떻게 보일까?’ 하는 것이다

p12 발산은 우리 종이 고고학적 기록에 처음 출연했을 무렵 호모 사피엔스의 한정되고 안정된 문화가 흩어지고 스스로를 변형하여 오늘날 우리가 서로 놀랄 만큼 엄청나게 다양한 삶의 방식들로 갈라진 과정, 지구상에 거주 가능한 모든 환경을 빠짐없이 채운 과정을 나타낸다

p14 유사 이래 대체로 발산이 수렴을 앞질렀다. 다시 말해 문화들은 상호 조우와 학습에도 불구하고 갈수록 다양해졌다(점점 더 서로 달라졌다)

p18 기술은 우리가 자초한 문제들로부터 번번히 우리를 구했지만, 그 결과는 더 크고 더 위험하고 더 값비싼 해결책을 요구하는 새로운 문제들뿐이다

p22 역사학은 변화에 관한 연구다. 그런 이유로 이 책은 연대기순으로 다섯 부분으로 이루어져 있다. 각 부분에서는 우선 환경사 전문가인 한 저자가 환경 배경을 짚으면서 인간과 환경의 상호 작용을 스케치한 다음 역시 자기 분양의 전문가인 다른 저자들이 해당 기간의 문화를 다룬다

p38 빙하시대의 인류는 건장했고 보통 몸집이 컸다. 더 호리호리하고 약한 골격은 한참 후에, 홀로세에 기후가 더 온난해지고 곡물과 녹말, 탄수화물을 소화하기 쉽도록 삶아 먹는 쪽으로 식단이 변한 무렵에 나타났다

p41 기근의 위험을 줄이고 지역의 선택압에 대응하는 데는 두 가지 전술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바로 이동과 공유다. 시공간 속 인간 집단은 이동함으로써 식량 자원의 변동에 적응한다

p43 지구의 공전궤도, 자전, 자전축 기울기의 변화가 기후에 영향을 준다는 사실은 오래전부터 알려졌다. 세 변화를 각각 이심률, 세차 운동, 지구 자전축 경사각이라고 한다. 천문학 데이터를 이용해 서로 맞물리는 세 운동의 주기를 알아낼 수 있는데, 공전 궤도(이심률)의 주기는 10만년, 자전축 경사각의 주기는 4만 1000년, 세차 운동의 주기는 2만 3000년이다

p44 초기 연구에서 지난 80만년 동안 간빙기-빙하기 순환이 지질학계의 주장처럼 네 번 완료된 것이 아니라 여덟 번 완료되었다는 사실도 밝혀졌다

p64 방사성탄소 연대에 관한 연구를 통해 알타이부터 알래스카까지 거의 7000킬로미터 거리를 인간이 빠름-느림-빠름 템포로 확산되었다는 것이 밝혀졌다. 전반적인 이주 속도는 연간 0.22킬로미터였다. 이 정착 경로에서 나오는 인공물들은 뚜렷한 단일 기준 집합을 이루지 않는다

p67 700만 명은 친족 관계, 사회적 집단화, 재료 저장에 힘입어, 그리고 자원 통제 방식을, 따라서 자원 재분배 방식을 바꾼 남성 간 협력에 힘입어 지구 전역에 당도했다

p71 쇼베 동굴-발견한 세 사람이 이렇게 부르기로 했다-이 세계에서 빙하 시대 예술 작품을 가장 많이 소장하고 있는 곳이자 가장 뛰어난 예술가들이 살았던 곳(그중 일부는 3만 년도 더 전에 살았다) 중 하나라는 사실이 곧 분명해졌다

p74 사냥감과 야생 식물 작물이 풍부했고, 에너지원이 풍족했으며, 대부분의 농경 사회보다 여가 시간이 많았고, 자연을 관찰하고 그 관찰에 관해 생각하고 그 결과를 예술로 기록할 시간이 충분했다

p92 호모 사피엔스는 친척 네안데르탈인과 언제나 모호한 관계였으며, 서로 공유하던 환경에서 우리 조상들은 살아남고 네안데르탈인은 멸종한 사실은 이론가들에게 곤혹스러운 문제였다

