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일치기 조선여행 - 한양과 경성, 두 개의 조선을 걷는 시간 한국사 여행 1
트래블레이블 지음, 이도남 감수 / 노트앤노트 / 2024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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읽은기간 : 2024/05/31 -2024/06/06


재미있는 책이 출간되었다.. 

서울을 여행하는 책인데 서울을 조선시대와 일제강점기로 나누어 중요한 역사적 유적지를 여행하게 한다.

조선시대는 아무래도 궁궐이 중심이 됐다. 서울에는 5대궁궐이 있는데 각 궁궐마다 역사적 내용과 관광 순서, 그리고 눈여겨볼 내용들로 이루어져 있다.

일제강점기는 아무래도 서대문역사 박물관처럼 무거운 곳들이 많았다. 안타깝기도 하고 쉽게 넘기기도 어려운 부분들이 많지만 이런 역사가 있어서 우리나라를 독립으로 이끌었다는 걸 생각하면서 강하게 다녀봐야 할 것 같다.

내가 서울에 살아서인지 서울을 이렇게 깊이있게 다녀보지 못했던 것 같다.

가까운 곳일수록 더 소홀하기 쉬운데 이런 책을 읽은 기념으로 올해는 서울에 관심을 좀 가져봐야겠다..

재미있었다 


p38 천상열차분야지도는 조선 왕조의 보물 같은 존재입니다. 태조 이성계가 국가를 세우고 건국의 정당성을 필요로 하던 시점, 한 노인이 고구려의 별자리가 새겨진 오래된 비석을 이성계에게 바친 것이 그 시작이었습니다. 새 왕조가 탄생하자마자 발견된 고대국가의 별 지도는 이씨 왕조의 정당성을 내세우기 좋은 유물이었지요.

p46 왕관을 쓰려는 자, 그 무게를 견뎌라라는 명언이 조선의 왕만큼 잘 어울리는 사람도 없을 것입니다. 성군의 면모를 보여야 했던 조선의 왕에겐 책임질 일이 너무도 많았습니다.

p53 검소하면서도 누추하지 않고, 화려하면서도 사치스럽지 않다. 김부식이 집필에 참여한 삼국사기 중에서 <백제본기 온조왕>편에 나와있는 검이불루 화이불치를 인용한 것입니다.

p64 우리의 전통 건축에는 차경기법을 사용했습니다. 빌릴 차, 경치 격, 즉 빌려온 경치라는 뜻입니다. 서양인들은 건물의 아름다움을 중시했지만 우리는 자연과의 조화를 함께 즐겼습니다. 조선의 건축물은 자연이란 배경 안에 머물 때 비로소 완벽해졌습니다.

p73 경복궁에서 왕이 평상시에 거처하며 실제로 업무를 보던 편전이 바로 사정전입니다. 근정전이 공식적인 행사를 치르기 위한 공간이었다면, 사정전이야말로 왕이 신하들과 함께 업무를 보던 곳이었습니다.

p93 충성이란 사모요 거동은 곧 교동일세 일만 흥청 어디 두고 석양 하늘에 뉘를 쫓아가는고. 두어라 예 도한 가시의 집이니 날 새우기엔 무방하고 또 조용하지요.(연산군일기 연산 12년 9월 2일) 충신들은 어디 가고 유배지 교동으로 가고 있는가? 일만이 되던 연산군의 기생 흥청들은 어디 두고 해 지는 길에 누굴 쫓아가는가? 그냥 둬라. 교동 또한 가시울타리 집이니 밤새워 놀기 좋고 조용히 죽기 좋지 않나?

p98 정당성을 깔끔하게 확보하지 못한 상황에서도 광해는 조선의 군주로서 백성을 위한 정치를 펼칩니다. 특히 세금을 쌀로 통일하는 대동법과 토지 조사를 위한 양전 사업은 양반과 지주층의 반발이 거셌지만, 민심이 왕의 편에 섰기에 시행할 수 있었습니다.

p115 다른 궁의 정전에 비해 규모가 작고 자연히 조정 마당의 크기도 작습니다. 또한 왕의 궁궐은 남향으로 짓는 것이 원칙이지만 창경궁은 자연 지세에 맞춰 동향으로 지었습니다. 조선의 궁엔 삼문의 원칙이 있는데 정문에서부터 3개의 문을 통과해야 정전을 만날 수 있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창경궁은 그 과정을 축소해 흥화문과 명정문만 통과하면 정전이 나오는 구조입니다.

p140 1620년, 경희국은 공사를 마치고 야심 찬 역사의 아침을 맞이합니다. 궁을 지은 사람은 조선 15대 왕 광해군이고, 당시 이름은 경덕궁이었지요. 광해군의 이복동생이었던 정원군이 살던 집터에 왕의 기운이 서렸다는 술사의 말이 없었다면 경덕궁은 역사 속에 존재하지 않았을지도 모를 일입니다.

p144 서울역사박물관 뒤 주차장에는 놀랍게도 방공호가 있습니다. 다시 말하자면 궁궐 안에 박물관도 있고 주차장도 있고 방공호도 있다는 얘기입니다.

p169 보태평은 종묘에 계신 조상신들의 문덕을 찬양하는 노래로, 국왕이 조상에게 첫 술을 올리는 초헌례의 순간에 연주했습니다. 반면 정대업은 조상신들의 무공을 찬양하는 노래로, 왕세자가 조상에게 두 번째 술을 올리는 아헌과 영의정이 마지막 술을 올리는 종헌에 연주했습니다.

p194 오조룡이 남긴 여운을 뒤로하고 중화전을 바라보던 시선을 왼쪽으로 돌려보겠습니다. 궁 안에 이렇게 서구적인 건축물이 세워져 있어도 될까 싶은 건물이 하나 보입니다. 돌로 만든 집, 석조전입니다.

p206 고종이 황제로 즉위한 1897년부터 자주 근대화를 위한 대대적인 개혁이 일어납니다. 바로 대한제국의 연호 광무를 붙인 광무개혁입니다. 광무개혁의 핵심은 황제의 권력을 강화하고 그 힘으로 국방, 경제, 산업, 교육 등 다양한 분야에서 외세의 도움없이 자주적인 근대국가를 만드는 것이었습니다.

p214 초기엔 비슷비슷한 한옥 건축물을 사용하던 각국 공사관들은 인접한 타국 공사관을 의식해 대대적인 공사를 진행합니다. 시간이 흐른 탓에 지금은 당시 공사관의 외관을 확인할 수 없지만, 남겨진 기록과 사진이 그 시절의 경쟁을 보여줍니다.

p221 정동제일교회의 역사는 1885년에 시작되었습니다. 언더우드가 자신의 집에서 집 없는 조선의 아이들을 위한 교육을 시작했다면, 아펜젤러는 그의 집에서 예배를 시작했습니다.

p238 경성역은 붉은 벽돌을 사용한 외관 때문에 한때 도쿄역을 본떠 만들었다고 알려지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경성역 축조 당시 도쿄대학교 건축과 교수였던 츠카모토 야스시 유품에서 서울역사 입면도가 발견되면서 스위스의 루체른역 모습을 참고해 만들었다는 것이 밝혀졌죠.

p246 1927년, 당시로는 아주 드물게 유럽 유학길에 오른 예술가 나해석도 이곳에 섰습니다. 그녀는 부산에서 출발하는 기차를 타고 대구와 수원을 거쳐 경성역에서 잠심 머무른 후 장춘, 하얼빈, 러시아를 거쳐 파리에 도착했습니다. 나해것이 떠난 길은 머나먼 유학길이기도 했지만, 사회적 통념에서 벗어나 스스로 옳다고 생각하는 방향으로 걸어가고자 했던 그녀의 인생길인 것만 같습니다.

p265 기상 나팔 소리가 울리면 벌떡 일어나 이불을 개고 젖은 수건을 짜서 몸을 훔치고 홀딱 벗은 뒤 문 앞에 선다. 그렇게 벌거벗은 채로 달리다가 허들을 넘으면서 입을 아~하고 벌린다 뛰는 것은 항문에 감춘 것이 없다는 표시, 입을 벌리는 건 입에 문 것이 없다는 증거다.

