합스부르크, 세계를 지배하다
마틴 래디 지음, 박수철 옮김 / 까치 / 2022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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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합스부르크, 세계를 지배하다

 : 마틴래디

 : 까치글방

 : 2022/08/14 - 2022/08/23


오스트리아의 빈을 좋아하기에 합스부르크에 대해 관심이 있었다.

기껏해야 자연사 박물관 앞에 있는 마리아 테레지아 여왕, 베르사이유의 장미의 마리 앙뚜와네트, 모차르트에 나오는 요제프 황제 정도만 아는데 합스부르크 제국의 ATOZ를 배우게 됐다

책은 생각보다 재미는 없었다. 

아무래도 에피소드 중심이 아니라 해당 지도자의 역할과 사건을 기술하다 보니 재미보다는 정보전달에 치중한 책이다.

그래도 새로운 걸 많이 배웠다. 

합스부르크 가문이 스위스에서 오스트리아로 옮긴 이야기며, 마리아 테레지아와 요제프2세의 계몽주의 정치, 뜬금없이 합스부르크 사람이 왜 멕시코에 가서 황제가 됐는지, 합스부르크 제국이 해체된 후 오토의 멋진 모습등

전쟁이 아닌 결혼으로 제국을 이룬 특이한 제국이기도 했고, 문화를 사랑했던 제국이다보니 강한 제국은 아니지만 멋진 제국이었다는 생각을 했다. 

유럽 역사의 다른 조각과 비교하면서 보면 더 재미있을 것 같다.

역시 아는만큼 읽을 수 있고 보이는 것 같다. 


p16 구왕궁은 호화로운 시설로 감동을 선사하기 위해 세워진 건물이 아니었다. 구왕궁은 빈과 그 주변의 농촌을 위압하고, 권력이라는 메시지를 전달하기 위한 성이었다.

p24 합스부르크 가문의 역대 황제들과 통치자들은 카톨릭 교회의 권위에 도전하는 신교 교리의 확산을 단속했따. 스페인계 합스부르크 가문의 종교의식에서, 신앙을 정화해야 한다는 사명은 영성체를 향한 과시적인 헌신과 안무를 통해서 연출된 이교도 화형 장면으로 골고루 드러났다

p39 초야권은 후대인들의 외설적인 날조의 결과물이다. 실제로 3실링은 결혼에 부과되는 세금이었을 뿐이고, 사육제의 종료를 알리는 사순절 선물과 다를 바 없었다. 그것은 스위스의 다른 지역들에서도 흔히 찾아볼 수 있었다.

p44 프란츠 페르디난트의 혈통을 파고든 연구자가 깨달았듯이, 합스부르크 가문 사람들은 생존자들이었다. 그들은 대대로 상속자를 낳았다. 아들이 없을 때면 사촌과 조카가 대를 이었다. 그렇게 끈질기게 대를 잇다 보니 혼인관계를 맺은 가문의 대가 끊어질 대 그 재산을 차지할 기회가 생겼다.

p66 알브레히트는 궁정을 오늘날 빈의 호프부르크 궁전 중심부에 위치한 구왕궁으로 옮겼다. 스위스인들이 아르가우에 있는 합스부르크 가문의 토지와 거점을 계속 압박했기 때문이다.

p76 루돌프는 합스부르크 가문의 일원들에게 역사의식과 자신감을 심어주었고, 덕분에 그들은 단순한 혈족 집단을 뛰어넘게 되었다. 로마 제국과 오스트리아를 둘러싼 과거를 상상으로 꾸며대고 대공의 관과 대공이라는 칭호를 창안한 데에 힘입어 후계자들 사이에서 연대감과 목적의식이 생겼고 연대감과 목적의식은 각 세대를 거치는 동안 그들의 마음에 더 깊숙히 각인되었다.