p97 일찍이 4만 년 전부터 현지에서 구할 수 없는 귀한 품목은 분명 먼 거리를 통해 거래되었다. 기원전 3500년 무렵 카스텔 메를의 장인들이 100킬로미터 넘게 떨어진 곳에서 상아를 공급받았는가 하면, 해안에서 300킬로미터 떨어진 곳에 사는 사람들이 조개껍데기로 치장을 하기도 했다

p119 앞서 간단히 말했듯이, 호미니드 계통의 대다수 종들은 전 세계의 더욱 다양한 생태계들을 향해 대담한 여행길에 오르지 않았다. 그렇지만 호모속 중 적어도 다섯 종은 어느 시점에 아프리카 밖으로 분포 범위를 넓혔으며, 다수의 개체가 유라시아 북부 냉대선에 도달해 동물을 사냥했고, 무엇보다 콩과식물과 외떡잎식물을 비롯한 다른 음식과 고기를 섞어 식단의 균형을 맞추었다

p127 바빌로프의 분석 이래 현장 조사에 나선 고고학자들은 여러 방법으로 농경 기원지의 폭을 넓혀왔다. 바빌로프는 중심지 여덟 곳을 제시했는데, 새로운 증거가 발견되어 중심지가 적어도 열두 곳으로 늘어났다. 게다가 방사성탄소 연대 측정법이 확산되고 적용됨에 따라 중심지들의 연대가 분산되고 변화의 속도가 또다른 쟁점으로 부각되었다

p133 세계의 기후가 홀로세 중 가장 온난한 단계로, 대략 9000년 전부터 5000년 전까지 최적 기후로 이행함에 따라 구세계와 신세계의 농경 기원 중심지 몇 곳에서 촌락, 타운, 도시 등 다양한 이름으로 불려온, 정교하고 빽빽하게 들어찬 건축된 공간이 출현했다.

p151 집약농업 단계에는 몇 가지 되풀이되는 테마가 있다. 우선 농민이 특정한 농지와 장기적이고 지속적인 관계를 맺게 되었고 물의 흐름, 토양, 동물, 몇몇 작물에도 지속적으로 헌신하게 되었다. 아울러 앞날을 내다보는 투자가 그 관계의 필수적인 부분이 되었다. 에너지의 측면에서 투자는 주로 생산적인 토양에 집중되었고, 축력 및 금속 기술과도 여러모로 관련이 있었다

p155 공동체들의 이동을 추동한 주요인은 작물이나 재화보다 가축에게 풀을 먹일 필요성이었을 가능성이 높다. 그들의 이동은 내륙 아시아 산악 회랑지대(알타이산맥부터 힌두쿠시산맥까지)를 따라 이루어졌는데, 이 지대에서 네트워크가 형성되어 이후 다양한 재화와 물품을 수송하는 데 쓰였고 결국 실크로드의 전신이 되었다. 이 네트워크의 여러 단계를 바탕으로 동물과 작물, 인공물의 확산을 추적할 수 있다. 또한 방랑자들의 정체성에 대해서도 생각해볼 수 있다

p169 문명 확산론을 믿는 사람들은 올메크를 아메리카의 모체 문명으로 찬양해왔다. 확산론의 요지는, 문명이란 재능을 타고난 소수의 사람들만이 만들어낼 수 있는 비범한 성취이며 모체 문명이 덜 창의적인 다른 사람들에게 (본보기를 보이거나 가르치는 방법으로) 확산되었다는 것이다. 확산론은 거의 확실히 틀렸다. 그럼에도 올메크의 영향은 메소아메리카에서 널리 퍼지고 어쩌면 그 너머까지 확산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p176 현존하는 메소포타미아 법전과 중국 문헌에 근거해 판단하지면, 여성은 갈수록 가족에 초점을 맞추어 재능을 발휘하게 되었다

p188 아카드의 정복왕 사르곤은 고대의 위대한 제국 건설자 중 한 명이었다. 사르곤의 군대는 강 하류 지역으로 쳐들어가 그를 수메르와 아카드의 왕으로 추대했다. 현존하는 연대기 파편에서 사르곤은 “장대한 산맥을 나는 청동 도끼로 정복했다”고 선언하고 자신을 계승할 왕들에게 자기처럼 하라고 권했다. 그의 군대는 시리아와 이란까지 도달했다고 한다

