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사랑한 화가들 - 살면서 한 번은 꼭 들어야 할 아주 특별한 미술 수업
정우철 지음 / 나무의철학 / 2024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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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내가 사랑한 화가들

 : 정우철

 : 나무의 철학

 : 2021/08/21 - 2021/08/27


특별히 기대를 하고 읽은 책은 아닌데 생각보다 재미있었다.

덕분에 책읽는 일주일동안 아주 즐거웠다.

피카소나 고갱 같은 화가의 내용만 들어서 그런지, 화가 하면 자유분방하고 생활도 난잡한 사람인줄만 알았는데 의외로 순정파도 많고 무하처럼 너그러운 사람도 많다.

첫번째로 소개한 샤갈의 그림은 몇년 전 전시회가 있어서 아이랑 다녀온 적이 있다. 내게 샤갈은 샤갈의 눈내리는 마을이라는 제목으로나 알려진 존재이지 누군지, 어떤 그림을 그리는지 잘 몰랐다. 이 책에서도 날아다니는 그림을 보며 저게 무슨 뜻일까 하는 생각을 많이 했는데 이 날아다니는 모습이 샤갈과 그의 부인이고, 또 그의 그림에 날으는 사람이 얼마나 큰 의미인지 배웠다. 

제일 인상깊은 화가는 알폰소 무하였다.

체코의 성비타 성당에 가서 그의 모자이크 그림을 봤을 때 재미있다는 생각만 했었는데 이렇게 너그럽고, 애국적이었던 좋은 사람인줄은 몰랐다. 무하에 대해서 더 알고 싶어졌다.

책을 읽으며 새롭게 깨닫고 또 다른 무언가를 알고 싶게 만드는 것이야말로 그 책에 대한 최고의 칭찬 아닐까?

좋은 책을 읽어서 참 좋았다. 


6% 샤갈의 인생을 따라가면서 느낀 건, 그는 스스로 희망을 선택하고 만들어내는 사람이었다는 거예요

8% 샤갈의 어머니가 화가의 꿈을 지원해주었다면 어렸을 때부터 함께했던 연인 벨라 로젠벨트는 그를 세계적인 화가로 키워준 인물이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10% 그는 자신의 전부인 벨라에게 다가가 뜨겁게 키스합니다. 그림 속 강렬한 붉은색에서 그날 둘의 감정이 느껴지지 않나요? 이때 샤갈은 마치 자신의 온몸이 공중에 붕 뜨는 것 같은 기분이었다고 해요

12% 유대인 숙청에 앞장섰던 히틀러가 샤갈을 콕 집어 제거해야 할 예술가로 언급했거든요. 1937년 퇴폐 미술전을 열어 샤갈의 그림을 걸어놓고 삐뚤어진 유대인 영혼을 보여주는 작품이라며 조롱하기도 했고요

16% 아버지의 바람대로 안정된 삶을 살던 청년 마티스는 결국 스스로 선택한 인생을 살기 위해 법률사무소를 그만두고 미술학교에 입학해요. 이런 여정을 보면 누구에게나 인생에 한번쯤은 운명을 바꿀 기회가 찾아오는 듯합니다

19% 나는 내 노력을 드러내려 하지 않았고, 그저 내 그림들이 봄날의 밝은 즐거움을 담기를 바랐다. 내가 얼마나 노력했는지는 아무도 모르게 말이다

22% 성당 내부에는 웅장하거나 화려하지는 않지만 마티스가 추구했던 예술의 지향점이었던 단순함, 명쾌함을 살린 성 도미니크, 십자가의 길 벽화 등이 가득했고 창문에는 푸른색, 초록색, 노란색으로 표현한 생명의 나무가 자리하고 있었습니다

24% 지금 우리가 생각하는 몽마르트르는 예술가들의 도시이자 낭만적이고 로맨틱한 지역이라는 이미지가 강하지만 그 시절 예술가들이 몽마르트르에 모여 살았던 이유는 집값이 가장 쌌기 때문이에요