p86 계보 중심의 기사 이야기는 귀족과 왕족의 혈통을 당대의 지명이나 언어, 여성 전사들과 거인들, 용이 가득했던 전설상의 과거와 연결하려는 중세 말엽의 문학 장르였다. 그러나 영주 95인의 연대기는 성서의 역사와 황실의 역사, 오스트리아의 역사를 뒤섞었다는 점에서, 그리고 공상을 문장학이나 전기와 조합했다는 점에서 특별하다.

p91프리드리히는 장수의 덕을 톡톡히 보았다. 그는 친척들과 적들보다 오래 살았고, 덕분에 여러 개로 나뉜 합스부르크 가문의 세습 재산을 단일 단위로 재편할 수 있었다.

p109 나중에 드러났듯이, 막시밀리안의 도박은 성공했다. 그의 상속자들은 유럽뿐 아니라 세계의 주인이 되었다. “남들은 전쟁을 벌일 때 행복한 오스트리아는 결혼을 한다”라는 17세기의 어느 낙서처럼 말이다.

p119 카를은 애인들을 둘 만큼 사별의 아픔에서 충분히 벗어난 후에도 티치아노에게 이사벨라의 초상화를 그리도록 하고, 종종 악사들에게 그녀를 추모하는 의미로 프랑스 샹송 “1000가지 후회”를 연주하도록 지시하는 등 부인의 죽음을 꾸준히 애도했다.

p146 펠리페는 그가 자신의 처신을 두고 몇 차례 내놓은 해명을 근거로 판단하는 편이 더 낫다. “종교에 대한 모욕을 조금이라도 감수하느니 차라리 내 모든 신분을, 그리고 만약 있다면 100개의 목숨을 잃겠다. 이단자들을 통치하고 싶은 마음은 없기 때문이다”

p179 헤르메스의 사상은 모든 물질이 사실상 같은 것이기 때문에 만물의 재료인 원질 또한 금으로 바뀔 수 있을 법하다는 원리를 확증함으로써 연금술 관행의 밑바탕이 되었다.

p229 마그데부르크 약탈 사건은 수많은 소책자와 선전용 인쇄물, 설교를 거쳐서 아주 생생하게 알려졌다. 카톨릭교도들은 그 사건을 천벌의 관점에서 평가했고, 도시를 잿더미로 만들어버린 화재를 일으킨 장본인들이 바로 마그데부르크 주민들이었다는 점을 (정확하게) 지적했다.

p236 베스트팔렌 조약은 “기독교 세계의 전반적인 평화” 달성을 목표로 삼았고, 따라서 최초의 유럽헌법을 제정한 조약으로, 또 근대 유럽의 발전에서 중대한 순간을 장식한 조약으로 높이 평가되어왔다.

p262 그들의 탁월한 통치 덕분에 펠리페 4세는 아무 부담 없이 의식과 관련한 역할을 맡고, 훌륭한 예술품을 의로하고, 본인의 특기를 발휘하여 무려 30명 이상의 사생아를 둘 수 있었다.

p273 바로크의 핵심은 풍유이고, 풍유는 흔히 상징(인간 조건의 양상이나 태도나 행동이 농축된 그림 문자나 주제)의 형태를 띤다.

p287 자동체스 인형이라는 속임수가 먹힌 데에는 켐펠렌의 기술적 창의력뿐만 아니라 상자 안에 숨어 있던 사람들의 공로도 컸다

p297 마리아 테레지아는 치세의 거의 절반 동안 전쟁을 치렀다. 재정 개혁과 자원의 적절한 관리는 그녀가 군사적으로 생존하는 데에 필수적이 역할을 했다

p320 마리아 테레지아가 신민들의 삶에 깊숙이 개입하는 과정의 기저에는 공동의 복리를 위해서 신이 군주를 임명했다는 신념이 자리 잡고 있었다.

p325 요제프가 반포한 관용 칙령에 힘입어 합스부르크 가문의 땅은 아마 유럽에서 종교적 비동조자들에게 가장 관대한 곳이 되었을 것이다

p345 죽음, 철학, 상업 등을 주제로 이사벨라가 남긴 글 중에는 남성론이라는 제목의 짧은 논문이 있는데, 이 글에서 그녀는 남자들을 실속 없고 이기적인, 그리고 여성의 속성인 이성이 결여된 자아도취자들이자 무익한 동물들이라고 통렬히 비방했다.