p191 이집트는 메소포타미아와, 메소포타미아는 하라파와 접촉을 유지했다. 중국의 상대적 고립은 (신세계 여러 문명의 극단적인 고립과 비슷하게) 큰 강 유역 사회들이 모두 경험한 변화의 과정들 중 일부를 중국이 뒤늦게 시작한 이유일지도 모른다

p201 당시 위기의 원인은 쇠퇴하거나 실패한 국가들이 공유한 구조적 문제, 즉 생태적 취약성과 불안정하고 경쟁적인 정치에 있었다. 이 측면에서 당시 위기는 바다 민족이 이리저리 돌아다닌 지중해 동부의 문명들에 국한되지 않은 더욱 폭넓은 위기였다

p203 하라파 문명의 몰락은 기원전 제2천년기의 대규모 실패 가운데 가장 극적인 경우였다. 그렇지만 넓게 보면 하라파 문명은 히타이트나 지중해 동부 문명들과 본질적으로 같은 운명을 맞았다. 다시 말해 식량 부내 체계가 자원 기반을 넘어섰다. 그리고 권력 네트워크가 무너지기 시작할 때 침입자들이 들이닥쳤다

p213 앞서 말했듯이, 인류의 조건은 기후 최적기와 위기(청동기 시대 오랜 이후 최적기 이후 기원전 3000년경부터 시작되었다)가 번갈아 나타나는 대순환을 경험했다. 앞서 언급한 사회들은 모두 기원전 12000년경 전 지구적 위기로 고통받았을 것이다.

p217 기원전 800년경부터 흑해 북쪽 스텝 지대에서 중앙아시아와 깊은 연관이 있엇던 듯한 새로운 전사 문화인 스키타이 문화가 출현했다. 스키타이 전사는 기존의 장궁과 달리 말을 탄 채로 쓸 수 있는 짧은 복합궁을 휴대했다. 스키타이 문화는 유라시아 스텝에서 최초로 출현한 전사단의 문화였으며, 훗날 훈족과 튀르크족, 몽골족이 스키타이족의 뒤를 따를 터였다

p225 성장하는 교역은 포식성 제국이 다시 등장하도록 자극했다. 철과 강으로 만든 새로운 무기와 스텝 지대로부터 구입한 기마용 복합궁으로 군대를 무장시키고 키워간 신흥 세력들은 작은 교역국들에 공물 납부를 강요했다

p236 이 전염병은 수백 년간 창구러하고 잦아들기를 반복하다가 마침내 9세기에 사그라졌다. 유스티니아누스 역병은 홍해 교역도 덮친 것으로 보이지만, 이제는 이 역병이 가래톳 페스트였으며 중동부 아시아 스텝 지대에서 유전적으로 기원한 뒤 인도나 이란을 지나는 비단 교역로를 따라 전파되었다는 사실이 분명하게 밝혀졌다

p237 한왕조는 계절풍이 급격히 반전된 단기간에 속하는 기원후 9년부터 23년까지 잠시 전복되었지만 이내 천명을 되찾아 중국을 통치했고, 더 오래 지속된 또다른 기후 반전에 시달린 끝에 220년 결국 멸망하여 향후 400년간 이어질 전쟁과 분열의 시대를 열었다

p242 카롤루스 마르텔루스는 732년 투르-푸아티에 전투에서 군대를 이끌었고, 그의 손자 카롤루스 대제는 800년에 교황에게 대관을 받았다. 카롤루스 왕조는 사법 개혁과 카톨릭교회 지원을 통해 이후 수백 년간 이어질 중요한 발전의 토대를 놓았지만, 그 배경에는 고대 후기에 마지막으로 격렬해진 기후 변화가 있었다

p244 겨울 편서풍이 북쪽으로 이동함에 따라 지중해 지역 대부분이 훨씬 더 건조해졌으며, 중앙아시아도 마찬가지로 건조해져 14세기초까지 심각한 가뭄이 그치지 않았다. 이런 이유로 한때 중세 온난기라고 불렀던 이기간을 지금은 중세 기후 이상기라는 더 중립적인 용어로 부르고 있다

p252 중국 전체 인구는 1200년 최고치인 1억 2800만 명에서 1400년 7000만명으로 급감했다. 여진족과 몽골족 모두 특별한 기후 전환기에, 즉 중국에 한랭 건조한 겨울이, 북쪽 스텝 지대에 온난 다우한 여름이 찾아온 시기에 중국을 침공했던 것으로 보인다

