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세 이야기 - 신들과 전쟁, 기사들의 시대
안인희 지음 / 지식서재 / 2021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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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중세이야기

 : 안인희

 : 지식서재

 : 2021/08/07 - 2021/09/15


시대를 구분해서 역사를 많이 이야기하지만 사실 시대를 구분하는게 쉽지는 않다.

보통은 시대의 특징이 서로 오버랩되면서 시대가 바뀌기 때문이다. 

우리가 중세라고 부르는 시대는 서로마제국이 멸망한 476년부터 동로마제국이 멸망한 1453년으로 나는 알고 있다.

이 책에서는 콜롬버스의 아메리카 발견인 1492년까지로 보고 있다.

시대를 어떻게 나누든 중세는 중세만의 특징이 있다.

기독교 중심이라는 것.

기독교가 어떻게 유럽의 중심이 되었고, 그 안에서 삶과 문학, 그리고 전쟁의 이야기가 펼쳐진다

두껍지 않은 분량에 꽤 많은 이야기가 담겨있어 저자의 필력이 대단함을 느낀다.

특히 그동안 잘 몰랐던 중세 문학, 특히 기사문학에 대해서 배웠다.

롤랑의 노래도 말만 들어봤지 내용이나 그 배경에 대해서는 잘 몰랐었는데 이 책에 자세히 나와 있어서 도움이 됐다.

유럽에 여행을 가게 되면 작은 시골 마을에 빠지지 않고 나오는 설명이 중세를 그대로 간직한 동네라는 말이다.

막상 가보면 이게 중세마을인가 싶기도 하지만 내가 보고싶은 유럽은 사실 그런 모습이긴 하다.

지금이야 낭만적으로 보이는 중세시대지만 당시 살던 사람들은 얼마나 고단했을까?

책을 읽으며 낭만만 생각한 내가 조금은 부끄러워진다.

그래도 중세가 이뻐보이고 그런 유럽을 가보고 싶은 맘은 더 커지기만 한다. 


p16 르네상스가 시작할 때에는 중세의 많은 요소가 아직 그대로 남아있었지만, 그 마지막 국민인 미술적 전성기인 16세기는 이미 중세가 끝나고 근대가 시작된 다음이었다

p22 인류의 4대 문명 발상지에 속하는 (호전적인) 메소포타미아 문명과 (평화로운) 나일 문명이 만나는 동부 지중해의 크레타 섬이 바로 고대 유럽 문명의 시작 지점이다(기원전 3000년경). 서로 이질적인 두 문명권이 만나는 곳이니, 고대 크레타 문명은 처음부터 매우 역동적이고 이동과 왕래가 빈번하고 활기에 넘쳤다

p34 그동안 그리스와 로마 사람들이 문명인으로서 유럽 역사의 주역이었다면, 이제 새로 펼쳐지는 중세에는 로마 사람들이 "야만인"이라 불렀던 유럽 북방의 게르만 사람들이 주역으로 등장했다

p38 이베리아반도에서 피레네산맥을 넘어 파죽지세로 북쪽으로 올라가던 아랍 세력을 막아낸 사람이 카를 대제(독일에서는 카를 대제, 프랑스에서는 샤를마뉴, 라틴어로는 카롤루스 대제)의 할아버지 카를 마르텔이다. 800년에 그의 손자 카를 대제가 황제가 되면서 서유럽은 조금 정신을 차리게 된다(이 시기를 카를 대제 시대의 르네상스라는 뜻으로 카롤링 왕조 르네상스라 한다)

p45 최근 연구자들은 주로 언어를 기준으로 문화를 가르고 있다. '프랑스 문화'란 프랑스어 문화를 뜻하는 것으로 본다

p55 메로빙 왕가가 힘없이 끝나고 카롤링 왕가가 시작되었다(751). 따져보면 피핀은 강력한 힘을 바탕으로 왕권을 찬탈한 인물인데, 유럽 종교 지도자인 로마 주교가 재빨리 그의 손을 들어준 것이다. 현실 정치에서 도덕성이 뒤로 밀리는 일이 어디 한두 번이던가

p65 프랑크 왕국의 카를 대왕은 이탈리아의 북부를 비잔틴 제국보다는 서유럽의 북부와 결합시켰다. 그리고 이 대관식은 비잔틴 제국과는 별개로 새로운 유럽의 시작을 알린 일이었다

p66 800년 카를 대제의 대관식은 이것을 상징하는 사건으로서, 이 해는 역사를 공부하는 사람에게는 기억하기에 편하고, 기억하면 매우 쓸모가 있는 연도이기도 하다

p68 하룬 알-라시드는 아바스 왕조의 황제로서, 이베리아반도에 자리 잡은 우마이야 왕조와 대립하고 있었다. 또한 이베리아반도의 이슬람 왕국은 앞에서 보았듯이 카를 대제가 정복하지 못한 적이었다

p81 이 문서는 위조의 시대이던 중세에 나타난 가장 유명한 위조문서의 하나다. 신앙심 깊은 수도사 한 명 도는 여러 명이 750~850년 사이에 교회에 꼭 필요하다고 생각되는 문서를 천연덕스럽게 위조했던 것이다.

p83 강력한 통치권을 기반으로 한 왕이 황제가 될 경우에만 황제의 지위도 튼튼했는데, 이 경우에도 그의 힘은 황제라는 지위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그가 실질적으로 지닌 영통의 통치권에서 나오는 것이었다

p84 8세기 말부터 본격적으로 서유럽에 출몰하기 시작한 북쪽의 해적들은 해안 지역에서 주로 수도원과 교회들을 약탈했다. 9세기가 되면서 그들의 출몰 횟수가 더욱 늘었고, 10세기가 되자 그들 중 일부가 약탈하던 지역에 차츰 눌러앉기 시작했다.

p108 1060년까지 14년동안 그는 거의 끊임없이 온갖 전쟁을 겪었다. 프랑스 왕과 앙주 백작의 합작 공격까지 막아내고 나서야 마침내 윌리엄은 확고한 승리를 거두었다

p117 이 전투에서 해럴드 왕과 두 형제가 노르만 기사들의 손에 전사했다. 윌리엄은 나중에 해럴드 왕이 쓰려져 죽은 바로 그 자리에 거대한 기념교회를 건설하게 했다. 이것이 배틀 수도원이다.

p122 그의 시대에 잉글랜드의 인구 및 재산 상태에 대한 상세한 기록이 나왔다. 이 기록은 원래는 왕의 두루마리라 불리는 것이지만, 자주 최후의 심판 책이라고도 불린다. 마치 최후의 심판을 위한 것처럼 그 무엇 하나 빼지 않고 기록했다는 뜻이다.

p129 프랑스 노르망디로 여행을 한다면 세계적으로 유명한 바이외 자수 박물관을 찾아가 보자. 저 유명한 정복자 윌리엄의 이야기를 새로운 눈길로 바라볼 수 있을 것이다.

p138 로마에서 하인리히 4세(당시 독일 왕이자 이탈리아 왕)에게 밀린 그레고리우스 7세 교황에게서 다급한 구조 요청이 왔다. 교황의 봉신이던 로베르는 아드리아해안을 버려두고 서둘로 로마로 달려가서 하인리히 4세를 쫓아내고 교황을 구출했다. 대신 그의 부하들은 로마를 잔인하게 약탈해서 교황을 곤란하게 만들었다.

p143 매우 뛰어난 교육을 받고 당대의 기독교와 아랍 세계에서 좋은 점을 모조리 받아들인 로저2세는 유럽에서 가장 부유한 통치자였으며, 서방에서는 예가 없는 하렘을 거느렸다.

p150 인기가 없는 교황이었다. 이 교황처럼 당대의 부자, 권력자, 왕 들과 대립하면서 그들의 권력을 제한한 개혁가가 고위층 사이에서 인기를 얻는다는 것은 상상할 수도 없는 일이다. 어느 시대나 마찬가지다. 다만 평신도들은 그의 개혁을 몹시 반겼다.