p286 그는 해례본의 정보를 알려주며 거래 중개를 맡았던 김태준에게도 중개 수수료를 1000원을 줍니다. 김태준은 조선어문학회를 결성하며 우리글을 지키려 노력했던 사람으로, 훗날 간송에게 받은 돈을 중국 연안에서 항일독립운동을 지원하는 데 사용합니다.

p292 성북동에서 빼놓을 수 없는 명소가 있습니다. 성북동의 운치를 담당하는 전통찻집 수연산방입니다. 오미자차, 단호박 팥빙수 등 대표적인 메뉴와 함께 고택의 안락함을 느낄 수 있는 곳이지요. 벼루가 목숨을 다할 때까지 글을 쓰는 집이라는 뜻의 수연산방은 조선의 모파상이라 불린 상허 이태준의 고택입니다.

p311 일제강점기 언론인이자 조선의 3대 천재로 불리던 소설가였지만 변절한 친일파 이광수는 삼천리(1936)의 성조기라는 글에서 정세권을 이렇게 표현했습니다. “늘 바짝 깎은 머리에 토목 두루마기를 입고 의복도 모두 조선산으로 지어 입고” 다녔다고 말입니다.

p334 이토 히로부미의 마지막 반응에 다시 주목해봅니다. 고종과의 대화에서 이토 히로부미가 주춤했던 이유는 고려인의 무덤에서 청자를 꺼낸 이가 본인이었기 대문은 아니었을까요. 실제로 그는 대표적인 고려청자 수집가였습니다.

p339 당신은 세한도를 받을 자격이 되는 것 같습니다. 김정희 선생님을 존경하는 그대의 마음이라면 안심하고 전달할 수 있겠군요. 후지츠카는 세한도를 아무 대가 없이 내어주었습니다. 얼마 지나지 않은 1945년 3월 후지스카의 서재에 불이 나느데, 세한도는 이미 손재형에게 건네진 후였지요.

p345 화재로 공사관을 잃은 일제는 이듬해인 1885년 조선에 피해 보상을 요구하며 한성조약을 체결하는데, 이 조약에는 조선이 일본에 공사관을 지을 수 있는 부지와 비용을 지원한다는 내용이 적혀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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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술관을 빌려드립니다 : 북유럽 - 일상의 행복을 사랑한 화가들 미술관을 빌려드립니다
손봉기 지음 / 더블북 / 2024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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읽은기간 : 2024/05/25 -2024/06/02


이런 책 너무 좋다.

프랑스편을 사서 읽고, 이 책은 도서관에서 바로 빌려 읽었다. 

아직 여행해보지 못한 미지의 나라 북유럽.. 말로만 들어도 참 멋진 나라.. 

그곳의 미술에 대해서 듣지 못해서 더 호기심이 생겼다. 

사진같다는 생각이 들만큼 현실을 세밀하게 묘사했다는 게 인상적이었다.

그리고, 일상의 그림이 많아 더 좋았다.. 

상당히 많은 그림들이 개인소장이라는 것도 특이했다..

결국 북유럽에 간들 이 책에 나와 있는 그림의 상당수는 보지 못한다는 것.. 좀 아쉽다. 

이탈리아나 프랑스의 종교화, 왕에 대한 그림도 좋지만 이렇게 현실 풍경, 현실의 사람들을 그리는 그림도 참 맘에 든다. 

미술이라면 치를 떨던 내가 언제 이렇게 그림을 감상하는 걸 좋아했나 싶다..

내가 못해도 보는 건 참 좋다.. 


다만, 개정판이 나올 때 오타는 좀 고쳤을면 좋겠다..

조사가 틀린 부분이 너무 많다.. 


p22 세상의 마지막 전투를 의미하는 라그나로크 전쟁으로 오딘은 늑대에게 잡아먹혀 끝내 목숨을 잃는다. 오딘의 아들이자 가장 힘이 센 토르 역시 거대한 뱀에 물려 죽는다. 신들의 숙명이라는 의미를 지닌 라그나로크 전쟁으로 신과 거인 그리고 괴물들이 모두 죽고 인간이 지배하는 새로운 세상이 창조된다.

p26 물질적 부와 정신적 문화로 풍요로운 피렌체에서 단테가 돌체를 노래했다면 경제적 여유와 뛰어난 복지를 누리는 오늘날 북유럽 사람들은 휘게와 라곰을 노래한다.

p35 바르비종에서 유학한 스웨덴의 신진 화가들은 인상중의에서 배운 풍부한 빛과 사실주의에서 배운 자연주의 기법이 결합된 스웨덴 특유의 낭만적인 화풍을 창조했다.

p43 집안의 모든 인테리어가 곧 예술이라는 그녀의 말처럼 카린의 작품은 20세기에 들어와서 따뜻하면서 실용적인 스칸디나비아 스타일의 기초가 되었다. 스웨덴의 세계적인 가구 브랜드 이케아의 창시자 캄프라드는 공공연하게 칼 라르손과 그의 아내 카린이 만든 가구와 인테리어가 이케아의 정신적 뿌리라고 이야기한다

p69 베르크의 또 다른 작품인 포즈를 취한 후에를 살펴보면 오랜 시간 같은 자세를 취한 모델이 막 일을 마치고 옷을 입고 있다. 헝클어진 머리칼과 바싹 쳐 올린 머리 아래로 드러난 목덜미는 삶의 무게를 버티며 하루하루 살아가는 여인의 연약함과 무력감을 보여준다.

p97 남자들이 책을 읽고 여자들이 뜨개질을 하고 있는 따위의 그림은 더 이상 그릴 필요가 없다. 내가 그리는 것은 괴로워하고 사랑하며 살아 숨 쉬는 인간이어야 한다. 이런 내 작품을 보는 사람은 이 주제에서 신성함과 숭고함을 느끼며 교회에서 하는 것처럼 모자를 벗어야 한다.

p99 뭉크는 대상을 보이는 대로 그리는 회화로부터 벗어나 자신의 감정을 작품에 담았다. 이런 그의 화풍이 잘 드러나는 것이 다리위의 소녀들이다.

p103 뭉크에게 여성은 마돈나이면서 메두사였다. 그에게 여성은 저항할 수 없는 관능적인 아름다움을 지닌 존재이지만 또한 반대로 남성들을 파괴할 정도의 치명적인 마력을 지닌 존재였다. 이러한 뭉크의 여성관은 젊은 시절 자신을 배신한 여인의 증오에 기인한다.

p111 전쟁이 끝나고 노르웨이는 스칸디나비아 중립국 회원이 아닌 나토창단 회원이 되어 미국의 마샬정책 원조를 받는 등 스웨덴으로부터 완전한 독립을 이룬다. 이러한 과정에서 노르웨이는 자기 민족의 정체성과 우월성을 찾으려는 국가적 낭만주의 예술운동을 대대적으로 펼치기 시작하는데 그 결과 나온 작품 중의 하나가 구데의 하르당에르 피오르의 신부 행렬이다.

p130 아비규환의 쟁탈전을 벌이고 있는 절박한 사람들 뒤로 오슬로에서 가장 번화한 거리에는 매서운 추위로 아무도 보이지 않는다. 단지 두꺼운 코트와 모피 모자를 쓴 경찰관이 무심한 듯 얼음길 한복판을 따라 걸으며 딴 곳을 바라보고 있다.

p158 토르가 쇠망치로 얼음산을 부수면 얼음이 녹으면서 봄이 찾아오고 천둥과 번개를 부려 비를 내리게 하면 풍년이 온다. 그래서 북유럽의 사람들은 토르를 가장 좋아한다

p164 제인 그레이의 처형 속에 나오는 제인 그레이는 자신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여왕이 되었다가 9일 만에 쫓겨난 후 18세에 처형당한 비극의 인물이다. 제인에게 연민을 느낀 당시 영국의 여왕, 메리 1세는 신교도였던 그녀에게 카톨릭으로 개종하면 살려주겠다고 제안을 한다. 하지만 그녀는 이를 거절하고 죽음을 선택한다. 숨 막힐 정도로 긴장되면서 비장한 이 작품 앞에 서면 누구든 운명의 비애에 가슴이 저리는 경험을 한다

p181 검정 옷은 그녀의 무거운 묵상을 상징한다. 작품 중앙에 창과 커튼 사이로 들어오는 빛은 바닥에 뿌연 그림자를 남긴다. 빛이 지나가는 자리에 밀도 있는 대기와 먼지가 어우러져 빈공간을 꽉 채우며 고요한 일상으로 우리는 안내한다.