p254 페스트는 1331년 중국을 강타했을 것이고, 1338~1339년 키르기스스탄의 도시 이식쿨을 덮쳤을 것이다. 오늘날 유전학적 연구에 따르면 페스트는 실크로드 네트워크 동단의 중심지에서, 즉 키르기스스탄과 황해의 중간쯤에 있는 칭하이-티베트 고원에서 발생했을 것이다

p259 논리적인 윤리 체계들은 초자연적 존재를 언급했고, 초자연적 계시를 믿는 사람들은 그런 계시를 합리적 사고와 조화시키려 했으며, 과학적 탐구를 하는 사람들은 마술적이거나 신화적인 설명을 배제하지 않았다. 예컨대 연금술은 화학의 어머니였으며, 점성술은 천체의 운행을 추적하려는 노력을 뒷받침했다

p261 이 여덟 가지 길은 서로 다르고 조금씩 겹치는 세 범주 또는 기둥으로 다시 나눌 수 있다. 첫째 기둥은 물질적 가치를 단념하고 자애롭고 비폭력적인 태도를 받아들이는 지혜와 관련이 있다. 윤리적인 둘째 기둥은 폭력, 거짓말, 도둑질, 성적 비행을 피하라고 조언한다. 셋째 기둥은 지혜와 통찰을 주고 궁극적으로 지각과 감정 너머의 상태로 인도하는 수행으 ㄹ요구한다.

p270 디오클레티아누스 황제는 북방 침입군에 맞선 로마 군단의 활약이 변변치 않은 이유가 기독교도 군단원이 전통적인 제물을 바치는 대신 성호를 그을 수 있도록 허락받아 로마의 신들이 노했기 때문이라고 확신한 뒤 한층 가혹한 박해에 나섰다

p278 전반적으로 이슬람은 바른 교리보다 바른 실천을 더 강조했다. 훌륭한 무슬림이라면 알라의 명대로 정해진 시간에 꼬박꼬박 기도하고, 자선을 베풀고, 신성한 달인 라마단 기간에 금식하고, 술을 삼가고, 옷을 수수하게 입고, 가능하다면 메카로 순례를 다녀와야 했다

p286 후원자로서 북위와 그 밖에 많은 개인들은 5세기 후반에 운강(현재의 산시성 소재)에서 주요 석굴 53개를 비롯한 수많은 석굴들의 벽을 5만 개 이상의 불상으로 장식하는 대업을 지원했다. 북위는 493년 수도를 남쪽 낙양으로 옮긴 직후 앞으로 400년간 이어질 또다른 기념비적 사업인 용문석굴 조성을 시작했다.

p301 다른 비전들은 전통에서 더 극적으로 벗어났는데, 그중 제일은 서유럽의 새로운 고딕 대성당일 것이다. 프랑스의 일부 건축가들은 반원형 아치와 궁륭을 석벽으로 지탱해야 하는 로마네스크 양식 대신 이슬람권 중동에서 몇몇 건축물에 적용된 적이 있는 첨두 아치를 채택했다. 이 선택으로 건축물의 나머지 형태도 크게 바뀌었는데, 건축물의 횡압력을 흡수하는 부벽의 버팀도리가 추가되었고, 그 덕에 반짝인 스테인드글라스를 측벽에 설치할 수 있게 되었다

p319 다이아몬드는 빙하시대 말에 순화될 가능성이 있는 동식물이 매우 불균등하게 분포했다는 부정할 수 없는 진실을 지적한다. 그런 동식물 중 절대다수는 운 좋은 위도대에서 진화했다 따라서 사람들이 어디서든 고만고만했음을 고려하면, 운 좋은 위도대의 사람들이 십중팔구 다른 장소의 사람들보다 동식물을 더 일찍 순화시켰을 것이다. 그저 운 좋은 위도대라서 그렇게 하기가 더 쉬웠기 때문이다

p330 성서의 이야기에는 여러 문제, 특히 그것이 예루살렘에서 밝혀낸 고고학적 세부 사실들과 합치하지 않는다는 문제가 있다. 모든 세부 사실을 놓고 논쟁이 벌어지긴 하지만, 많은 학자들은 솔로몬 시대로부터 수백 년 후에 성서를 쓴 저자들이 기원전 9세기와 8세기의 상황을 10세기에 투영하여 이스라엘 통일 왕국의 역략을 과장했다고 의심한다.