p165 로마카톨릭의 기틀을 세운 위대한 교황 그레고리우스는 로마에서 멀리 떨어진 살레르노에서 쓸쓸히 죽었다. 그의 마지막 말은 다음과 같다. 나는 옳은 일을 사랑하고 불의를 미워했다. 그래서 나는 유배지에서 죽는다

p182 마라트에서 한 행위는 아랍 세계에 이교도(기독교) 침입자들의 야만성과 잔인성을 알리는 예로 널리 퍼졌다고 한다. 오늘날까지도 아랍의 노래에는 "인육을 먹는 자들"이라는 말이 나오는데 이는 그 옛날 십자군 전쟁 시기에 쳐들어온 프랑크 기사들을 가리킨다고 한다

p196 프랑스 왕 필리프 4세는 이렇게 큰일을 벌여서 마련한 권력과 재물의 이점을 그리 오래 누리지는 못했다. 자크 드 믈레가 죽던 같은 해에, 극히 우유부단하던 클레멘스 교황도 죽고, 필리프 왕까지 죽었기 때문이다

p198 카페 왕조의 필리프 4세는 중세 프랑스의 왕권을 강력하게 만든 왕으로서, 교황청을 프랑스 아비뇽으로 옮겨간 사건(아비뇽 유수, 1309~1377)과 성전기사단을 파괴한 일 덕분에 특별한 역사적 의미를 얻었다

p204 3차 십자군 전쟁의 마지막에 리처드가 귀국하다 같은 편에게 포로로 잡혔다는 사정은 십자군에 동참한 유럽 영주들의 개인적 이권이 기독교 공통의 전투라는 전체 이념과 동일한 것이 될 수 없음을 분명히 보여주었다

p208 전 유럽에서 종교수호를 위해 모였들었다는 연합 군대가 성지 회복은 커녕 같은 기독교 도시를 공격하여 약탈하고 지배하는 깡패 집단으로 변질된 것이다. 이미 한 번 시작된 약탈의 버릇은 더욱 고약한 방향을 잡았다

p213 프랑크 사람들은 황금 장식품의 약탈에 열성이었지만, 베네치아 공화국은 예술품 전문가들로 이루어진 탐색조를 구성해서 가장 가치 있는 물품들을 베네치아로 가져갔다. 오늘날에도 베네치아의 총독궁전에 그때의 보물 일부가 장식 또는 전시되고 있다

p225 아키텐 공작 윌리엄 9세는 총 11편의 노래들을 남겼는데 이들이 모두 그의 작품인지 아주 분명하지는 않다. 어쨋든 그의 이름을 달고 오늘날까지 전해지고 있다.

p226 이런 모진 시험을 거친 끝에 여인들은 나그네가 다른 사람들에게 아무 말도 전하지 않으리라 믿고 그가 마음에 들어서 자기들이 하고 싶은 일을 했다. 그러니까 목욕물을 마련하고 좋은 시간을 위한 준비를 했다. 그는 거기서 8일 이상을 머물며 그들과 188번이나 섹스를 했단다

p233 앞서 3차 십자군 전쟁 이야기에서 만나본 사자심장 리처드는 헨리와 엘레오노르 사이에 태어난 셋째 왕자다. 그의 이야기와 또 다른 유명한 전설 아서 왕과 원탁의 기사들 이야기의 상당수는 잉글랜드가 아닌 프랑스를 배경으로 한다

p238 베네딕트 수도원 노래라고 불리기도 하는데, 베네딕트 수도원에서 카르미나 부라나의 중세 필사본이 발견되었기에 붙여진 이름이다. 여기 수록된 작품들은 11,12,13세기에 쓰인 것들이다. 주고 (깨진) 라틴어와 중세 도이치어가 뒤섞여 있고, 많은 작품들은 일부 또는 상당 부분이 소실되어 몹시 불완전한 형태다. 옛날 필사본에 적힌 작품들이 지닌, 피하기 힘든 운명이다

p246 역사적으로는 기독교도들끼리의 싸움이던 것이 서사시 <롤랑의 노래>에서 갑자기 기독교와 이교도의 전투로 바뀌었다

p258 중세 시대를 논하려면 정교와 카톨릭을 나누어 생각해야 한다. 정교와 카톨릭이 중세 시대인 1054년에 나뉘기 때문이다.

p265 이교도 기사나 기독교 기사나 가리지 않고 중세 기사 이야기들은 판타지 요소를 띠게 되었다. 중세 문학의 특성 중 하나가 바로 이런 판타지 요소를 지닌다는 점이다. 진지한 역사인 듯이 꾸민 이야기들에도 대부분 판타지 요소가 많이 섞여서 등장한다.

p272 크레티앵의 작품들은 1190년 무렵부터 활발해지는 중세 도이치 궁정 기사소설의 내용과 형식에 많은 영향을 미쳤다. 도이치 소설 내용의 일부가 다시 스칸디나비아반도의 작품인 에다에도 스며든 만큼, 크레티앵을 전성기 중세 유럽 문학에서 가장 중요한 선구자라고 부를만하다

p279 그들의 사랑은 처음부터 간통 이야기인데, 그들은 죽을 때까지 자기들의 사랑을 보존할 뿐만 아니라 죽은 다음 두 사람의 무덤에서 자라난 나무들까지도 서로 뒤엉켜서 굳건히 하나가 된다. 성직자 계층의 작가가 이런 간통 소설을 쓰고, 게다가 그 사랑을 찬미한다는 것이 우리에게는 그야말로 이상하고 이해하기 힘든 일이기는 하다

p284 오늘날 우리는 종교가 지배한 중세 시대 유럽 여성을이 억압을 받았을 것이라고 생각하기 쉽지만(물론 억압을 받았지만) 중세 전문가 르 고프에 따르면 중세 시대는 전반적인 생활이 후세보다 훨씬 불편한 상황에서도 여성에 대해서는 상대적으로 더 평등한 사회였다고 한다. 물론 완전한 평등이 아니라 상대적으로 그렇다는 말이다.

p286 운문 에다의 시편들은 대략 800년대부터 1300년대에 이르기까지의 긴 시간 동안 스칸디나비아반도와 아이슬란드의 여러 시인들이 쓴 시편들을 수집하여 새로 정리한 것들이다. 여기에는 40편 이상의 장시가 들어있다. 그중 16편까지가 신들의 노래이고, 그 뒤는 영웅들의 노래다

p291 대부분 젊은 대학생들로 이루어진 낭만주의 작가들은 고대 그리스 로마와는 다른, 게르만 언어와 문화의 뿌리를 중세 문헌에서 찾으려 했다. 그리고 야코프 그림의 열혈 제자 하나가 에다 문헌을 번역해서 스승에게 헌정햇다

p292 잔인하고 난폭한데도 여전히 점잖고 게다가 죽지 않는다는 그리스 신들에 비해, 게르만 신들이 지닌 그로테스크한 야만성은 현대인이 가상 세계에서 폭발시키는 난폭함과 코드가 잘 맞는 모양이다. 어쨋든 이들 게르만 신들과 수많은 중세 이야기들은 현대의 판타지 세계에서 기묘한 모습으로 부활했고, 또한 각종 변형까지도 경험하는 중이다

p296 페스트는 1347년에 시칠리아와 제노바를 거쳐 유럽 대륙에 상륙했다. 이듬해에는 벌써 피렌체, 베네치아 등 북부 이탈리아와 유럽 전역으로 퍼졌다. 이보다 몇 해 앞서서 인도와 중국에서 수많은 사람이 괴질로 쓰러졌다는 기록이 나타난다

p305 언제나 큰 재앙의 시기에는 생각 없는 인간들이 누군가를 희생양으로 삼고 싶어 하는데, 이 또한 예나 지금이나 별반 차이가 없다. 덕분에 인간이 손쓸 수 없는 두려운 상황에다가 인간의 불필요한 잔혹 행위까지 더해져서 전염병 시대의 삶은 더욱 끔찍해진다

p308 많은 이들이 좋은 것들을 소중하게 아끼고 간직했으나, 전염병이 닥치자 즐기지도 못한 채 죽거나 도망쳐야 했다. 내일을 위해 비축해 둔 것이 아무 소용 없음을 거듭 목격하고 보니, 차라리 지금 이 순간을 과도하게 즐기자는 생각이 든 것도 이해가 된다

p320 그녀는 푸아티에에서 3주에 걸쳐 성직자와 고위직 인사들의 신뢰성 검사를 통과하고, 시녀들이 수행한 처녀성 검사도 통과했다

p321 2차 종교재판에서도 그녀는 다시 이단 판정을 받은 끝에 1431년 5월에 루앙의 시장에서 화형에 처해졌다. 사후에 추종자들이 그녀를 순교자로 여겨 숭배할 성유물이 나올까봐 불에 타고 남은 재는 센강에 뿌려졌다

p340 이런 사유의 맨 앞장에 선 인물이 페트라르카다. 그는 섬세한 감수성을 소유했던 듯하다. 자연에 대한 미적 안목을 지니고 풍경과 자연을 즐기면서 그런 즐거움을 글로 남겼거니와, 유적지나 고전 서적에 대해서도 특별한 애착을 느꼈다

p348 출신을 가리지 않고 뛰어난 재능을 후원했다는 것은 이탈리아 르네상스의 가장 중요한 원동력 중 하나다

p350 르네상스 시대 전제군주들은 학자들과 예술가들을 후원하는 일을 놓고 서로 경쟁을 벌였다. 이런 경쟁 상황에서 특별히 유명한 통치자 집안들과 통치자들이 나타났다. 이들이 인문주의자와 작가들을 후원했고, 학자와 작가들은 그들의 업적을 기록하고 찬미하며 후세에 남겼다. 다만 그들이 행한 악행의 기록들도 비교적 상세히 남아있다. 자기 힘을 과시하기를 좋아한 통치자들이 건축가, 조각가, 화가 등 예술가들을 후원했다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p364 15세기 초에 태어난 마사초는 원근법을 거의 창안하다시피 하면서 미술에서 완전히 새로운 표현의 길을 열었다. 그때까지의 그림들이 2차원 화폭에서 2차원적인 표현만이 가능했다면, 28살에 요절한 이 젊은 화가는 그림에 깊이와 축을 만들어내면서 3차원의 모습을 표현하기 시작했다

p384 이들 부부 카톨릭 왕들은 교황의 칙서에 따라, 통합된 에스파냐 왕국에 종교재판 제도를 도입했다. 그들의 뒤를 이은 에스파냐 왕들은 유럽에서 가장 지독한 종교재판과 이교도 및 이단 탄압 정책을 계속해서 펼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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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흐 : 천상의 음악
존 엘리엇 가디너 지음, 노승림 옮김 / 오픈하우스 / 2020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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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 바흐, 천상의 음악

 : 존 앨리엇 가드너

 : 오픈하우스

 : 2021/06/20 - 2021/09/06


바흐를 좋아한다는 이유만으로 그냥 산 책..