p184 생전에 유명한 화가였던 함메르쇠이는 사후에 다른 많은 상징주의 미술가들과 함께 잊혀졌다. 하지만 20세기 후반에 이르러 상징주의 회화에 대한 관심이 커지면서 함메르쇠의의 작품은 재조명되기 시작했다. 이후 그의 작품으로 런던, 파린, 뉴욕, 도쿄에서 연 전시회가 성공하며 덴마크를 대표하는 세계적인 화가가 되었다.

p196 르누아르는 뱃놀이에서의 점심에서 여인들의 엷은 미소와 발그스레하게 상기된 두 뺨을 통해 행복을 보여준다. 행복한 빛들로 가득한 일상을 그린 느루아르는 다음과 같이 이야기했다. 삶은 끊임없는 파티다. 그리고 나는 세상이 웃는 모습을 알았다.

p201 크뢰위에르의 정신병을 모르는 많은 사람들로부터 국가 훈장까지 받은 남편을 버리고 외도를 저지른 부도덕한 여자라고 손가락질을 받았다. 그녀는 오랜 소송 끝에 이혼은 했지만 딸의 양육권을 빼앗긴다. 후고와의 사이에서 임신을 하지만 후고는 자신은 자유가 필요한 예술가라며 그녀를 떠난다. 이후 그녀는 죽을 때까지 자신의 선택이 가져온 결과를 담담하게 견디며 살았다.

p205 덴마크 최북단에 위치한 작은 어촌마을 스카겐. 인근에 거대한 사막까지 있는 외떨어진 이곳에 19세기가 되자 덴마크를 비롯하여 젊은 북유럽의 예술가들이 모여들었다. 파리 인상파의 영향을 받아 혁신적인 화풍을 선보이려는 화가들에게 스카켄의 전원적인 분위기와 바다 마을 특유의 풍부한 빛은 엄청난 영감을 주었다.

p246 따스한 궁중의 일상을 그리고 있는 이 작품에서 화가는 국왕 부부를 그리고 있는 것인지 공주와 시녀들을 그리고 있는 것인지 알 수가 없다.

p267 핀란드의 빛이라는 불리는 알베르트 에델펠트는 물가에서 노는 아이들과 일몰의 태양 아래 빛나는 ㄴ풍경들을 그리며 빛으로 생명을 가진 인물들과 사물들을 진실하게 표현하였다. 고객의 영향을 받은 핀란드 상징주의 화가인 페카할로넨은 원시적인 색감과 상징적인 묘사로 평화로운 느낌의 작품을 발표하며 핀란드 예술계 리더로 떠올랐다.

p271 알베르트 에델펠트의 해변에서 노는 아이들은 네바문의 벽화와 같이 살아 있을 때 가장 행복했던 순간이 우리를 영원한 아름다움의 세상으로 데려간다는 사실을 알려준다.

p279 그녀는 매일 반복되는 일상을 벗어나서 자신이 하고 싶거나, 가고 싶은 일을 떠올리고 있는지 모른다. 이 작품에서 감보기는 웅장한 신화나 역사화 속의 매력적인 여성의 몸을 보여주는 기존의 전통적인 틀에서 벗어나 일상을 살아가는 당당한 여성을 보여준다.

p294 헬레나는 작품을 보고 깜짝 놀라면서 여성동맹연합기금으로 작품을 사고 싶다고 이야기한다. 둘은 테이블에 앉아 청어를 안주 삼아 술을 먹으며 밤새도록 웃고 떠들며 시간을 보낸다. 다음날 사랑하는 사람으로부터 다른 여자와 약혼을 한다는 통지를 받은 헬렌이 울면서 편지를 보여주자 헬레나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마음껏 슬퍼해. 그리고 다시 일어설 때는 담금질한 쇠처럼 더 단단해지길 바라”

p301 헬렌이 활동할 당시에는 아픈 아이가 미술의 대중적인 주제였다. 당시 뭉크는 아픈 아이를 통해 인간의 실존을 보여주었지만 헬렌은 인상주의를 연상시키는 활기찬 붓눌림과 빛의 처리로 병든 아이의 회복과 활력을 밝게 그려내고 있다.

p306 모든 농부들이 장작을 태우며 열심히 일하고 있는 가운데 유독 중앙에 보이는 소녀가 일손을 멈추고 우리를 강렬하게 응시하고 있다. 극도로 지친 모습을 보이는 소녀의 퀭한 눈은 밭이 개간되지 않아서 농작물이 자라지 않으면 가족이 겨울을 견뎌낼 식량을 갖지 못할 것이라는 공포와 세상에 대한 원망이 담겨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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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켈란젤로, 생의 마지막 도전 - 황혼이 깃든 예술가의 성 베드로 대성당 건축 분투기
윌리엄 E. 월리스 지음, 이종인 옮김 / 책과함께 / 2021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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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미켈란젤로, 생의 마지막 도전

 : 윌리엄 윌리스

 : 책과함께

읽은기간 : 2024/05/09 -2024/06/04


인류 역사에 큰 획을 그은 이름. 미켈란젤로..

사실 미켈란젤로에 대해 알고 있는 에피소드와 작품은 모두 젊은 시절 이야기다.

피에타나 다비드상의 멋진 작품.. 천지창조를 그리며 교황과 싸웠던 이야기.. 

레오나르도 다빈치와 티격태격했던 이야기나 라파엘로의 베끼기 능력을 무척 미워했던 이야기...

이 책은 미켈란젤로의 노년이야기를 담았다. 그리고 그 이야기의 대부분은 베드로 대성당을 건축하는 내용과 연결되어 있다.

노년기의 미켈란젤로는 내가 알던 괄괄하고 화많이 내던 모습이 아니다. 

수도자의 모습에 가깝고, 신에게 다가가는 경건한 모습이 대부분이다. 

그리고, 베드로 대성당을 짓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모습이 나타난다.

인간적인 나약한 모습도 많이 볼 수 있다.

그도 역시 연약한 한 인간이었음을 보면서 연민을 느낀다.

그는 코시모 메디치의 간곡한 부탁을 받으면서도 베드로 대성당의 건축을 위해 피렌체에 돌아가지 않는다.

결국 다시 피렌체에 가지 못하고 로마에서 죽는다.

죽기전까지 피에타를 만들던 미켈란젤로...

그는 무슨 생각을 하며 마지막 작품을 만들었을까? 결국 자신은 완성된 모습을 보지 못하며 열심히 설계하고 지었던 베드로 대성당을 보면 무슨 생각을 했을까?