p339 유라시아 제국들은 각기 다르 ㄴ정도로 고가 모델을 향해 나아갔다. 고가모델은 귀족층을 효과적으로 우회하여 정부와 농민층 사이에 직접적인 연계를 확립한다는 점에서 저가 모델과 구별되었다. 이 방향으로 더 멀리 나아간 국가일수록(로마와 중국이 가장 멀리까지 나아갔고 파르티아 제국과 쿠샨 제국이 가장 적게 나아갔다) 엘리트층과 농민층을 가르는 구분선을 없애는 한편 농민들에게 토지에 대한 법적 소유권(소작인으로서 대지주의 토지를 보유할 권리가 아니라)을 주고 그 대가로 왕에게 납부하는 세금과 징집 의무를 요구하기 시작했다

p349 수나라 문제는 성공하고 유스티니아누스, 카롤루스, 알마문은 실패한 이유는 여전히 논쟁거리이지만, 문제가 거둔 성공의 결과는 분명하다. 바로 세계 조직의 중심축이 유라시아 서부에서 동부로 옮겨갔다는 것이다. 700년경 장안에는 100만 명이, 낙양에는 또다른 50만 명이 살고 있었다

p378 스와힐리 해안의 중심부를 지배하던 두 경쟁 항구 가운데 몸바사는 앞서 말했듯이 바스쿠 다가마의 선단을 멀리한 반면, 더 작은 항구 말린디의 무슬림 통치자들은 다가마의 선단을 말라바르 해안까지 안내할 도선사를 제공했다. 이때 베푼 호의는 7년 후에 보답을 받았는데, 강력하게 무장한 포르투갈 함대가 스와힐리 해안을 따라 북상하던 중 몸바사만 포격하고 말린디는 공격하지 않은 것이다.

p393 아프리카인 노예를 대규모로 사용한 것은 비용이 적게 들었기 때문이 아니다. 아프리카에서 노예를 구입해 실어오는 데에는 돈이 많이 들었다. 플랜테이션 체제가 확산됨에 따라 노예의 값은 올라갔는데, 어느 정도는 식민지에서 노예 수요가 많았기 때문이고, 어느 정도는 아프리카에서 노예를 구입하는 비용 역시 증가했기 때문이다.

p399 선박 의사의 보살핌, 최소한의 위생 준수, 충분한 식사 제공 등은 친절이 아니라 가능한 한 많은 노예를 살려서 수송하려는 노력이었다

p401 노예선으로 끌려온 사람들이 겪은 고통이야 전혀 과장이 아니지만, 노예 무역이 아프리카에서 초래한 피해는 한때 생각했던 것만큼 오래 지속되지 않았다

p413 통치자들의 권력 증대는 그 과정의 일부, 즉 한 가지 원인이자 결과였다. 하지만 그게 전부는 아니었다. 군주들은 신성한 목표를 선호했지만 어디까지나 속권과 경쟁하지 않거나 속권을 손상시키지 않는 한에서였다. 위협을 느낄 경우 국가들은 카톨리교든 개신교든 교회를 상대로 인정사정없이 한껏 권력을 휘둘렀다.

p431 과학과 종교가 서로 독립적이라는 관념은(비록 종종 주장되긴 했지만) 19세기 들어서야 비로소 널리 받아들여졌다. 그전에는 대담한 의문이 제기될 경우 이성과 실험으로 도출한 데이터와 계시를 받아 선포한 진리 사이의 대화가 서서히 오랫동안 이어졌다.

p434 영국 왕립학회는 1660년 건축가이자 천문학 교수인 크리스토퍼 렌 경이 의장을 맡은 모임에서 저명한 학자 열두 명이 물리-수학적 실험 지식을 증진하기 위해 발족했다. 그들이 모토로 채택한 호라타우스의 ‘누구의 말도 곧이곧대로 받아들이지 마라’라는 경구는 교권보다 경험의 신뢰도가 더 높다는 생각을 암시했다.