집에 배달된 책을 보니 미주를 포함해서 1000페이지에 달하는 엄청난 책이다.

회사에서 점심시간에 차근차근 읽었는데 생각보다 내용이 깊어 고생했다.

바흐의 전기라기보다는 바흐의 음악의 완성도와 악보에 대한 설명위주로 되어 있어 더욱 어려웠다.

악보를 읽을 줄은 알지만 악보의 전개에 대한 지식이 없다보니 왜 아름답고 이런 주제와 선율이 왜 중요한지에 대해서는 제대로 이해가 되지 않았다. 

음악을 들으면서 읽었으면 그나마 이해를 했을지 모르겠지만 회사에서 읽다보니 음악을 들을 수 없어 작가의 설명이 마음에 막 와닿지는 않았다.

주변환경이 그렇게 어려웠음에도 음악을 향한 바흐의 열정과 음악의 완성도는 바흐가 왜 바흐인지를 설명해주는 것 같다.

저자는 바흐도 인간이었고, 실수도 많았음을 계속해서 강조하지만 내 눈에는 , 어떤 환경하에서도 굴하지 않는 바흐의 위대함만 눈에 띈다.

너무나 두꺼워 다시 읽을 엄두가 나지는 않지만 음악을 들으며 저자의 설명을 다시 들어보고 싶다. 

나의 일천한 음악지식이 한스럽다. 


p20 그가 남긴 글 중 상당수는 교회 오르간 연주에 관한 상세한 기록과 썩 훌륭한 제자들을 위한 추천서로, 재미없고 난해한 내용이다. 그다음으로 많은 내용은 시청 공무원에게 보내는 항의 서한으로, 자신의 근무여건과 불만스러운 보수를 가지고 끝없이 물고 늘어지고 있다.

p27 이 책의 목적은 작품 속 인간과의 조우에 있다. 따라서 이 책이 지향하는 바는 전통적인 전기와는 매우 다르다. 똑같은 경험과 똑같은 느낌을 다루면서 이 책은 작곡행위가 바흐에게 실제로 무슨 의미였는지 독자에게 알려주고자 한다

p43 내 속은 분노로 끓어올랐다. 어린 시절부터 알아왔던, 이 놀랄 만큼 기쁨에 찬 음악을 어떻게 이토록 점잔만 빼고 창백하게 만들어버릴 수 있을까?

p57 바흐 부고 기사에 수록된 그의 미출판 작품 리스트는 그의 아들과 제자들이 그의 칸타타를 얼마나 중요하게 여겼는지 알려준다. 그들은 바흐 작품 중 총 다섯 편의 주일 및 축일을 위한 교회음악 전곡집을 부고 기사 제일 상단에 올렸다

p95 이처럼 미신과 계몽은 대학도시 안에서도 계속 공존했으며, 지동설과 기계적 세계관이 작센의 일반 시민들에게 그리고 앞으로 살펴볼 학교 교육 침투하는 데는 굉장히 오랜 시간이 걸렸다.

p121 바흐 왕조의 근원과 발전 과정을 복원한다면 어떤 식으로든 이런 남성 편향성과 선택적 접근을 완전히 피해갈 수 있다.

p135 암브로지우스의 음악적 다재다능함, 자신의 재능에 대한 대쪽 같은 믿음, 그리고 기교적으로 정진하고자 노력했던 전후 바흐 형제 및 사촌들의 세대에서 볼 수 있는 전형적인 특징이었다

p142 그가 제바스티안이 아주 어린 시절 접한 음악적 환경 안에서 가장 흥미롭고 혁신적인 음악가였으며, 제바스티안에게 오르간 음악에 대한 첫인상을 안긴 인물이었다는 점은 거의 의심의 여지가 없다.

p158 그 자취는 오늘날 남아있지 않고, 셀 수 없이 많은 순레자들이 찾는 아이제나흐의 바흐 하우스는 2000년 가짜로 개조한 인상적인 박물관에 불과하다

p162 요한 마테존이 말했든, '창의력은 열정과 정신을 요구하며, 그 순서와 비율을 냉철히 계산해서 계획적으로 반영해야 한다' 바흐 자신도 만년에 이렇게 말했다. '내가 근면과 연습을 통해 성취한 것들은, 웬만한 재능과 능력을 타고난 사람이라면 누구나 얻을 수 있는 것이다'

p176 제바스티안 이전 세대 중 가장 위대한 바흐였던 크리스토프는 자신의 숙원이던 오르간 프로젝트가 완성되는 모습을 보지 못했고, 어린 사촌의 작곡가로서의 눈부신 발전 또한 목격하지 못했다

p191 헨델은 바흐처럼 독일 교회음악가가 될 기회가 이미 두 번이나 있었고, 두 번이나 외면했으며, 이는 -마테존의 충고도 분명 한몫했다- 오페라라는 마법의 세계에 강렬한 유혹을 느꼈기 때문이었다

p196 짧은 호흡의 스트럭처, 일관성이 결여된 음조 배열, 음악적 논거를 유지하지 못한 점, 그리고 오페라에서 걸핏하면 보이는 임시 처방과 타협들은 진지한 목적을 가진 음악가 바흐로 하여금 환멸을 느기게 했던 것 같다

p231 바흐의 작품에서는 오페라에 등장하는 허구적 드라마 인물이 아니라 다양한 위기를 관통하는 다양한 인간의 대리인들에게 안배된 아리아들을 만난다

p245 그는 민요가 품고 있는 노골적인 속악과 음란함을 신앙 예배에 전용했는데 이는 '화성의 모든 목표는 신의 영광'이라는 그의 주장을 위해서였다

p258 직장생활 내내 계속된 반대와 비판에도 꺾이지 않던 바흐의 완고한 투지, 그리고 라이프치히 토마스 교회 칸토르에 임명된 뒤 첫4년동안 1년 주기의 칸타타 사이크과 수난곡을 완성시키면서 보여준 그의 집요함을 앞으로 다시 짚어볼 것이다

p271 바흐가 생애 내내 가족들 사이에서 죽음을 자주 마주하고 고통스러워했다는 것만은 논란의 여지가 없는 사실이다. 그의 부모가 둘 다 50세를 넘기지 못했고, 20명의 바흐의 자식 중 12명이 세 살이 되기 전에 사망했다

p285 그의 개인적인 독실함, 그가 평생 루터에게 바친 숭배, 그리고 개인적,직업적 재능 양쪽 모두의 의미에서 루터의 저서에 중요성을 부여했다는 것을 넘어서, 여기서 드러나는 바는 '바흐가 분명히 적어도 2백 살은 된 사고방식에 깊이 -그리고 분명 무비판적으로- 빠져 있었다는 것이다

p291 이 모든 일은 지난 7년간 갈수록 험악해지다 폭발 직전까지 이른 바흐와 의회 사이에 벌어진 분쟁의 일부였다. 이는 '천재이면서 동시에 순종적인 직원'이 되리라는 기대를 안고 예술가를 관공서에 불러들일 대 벌어지는 고전적인 갈등이기도 하다

p303 대공의 궁정에서 일했던 15년의 시간과는 달리 바흐는 자신이 함께 일하던 조직과 높은 수준의 교회음악을 전달할 자신의 능력 사이의 절충점을 찾아야 했음에도 불구하고 이런 상황을 처리하는 데 미숙했다는 점이다

p305 그가 소란 및 폭력 행위에 연루되어 아이제나흐 교회 목사들의 골치를 석이고, 사람들 사이에 추문을 일으킨 증거는 무수히 많다

p317 왜 4주가 아닌 4개월 동안 종적을 감췄냐는 완벽하게 합리적인 의문에 대해, 바흐는 '(나의) 예술에 대해 이것저것 이해하기 위해서'였다는 압도적인 태도로 응수했다

p317 뤼백에서 인생 최고로 고무적인 만남을 경험한 뒤 돌아와 여전히 들떠 있는 바흐에게, 살면서 화성 수업이라곤 단 한 번도 받아본 적이 없는 훌륭한 의원들이 작곡과 오르간 즉흥 연주를 이렇게 하라고 가르친 것이다.