미켈란젤로의 또다른 모습을 읽을 수 있어서 좋았다. 


p15 더 중요한 사실은 고향 사람들이 그를 피렌체에 데려오려고 거듭 노력했는데도, 그가 로마에 성 베드로 대성당을 건립하겠다는 약속을 결코 포기하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그는 “하느님이 나 자신을 여기에 있게 하셨다”라는 확고한 믿음을 간직했으며 대성당 건설하는 일을 결코 포기하지 않겠다고 맹세했다.

p21 역사가 존 엘리엇은 이런 말을 했다. 좋은 역사서를 집필한다는 것은 무엇인가? 그것은 상상력을 발취하면서 시간적으로나 공간적으로 멀리 떨어진 사회의 생활 속으로 들어가, 왜 그 사회의 구성원들이 그렇게 생각하고 또 행동했는지 그 이유를 밝혀내는 것이다.

p32 그들이 석상 앞으로 다가가려 하자 기독교인 구경꾼들이 거칠게 제지했다. 유대인의 오염된 손길이 석상을 더럽힐까 우려했기 때문이다. 이교도는 볼 수만 있을 뿐 직접 만져보는 것은 허용되지 않았다.

p35 율리우스는 고집불통이었고 성질이 사나웠으며 그 어떤 반대도 용납하지 않았다. 동시대인들은 강인한 의지와 까다로운 성품을 지닌 이 두 사람을 가리켜 테리빌리타라는 용어를 사용했다.

p37 서른 살의 미켈란젤로는 실제로 영묘를 마침내 완공한 60대 후반의 아주 명상적인 인물과는 크게 다른 사람이었다. 예술가 자신과 영묘를 지어 기념한 교황을 이해하기 위해서, 우리는 미켈란젤로와 그의 예술이 그전 40년 동안 어떻게 성숙해졌는지를 알아야 한다

p48 미켈란젤로의 거대한 석상들은 대리석 덩어리의 한계를 뚫고 나오려는 폭발적인 힘을 보여주는 경향이 있다는 점을 감안할 때, 라헬과 레아의 수수한 크기와 온유한 모습이 그 주위의 벽감에 의해 더욱 제약을 받고 있는 점은 특기할 만하다

p72 에르콜레 곤차가는 예술을 애호하는 교양 높은 사람이었고, 미켈란젤로 작품을 열렬히 숭배하면서 모아들이는 수집가였으며, 비토리아 콜론나의 가까운 친구이기도 했다.

p85 루이지 델리초가 죽은 지 석 달 뒤인 1547년 2월, 미토리아 콜론나가 갑자기 사망한 것이다. 그녀는 57세였고 미켈란젤로는 15세 연상이었다. 자신보다 젊은 가까운 친구들이 다 세상을 떠났는데 왜 그는 아직도 살아 있는가?

p91 비록 간접적으로 아는 사이이기는 하지만 존경하는 사람들의 함구, 추방, 죽음을 목격하고서, 미켈란젤로는 어쩔 수 없이 이단심문소를 의식하면서 깊은 침묵에 빠져들었다.

p102 또다시 여인의 아름다움이 나를 뒤흔들고 나를 격려하며 내게 채찍질을 가한다. 이제 오전 아홉 시의 기도는 지나갔고, 오후 세 시의 기도 그리고 저녁기도도 지나가서, 밤이 오고 있다.

p130 그 모형 지지자가 상갈로 설계를 풀이 모자라지 않는 풀밭이라고 말하자, 미켈란젤로는 까칠하게 대답했다. 그건 그렇습니다. 예술에 대해서 아무것도 모르는 멍청한 황소와 어리석은 양 떼를 위해서라면.

p143 미켈란젤로는 공사의 세부를 잘 알고 있었을 뿐만 아니라 복잡한 공사의 윤곽을 빨리 파악하는 능력이 있었다. 그것은 공부를 많이 한 인문주의자의 책상물림 지식이 아니라, 현장에서 몸으로 익힌 장인의 실무적 지식이었다.

p161 선배 건축가의 설계에 신경 쓰면서도 미켈란젤로는 그 자신의 독창적 아이디어를 내놓았다.

p163 파울루스가 오래 살수록-실제로 그는 아주 장수한 교황이었다- 미켈란젤로가 맡아야 할 공사 수는 늘어났다. 처음에는 최후의 심판이 있었고 그다음에는 대성당 공사, 파루네세 궁전, 그리고 아직도 덜 끝난 캄피돌리오와 파올리나 예배당이 있었다.

p178 만약 그가 반란자들과 어울린다고 고소를 당한다면 부오나토리 가문은 얼마든지 국외 추방과 재산 몰수를 당할 수 있었다. 그래서 미켈란젤로는 언제나 혼자라든지, 누구한테도 말을 걸지 않는다는 노골적이지만 잘 계산된 과장법을 이용해 평소에 권력자들을 조심하고 정치와는 단호하게 무관한 태도를 유지해 온 그의 습관을 그대로 반영한 것이다.

p223 자신의 다양한 임무를 동시에 수행하기 위해 그는 협력자들에게 시선을 돌려 그들에게 점점 더 많은 권한을 위임했다. 미켈란젤로의 후반기 예술과 건축은 이런 개인적 관계에 크게 의존했다.

p220 미켈란젤로와 그의 친구 줄리아노 다 상갈로가 발굴 현장에 호출되어 그 조각 난 고대 작품의 파편을 맞추어보니 하나의 돌덩이리로 만든 것이 아니었다. 실제로는 대리석 덩어리 여섯 개를 가지고 만든 다음에 잘 이어붙인 것이었다. 플리니우스의 기록은 오류로 판명되었다.

p245 미켈란젤로가 신임하는 그 젊은이는 파손된 부분을 복구하여 그 작품을 살리려고 최선을 다했다. 그는 이 작업으로 별로 공로를 인정받지 못했지만, 그 작품을 감상하기 위해 피렌체의 두오모 오페라 미술관을 찾는 사람이 아주 많다는 사실은 그의 보수 작업이 성공적이었음을 여실히 보여준다.

p249 단테는 현명한 시인 베르길리우스와 사랑하는 여인 베아트리체라는 두 안내인에게 동정과 보살핌을 받을 수 있었다. 이제 단테보다 두 배나 더 나이가 많은 미켈란젤로는 오로지 하느님만을 안내자로 모시고 있었다. 불행하게도 미켈란젤로의 주님은 단테의 베르길리우스와 베아트리체만큼 도움을 주지도 않았고 동정을 베풀지도 않았다.

p262 나는 그 사실에 별로 놀라지 않는다. 피렌체의 인구를 늘려주는 것은 우리 가문의 운명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니 네가 지금 곁에 두고 있는 자식(당시 두 살 반이던 부오나로토)만이라도 살려달로 하느님께 간절히 기도하거라

p263 1556년에서 1560년까지 다섯 해 동안, 미켈란젤로는 조카손자 중에 남자아이 하나와 여자아이 셋을 잃었다. 이런 여러 슬픈 사건들은 미켈란젤로를 전보다 더 부드럽고 관대한 마음을 가진 사람으로 만들었다. 미켈란젤로의 이런 여린 마음을 동시대인들은 때때로 목격했으나 미켈란젤로의 전기 작가들은 대체로 무시해 버렸다.

p274 1556년 7월, 미켈란젤로는 와인이 지금껏 받아본 것 중에 최상품이라고 말하면서도 이런 슬픈 말을 덧붙였다. 하지만 그것을 나눠줄 사람이 이제는 없구나. 내 친구들이 다 세상을 떠나버렸으니.

p300 파울루스 4세 치하 교황청의 억압적 분위기는 미켈란젤로에게 광적인 수도자 지롤라모 사보나롤라를 연상시켰다. 미켈란젤로는 그 수도자가 처형된 지 50년이 지났는데도 그의 찢어지는 목소리를 기억했다.

p312 한 해 한 해 시간이 지날수록, 특히 이런 시련의 시기일수록 코시모 데 메디치, 조르조 바사리, 조카 리오나르도는 미켈란젤로를 고향 피렌체로 데려오려는 노력을 멈추지 않았다. 미켈란젤로는 로마에서와 같은 의무는 전혀 지는 일 없이 평화와 안정을 보장받을 것이라는 약속도 받았다. 미켈란젤로가 이런 권유를 모두 물리친 것은 기적에 가까운 일이었다. 이로써 그가 성 베드로 대성당 건설 공사에 기울인 헌신의 깊이를 엿볼 수 있다.

p333 미켈란젤로는 창조적인 천재였을 뿐만 아니라 눈 밝은 사업가, 노련한 엔지니어, 융통성 있는 건설업자, 성공적인 기업가였다. 그는 성과 속을 무시로 오가는 사람이었다.

p336 미켈란젤로의 후기 경력 중 가장 큰 특징은 작업 요청이 점점 더 늘어났다는 것이다. 그가 나이 들어가면서 모든 사람이 그의 손에서 나온 것을 점점 더 많이 요구하는 듯 했다.

p344 건축가인 자코도 델라 포르타가 성 베드로 대성당의 아름다운 돔을 미켈란젤로의 설게대로 건설했다. 그러므로 그는 미켈란젤로의 대성당을 완공한 사람인 셈이다.

p351 우리는 산 로렌초의 파사드를 위한 도면, 그리고 같은 교회의 목재 모형 등에서 미켈란젤로가 초창기부터 2열 기둥을 실험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p360 피렌체의 경우 그 대답은 필리포 브루넬레스키에게서 나왔고, 로마에서는 미켈란젤로가 해결안을 내놓았다.

p371 미켈란젤로의 생애 마지막 10년 동안에 코시모는 거듭하여 귀향을 요청했고, 심지어 의무 없는 한직을 마련해 주겠다는 얘기까지 했다. 예술가는 솔깃했지만, 그런 요청이 올 때마다 “여기 일을 먼저 정리해야 합니다”라고 대답하며 완곡하게 물리쳤다.