27% 모딜리아니 하면 많이 떠오르는 초상화의 특징이 긴 얼굴과 아몯느 모양의 눈이죠

29% 모딜리아니의 전시회는 완전한 실패로 막을 내립니다. 그는 좌절한 나머지 이때부터 "나는 이 시대 사람들이 이해할 수 없는 작가"라며 다시는 전시회에 작품을 내지 않았고 지인들에게 그림 몇 점을 판매하고 받은 돈도 병원비와 술값으로 모두 써버립니다

29% 파리로 돌아온 모딜리아니가 그린 잔 에뷔테른의 초상에는 예전의 작품들과 달리 눈동자가 선명합니다. 이 작품을 보고 잔은 너무나 행복한 나머지 그 자리에서 펑펑 울었다고 해요

32% 그의 작품은 세일레문, 카드캡터 체리 같은 유명 애니메이션에도 영향을 끼쳤지요. 지금 활동하는 순정만화 작가들은 모두 무하에게 큰 빚을 지고 있다라는 말이 있을 정도로 그의 그림은 당대에도, 한 세기가 지난 지금도 특유의 아름다움으로 사랑받고 있습니다

33% 무하의 가장 큰 성공 요인은 단언컨대 성실함이었습니다. 그는 정말 성실하게 그림을 그리면서 기회가 왔을 때 단단히 붙잡을 준비를 하고 있었던 거에요

36% 무하는 가진 것을 베푸는 것에 아낌이 없었습니다

37% 현재 체코의 땅에 최초로 정착한 켈트인들의 이야기인 슬라브 민족의 원고향에서 시작해 슬라브 찬가까지 이어지는 이 거대한 작품을 완성하는 동안, 50대였던 무하는 어느새 70대 노인이 되었죠

38% 다음에 실린 체코 음악의 판테온에서 수염을 기른 사람은 베드르지흐 스메타나, 옆에 종이와 펜을 들고 있는 사람은 안토닌 드보르작입니다

38% 사람들은 "알폰스 무하는 죽어서 프라하의 별이 되었다"며 사랑하고 존경하는 예술가를 추모합니다. 민족을 위한 그림을 그리는 데 인생 후반을 모두 바친 무하는, 결국 자신이 그렸던 위인들처럼 본인도 역사가 기억하는 위대한 화가로 자리매김합니다

41% 프리다는 이 사고로 왼쪽 다리 열한 곳이 골절되고 오른발이 탈골되었습니다. 골반, 쇄골은 골절되고 갈비뼈도 부러지지요. 하지만 가장 심각한 부상은 따로 있었습니다

43% 뉴욕은 디에고에게 열광했고 전시는 대성공을 거둡니다. 디에고는 대중의 사랑에 한껏 도취됐고, 수많은 여성이 그에게 접근하죠. 짐작했듯 디에고는 거부하지 않습니다.

47% 그녀의 일기장에는 "나는 1년을 앓았고, 척추 수술을 일곱 차례나 받았다. 자주 절망에 빠진다. 어떤 말로도 표현할 수 없는 절망감, 그럼에도 불구하고 살고 싶다"라는 내용이 쓰여 있었다던데, 어떠신가요?

47% 프리다는 살면서 총 32회의 수술을 받았고 인생의 절반 이상을 침대에서 보냈죠. 그녀의 이름이 자유라는 뜻이었음을 생각하면 참 아이러니합니다

50% 오랜 방황 끝에 클림트는 세상의 요구보다 자신의 예술에 충실하기로 결심합니다. 그리고 자신만의 예술성이 폭발하는 작품을 선보이죠. 바로 클림트의 대표작이자 빈 대학 천장화인 그려진 철학, 법학, 의학입니다

51% 너무나도 아쉬운 점은 이 벽화는 제2차 세계대전 당시 나치가 전부 불태우는 바람에 지금은 남아 있지 않다는 건데, 만약 이 작품이 지금까지 남아 있다면 아마 클림트의 대표작이 되지 않았을까요?