p322 북스테후데처럼 풍부한 경험을 가진 거장이 자신의 지위에서 음악을 어떻게 성취했는지 직접 목격한 스물 두 살의 바흐는 필하우젠에서 비슷한 목표를 추구하기 위해 똑같은 자율성을 보장받고자 했다

p331 이처럼 권위에 눌릴 때면, 그는 자신의 잠재력에 기대어 음악으로 가벼운 복수를 했다. 그 방식은 교묘해서 늘 본래 의도를 감췄기 대문에 우리는 물론 심지어 복수의 대상조차 고의성을 증명하지 못했다

p348 이를 실현할 수 있는 최고의 기회를 1723년 라이프치히에서 마주한 순간, 그는 이를 성취하기 위해 자신의 지위, 임금, 가족, 그리고 안락을 희생할 각오가 되어 있었던 것이다. 이후 3년동안 그는 자신의 모든 에너지를 그 꿈을 실현시키는 데 쏟아부었다. 이 분야에서 그의 창의성-이때 작곡 중이던 세 편의 칸타타 사이클과 두 편의 수난곡-은 거의 넘치는 수준에 이르렸고 구상과 실제, 가치 그 어던 면에서나 당대 다른 작곡가들을 능가했다

p359 음악가로서, 그리고 신에게 선택받은 신하로서 자신의 권위가 도전받는다고 느낄 때마다 그는 성마르고 과민해졌다

p372 그의 화성에 관한 지식은 대단히 심오해서 수학적이기가지 하다. 그의 모든 음표와 조성 하나하나가 서로 어떻게 관련되어 있는지, 화음 하나하나 , 지시 변화 하나하나가 무엇을 만들지 알고 있었다. 에마누엘이 말했듯 '그는 그것들을 완벽하게 계산해서 크고 아름다운 전체에 맞물려 다양성과 위대한 단순성을 결합시켰다'

p389 바흐는 그가 선택한 아홉 명의 희생양 중 하나에 불과했다. 하지만 그들 중 바흐만이 유일하게 샤이베의 가시 돋친 비평에 공개적으로 대응했으며, 이 순간부터 샤이베의 표적이 되었다

p395 바흐가 악보에 포함시킨 엄청난 분량의 디테일한 장식음은 그의 실제 연주 경험과 관련된 것으로, 그가 즉흥적으로 작곡하고, 다듬고, 그리고 최초의 단순한 첫 아이디어를 발전시키는 데 사용했던 다양한 전략들이 가장 훌륭한 방식으로 압축되어 있다

p437 그 어떤 장르에서든 그는 관습적으로 정해진 정서에 얽매이는 것을 거부했으며, 이와 관련해서는 그의 첫째와 둘째 아들도 명성이 자자했다

p452 그의 발은 마치 날개가 달린 듯 움직이며... 페달을 넘나들었고 그러한 움직임으로 오르간 사운드는 충만하게 채워졌으며 그곳에 참석한 이들의 귀를 천둥 번개처럼 관통했다. 그 천둥 번개는 원석을 다듬어 반지를 만들더니, 소리가 사라지자마자 바흐에게 안겨줬다

p457 니콜라이 교회와 토마스 교회의 내부 디자인은 사회적 계층에 따라 좌석을 분리함으로써 루터교도들의 통합에 정면으로 위배되어 있었다. 다만 공동 예배라는 목적 하나를 위해 이들은 이렇게 분열된 채로 한 자리에 모여 있을 뿐이었다

p470 괴테와 여타 지식인들이 훌륭한 음악 매너와 침묵하는 자기 성철의 습관(피터 게이가 19세기 절묘한 아름다움을 위한 이상적인 자기 통제, 혹은 지연된 심리적 보상이라 불렀던 것)이 무엇인지 가르치기 전, 글루크, 모차르트, 로시니, 슈포어 등 여러 작곡가들은 연주 도중 청중이 배회하는 것은물로이거니와 강물처럼 흐르는 수다와 카드게임, 소르베를 홀짝거리는 소리를 인내하는 법을 배워야 했다

p523 이 크리스마스 음악들은 정신없는 빠르기로 연주되는 작품들로 가득 차 있기 때문이다

p564 라이프치히에서 바흐가 처음 품었던 포부는 학자들의 일반적인 가정보다 훨씬 웅장했다는 것이다

p570 이 칸타타에서 만날 수 있는 바흐의 가장 매력적인 습관 중 하나는 악기의 개성을 한껏 살린다는 점이다. 표정 있는 결말을 위해 그는 각 악기를 독립적으로 사용하거나 다양한 조합을 시도한다

p576 바흐의 음악은 가사만큼이나 타협을 거부한다. 이중 푸가의 두 주제는 서로 교차하고, 한 대의 코르넷과 세 대의 트롬본으로 구성된 고풍스러운 금관 악기들이 친밀하게 합류하면서 성악파트는 2중으로 확대된다

p586 1829년 멘델스존이 요란스럽게 복원한 이래, 마태수난곡은 사실상 바흐의 천재성을 증명하는 최고의 작품으로 인정받으며 경외감에 가까운 보편적 존경심을 불러일으켰다. 이보다 짧은 요한수난곡은 1883년 마찬가지로 멘델스존에 의해 복원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오랫동안 정당한 대우를 받지 못하는 듯했다

p637 마지막 합창-유사 코랄 주의 고난이 있었기에-은 프리드리히 슈멘트가 이 노래를 재판 장면의 핵심으로 인정한 이래 학자들의 가장 큰 관심을 모아왔다

p648 성악가들의 선율은 예수의 마지막 말씀(끝났도다)에 부응한 뒤, 관례대로 연주를 완전히 멈췄다가 감바 선율이 죽어가는 종지부 위에서 다시 한번 반복된다. 그러고 난 뒤 다시 회귀하는 화려하면서도 구슬픈 감바 선율은 이 음악을 절대로 공허한 승리주의로 놔두지 않겠다는 분명한 신호다

p658 바흐의 요한수난곡이 초연 직후 정확히 1년 만에 과감하게 수정된 것을 보면 이 첫 번째 버전에 대한 목사들의 반응이 어땠는지 짐작할 수 있다. 이 수정을 통해 장엄한 오프닝 코러스와 문제적인 마지막 코랄이 삭제되었다

p664 나는 바흐의 수난곡을 떠받치고 있는 다층적 구조를 청중이, 만약 직접 보거나 들을 수 없다면, 적어도 느낄 수는 있다고 말하고 싶다

p673 1724년과 1725년 공개된 두 가지 상이한 버전의 요한 수난곡은 양쪽 모두 빠른 드라마 전개를 보여줬으며, 이를 둘러싸고 논쟁이 벌어졌다. 이후 바흐는 복음 장면들 사이에 청중에게 묵상할 시간을 더 제공할 장치를 고려하게 되었다

p676 요한 수난곡에서 즐길 수 있었던 생생한 장면 묘사와 거침없는 극적 추진력이 감소되는 대신 이 마태 수난곡에서는 정교하게 의인화된 다양한 음성들-드라마 자체(바흐가 주로 대화를 통해서만 진행시키는)에 개입되어 있을 뿐 아니라 아리아도 부르는 우화적인 요소들-과, 생산적인 긴장 상태에서 연속적이면서 거의 동시다발적으로 일어나는 이 모든 시간 변화를 유지하는 방식을 즐길 수 있다

p719 바흐는 일찍부터 (1부에서 최후의 만찬 중 성찬식 주도와 정원에서의 고뇌) 내레이션 위로 그의 존재를 끊임없이 떠올리고, 예수의 개입을- 늘 독특한 분위기를 자아내는 현악 사운드와 더불어 (십자가에서 마지막 통곡을 제외하고)- 강렬하게 각인시킨다

p731 에마누엘 바흐는 자신의 아버지에 대해 포르켈에게 말하길 '부지런히 일했고, 가사의 내용을 중시하며 단어를 이상한 자리에 잘못 배치하지 않도록 노력했고, 그렇다고 큰 그림을 훼손시켜가면서까지 단어 하나하나에 일일이 매달리지는 않았다. 그 결과물을 가지고 자칭 전문가라고 주장하지만 그렇지 못한 사람들이 감탄하는, 말도 안 되는 상황이 종종 벌어지곤 했지만 말이다

p738 바흐는 경계를 허무는 사람이었다. 용인되던 취향의 범위, 더 많은 형식적, 표현적 어휘를 수용할 수 있는 음악의 범위, 인간의 감정을 전달하고 신에게 기도하고 이웃을 교화시킬 수 있는 음악의 범위를 더 확장시키고자 했고, 이전에 자신이 무엇을 성취했든 늘 그 이상을 원했다

p762 다음에 이어지는 곡은 우리는 미약하지만 열망의 걸음으로 나아갑니다다. 아무리 상상력이 풍부한 사람이더라도 고결한 오프닝 코러스 다음에 이처럼 뜬금없이 화려하고 경박하기까지 한 이중창을 예상하기는 힘들 것이다.

p798 바흐 모테트가 보여주는 빛나는 자유, 자신의 창조주를 찬양하며 보여주는 우아한 기쁨, 그리고 죽음을 명상하는 가운데 드러나는 그의 완벽한 확신은 언젠가 죽음을 맞이해야 하는 우리의 운명에 대해 상상할 수 있는 가장 훌륭한 응답니다.