381 미켈란젤로는 분노하고 좌절했다. 그 공사의 수석 건축가로 무려 15년이나 일해 왔는데도 현장 감독 한 명을 마음대로 임명할 수 없었으니 말이다. 미켈란젤로는 한 달 동안 공사 현장에 나가 보지 않았고 마침내 1563년 9월에 교황이 개입하여 그에게 현장으로 돌아오라고 호소했다. 그리하여 무명의 피에르 루이지 가에타는 마침내 고용되었고 미켈란젤로의 현장 대리인으로 근무하게 되었다.

p404 필생의 가장 중요한 과업을 완수하지 못한 채 세상을 떠난 사람들이 그 얼마인가? 미켈란젤로는 자신의 최종 프로젝트가 도다시 미완의 작품으로 끝난 것을 고통스럽게 의식했다. 그의 인생 여정이 끝나는 판에, 그의 최고 걸작은 막 생겨나기 시작했다. 성 베드로 대성당은 그의 최고 업적일 뿐만 아니라, 교황청과 보편 교회의 가장 우뚝한 상징이었다.

p406 미켈란젤로 생애 후반의 특징은 그가 많은 프로젝트에 창의적인 책임을 맡았고 또 그를 주요 건축가로 인정하는 그보다 더 많은 프로제그에 활발히 개입했다는 것이다. 그가 생애 만년에 정성을 기울여 이룩한 높은 업적 덕분에 로마는 다시 한번 스스로를 가푸트 문디(세상의 머리)라고 주장할 수 있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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컬처, 문화로 쓴 세계사 - 하버드대 마틴 푸크너의 인류 문화 오디세이
마틴 푸크너 지음, 허진 옮김 / 어크로스 / 2024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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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컬처, 문화로 쓴 세계사

 : 마틴 푸크너

 : 어크로스

읽은기간 : 2024/05/20 -2024/06/02


세계사를 통사로 보여주는 책들은 많다.. 

최근들어는 옥스포드 세계사나 녹색세계사, 대세 세계사처럼 각론으로 가기보다는 컨셉을 잡아 세계사를 읽도록 하는 책들이 점차 늘어나는 것 같다. 

이 책은 컬처를 중심으로 세계사를 써내려가는데 도서관이 중심이다. 

그리고 그 도서관은 여러 문화의 혼합을 만들어낸다.

저자는 문화의 원조가 그렇게 의미있는 것이 안니라고 주장한다. 

문화라는 것이 결국 혼합되고 개선되는 것이지 최초라는 것이 후대에 큰 의미를 주지 않는다는 것이다. 

여러 문화의 도서관과 문자에 대한 문화전파에 대해서 다양하게 배울 수 있어서 좋았다. 

마지막에 BTS나 싸이 이야기가 나온다. 이런 베스트셀러에 한류문화에 대한 내용이 나오니 반갑기도 하고, 우리나라의 문화가 이정도로 연구대상이 되고 있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악한 국가 지도자 빼고는 다 좋아지고 있다.. 


p18 시간이 지남에 따라 동굴 속 그림과 상징, 의식으로 시작된 것이 다른 관습으로 발전했다. 노하우가 늘어나면서 인간은 거주 공간을 만들 수 있게 되었고, 그중 일부는 피난처로 사용했지만 일부는 의식을 행하고(사원과 교회), 공연을 하고(극장과 공연장), 이야기를 하는 특별한 경우에만 방문했다

p55 다른 문화를 차용하는 방식의 중요성은 과거를 차용하는 방식, 즉 과거를 기억하는 방식과 관련이 있다. 네페르티티와 아케나톤은 왕의 계보에서, 조각상에서, 다른 모든 기록에서 삭제되어 거의 잊혔다.

p57 수많은 유럽인 이집트 학자들은 식민국의 힘을 이용해 발굴한 유물을 도굴꾼처럼 유럽 박물관으로 보내고도 아무 처벌을 받지 않았고, 보존을 위해서였노라고 정당화했다.

p84 미래와 대화하고 싶은 모든 이를 위한 교훈이 있으니 내구성이 좋은 재료로 관심을 끌만한 것을 만들어라. 그러면 미래의 통치자들이 그것을 보존할 테고 후대가 그 기원과 역사에 호기심을 가질 것이다.

p108 폼페이가 마치 타입캡슐처럼 제공하는 단면이 너무나 이례적이기 때문에 역사가들은 폼페이 선입관에 대해 말한다. 우리가 서기 79년 로마의 일상에 대해서 아는 것 대부분이 이 지방 도시 하나에 바탕을 두고 있다. 폼페이만 보고 로마 제국 전체를 추론할 경우 오도의 가능성이 있다.

p121 베르길리우스는 아이네이아스를 선택함으로써 귀종한 것을 얻었다. 바로 그리스와의 거리감이었다. 그는 로마의 선사 시대를 그리스 선사 시대에 봉합하는 동시에 이야기의 짜임에 새로운 실을, 그리스와 관계없이 트로이와 로마를 연결하는 실을 엮어 넣어 승자인 그리스를 로마 건국이라는 드라마의 구경꾼으로 만들었다

p133 문화 이동에 필연적으로 뒤따르는 힘, 즉 수입된 문화의 머나먼 기원에 대한 유혹이 현장을 인도로 이끌었다. 외국에서 수입된 문화에 매료된 사람들은 종종 자신이 아는 것이 진짜의 그림자에 지나지 않는 것은 아닐까, 단편적이고 걸러진 것이 아닐까. 시간과 공간을 거치며 근본적으로 변한 것이 아닐까 걱정한다.

p142 오늘날에도 표지에서 번역가 이름이 빠지는 일이 종종 벌어진다. 마치 우리는 항상 원본에 접근할 수 있으며, 책은 개개인의 천재가 만드는 것이고, 문화 매개자의 도움은 필요없다고 믿고 싶어하는듯하다. 우리는 번역가 덕분에 다양해진 세상에서 살아가고 있으며, 때대로 인정받지 못하는 번역가의 노고에 모든 문화가 의지하고 있으므로 이런 태도는 더욱 놀랍다.

p151 무엇보다도 시는 사교의 일환이었다. 종종 사람을 통해 특정 상대에게 시를 보냈는데 이때 받은 사람도 똑같은 방식으로 대답해야 했다. 중국 고전 시를 교묘하게 암시하거나 인용한 다음 그 시를 살짝 비트는 짧은 구절을 덧붙여 간접적으로 의사를 전하는 기술이었다

p160 엔닌으로서는 불교 예술 파괴가 가장 안타까웠다. 그들은 불상에서 금을 벗겨내고 동과 철로 만든 불상을 부수어 무게를 달았다. 너무나 안타까운 일이다. 이 땅의 청동불, 철불, 금불에 무슨 잘못이 있단 말인가?

p168 그런 주장은 편리하게도 모든 것이 어딘가에서 왔음을, 발굴되고 차용되고 옮겨지고 구매되고 도난당하고 기록되고 복사되고 종종 오해받는다는 사실을 잊는다. 무언가 본래 어디에서 나왔는지보다 훨씬 더 중요한 것은 울리가 그것을 가지고 무엇을 하느냐이다.