p350 빈이라는 도시에는 저급한 면도 있었다. 약 20만 명이 거주하는 도시인 이곳엔느 1만 명의 일반 매춘부들과 4,000명의 고급 매춘부들, 1만 2,000명의 매독 환자들이 있었다.

p356 1780년대 후반기에 개혁이 좌초되기 시작하고 반대 세력이 결집하자, 요제프는 언론과 극장에 대한 검열을 강화했다. 어릿광대의 즉흥 공연을 금지했고, 신문에 특별세를 부과했으며, 모든 종교와 도덕과 사회질서를 훼손하려는 잠재적 말썽꾼들을 조사하도록 경찰에 지시했다.

p394 롬바르디아에서는 모든 민주 정치가 파괴되었고, 군사 통치와 공포 정치가 시작되었다. 합스부르크 제국의 군대는 반란자들과 동조자들을 체포해서 공개 태형과 교수형에 처했다. 오늘날 음악회에서 라데츠키 행진곡의 박자에 맞춰 손뼉을 치고 발을 구르는 관객들은 곡의 배경을 상기할 필요가 있다.

p411 프란츠 요제프는 책임을 지지 않았고 제도나 헌법에 얽매이지 않았다. 그는 군주로서 적합하지않은 인물이었지만, 자신이 우월한 지혜의 소유자라고 자부했다.

p435 멕시코에서는 이미 사형제가 폐지된 상태였음에도 그는 짧은 재판을 거친 뒤 2명의 장군과 함께 총살형을 선고받았다. 1867년 6월 19일에 처형장으로 향할 때, 그는 날씨를 언급했다. “날씨 참 좋군! 늘 이런 날에 죽고 싶었지”

p436 막시밀리안의 위엄과 용기, 순교를 길게 설명하는 익명의 프랑스어 원문은 곧바로 독일어와 헝가리어로 번역되어 독자들의 호기심을 채워주었다. 막시밀리안이 사후에 그와 같은 명성을 누린 것은 무엇보다 그가 죽음을 맞이한 상황 때문이었다.

p462 조각상에 담긴 뜻은 분명했다. 자연의 제국을 탐험하는 사람들은 그리스와 로마 시대의 제국 창건자들만큼 칭송되어야 했다.

p463 역사주의는 19세기 중엽의 건축적 관례였다. 역사주의에 의하면 건물은 각자의 기능에 맞추어 그것과 가장 부합하는 시기의 건축 양식을 반영해야 했다. 따라서 빈의 시청은 빈이라는 도시가 영광을 누렸던 중세를 상기시키는 고딕 양식으로 지어졌다.

p483 루돌프 황태자는 1888년에 보스니아를 방문해서 이렇게 말했다. “우리가 이곳에서 이룩해야 할 사명은 동방에 서양 문화를 도입하는 것이다 .”

p505 영국의 외무 장관 로이드조지도 합스부르크 제국의 해체는 “우리 전쟁 목표의 일부분이 아니다”라고 선언했다. 그러나 합스부르크 제국을 독일로부터 떼어놓을 가망이 희박해지자 연합국은 강경한 태도를 보였다. 미국의 국무 장관은 합스부르크 제국이 “유럽의 지도에서 지워져야 한다”라고 요구했고, 1918년 6월에 윌슨 대통령은 “슬라브 인종의 모든 분파를 독일과 오스트리아의 지배로부터 완전히 해방해야 한다”라고 선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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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국시대, 진실과 반전의 역사 - 유물과 유적으로 매 순간 다시 쓰는 다이나믹 한국 고대사 서가명강 시리즈 12
권오영 지음 / 21세기북스 / 2020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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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삼국시대, 진실과 반전의 역사

 : 권오영

 : 21세기북스

 : 2022/08/07 - 2022/08/11


이런 책을 읽어야 성장하는 느낌이 들지 않을까?