p809 새로 취임한 시장 야콥 보른은 교직임무에 더욱 충실하라고 바흐에게 직접적으로 강요했고, 의회에는 그가 일할 기미조차 보이지 않는다고 보고하면서 그로부터 보직을 박탈하고자 시도한바 있었다

p819 바흐의 미사곡은 이러한 경쟁자들을 훨씬 넘어서 있었으며, 객관적 기준으로 보더라도 독창성과 복잡함에 있어 완전히 차원이 달랐다

p844 18세기 문학 및 음악 관습상 표절은 널리 허용되긴 했지만, 헨델과 달리 바흐는 다이아몬드를 만들기 위해 다른 사람의 거친 조약돌을 가져다 쓸 필요가 없었다

p854 바흐가 이 중요한 순간과 어떤 사투를 벌였는지는 그의 자필 악보에 고통스러울 만큼 명료하게 드러난다. 이 페이지를 보면 중간 성부에 줄을 찍찍 긋고 새로 수정한 자국들로 지저분하게 어지럽혀져 있다

p881 바흐는 자신의 인생의 마지막을 되돌아보며 1723-1733년-토마스 칸토르에 취임한 때부터 작센 선제후에게 미사곡을 헌정할 때까지-을 가장 도전적이고 생산적인 10년으로 보았을 것이다

p894 카를 필립 에마누엘 바흐가 포르켈에게 한 말에 따르면, 그의 아버지는 편지를 길게 쓸 시간은 없었지만 대신 그의 집은 비둘기장처럼 늘 사람들로 북적거려서 좋은 사람들과 직접 대화를 나눌 기회를 더 많이 가졌다. 그와 어울리는 사람들은 모두 즐거워했고, 유익할 때가 많았다

p901 그의 제자 요한 필립 키른베르거에 따르면, 바흐는 '모든 것이 가능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라는 말을 입버릇처럼 달고 다녔다

p911 바흐의 인간성을 순순히 인정하면 그가 우리와 얼마나 비슷한 사람인지 보이기 시작한다. 그의 천재성을 설명하지 않으려고만 든다면(신의 선물이라든가, 혹은 유전자나 양육의 결과라든가 하는 식으로) 더욱 많은 것을 얻을 수 있다

p926 바흐는 7월 28일 오후 8시 15분이 조금 지난 직후 사망했다

p994 순례여행의 경유지로 통상적인 연주회장이 아닌 교회를 고집했습니다. 바흐의 칸타타는 연주회를 위해 작곡된 것이 아니기 때문이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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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크라테스 익스프레스
에릭 와이너 지음, 김하현 옮김 / 어크로스 / 2021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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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 소크라테스 익스프레스

 : 에릭 와이너

 : 어크로스

 : 2021/08/28 - 2021/09/05


요즘 아주 핫한 책..

철학자들의 나라의 기차를 타고 다니면서 쓴 철학 입문서이자 에세이. 

서양철학만 쓴다는 말을 듣고 싶지 않아서인지 두명의 동양철학자도 포함이 되어 있다.

그 두명이 중국과 일본이다. 

철학자라고 할 수도 없는 일본인을 끼워넣는걸 보면 역시 서양에게 동양은 중국과 일본인가보다.

나에겐 평범한 책으로 보이는데 게속 베스트셀러인걸 보면 다른 사람들에겐 꽤 재미있고 괜찮은 책인가보다.. 


2% 영국의 음악가 마일스 킹턴은 이렇게 말했다. "지식은 토마토가 과일임을 아는 것이다. 지혜는 과일 샐러드에 토마토를 넣지 않는 것이다" 지식은 안다. 지혜는 이해한다 지식은 소유하는 것이다. 지혜는 실천하는 것이다. 지혜는 기술이며, 다른 기술과 마찬가지로 습득할 수 있다.

5%마르쿠스는 제국을 통치하며 자신의 악마와 씨름을 했고, 나는 고양이에게 밥을 주며 나의 악마와 씨름을 한다

6% 흄은 꼭 그렇지는 않다고 말한다. 사실 명제에서 윤리 명제로 넘어가선 안 된다. 침대에서 나가는 것이 건강에도 좋고, 수익 창출에도 도움이 될 지 모르지만, 그렇다고 마땅히 그래야 하는 것은 아니다

7% 마르쿠스는 스스로에게 생각을 그만두고 행동에 나서라고 누차 촉구한다. 좋은 사람에 대해 설명하는 것은 관둬라. 좋은 사람이 되어라. 철학과 철학을 논하는 것의 차이는 와인을 마시는 것과 와인을 논하는 것의 차이와 같다

9% 철학자들은 거의 외계인에 가까운 이질성이 있다. 로마 황제였던 마르쿠스조차도 자신을 부적응자로 여겼다. 견유학파의 창시자인 디오게네스는 괴짜 중의 괴짜였다

10% 소크라테스가 인간 탐구에 가장 크게 기여한 것, 오늘날에도 여전히 철학적 자극을 불러일으키는 바로 그것은 이 순진한 무지, 철학자 칼 야스퍼스의 표현에 따르면 이 놀랍고 새로운 천진난만함을 도입한 것이다.

10% 이 세상에 소크라테스의 사상 같은 것은 없다. 소크라테스의 사고방식만이 있을 뿐이다. 소크라테스에게는 수단만 있을 뿐, 그 끝은 없었다

11% 좋은 하루 보내세요나 이와 비슷한 무의미한 표현 대신 우리 서로에게 느긋해지세요나 천천히 하세요라는 말로 인사해보자. 이런 명령식의 표현을 자주 말하다 보면 정말로 속도를 줄이게 될 지 누가 알겠는가

15% 행복은 붙잡으려고 애쓸수록 우리의 손가락 사이로 빠져나간다. 행복은 부산물이지, 절대 목표가 될 수 없다

16% 혼자서 두 발로 여행할 때만큼... 이렇게 생각하고, 이렇게 존재하고, 이렇게 살아 있고, 이렇게 나 자신이었던 적이 없다. 걷기는 루소를 살렸다. 또한 걷기는 루소를 죽이기도 했다

17% 루소는 글을 꾸며내지 않는다. 루소의 철학은 다음 네 어절로 요약할 수 있다. 자연은 좋고 사회는 나쁘다

21% 어떤 사람은 소로로 태어나고, 어떤 사람은 소로가 되는 데 성공한다. 대부분은 억지로 소로를 떠안는다

22% 소로가 받는 혹독한 비난은 주로 위선에 관한 것이다. 소로는 숲속에서 홀로 자족하는 척하면서 몰래 엄마 집에 들러 파이를 먹고 빨래를 맡겼다

22% 소로의 한 추종자가 말했듯, 월든은 숲속에서 살아가는 사람에 관한 책이 아니다. 월든은 삶을 살아가는 사람에 관한 책이다

24% 마르쿠스와 달리 소로는 아침형 인간이었다. 의식이 막 돌아온 순간 "꿈과 사색 사이의 그 모호한 지대"를 만끽했고, "모든 지성은 아침과 함께 깨어난다"라는 고대 인도 경전 베다의 한 구절을 즐겨 인용했다

25% 소로는 모두가 자신처럼 해야 한다고 주장한 적이 없다. 월든은 각성제로 쓰인 것이지, 처방전은 아니었다.

28% 보는 데는 시간뿐만 아니라 거리도 필요하다고, 소로가 내게 말한다. 무엇이든 제대로 보려면 거리를 두어야 한다

28% 원래 가려고 했던 쇼펜하우어 기록보관소는 문을 닫았지만 분명 문을 연 곳이 있을 것이다. 아닌가 보다. 유럽인은 공휴일에 진지하다

29% 여태껏 염세적인 철학자는 여럿 있었지만 염세주의를 진정으로 파고든 철학자는 쇼펜하우어 단 한 명뿐이다

30% 철학계의 최하층민이었던 쇼펜하우어는 비판받는 것보다 무시당하는 것이 더 가혹한 운명임을 보여주는 살아 있는 증거였다. 거의 평생 동안 그의 책은 읽히지 ㅇ낳았고 그의 생각은 사랑받지 못했다

31% 쇼펜하우어는 여기서 아무 모순도 느끼지 못했다. 이 세계는 실재로 고통이자 엄청난 오류이지만, 그 고통이 일시적으로 유예될 때가 있다. 짧은 즐거움의 순간들

33% 좋은 철학자는 좋은 청자다. 지혜가 어디에 숨어 있는지는 아무도 모르므로 이들은 얼마나 낯설든 간에 다양한 목소리를 듣는다. 아르투어 쇼펜하우어는 이국의 고대 문헌에 숨은 지혜를 발견했다

33% 쇼펜하우어가 당시로선 드물게 불교를 깊이 이해하긴 했지만 자기가 배운 바를 실천한 것은 아니었다

34% 쇼펜하우어가 옳았다. 다른 사람들의 생각으로 머리를 가득 채우면 그들의 생각이 내 생각을 밀어낸다

36% 다른 학파는 오로지 아테네의 남성 시민만 받아들인 반면 에피쿠로스는 해방 노예와 여성도 환영했고, 테미스타에게도 여러 편의 글을 헌정했다

38% 정적인 쾌락이 더 우월한 쾌락인데, 우리가 추구하는 것이 바로 그 상태이기 때문이다. 정적인 쾌락은 목표지, 수단이 아니다

38% 1417년에 포지오 브라치올리나라는 이름의 용감한 학자가 사라진 고대 유물을 찾아 남유럽을 샅샅이 뒤지다 로마의 시인 루크레티우스가 남긴 사물의 본성에 관하여의 마지막 한 부를 발견했다. 에피쿠로스 학파의 사상을 정리한 책이었다