p443 페르시아와 오스만 제국도 유럽 소비자들에게 이국적인 이미지와 유럽 방식의 대안을 제공했다. 예컨대 몽테스키외의 페르시아인의 편지나 모차르트의 후궁 탈출은 전제정에 대한 비판과 동양의 관대함 및 명민함에 대한 찬사를 결합함으로써 19세기의 오리엔탈리즘을 예고했다.

p454 이븐바투타의 생애는 근대 초에 아프리카-유라시아 세계가 어떻게 연결되어 있었는지 보여주는 실례다.

p457 20세기 말에 이르러 역사가들은 유럽 중심주의를 포기하기로 합의했다. 유럽 중심주의에 따르면 근대 서양의 부상은 근대 초에 이상적인 모델 또는 기적이었고, 나머지 세계는 그 모델에 순응하지 못한 것이다. 이제 학자들은 서양의 부상을 아시아가 중심에 있는 이야기에서 일시적으로 벗어난 현상으로 재해석하기 시작했다.

p474 유럽부터 명나라와 청나라까지. 하나의 공통된 가닥이 근대 초 제국들을 연결했다. 이 제국들은 모두 역사가들이 말하는 군사 혁명. 가볍고 다루기 쉬운 화기의 도입을 계기로 일어나 혁명을 겪었다. 이런 화기의 사용법을 남자들에게 훈련시켜야 했으므로 군대를 유지하는 제도가 발전했다.

p476 발타자르 헤르비르와 앤서니 셜리 같은 사람들은 값을 치르기만 하면 어떤 후견인에게든 충성했다. 출생지, 문화적 정체성, 종교, 언어 등에 구속받지 않은 그들의 변화하는 충성은 정치적 대리인 또는 중개인이라는 직업의 직접적인 소산이었다.

p485 순교 열의와 제국에 앞서 영적 정복을 추구하려는 욕구는 십중팔구 카톨릭교도의 포부였다. 카톨릭적 맥락 밖에서 토착민이 질병으로 절멸하지 않았을 경우에는 종교적 수사가 질병의 역할을 대신했다. 극단적이되 전형적인 사례로는, 하버드에서 교육받은 역사가이자 종교 지도자로서 인디언 절멸을 지지하는 주장을 편 코튼 매더가 있다.

p493 카톨릭교와 개신교가 투쟁하는 가운데 유럽의 평범한 가정에서는 여성의 전통적인 역할-가정 일과의 수호자-이 새로이 중시되었다. 어머니는 소박한 신앙과 경건한 관행을 한 세대에서 다음 세대로 전해주는 난롯가의 복음 전도자였다.

p505 2000년 어느 학회에서 참석자들이 끊임없이 홀로세를 언급하는 데 짜증이 난데다 현대 사회들이 초래한 엄청난 변화를 잘 알고 있던 크뤼천은 불쑥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그만합시다! 우리는 더이상 홀로세에 있지 않습니다. 우리는 인류세에 있습니다”

p518 일자리는 조혼을 부추기고 출산율을 끌어올렸다. 에너지 부족, 캐내기 쉬운 석탄, 역동적이고 빠르게 성장하는 인구와 경제는 더 효율적인 석탄 채굴과 사용 방법 개발을 자극하는 강력한 유인이 되어 석탄 관련 산업에 대한 투자를 이끌어냈다.

p526 19세기 후반에 화석 연료 기술은 세계 각지로 전파되기 시작했다. 농업이 지구 구석구석까지 도달하는 데 거의 1만 년이 걸렸던 반면에 화석 연료 혁명은 두 세기 만에 세계를 일주했고, 부와 권력의 전 세계적 분포를 바꾸어 놓았다

p539 하버-보슈 공법은 공기 중 질소를 고정해 (비료의 원료인) 암모니아를 합성하는데, 질소가 워낙 안정적인 물질이라 반응을 일으키려면 에너지가 많이 필요하기 때문에 화석 연료 시대에 들어서야 비로소 실행할 수 있게 된 방법이다. 사실상 화석 연료(대부분 석유)를 음식으로 바꾸는 공법인 셈이다

p545 우리는 특히 다른 유기체들에 심대한 영향을 끼쳐왔다. 인류가 지구의 자원을 사용하면 할수록 다른 종들이 사용할 수 있는 자원은 그만큼 줄어든다. 그런 이유로 오늘날 생물의 멸종률은 지난 500만 년의 멸종률보다 1000배나 높게 나타나고 있다.