학교를 졸업하고 이곳저곳에서 책읽고 강의듣고 했던 내용보다 책 한권에서 얻은 지식이 훨씬 크다.

그만큼 유물조사 및 고고학에 의한 역사발견이 많았다는 이야기다.

페이스북이나 유튜브를 보면 그저 우리나라 만세를 외치는 국뽕주의자나 일본이나 미국에 경도된 바보들이 정말 많은데 그런 엉터리 사이에서 역사학자들이 어떻게 역사를 발견하고 연구하고 발전시키는 지를 알 수 있었다. 

올해 읽은 책중 가장 재미있고 유익했던 책 가운데 하나다.

좋다.. 


p7 일본의 정사서 일본서기를 바탕으로 전개되면서 한일 역사학계에서 오랜 기간 논란이 되었다가, 가야 고분군의 발굴 등으로 유물들이 발견되면서 2010년 한일역사공동연구위원회를 통해 공식적으로 폐기되었다

p13 상고사는 전문 연구자만이 아니라 역사에 관심이 많은 일반 시민들이 수많은 설을 자유롭게 주장하는 백가쟁명의 장이기도 하다. 수십 년간 전문적인 훈련을 받은 연구자나 종교적 신념에 사로잡힌 유투버가 등가로 취급받는 분야이기도 하다

p22 두 책에 의하면 고대부터 일본 천황은 대단히 높은 지위를 누렸고 백제와 신라, 가야 왕들은 천황에게 굽신거리는 낮은 지위에 머물렀다. 이 내용이 사실일 가능성은 희박하다. 그러나 이 책을 이용해서 한국 고대사나 한일 관계사를 연구하려면 독이 가득한 알을 제거하고 복어를 섭취하듯 왜곡된 내용을 전부 걸러내야 한다

p22 이처럼 급변하는 게 고대사이다 보니, 수십 년 전 진실이라 여겼던 역사적 사실을 줄기차게 주장하는 이의 말은 곧이곧대로 믿을 수 없게 되었다. 통설은 계속 무너지고 있다

p30 기원전 1세기 무렵 한반도 남해안에는 원거리 국제 교섭을 관장하던 세력이 있었고, 엄청난 부를 독점하던 지배자가 있었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p36 고고학 자료는 금석문이나 목간처럼 요리하기 좋은 재료가 아니기에 연구자는 자료가 충분히 말을 하도록 자꾸 대화를 걸고 흔들어 깨워야 하는데 그것에 어려움을 느끼는 것이다.

p47 대표적인 예로 비늘 갑옷을 들 수 있다. 4~5세기 무렵 일본에서도 쇠판으로 만든 갑옷을 많이 사용했지만, 대성동을 비롯한 가야무덤에서 발견한 갑옷들은 그보다 훨씬 발전된 개량 기술로 만든 것이다. 이외에도 기마전에서 사용한 재갈, 발걸이 등 마구류와 철제 무기류는 일본을 압도하는 양과 기술을 보여주었다. 결론적으로 갑옷, 마구, 무기 제조술에서 나타난 우열의 차이를 감안한다면 왜가 군사적 우위로 가야를 지배했다는 임나일본부설은 도저히 성립할 수 없다

p57 익산 미륵사가 무왕과 신라 출신 선화공주의 협력으로 조성되었다고 우리에게 말해준 문헌은 13세기에 쓰여진 삼국유사인데, 미륵사지 서탑을 해체하는 과정에서 사리봉안기가 발견되면서 800년 통설이 무너졌다. 문헌에는 보이지 않던 사택씨 왕후가 등장했고 무왕의 왕비가 누구인지를 둘러싼 논쟁이 시작됐다

p61 무엇보다도 인천공항을 향할 때마다 근심걱정보다 가슴 설레는 체질이라면 고고학 연구에 안성맞춤일 것이다

p72 경산 임당동 고분군은 진한에서 신라에 걸쳐 장기가 만들어진 무덤들인데, 발굴 결과 유례가 없을 정도로 많은 인골이 출토되었다. 현재 발견된 인골 대부분은 영남대학교 박물관에 소장되어 있으며, 200여 개체의 인골 중에서 편두를 한 두개골이 적지 않게 포함되어 있다. 결과적으로 진한과 변한은 물론 신라와 가야에서도 편두를 실시했음을 알 수 있다.