p175 세계 최초의 도서관 중 하나는 아시리아 왕 아슈르바니팔이 니네베에 세운 것이었다. 그러므로 새로 건설한 바그다드에 과거의 문서 기록을 보존하겠다는 목표를 가진 야신 찬 궁전 도서관 지혜의 창고가 포함된 것도 놀라운 일이 아니다.

p179 바그다드 학자들은 멀리서 온 지식을 추구하면서 선지자 무함마드가 했다는 유명한 말을 따르고 있었다. “멀리 중국에서 왔을지라도 지식을 추구하라. 지식 추구는 모든 이슬람교도의 종교적 의무이다”

p214 에티오피아 기독교와 마찬가지로 라스타파리아니즘은 때로 잡탕이나 온갖 관슴이 섞인 잡동사니 취급을 받는다. 그러나 이 운동은 고대 에피오피아처럼 문화 전이와 융합을 가장 잘 드러내는 예로 보아야 한다.

p222 샤를마뉴가 추진했던 문화 부흥 프로그램에는 정치적 사회적 개혁까지 포함되어 있었다. 이는 너무나 중요한 움직임이었기에 지금도 종종 카롤링거 르네상스로 불린다. 하지만 자세히 살펴보면 이것은 재탄생이라기보다 자신의 왕국을 로마 제국의 역사와 연관시키려는 샤를마뉴의 전략적 결정에 가깝다

p240 교황은 대대로 이 문서를 이용해서 그리스도교 세계에 대한 통치권을 주장했지만 로렌초 발라 사제 등문헌학에 통달한 사람들에게는 이 문서가 수상쩍어 보였다. 그래서 발라 사제는 증여 문서를 엄밀하게 분석했고, 그의 추론을 이해할 수있는 사람들에게 해당 문서가 콘스탄티누스 황제 시대가 아니라 그 몇백 년 후에 만들어진 것이 틀림없다는 사실을 증명해 냈다.

p253 이야기를 두고 싸웠다는 것은 아즈텍족이 과거를 지울 뿐 아니라 다시 쓰고 싶어 했다는 뜻이다. 아즈텍족은 옛 문명의 책을 태우는 대신 새로운 책을, 그들의 역법(읽는다는 단어에 게산하는 뜻도 있다)과 그들의 신, 그들의 신화, 그들의 역사를 적은 책을 만들었다.

p263 뒤러가 문화적 맥락이 완전히 제거된 이 물건들을 보면서 떠올린 것은 고도로 발달된 장인의 기술과 예술적 상상력 자신의 무지에 대한 겸손함이었다. 따라서 그는 고귀한 야만인이니 피에 굶주린 식인종이니 하는 아메리카 대륙에 대한 진부한 표현에 휘둘리지 않고 이렇게 멋진 만남을 가질 수 있었다. 유럽의 일류 예술가가 드물게도 열린 마음을 가지고 메소아메리카의 고도로 발전된 예술과 상호적응하며 그 진가를 알아보는 최초의 순간이었다.

p269 이러한 설명은 아즈텍족이 몰락하기 전에 역법과 역사, 신화를 기록하던 복잡한 그림 부호로 쓴 책들과 전혀 달랐다. 복잡한 쓰기와 읽기 지식은 차츰 잊혔고, 아즈텍의 책은 대부분 불에 타거나 사라졌다. 테노치티틀란이 파괴되면서 극소수의 책만 남았다.

p272 우리는 아주 먼 과거의 물건이 아니더라도 원본을 도서관과 미술관에 보존하는 일에 계속해서 상당한 자원을 쓴다. 대량생산이 쉬워지고 널리 퍼질수록 원본은 더욱 귀중해지는 듯하다.

p291 우스 루지아다스는 수많은 선원이 앓다가 죽기도 하는 괴혈병을 포함해 긴 항해의 세세한 일상을 언급한 최초의 서사시다. 선원들은 몰랐지만 괴혈병의 원인은 비타민C 결핍으로, 몇 주 또는 몇 달 동안 항해하면서 신선한 음식을 섭취하지 못하면 발병했다. 괴혈병은 피로, 메스꺼움, 설사, 발열로 시작해서 잇몸 부종으로 이어졌는데 카몽이스는 이 모든 과정을 서사시에 담았다.

p300 우스 루지아다스가 포르투갈 제국의 몰락에서 어떤 역할을 했든 이 작품은 의미 만들기가 얼마나 위험한지 잘 보여준다. 과거를 이용해 현재를 정당화하는 것은 위험하다. 무지와 폭력으로 다른 문화를 대하는 것은 위험하다. 문학의 힘을 이용해 독자를 자극하는 것은 위험하다. 특히 인쇄의 시대에는 더욱 그러하다.

p314 행동과 마찬가지로 사상 역시 의도하지 않았거나 희미학만 인식하던 결과를 가져오는 경우가 많다. 자연권 사상도 마찬가지였다. 미국 독립 선언에 서명한 사람들 중에서 자연권이라는 새로운 언어가 여성과 노예에게 적용되리라 생각한 사람은 거의 없었다.

p320 마담 조프랭은 주목받기를 원하지 않았고 보수적 견해를 가졌으나 당시의 가장 급진적 사상가들을 양성하게 되었다. 그녀의 살롱은 자유로운 사상의 요새로 알려졌다.

p325 노예 제도가 잔인한 것은, 노예 감독과 주인이 비인간적이라서가 아니라 경제 체제가 한 집단의 착취에 기반을 두기 때문이었다.

p327 신속한 군사적 해결이 불가능해지자 나폴레옹은 외교적 방법을 시도하며 루베르튀르에게 안전을 약속할테니 프랑스에 오라고 제안했다. 루베르튀르는 이를 받아들였지만 나폴레옹은 약속을 어기고 그를 체포했다. 루베르튀르는 1803년에 프랑스 동부 포르 드 주에 갇힌 채 사망했다.

p336 고고학이라는 학문이 이제 막 자리를 잡아가는 중이었으므로 슐리만은 고고학자로서 정식 교육을 받지 못했다. 그는 곳곳을 파내느라 고대 유적지 대부분을 파괴했고, 오늘날의 고고학자들은 여기에 슐리만 참호라는 씁쓸한 이름을 붙였다.

p371 두 항구를 통해 온갖 상품이 수출되어 일본 제품에 대한 서양이 관심을 충족시켰다. 그중에서도 다색판화가 무척 눈길을 끌었다. 우아한 구도와 눈에 띄는 색상, 독특한 주제가 서양인의 눈에는 전형적 일본 양식으로 보였다.

p376 페놀로사의 위치는 무척 모호했다. 일본 전통예술의 저평가를 초래하는 외국 사상 유입에 일조했고 밤에는 싸게 사서 비싸게 파는 방법으로 그러한 저평가에서 이익을 얻었다. 한편으로는 진심으로 보존에 관심을 가지고 미술관을 지었으며 과거를 다루는 새로운 과학을 일본 예술에 적용하여 그 위상을 높이려고 노력했다. 그리고 이러한 노력 덕분에 일본에서 존경을 받았다.

p411 소잉카와 말을 들어라 이 둘은 문화가 순수할 때보다 혼합되었을 때, 혼자 갇혀 있기보다 문화적 형태를 차용할 때 번성한다는 사실을 일깨워준다

p421 우리는 국부 펀드가 뒷받침하는 가장 안정적 민주주의 국가의 지원을 받아 멋진 도서관을 새로 지을 수 있다. 하지만 환경 변화의 산물인 아주 작은 바이러스가 여행을 비롯해 많은 것들을 중단시킬 수 있다. 미래는 예측 불가능하고 문화란 기껏해야 세대가 바뀔 때마다 계속해서 수선해야 하는 끊어진 사슬이라는 점을 우리에게 상기시킨다.

p426 이 뮤직비디오는 천연덕스러움, 유쾌하게 활용한 저속함, 엉뚱한 장소에서 커피를 마시는 광경이나 엘리베이터에서 몸을 흔드는 남성의 다리 사이에 엎드린 싸이의 모습 등 재미있는 세트 장면들 덕분에 유튜브 최초로 10억 뷰를 돌파했다.

p426 한류가 이토록 많은 청중에 다가갈 수 있었던 것은 처음부터, 록, 재즈, 레게, 아프로비트 등이 뒤섞인 스타일을 기반으로 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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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문화유산답사기 11 : 서울편 3 - 사대문 안동네 : 내 고향 서울 이야기 나의 문화유산답사기 11
유홍준 지음 / 창비 / 2022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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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나의 문화 유산 답사기11

 : 유홍준

 : 창비

읽은기간 : 2024/04/21 -2024/05/27


11권을 먼저 읽기 시작했는데 12권을 먼저 읽고 11권을 후에 읽었다

어떤 책을 먼저 읽는다 한들 그리 문제가 되지는 않는다.