53% 그림을 이렇게 잘 그렸던 클림트에게는 악필이라는 허점이 있었다고 합니다. 그래서 클림트는 평소엔 글을 거의 쓰지 않았는데 에밀리에게 보낸 편지만 약 400통이 넘었다고 해요

53% 클림트는 그리 잘생긴 외모가 아니었는데도 사망 후 친자 확인 소송만 14건이었다고 해요

54% 클림트의 풍경화는 황금빛 작품에 가려져 잘 알려지지 않았지만 작품의 4분의 1이나 되거든요

57% 그런데, 불행의 정점을 찍은 듯한 이 시기는 다행이 로트레크 인생의 전환점이 됩니다. 집에서 할 일이 없어진 로트레크는 연필을 들고 다니며 눈에 보이는 모든 것을 그리기 시작해요

58% 인상파에 속하는 화가들치고 우키요에의 영향을 받지 않은 사람은 거의 없는데, 특히 로트레크는 포스터 작업을 할 때 우키요에의 두가지 특징인 원근법 무시와 사선구도, 독특한 신체 절단을 차용합니다.

59% 로트레크는 작가들의 뮤즈가 되어주면서도 천대받던 댄서들의 이름을 포스터에 넣었고, 개개인의 특징을 발견해 이를 부각합니다.

61% 판화집은 매춘부들이 청소와 빨래를 하는 모습, 슬퍼서 우는 모습 등 보통 사람들의 일상과 다르지 않은 그림으로 가득했거든요. 이것이야말로 로트레크의 진정한 시선이었던 거죠

67% 평화를 추구해야 할 성직자들이 전쟁을 독려했으며 젊은이들에게 미래를 보여줘야 할 학교는 전쟁의 필요성을 가르쳤죠. 페터가 전쟁에 자원했던 데는 학교와 친구들의 영향도 컸습니다

68% 콜비츠를 비롯해 반전 운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했던 표현주의 예술가들과 정부의 갈등은 독일에 나치 정권이 들어서면서 정부의 승리로 끝이 납니다

69% 그녀는 세상을 떠났지만 평화를 외쳤던, 아이들의 미래를 지키려는 메시지로 가득했던 그녀의 작품들은 세계 각국으로 뻗어 나가 지금도 많은 이들에게 울림을 주고 있습니다. 콜비츠 또한 국제적인 찬사를 받으며 가장 유명한 독일의 예술가 중 한 명으로 기억되고 있고요

72% 대학에서 법을 공부하다 화가로 전향했던 세잔은 "내 아버지는 피사로였다"고 했을 정도로 피사로의 도움을 많이 받은 걸로 알려져 있습니다. 고갱도 피사로의 화실에서 위로를 받으면서 그림을 그릴 원동력을 받곤 했어요

74% 폴 세잔 역시 후기 인상주의에 속하는 작가예요. 그의 작품이 지니는 가장 큰 의의는 과거 회화의 멱살을 잡고 미래로 끌고 왔다는 점입니다

84% 그림을 보기 위해서가 아니라 몸을 녹이기 위해 루브르 박물관에 갔다고 고백했을 정도로 형편이 좋지 않았습니다. 그러니 주변에서 재료를 선물해줘야 그림을 그릴 수 있었고, 그마저도 아껴 써야 했기에 물감도 아주 얇게 칠했습니다.

84% 오늘날 우리가 감상하는 뷔페의 초기작들은 그냥 그림이 아니라 한 인간이 단지 살기 위해 그렸던, 절박한 생존의 흔적입니다

89% 뷔페는 누가 자신을 욕해도 거의 반박하지 않았다고 해요. 한창 평론가들에게 비난을 받을 때도 혼자 괴로워했을 뿐 맞서지 않았고요

92% 실레는 성병으로 괴로워하던 아버지에게 인간의 본성, 인간 안에 내재돼 있는 근본적인 고통을 봤거든요. 그때부터 그는 성에 집착하는 모습을 보이기 시작합니다. 성욕 역시 인간의 본능인데 왜 유독 그것만 금기시하고 숨겨야 하지 라고 생각했던 거죠

93% 클림트는 이미 자신보다 뛰어난 사람의 스승이 될 수는 없으니 친구로 지내자고 제안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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