p101 옥전 M3호분이라고 명명된 다라국 왕릉에서는 고령 지산동만큼의 순장자가 발견되지는 않았지만 쇠도끼 수십 점, 말 갑옷과 투구, 사람 갑옷과 투구, 용과 봉황을 화려하게 장식한 고리자루칼이 4점이나 나왔다. 비슷한 시기의 백제 무령왕릉에서 용봉문 고리자루칼이 한 점밖에 나오지 않은 점을 고려하면 옥전 M3호분의 후장은 분명 지나치다. 아마 망자의 내세를 위해 현세의 삶을 망가뜨린 것이다.

p127 왕성 자체가 산성의 형태를 취한 고구려의 오녀산성과 환도산성 외에도 평지에 있는 왕성을 보호하기 위해 주변에 위성처럼 여러 개의 산성을 배치했다.

p143 1980년대에 서울 몽촌토성과 하남 이성산성을 발굴조사하면서부터 대부분의 연구자는 하남 위례성이 있던 곳으로 몽촌토성과 이성산성에 주목하기 시작했다. 결국 1999년에 진행한 풍납토성 동벽 조사로 인해 위례성 위치 논쟁을 종결할 수 있었다. 전체 둘레 3.5킬로미터, 기저부 폭이 40미터 이상, 높이 12미터 이상인 초거대 토목구조물을 축조하며 동원된 노동력은 200만 명을 훌쩍 넘어섰다. 왕성이 아니고서야 이처럼 큰 규모의 성을 쌓을 이유가 없다.

p146 이런 최첨단의 판축공법과 부엽공법은 백제인에 의해 일본으로 전래되 토성과 궁궐, 고분, 제방 축조에 활용되었다. 이렇게 풍납토성을 짓는 데는 최첨단 기술과 최고의 기술자가 동원되었다. 풍납토성이란 걸작을 만든 이들은 당대 최고의 기술자임에 틀림없다

p155 무령왕릉을 발굴한 학자들은 최고의 영예와 행복을 누렸을 것 같지만 제대로 조사하지 못했다는 죄책감과 최대의 발견, 최악의 발굴이라는 야유와 빈정거림 속에 살아야 했다. 모든 유적은 소중하며, 단 하나밖에 없는 것이기에 유적 발굴조사에 임하는 사람은 사람의 생명을 다루는 의사의 자세를 본받아야 한다

p162 동북아시아를 바라보는 시야를 넘어서 유라시아 동부라는 안경을 쓰고 역사를 보면 다른 모습이 보이기 시작한다. 한이라는 초강대국에 맞서 싸운 세력은 동쪽의 고조선만이 아니었다. 북쪽의 흉노가 한을 압박했고, 서쪽에는 오손, 월지, 사카란 세력이 있었다. 미얀마 쪽에는 퓨라는 종족이, 중국 운남성 지역에는 디안이, 그리고 지금의 중국 광동, 광서, 베트남 북부에는 남월이, 복건성의 민월 등이 마치 사나운 호랑이 한 마리를 둘러싼 진돗개 무리처럼 한을 둘러싸고 계속해서 긴장관계를 맺었던 것이다.