11권은 서울 한복판 이야기다.. 

11권은 과거의 이야기가 아니라 내가 살았던 시절의 이야기다.. 

내가 어릴 때 아빠따라 다니던 골목의 이야기가 나온다. 

정겨우면서 그립기도 하고 신기하기도 하다. 

한국사 검정시험을 볼 때 현대사 문제를 보면 '내가 이때 뭐하고 있었지?' 이런 생각을 하곤 했는데, 이 책을 읽다보면 나는 이때 뭐했지? 하는 생각이 저절로 든다. 

나는 너무 어려서 잘 몰랐는데 내가 어릴 때도 우리나라는 정말 다이나믹하게 변화하고 있었구나 하는 생각이 든다.

어느덧 나도 이제 한국의 현대사의 한 자락을 차지하고 있다. 

후손들에게 어떤 선조로 기록될까 하는 생각을 하게 한다. 

정겹기도, 두렵기도 하다.. 


p18 북악산 금단의 구역 경계선상에 가장 먼저 공식적으로 들어온 건축은 서쪽 산자락 아래에 자리 잡고 있는 지금의 칠궁이다. 칠궁은 왕을 낳은 후궁 일곱 분의 사당이 모여 있는 곳인데 그 출발은 육상궁에서 시작되었다. 윳은 잉태하다, 상은 상서롭다는 뜻으로 육상이란 상서로움(영조대왕)을 낳았다는 의미가 된다.

p23 육상궁과 연호궁, 선희궁과 경우궁은 하나의 사당에 합사되었기 대문에 사당 건물은 다섯 채만 있다. 이렇게 복잡하기 대문에 칠궁답사는 정신 차리지 않고는 뭐가 뭔지 모르기 십상이다.

p37 이 영빈관 건물은 박정희 시대 우리 관공서 건물의 한 전형을 보여준다. 정면정관의 권위를 앞세우면서 골조가 콘크리트든 석조든 전통 지붕을 얹어 한옥의 이미지를 살리겠다는 뜻이 들어 있는데 결과적으로 갓 쓰고 자전거 타는 어색함을 면치 못하고 있다. 그 때문에 건축가가 누구인지 알 수도 없고 또 알 필요도 없이 권위주의 시절의 자취만을 볼 수 있을 뿐이다.

p43 그 이유가 무엇이냐는 질문에 우선 사람이 사는 생활공간으로서 부적합하고 풍수를 보아도 관저는 옮겨야 한다고 답했다. 이후 나는 청와대의 풍수 문제가 나올 때마다 구설수에 오르고 있다. 그러나 내가 말한 풍수는 청와대 터가 아니라 관저 건물에 국한해 말한 것이었다. 청와대 자리야 예부터 천하제일복지라고 칭송되는 길지인데 내가 그렇게 말할 리 있겠는가

p60 나는 고향이란 장소에 사람이 더해질 때 비로소 고향심이 생기는 것임을 알았다. 그런 서촌이기에 이번 답사기는 내 어린 시절을 보낸 회상의 여로를 겸할 수밖에 없을것 같다.

p65 청와대 분수대 옆 바닥에는 4.19 혁명을 기념하느 ㄴ동판 하나가 누워있다. 1960년 4월 19일 화요일 오후 1시 40분경에 이승만 독재에 항거하는 시위대가 해무청을 돌아 경무대 쪽을 향하자 경찰이 총을 발포해 이날 21명이 죽고, 172명이 부상을 입었다. 이를 추념해 2018년에 서울시가 첫 발포 현장을 표시한 것이다.

p80 나는 한국미술사 신령님만 믿을 뿐 종교를 따로 갖지 있지 않지만 1960년대 말에 이 교회에 부임해오신 마경일 목사의 아들 상렬이가 친구여서 몇 번 들어가보았는데 우리 동네에 이렇게 고풍스럽고 예쁜 교회가 있다는 것이 자랑스러웠다. 특히 스테인드글라스가 환상적으로 보였다. 마경일 목사는 온화한 분으로 이화여고 교목실장, 기독교대한감리회 총회장을 지내셨는데 글도 많이 발표하셨다.

p96 조선 산후화를 진경산수라는 하나의 장르로 완성한 겸재는 사실 천분이 뛰어난 화가는 아니었다. 올락했어도 양반출신이었기 대문에 도화서 화원이 될 수도 없었다. 그러나 그에게는 훌륭한 스승과 뛰어난 벗들이 있었다. 장동 김씨 농암 김창협과 삼연 감층흡 밑에는 겸재를 비롯해 사천 이병연, 담헌 이하곤, 이의현, 신정하 같은 제자들이 있었다.

p105 오거리의 길들은 하나같이 직선이 아니라 곡선이고 적당한 비탈이다. 그래서 길 끝이 곧바로 뚫려 있지 않고 길을 걸어가면서 장면들이 서서히 나타나게 되어 있다. 만약 이것이 직선이었다면 길은 사뭇 사무적이고 냉랭한 분위기를 풍겼을 것이다. 오거리 길이 이렇게 만들어진 것은 도시계획 때문이 아니라 수성동, 옥류동에서 내려오는 물길을 따라 자연스럽게 길을 내었기 때문이다.

p107 한국사신론이 20세기 후반 지성사에 끼친 영향은 지대한 것이었다. 내가 군대에 있을 대 우리 연대장이 장교들에게 세미나를 시켜 한국사신론을 차트로 만들어 작전 지시봉으로 짚어가며 발표하는 것을 신기하게 보았을 정도였다. 나만 해도 이 책처럼 학문적 기조를 유지하면서 일반인도 알아들을 수 있는 통사로 한국미술사를 쓰는 것을 학문적 목표로 삼아 왔다.

p133 원조 자체는 무상이었지만 그 내용은 사실 공짜가 아니었다. 한국 정부가 원조 물자를 팔아서 마련한 돈을 어디에 쓸 것인지 결정하는 권한은 미국이 주도권을 쥐고 있는 한미합동경제위원회에 있어 원조 물자 판매 대금의 상당 부분은 미국산 무기와 제품을 사는 데 쓰였다. 게다가 1958년에는 농산물 가격이 폭락해 농민들이 큰 어려움을 겪었는데, 주요 원인은 필요한 양보다 더 많은 잉여 농산물이 들어와 곡물 가격이 크게 떨어졌기 때문이었다. 이리하여 밀과 원면이 대량으로 들어온 후 농촌에서는 목화밭과 밀밭이 사라졌다.

p143 불우하기는 구본웅도 마찬가지였다. 한국전쟁 중인 1952년 급성폐렴으로 누하동 이 집에서 46세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그러나 그는 벗 이상을 그린 친구의 초상, 푸른 머리의 여인, 여인이라는 주옥같은 작품들을 남겼고 그의 예술가 유전자는 후손에게 전해져 외손녀 강수진이 희대의 발레리나가 되었다.

p155 근대의 지성들이 여기에 많이 모여 살명서 북촌에서는 개화사상이 일어나고, 갑신정변이 모의되었고 동학, 대종교, 불교의 종교운동이 일어났고, 3.1운동 준비가 이루어졌으며, 동아일보가 창간되고, 진단학회, 조선어학회, 조선민속학회 등이 창립되었다. 해방공간에서 암살된 대표적인 정치인인 우익의 송진우, 중도좌파의 여운형이 살았으니 북촌은 우리 개화기와 근대 지성의 심장이었다고 할 수 있다.