p551 프랑스 혁명이 무신론을 정치적 유행으로 만든 지 한 세기가 조금 더 지난 시점에 미래파는 신이 제거되었다며 축배를 들었다. 인간을 강력하게 그리는 이미지에서 신은 주변화된 반면, 기계는 세속화된 세계의 천사가 되었다

p556 메리 셸리는 소설 프랑켄슈타인에서 개인 과학자의 혼란한 정신에서 태어난 생명체를 묘사했으며, 근대 픽션은 대중을 마치 낭만주의적 프로메테우스의 해로운 버전처럼 구속에서 풀려나 세상을 파괴할지도 모르는 괴물로 그렸다.

p567 대중과 국가, 기술과 무신론. 이 네 기둥은 근대 후기를 지탱하는 동시에 한정해왔다. 신을 빼앗긴 세계. 비관주의와 니힐리즘을 포함하는 온갖 가능성에 열려 있는 듯한 세계라고 해서 부정적인 결과만 나타나는 것은 아니다. 무신론과 유물론은 긍정적이고 즐거운, 진정으로 에피쿠로스적인 철학을 증진할 수 있다.

p576 적어도 세계의 몇몇 큰 지역에서는 과거에 대한 체계적이고도 열렬한 관심이 증가하고 있다. 희망처럼 미래를 지향하는 개념들이 예컨대 버락 오바마의 2008년 대통령 선거 운동 등에서 이따금 다시 부각되긴 하지만, 미래를 통제할 힘은, 적어도 서구 세계와 서구화된 세계에서는 과학과 자유민주주의에 맡겨져 있다.

p586 움베르토 에코가 언젠가 말했듯이 묵시론적 인물들은 실은 체제에 가장 잘 융화되는 부류로 드러났다. 그들은 돈을 많이 벌었을 뿐 아니라 겉보기에 체제에 도전함으로써 체제의 정당성을 효과적으로 입증하기까지 했다.

p599 그러나 매우 중요한 이 위험 요인을 감안하더라도, 중국에서나 미국에서나 사람들은 본질적으로 동일한 물질문화를 바탕으로 그 문화를 조직하고 그로부터 이익을 얻는 가장 좋은 방법을 찾기 위해 경쟁하고 있었다

p619 소련에서 젊은 지도자 미하일 고르바초프가 새로 집권한 1985년부터 긴장이 완화되었따. 공산권을 강화하려던 고르바초프의 개혁 정책은 본래 의도와는 다르게 1989년 동유럽 공산주의 정권들의 몰락과 1991년 소련의 붕괴로 귀결되었다

p629 이 확산은 세계 도처에서 종족, 종교 분쟁이 부활하면서 급속이 허물어졌다. 1990년대에 정체성과 분쟁을 형성하고 표현한 것은 냉전기의 이데올로기적 분열이 아니라 지역 수준의 종족성이었다. 이 상황은 2000년대 들어 이슬람이 자유주의적 국제주의에 제동을 거는 새로운 국제주의를 제시하면서 더욱 심화되었다

p632 적어도 수렴이 발산을 밀어내는 일은 없을 것이고, 세계화의 외피 아래서 발산은 계속될 것이다. 설령 언젠가 단일한 세계 문화가 출현한다 해도 그것은 기존의 다채로운 문화들에 추가된 또하나의 문화일 것이다.

p636 현실 세계에서 구현한 유토피아적 비전에 가장 가까운 사례는 20세기에 볼셰비키와 나치가 건설한 국가다. 대다수 사람들의 궁극적인 유토피아는 적이 없는 세계이며, 그 세계를 구현하는 가장 빠른 길은 적을 몰살하는 것이다. 이상적인 사회를 찾는 것은 행복을 추구하는 것과 비슷하다. 목적지에 도착하고 나면 환상이 깨지기 마련이므로 희망을 품고 여행을 이어 가는 편이 더 낫다

p638 간단히 말해 과거의 특징을 이루어온 테마들의 전개 양상을 미래에 투영해보면, 암울한 미래가 다가올 것으로 예측된다. 미래학의 수정 구슬은 울적하리마치 뿌옇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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