42% 몰입을 경험하기 위해 보트로 대서양을 항해하거나 에베레스트산을 오를 필요는 없다. 그저 주의를 기울여야 할 뿐이다

43% 배유의 급진적 공감 능력은 관심에 대한 배유의 급진적 견해를 설명하는 데 도움이 된다

44% 관심의 반대말은 산만함이 아니라 조급함이다. 해결책을 찾아 나서지 말것, 기다릴 것

46% 8월 24일 저녁, 동료가 방문한 직후 배유는 코마 상태에 빠졌다. 그로부터 다섯 시간 후 시몬 베유는 사망했다. 향년 34세였다

49% 인도에서는 그 무엇도 마지막까지 끝난 것이 아니며, 심지어 마지막도 끝이 아니다. 모든 결말은 하나의 시작이다

50% 미국인 선교사 존 모트가 간디에게 평생 가장 창조적이었던 경험이 무엇이었냐고 묻자, 간디는 남아공에서 겪었던 기차 일화를 들려주었다. 조용한 결의의 순간을 창조와 동일한 것으로 본 것이다

51% 간디는 남성성에 집착했다. 그가 쓴 글에는 남자다움과 힘, 용기 같은 단어가 심심치 않게 등장한다

52% 간디는 인도의 아버지였지만 제 자식에게는 형편없는 아버지였다. 정계에서도 간디는 여러 실수를 저질렀다

52% 필요하다면 그것이 폭력이더라도 자기 의무를 다해아 한다는 것이 바가바드기타의 기존 해석이다

52% 바가바드기타는 노력과 결과를 분리하라고 가르친다. 모든 시도에는 100퍼센트의 노력을, 그 결과에는 정확히 0퍼센트의 노력만을 기울일 것

53% 다른 이를 잔인하게 대하는 사람은 곧 스스로를 잔인하게 대하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대부분의 혁명이 결국 실패로 끝나는 것이다

55% 나는 은밀하게, 깨긋하지 못하게 싸운다. 겉으로는 고분고분해 보이지만 속으로는 전쟁 중이다

58% 노자가 중국 철하계의 서핑족이라면 공자는 땍땍거리는 선생님이다

62% 일본인만큼 좁은 공간에 사는 사람은 없다. 구석 인간들이다

62% 베갯머리 서책을 영어로 옮긴 메러디스 매키니는 짤막한 글과 생각과 일화를 누빈 불규칙한 퀼트라고 말한다

63% 소로가 가르쳐주었듯이, 우리는 볼 준비가 된 것만 본다. 그리고 우리 대부분은 작은 것을 볼 준비를 갖추지 못했다

69% 니체는 여름에는 스위스에, 겨울에는 이탈리아나 남프랑스에 있었다. 니체가 가진 것이라곤 옷, 글을 쓸 종이, 옷과 종이를 담은 커다란 가방이 전부였다

70% 니체는 내게 고함을 치고 있다. 소크라테스가 물음표의 철학자였다면 니체는 느낌표의 철학자다. 니체는 느낌표를 사랑한다. 가끔은 두세 개씩 붙여 스기도 한다

74% 정원 벽 뒤에 편안하게 자리잡은 에피쿠로스 학파와 달리 스토아 학파는 모두가 지나다니고 상인들과 사제들과 매춘부들이 다 보는 앞에서 공개적으로 철학을 설파했다. 스토아학파에게 철학은 공적인 행위였다

75% 스토아철학을 실천하면 작은 기쁨을 더 섬세하게 느끼게 된다. 우리는 뜬금없이 우리가 우리라서, 우리가 우연히 살게 된 이 우주 안에서 우리가 지금 살고 있는 삶을 살고 있어서 기쁨을 느낀다

75% 스토아철학은 이처럼 우리의 통제를 벗어나는 상황과 성과를 무관한 것이라 칭한다. 이런 무관한 것들은 우리의 인성이나 행복에 티끌만큼도 보탬이 되지 않는다. 무관한 것들은 좋지도 나쁘지도 않다

79% 이성적 행동은 우주와 조화를 이루는 행동이며 거기에는 냉정한 점이 조금도 없다

82% 로마의 철학자 키케로가 말했듯이 우리가 노화 탓으로 돌리는 많은 결점은 사실 인성의 문제다

86% 나이가 들면 특이하고 놀라운 일이 벌어진다. 더 이상 다른 사람의 생각에 신경 쓰지 않게 되는 것이다. 더 정확히 말하면, 애초에 다른 사람들은 내 생각을 안 한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87% 이 나이에 공공연하게 항의하는 것을 두려워할 이유가 뭐가 있겠습니까? 이게 바로 노년의 장점 중 하나다

89% 보부아르가 나이 듦에 집착한 것처럼 몽테뉴는 죽음에, 더 정확히 말하면 죽어가는 과정에 집착했다

91% 몽테뉴는 말했다. "문이 닫혔는지 알아보려면 먼저 문을 밀어봐야 한다"

92% 죽음과 절망 모두 같은 약을 필요로 한다. 수용이다. 보부아르처럼 몽테뉴도 결국 받아들였다.

93% 시인 호라티우스는 이렇게 말한다. "새로 시작되는 매일매일이 너의 마지막 날이라고 확신하라. 그 뜻밖의 시간들을 감사하는 마음으로 받아들이게 될 것이니"

93% 내가 이번 여행에서 배운 점이 있다면 그건 바로 인식은 선택이라는 것이다. 세계는 내가 만들어낸 생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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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어쩌다 명왕성을 죽였나 - 명왕성 킬러 마이크 브라운의 태양계 초유의 행성 퇴출기
마이크 브라운 지음, 지웅배 옮김 / 롤러코스터 / 2021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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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 나는 어쩌다 명왕성을 죽였나

 : 마이크 브라운

 : 롤러코스터

 : 2021/08/25 - 2021/09/02


내가 어렸을때 행성은 수금지화목토천해명이었다.

그리고 은하철도 999에서 태양계를 빠져나가며 마지막으로 들린 곳은 명왕성이었다. 거기서 메텔은 얼음속에 누워있는 누군가를 보며 눈물을 흘린다. 

그리고 은하철도 999는 태양계를 벗어나 안드로메다로 향한다.

이렇듯 어려서부터 친숙했던 명왕성이 어느날 갑자기 행성에서 쫓겨났다.

당시 그 기사로 인터넷이 떠들석했던 기억이 난다.

그 명왕성을 쫓아내는 데 일조한 저자가 명왕성 퇴출기에 대한 글을 썼다.

사실 명왕성 퇴출기가 아니라 자신이 행성 또는 왜행성을 발견한 이야기다.

그 옛날 갈릴레오처럼 아직도 하늘을 사진으로 찍어 관찰하며 새로운 행성을 찾는 천문학자의 이야기다. 

행성을 찾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이야기가 자못 흥미롭다. 

더구나 누가 먼저 행성을 발견하고 발표하고 등록하느냐에 따라 행성의 발견자가 바뀌기 때문에 행성의 발견자들끼리 치고받고 싸우는 이야기가 추리소설도 아닌데 손에 땀을 쥐게 한다. 

반대편에 있는 사람의 이야기도 들어봐야겠지만 과학계에서도 비열한 사람들의 비열한 행동이 참 많다는 걸 느낀다. 

비록 자신이 발견한 천체가 행성이 되지 못하고 오히려 명왕성도 행성의 지위를 잃었지만 저자는 여전히 하늘을 보며 새로운 천체를 찾고 있다. 

언젠가 우리가 아직까지 발견하지 못한 어두운 행성이 9번째의 행성자리를 차지할지도 모르겠다.

그러면 우리 후손들은 수금지화목토천해x라고 외우겠지.