p158 박규수는 연암 박지원의 손자로 할아버지의 영향으로 실학사상에 젖어 있어 16세 때 벌써 태양, 지구, 달에 대해 읊은 시가 남아 있다. 18세 때 효명세자의 벗이 되어 1827년 세자가 대리청정을 시작한 뒤에는 세자의 명으로 연암집을 바치기도 했다. 그러나 1830년 효명세자가 요절하자 박규수는 세자에 대한 충성을 다짐하며 18년간 은거에 들어갔다.

p175 이 가회동성당은 건축 자체로도 유명하고 북촌 답사에서 큰 볼거리인데 2017년에 가수 비와 배우 김태희가 여기에서 혼례식을 올려 더욱 큰 유명세를 타고 있다.

p181 조선귀족은 1910년에 강제 한일합병 조약이 체결됨에 따라 일제가 일본의 화족 제도를 준용하여 내린 조선귀족령에 의거해 대한제국의 고위급 인사와 한일합병에 공로가 있는 자들에게 봉작하고자 만들어낸 특수 계급이다.

p187 문화유산의 관점에서 볼 때 왕족과 귀족이 누린 고급문화 자체는 귀중한 문화적 자산이다. 그들이 만들어낸 거의 독점적인 세련된 문화 형식을 나 같은 서민도 누릴 수 있게 확산되는 것이 사회가 발전하는 길이라고 생각한다

p197 조선물산장려운동은 명망가들의 계몽운동 차원에서 일어났지만 정세권의 참여로 실천력을 가진 운동으로 발전했다. 정세권은 낙원동 300번지에 조선물산장려회관을 지어 기증했고 재정을 담당했다. 또 이극로의 열정적인 국어운동에 감명받아 화동 129번지에 조선어학회관을 지어주고 역시 재정적으로 지원했다.

p219 1943년, 간송은 한남서림을 인수한 덕분에 마침내 훈민정음 해례본이라는 국보 중의 국보를 손에 넣게 되었다. 그때 중개상은 값으로 1천 원을 요구했는데 당시 1천 원은 서울의 큰 기와집 한 채 값이었다고 한다. 이에 간송은 이 작품의 가치는 그 정도가 아니라며 내가 그 10배인 1만원과 자네 수고료로 1천 원을 얹어줌세라고 하고는 1만 1천 원을 지불했다고 한다.

p228 여보게. 자네가 보다시피 여기 있는 책들은 수준이 낮아요. 그래서 손님이 잘 보이는 내 머리 위에 이 거룩한 책을 꽂아둔 거예용. 이게 있으면 고서점이고 이게 없으면 헌책방이 되는 거야. 뭘 좀 알고나 산다고 해. 윤팔병 형의 생애 마지막 직함은 아름다운 가게 이사였다.

p231 통문관은 해방을 맞은 기념으로 1946년에 류열 박사의 농가월령가를 펴낸 바 있었는데 산기 선생은 류열 박사가 왔다는 신문 기사를 보고는 일행이 방문한다는 롯데월드 민속관 앞에서 기다렸다가 류열 박사를 보고는 냅다 달려가 농가월령가 2부와 50만원이 든 흰 봉투를 불쑥 건넸다. “내가 통문관이오 선생 책을 펴냈지만 기별이 끊겨 책도 못 드리고 원고료도 못 드렸수. 받아주슈”

p232 통문관에는 적서승금이라는 편액이 걸려 있었다. 책을 쌓아두는 것이 금보다 낫다는 뜻이다.

p241 이러한 민예품 가게들이 건재하고 여기를 드나드는 점잖고 멋을 아는 미술 애호가들이 거리를 채우고 있기에 아직까지 인사동이 문화의 거리로서 품격을 지니고 있는 것이다

p270 영국사람이 가야토기를 사가면 영국 토기가 되는 것이 아니라 영국 사람도 가야토기를 통해 한국 문화를 사랑하고 존경하게 되는 것이다.

p282 내가 연구원들과 식당으로 들어서자 부인은 반가워하며 나를 보자마자 눈물을 글썽이면서 “왜 그간 안 왔느냐”며 손을 놓지 못했다. 생태찌개가 끓기 시작하자 드디어 밥이 나왔다. 연구원들은 호기심 어린 눈으로 밥뚜껑을 여니 과연 김이 모락모락 나는 윤기 있는 흰밥 위에 콩이 다섯 알 얹혀 있었다. 그런데 내 밥뚜껑을 여니 콩이 열 알이나 수북이 들어 있었다. 옛정이 한없이 느껴지는 콩 열 알이었다.

p286 두 사람은 수락산 기슭에 사글셋방을 하나 얻고 사는데 출판사를 경영하던 시인 강태열이 막걸리 값이나 하고 돈은 천천히 갚으라며 300만 원을 내준 것으로 찻집 귀천을 열었다. 귀천에는 그의 친구 문인들이 드나들면서 인사동은 본격적으로 문인들의 거리가 되었다. 천상병 시인은 결국 1993년 간경화로 세상을 떠났고 귀천이라는 시를 남겼다.

p291 평화만들기에 들어가 테이블에 앉으면 옆에도 뒤에도 아는 사람이라 술병을 들고 자리를 옮겨가며 마셨고, 또 새 손님이 들어오면 일어나서 인사 나누기 바빴다. 약속 없이 가도 어디엔가 끼어 앉아 함께 술 마실 자리가 있었다. 그래서 시골 노인 마실 나오듯 평화만들이게 오는 인생들이 적지 않았다.

p293 김지하는 내 글씨가 아니라 분단의 아픔을 우아한 서정으로 노래한 이용악의 글을 봐달라고 했다는데, 나는 이를 보면서 이용악의 시보다도 오랜 기간 감옥 독방에서 얻은 후유증으로 정신병원까지 드나들며 말년에 이해하기 힘든 언행을 보여준 김지하가 아니라, 말술을 마시며 통음을 하고서도 이용악의 시를 외워 쓰던 그 시잘 지하형의 옹훈한 호연지기를 보게 된다.

p295 카페 소설에는 가수 김민기처럼 홀로 와서 술과 고독을 함께 마시는 인생들도 적지 않았는데 영화제작자 이준동은 한쪽 기둥 옆자리에서 맥주 대여섯 병에 멸치 땅콩 안주만 놓고 몇 시간씩 말없이 앉았다 가곤 해 사람들은 그를 카페 소설의 실내장식 같다고 말하곤 했다.

p302 인사동길의 주인이 그렇게 완벽하게 바뀌게 되자 상권이 바뀌면서 전통으로 먹고 살아온 고서점, 고미술상, 민예품 가게, 표구점, 필방 들이 하나둘씩 문을 닫고 그 자리에는 액세서리와 관광 기념품 가게가 들어섰고 호떡집, 실타래 엿, 쫀득이 아이스크림 가게가 길가를 차지했다.

p308 내가 지나가면서 눈인사를 보내면 언제나 편안한 미소로 답해주셨는데, 이분이 있기에 인사동에는 인간적 체취가 더욱 짙게 느껴졋고 이런 분이야말로 건강한 서민의 표상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황씨 아저씨가 10여 년 전부터 보이지 않았다. 이글을 쓰기 위해 수소문해보았더니 그 무렵에 돌아가셨다고 한다.

p311 북한산은 최고봉인 백운대를 중심으로 북쪽에 인수봉, 남쪽에 만경대가 있어 삼각산이라고도 불려왔다.

p333 케네스 클라크는 문명에서 고대국가가 성립되기 위해서는 반드시 세 가지를 갖추어야 한다고 했으니 첫째는 율령체계, 둘째는 종교, 셋째는 영토의 확장이다. 신라가 이 세가지를 확실히 갖춘 것은 법흥왕부터 진흥와에 이르는 시기였다

p347 공군에서는 추락한 비행기의 날개자락 잔편만 찾으면 그 원인을 알 수 있다고 한다. 비석 머릿돌도 아주 작은 잔편 하나만 찾으면 완벽하게 복원할 자신이 있다. 나는 언젠가는 찾아낼 것으로 지금도 기대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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