신비한 우주의 세계다. 


p22 지금은 비행기 옆 좌석에 앉아 있는 사람이 내게 카이퍼 벨트가 무엇인지 물어본다면 해왕성 궤도 너머 태양 주변을 둥글게 맴돌고 있는 아주 많은 작은 얼음 천체들에 관한 이야기를 자세하게 들려줄 수 있다

p35 우연히 읽은 신문 기사를 통해 그것이 실은 목성과 토성이었다는 사실을 알게 된 직후 나는 행성이란 게 단순히 포스터 속 그림이나 탐사선이 멀리서 찍어보내온 사진 속에 담긴 추상적인 개념이 아니라, 실제로 하늘 위에서 별들 사이를 떠돌아다니며 밝게 빛나는 점이라는 사실을 깨달을 수 있었다

p54 거의 비슷한 하나의 궤도 평면상에 놓여 있는 다른 행성들과 달리 명황성의 궤도는 거의 20도 가량 크게 기울어져 있었다.

p55 얼마 지나지 않아서 천문학자들은 명왕성이 사실 혼자 외롭게 태양계 가장자리를 떠도는 하나의 이상한 천체가 아니라, 카이퍼 벨트라는 더 거대한 집단의 구성원 중 하나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깨닫기 시작했다

p74 48인치 슈미트 망원경의 사진 건판은 다른 최신 망원경에서 사용하는 디지털 카메라에 비해서는 덜 민감하긴 했지만, 바닷속 거대한 고래를 잡을 수 있는 아주 큰 그물이었다

p78 지난 200년간 천문학자들이 해온 것처럼 나는 사진 속에서 무언가 움직이는 게 보이지 않는지 찾아내기 위해 사진을 분석했다

p119 그 사진들을 비교하며 아까와 마찬가지로 처음에는 없다가 새롭게 나타난 새로운 천체가 있는지를 확인했다. 놀랍게도 정말 거기에 새로운 천체가 모습을 드러냈다. 내가 예측한 바로 그 자리에 있었다. 나는 복도를 내달리며 드디어 1년 전에 찍힌 천체 X의 모습을 찾아냈다고 소리쳤다.

p127 이제 우리는 천체 X가 20년 전에는 어디에 위치했는지도 알게 됐다. 이건 우리가 천체 X의 아주 정확한 궤도를 계산할 수 있게 됐다는 뜻이었다.

p137 20개의 별 중 19개의 별은 완벽하게 똑같은 자리에 찍혀 있었다. 하지만 그중 하나는 살짝 자리가 바뀌었다. 바로 천체X였다

p154 이제 내가 직접 매일 밤샘 작업을 하면서 혼자 일을 해야 한다는 것을 의미했기 대문이다.

p155 아쉽게도 컴퓨터는 카메라 장비의 한계로 인해 생긴 밝은 반점과 실제 하늘에서 빛나는 천체의 모습을 분간하지 못했다.

p159 문제는 카메라가 너무 많은 얼룩이 찍힌다거나 소프트웨어가 잘 돌아가지 않는다는 게 아니었다. 가장 큰 진짜 문제는 나 스스로 포기하고 천문학자가 아닌 그냥 평범한 사람이 되어버렸다는 것이었다. 나는 대부분의 사람이 생각하는 대로 믿고 있었다

p169 덩치 큰 행성은 주변에 자신을 날려버릴 정도로 충분히 큰 다른 천체가 없기 때문에 깔끔한 원 궤도를 계속 유지할 수 있다. 카이퍼 벨트 전체는 너무 크기가 작아서 해왕성의 중력에 의한 영향으로 인해 크게 기울어진 타원 궤도를 갖고 있다. 따라서 더치도 멀리서 원 궤도를 그리는 행성이 아니라, 흩어져버린 카이퍼 벨트 천체일 수 있었다

p170 우리가 발견한 더치의 위치는 사실 더치가 그리는 전체 궤도에서 가장 가까이 있는 지점이었고, 더치는 바깥으로 더 멀어지는 중이었다. 그리고 더치가 태양 주변을 돌면서 그리는 궤도는 너무 크게 기울어져 있어서 궤도를 한 바퀴 완주하는데 무려 1만1000년이 걸릴 정도였다

p197 태평양을 가로질러 찾아온 겨울 폭풍 덕분에 하늘이 맑게 개고 산이 눈으로 뒤덮이는 1년 중 특별한 바로 이 순간, 동지가 지난 며칠 후 맑은 하늘에 낮게 떠 있는 정오의 태양이 눈부시게 테이블을 비추는 바로 이 순간, 딱 카페의 이 자리에 앉아 빠르게 녹고 있는 산꼭대기의 눈을 바라보며 마시는 커피 한잔만큼 내 마음을 편안하게 해주는 건 없었다

p242 과학에서는 처음으로 발표하는 사람이 승자였다. 그 에스파냐의 천문학자들이 산타를 처음 발표했고, 다라서 산타는 그들의 발견이었다.

p286 발견 자체에는 사실 과학적으로 크게 흥미로울 것이 없습니다. 빌제로 관심 있는 과학의 대부분은 발견 이후 그 천체에 대해 자세한 연구를 하면서 얻게 됩니다.

p300 대륙은 무엇을 의미할까? 내가 생각하는 대륙의 정의는 대강 이렇다. 하나의 연결된 거대한 당덩어리. 얼마나 큰가? 이 질문에 내가 줄 수 있는 유일한 답은 충분히 크다는 것뿐이다.

p338 위원회는 모든 둥근 천체를 다 행성이라고 말했다. (위성은 예외로 행성이라고 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중에서 또 카론은 예외로 행성이라고 했다) 나는 태양계에서 이 기준에 부합하는 천체가 약 200개는 된다고 추정했찌만, 국제천문연맹은 자기들만의 셈법에 따라 겨우 열두 개뿐이라고 이야기했다.

p347 프라하 현장에서는 분명하게 명왕성을 지지하는 비밀 위원회 사람들이 분명하게 명왕성은 행성이 되어서는 안된다고 생각하는 다수의 사람들 몰래 투표 결과와 상관없이 명왕성을 그대로 행성으로 유지하도록 하는 문구를 넣을 것이라는 우주적 불신이 치솟고 있었다

p351 1930년 명왕성이 처음 발견됐을 때는 그것을 부를 만한 다른 좋은 방법이 없었지만, 이제 우리는 명왕성이 해왕성 너머 궤도를 돌고 있는 수천 개의 천체 중 하나에 불과하다는 걸 알고 있습니다.

p379 한동안 제나라는 별명으로 불렸던 가장 거대한 왜소행성은 금세기 천문학계에서 가장 거대했던 결전을 일으켰고, 명왕성을 죽였다. 그리고 이제 그리스 신화 속 갈등과 불화를 상징하는 여신 에리스의 이름으로 불리게 됐다.

p391 여신 하우메아는 자신의 몸 일부를 떼어내서 자식들을 낳았다. 왜소행성 산타도 자신의 몸이 부서지면서 만들어진 자식들이 태양계 곳곳에 퍼져있었다.

p397 그녀는 다시 시내에 나갔을 때 기쁜 마음으로 샴페인을 가지고 왔다. 하지만 결국 에리스는 열 번째 행성이 되지 못했다. 그 대신 나는 아홉 번째 행성을 죽인 킬러가 됐다. 샴페인은 장례식에서 마시기에는 적합하지 않은 술이다.

p404 행성은 실제 하늘에 존재한다. 매일 밤마다 하늘에서 행성이 무엇을 하고 있는지를 보라. 행성은 계속 움직이고 하늘을 떠돌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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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사랑한 화가들 - 살면서 한 번은 꼭 들어야 할 아주 특별한 미술 수업
정우철 지음 / 나무의철학 / 2024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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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 내가 사랑한 화가들

 : 정우철

 : 나무의 철학

 : 2021/08/21 - 2021/08/27


특별히 기대를 하고 읽은 책은 아닌데 생각보다 재미있었다.

덕분에 책읽는 일주일동안 아주 즐거웠다.

피카소나 고갱 같은 화가의 내용만 들어서 그런지, 화가 하면 자유분방하고 생활도 난잡한 사람인줄만 알았는데 의외로 순정파도 많고 무하처럼 너그러운 사람도 많다.

첫번째로 소개한 샤갈의 그림은 몇년 전 전시회가 있어서 아이랑 다녀온 적이 있다. 내게 샤갈은 샤갈의 눈내리는 마을이라는 제목으로나 알려진 존재이지 누군지, 어떤 그림을 그리는지 잘 몰랐다. 이 책에서도 날아다니는 그림을 보며 저게 무슨 뜻일까 하는 생각을 많이 했는데 이 날아다니는 모습이 샤갈과 그의 부인이고, 또 그의 그림에 날으는 사람이 얼마나 큰 의미인지 배웠다. 

제일 인상깊은 화가는 알폰소 무하였다.

체코의 성비타 성당에 가서 그의 모자이크 그림을 봤을 때 재미있다는 생각만 했었는데 이렇게 너그럽고, 애국적이었던 좋은 사람인줄은 몰랐다. 무하에 대해서 더 알고 싶어졌다.

책을 읽으며 새롭게 깨닫고 또 다른 무언가를 알고 싶게 만드는 것이야말로 그 책에 대한 최고의 칭찬 아닐까?

좋은 책을 읽어서 참 좋았다. 


6% 샤갈의 인생을 따라가면서 느낀 건, 그는 스스로 희망을 선택하고 만들어내는 사람이었다는 거예요

8% 샤갈의 어머니가 화가의 꿈을 지원해주었다면 어렸을 때부터 함께했던 연인 벨라 로젠벨트는 그를 세계적인 화가로 키워준 인물이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10% 그는 자신의 전부인 벨라에게 다가가 뜨겁게 키스합니다. 그림 속 강렬한 붉은색에서 그날 둘의 감정이 느껴지지 않나요? 이때 샤갈은 마치 자신의 온몸이 공중에 붕 뜨는 것 같은 기분이었다고 해요

12% 유대인 숙청에 앞장섰던 히틀러가 샤갈을 콕 집어 제거해야 할 예술가로 언급했거든요. 1937년 퇴폐 미술전을 열어 샤갈의 그림을 걸어놓고 삐뚤어진 유대인 영혼을 보여주는 작품이라며 조롱하기도 했고요

16% 아버지의 바람대로 안정된 삶을 살던 청년 마티스는 결국 스스로 선택한 인생을 살기 위해 법률사무소를 그만두고 미술학교에 입학해요. 이런 여정을 보면 누구에게나 인생에 한번쯤은 운명을 바꿀 기회가 찾아오는 듯합니다

19% 나는 내 노력을 드러내려 하지 않았고, 그저 내 그림들이 봄날의 밝은 즐거움을 담기를 바랐다. 내가 얼마나 노력했는지는 아무도 모르게 말이다

22% 성당 내부에는 웅장하거나 화려하지는 않지만 마티스가 추구했던 예술의 지향점이었던 단순함, 명쾌함을 살린 성 도미니크, 십자가의 길 벽화 등이 가득했고 창문에는 푸른색, 초록색, 노란색으로 표현한 생명의 나무가 자리하고 있었습니다

24% 지금 우리가 생각하는 몽마르트르는 예술가들의 도시이자 낭만적이고 로맨틱한 지역이라는 이미지가 강하지만 그 시절 예술가들이 몽마르트르에 모여 살았던 이유는 집값이 가장 쌌기 때문이에요

27% 모딜리아니 하면 많이 떠오르는 초상화의 특징이 긴 얼굴과 아몯느 모양의 눈이죠

29% 모딜리아니의 전시회는 완전한 실패로 막을 내립니다. 그는 좌절한 나머지 이때부터 "나는 이 시대 사람들이 이해할 수 없는 작가"라며 다시는 전시회에 작품을 내지 않았고 지인들에게 그림 몇 점을 판매하고 받은 돈도 병원비와 술값으로 모두 써버립니다

29% 파리로 돌아온 모딜리아니가 그린 잔 에뷔테른의 초상에는 예전의 작품들과 달리 눈동자가 선명합니다. 이 작품을 보고 잔은 너무나 행복한 나머지 그 자리에서 펑펑 울었다고 해요

32% 그의 작품은 세일레문, 카드캡터 체리 같은 유명 애니메이션에도 영향을 끼쳤지요. 지금 활동하는 순정만화 작가들은 모두 무하에게 큰 빚을 지고 있다라는 말이 있을 정도로 그의 그림은 당대에도, 한 세기가 지난 지금도 특유의 아름다움으로 사랑받고 있습니다

33% 무하의 가장 큰 성공 요인은 단언컨대 성실함이었습니다. 그는 정말 성실하게 그림을 그리면서 기회가 왔을 때 단단히 붙잡을 준비를 하고 있었던 거에요

36% 무하는 가진 것을 베푸는 것에 아낌이 없었습니다

37% 현재 체코의 땅에 최초로 정착한 켈트인들의 이야기인 슬라브 민족의 원고향에서 시작해 슬라브 찬가까지 이어지는 이 거대한 작품을 완성하는 동안, 50대였던 무하는 어느새 70대 노인이 되었죠

38% 다음에 실린 체코 음악의 판테온에서 수염을 기른 사람은 베드르지흐 스메타나, 옆에 종이와 펜을 들고 있는 사람은 안토닌 드보르작입니다

38% 사람들은 "알폰스 무하는 죽어서 프라하의 별이 되었다"며 사랑하고 존경하는 예술가를 추모합니다. 민족을 위한 그림을 그리는 데 인생 후반을 모두 바친 무하는, 결국 자신이 그렸던 위인들처럼 본인도 역사가 기억하는 위대한 화가로 자리매김합니다

41% 프리다는 이 사고로 왼쪽 다리 열한 곳이 골절되고 오른발이 탈골되었습니다. 골반, 쇄골은 골절되고 갈비뼈도 부러지지요. 하지만 가장 심각한 부상은 따로 있었습니다

43% 뉴욕은 디에고에게 열광했고 전시는 대성공을 거둡니다. 디에고는 대중의 사랑에 한껏 도취됐고, 수많은 여성이 그에게 접근하죠. 짐작했듯 디에고는 거부하지 않습니다.

47% 그녀의 일기장에는 "나는 1년을 앓았고, 척추 수술을 일곱 차례나 받았다. 자주 절망에 빠진다. 어떤 말로도 표현할 수 없는 절망감, 그럼에도 불구하고 살고 싶다"라는 내용이 쓰여 있었다던데, 어떠신가요?

47% 프리다는 살면서 총 32회의 수술을 받았고 인생의 절반 이상을 침대에서 보냈죠. 그녀의 이름이 자유라는 뜻이었음을 생각하면 참 아이러니합니다

50% 오랜 방황 끝에 클림트는 세상의 요구보다 자신의 예술에 충실하기로 결심합니다. 그리고 자신만의 예술성이 폭발하는 작품을 선보이죠. 바로 클림트의 대표작이자 빈 대학 천장화인 그려진 철학, 법학, 의학입니다

51% 너무나도 아쉬운 점은 이 벽화는 제2차 세계대전 당시 나치가 전부 불태우는 바람에 지금은 남아 있지 않다는 건데, 만약 이 작품이 지금까지 남아 있다면 아마 클림트의 대표작이 되지 않았을까요?

53% 그림을 이렇게 잘 그렸던 클림트에게는 악필이라는 허점이 있었다고 합니다. 그래서 클림트는 평소엔 글을 거의 쓰지 않았는데 에밀리에게 보낸 편지만 약 400통이 넘었다고 해요

53% 클림트는 그리 잘생긴 외모가 아니었는데도 사망 후 친자 확인 소송만 14건이었다고 해요

54% 클림트의 풍경화는 황금빛 작품에 가려져 잘 알려지지 않았지만 작품의 4분의 1이나 되거든요

57% 그런데, 불행의 정점을 찍은 듯한 이 시기는 다행이 로트레크 인생의 전환점이 됩니다. 집에서 할 일이 없어진 로트레크는 연필을 들고 다니며 눈에 보이는 모든 것을 그리기 시작해요

58% 인상파에 속하는 화가들치고 우키요에의 영향을 받지 않은 사람은 거의 없는데, 특히 로트레크는 포스터 작업을 할 때 우키요에의 두가지 특징인 원근법 무시와 사선구도, 독특한 신체 절단을 차용합니다.

59% 로트레크는 작가들의 뮤즈가 되어주면서도 천대받던 댄서들의 이름을 포스터에 넣었고, 개개인의 특징을 발견해 이를 부각합니다.

61% 판화집은 매춘부들이 청소와 빨래를 하는 모습, 슬퍼서 우는 모습 등 보통 사람들의 일상과 다르지 않은 그림으로 가득했거든요. 이것이야말로 로트레크의 진정한 시선이었던 거죠

67% 평화를 추구해야 할 성직자들이 전쟁을 독려했으며 젊은이들에게 미래를 보여줘야 할 학교는 전쟁의 필요성을 가르쳤죠. 페터가 전쟁에 자원했던 데는 학교와 친구들의 영향도 컸습니다

68% 콜비츠를 비롯해 반전 운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했던 표현주의 예술가들과 정부의 갈등은 독일에 나치 정권이 들어서면서 정부의 승리로 끝이 납니다

69% 그녀는 세상을 떠났지만 평화를 외쳤던, 아이들의 미래를 지키려는 메시지로 가득했던 그녀의 작품들은 세계 각국으로 뻗어 나가 지금도 많은 이들에게 울림을 주고 있습니다. 콜비츠 또한 국제적인 찬사를 받으며 가장 유명한 독일의 예술가 중 한 명으로 기억되고 있고요

72% 대학에서 법을 공부하다 화가로 전향했던 세잔은 "내 아버지는 피사로였다"고 했을 정도로 피사로의 도움을 많이 받은 걸로 알려져 있습니다. 고갱도 피사로의 화실에서 위로를 받으면서 그림을 그릴 원동력을 받곤 했어요

74% 폴 세잔 역시 후기 인상주의에 속하는 작가예요. 그의 작품이 지니는 가장 큰 의의는 과거 회화의 멱살을 잡고 미래로 끌고 왔다는 점입니다

84% 그림을 보기 위해서가 아니라 몸을 녹이기 위해 루브르 박물관에 갔다고 고백했을 정도로 형편이 좋지 않았습니다. 그러니 주변에서 재료를 선물해줘야 그림을 그릴 수 있었고, 그마저도 아껴 써야 했기에 물감도 아주 얇게 칠했습니다.

84% 오늘날 우리가 감상하는 뷔페의 초기작들은 그냥 그림이 아니라 한 인간이 단지 살기 위해 그렸던, 절박한 생존의 흔적입니다

89% 뷔페는 누가 자신을 욕해도 거의 반박하지 않았다고 해요. 한창 평론가들에게 비난을 받을 때도 혼자 괴로워했을 뿐 맞서지 않았고요

92% 실레는 성병으로 괴로워하던 아버지에게 인간의 본성, 인간 안에 내재돼 있는 근본적인 고통을 봤거든요. 그때부터 그는 성에 집착하는 모습을 보이기 시작합니다. 성욕 역시 인간의 본능인데 왜 유독 그것만 금기시하고 숨겨야 하지 라고 생각했던 거죠

93% 클림트는 이미 자신보다 뛰어난 사람의 스승이 될 수는 없으니 친구로 지내자고 제안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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