p167 동쪽에서 서쪽으로 가면서 위구르족, 카자흐스탄, 우즈베키스탄, 키르기스스탄, 투르크메니스탄, 아제르바이잔이 모두 투르크계 국가이다. 투르크 벨트의 동쪽에 해당하는 카자흐스탄 사람들은 우리와 가장 비슷한 생김새를 지녔다. 그리고 서쪽으로 갈수록 백인에 가깝다. 이런 양상은 돌궐족의 이동과정 중 생성된 변화다

p169 2018년 국립중앙박물관은 황금인간전이란 이름으로 기원전 6세기에 살았던 사카족 왕자의 무덤, 즉 쿠르간에서 출토된 부장품을 전시했다. 그런데 이 무덤의 구조와 부장품을 5세기 무렵의 신라 왕릉인 황남대총에서 발견된 것들과 매우 유사한다. 문제는 두 유적 사이에 천 년이란 시차가 있다는 것이다.

p175 내게 죽기 전에 꼭 가봐야 할 곳을 몇 군데 꼽으라고 한다면 나는 주저 없이 이 사막길을 통해 만날 수 있는 우즈베키스탄의 사마르칸트와 이란의 이스파한을 꼽는다. 특히 사마르칸트에 있는 비비하눔 모스크의 눈 내리는 풍경은 잊을 수가 없다.

p178 국제도시 장안에서는 복장, 음악, 음식 등 많은 분야에서 소그드와 페르시아의 호풍 문화가 크게 유행했다. 기원전 4세기 마케도니아의 알렉산더 왕이 동정했을 때 혼인한 현지의 여성도 소그드인이었고, 당나라를 뒤흔든 안록산-사사명의 반란을 주도한 안록산 역시 소그드와 돌궐의 혼혈이었다.

p184 카타콤 내부에서는 신장 180센티미터가 넘고 편두를 한 장신 여성이 온몸에 상처투성이가 된 채 무기를 잔뜩 보유하고 누워 있는 모습도 찾아냈다. 여성 전사였던 것이다. 아제르바이잔 학자들의 도움을 받아 이 카타콤에 묻힌 이들은 알란과 사르마티아라고 하는 유목 기마민족이었음을 알아냈다.

p190 사기에 등장하는 한나라의 누선장군 양복은 남월 공략을 마무리하고 곧바로 위만조선 침략전에 나섰다. 이 양복이란 인물에 의해 남월과 위만조선이 연결되었다. 그렇기에 남월의 역사를 왜 알아야 하느냐 묻는다면 위만조선을 아는데 남월국의 역사가 큰 도움이 되기 때문이라 답할 수 있다.

p192 참파는 한자로 임읍이라 불리던, 베트남 중부의 다낭과 호이안을 무대로 발전한 항시 국가다. 372년 참파가 동진에 사신을 보낸 기사가 남아 있는데 이 기사에는 백제 근초고왕이 사신을 보낸 기록도 포함되어 있다.

p197 아르잔 2호분은 러시아와 독일 연구팀이 공동조사한 것으로, 세계사 서술을 바꿀만한 위대한 발견을 이뤄냈다. 기원전 6세기 무렵 흑해 연안에서 발생한 스키타이 문화가 점차 동으로 퍼졌다는 기존의 정설을 뒤집은 것이다. 기원전 9-8세기에 이미 스키타이 문화는 아르잔에서 발생하였으며 점차 서쪽으로 퍼져나간 사실이 입증되었다.

p206 우리 민족 제일주의에 입각한 우리의 고대사 연구가 지나친 민족주의적 편향으로 인해 세계 학계의 우스갯거리가 되어가고 있음도 알게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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붉은 백합의 도시, 피렌체 여행자를 위한 인문학
김상근 지음, 하인후 옮김, 김도근 사진 / 시공사 / 2022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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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붉은 백합의 도시, 피렌체

 : 김상근

 : 시공사

 : 2022/08/06 - 2022/08/12


이탈리아 시리즈를 쓰고 계신 김상근 교수님의 세번째 책..

이번에는 피렌체다.

르네상스의 도시이고, 메디치가로 유명한 곳.

도시는 작지만 볼거리가 풍성하고, 미켈란젤로 언덕에서 바라보는 뷰가 멋있었던 곳.

다시 한번 가보고 싶은 도시가운데 하나..

김상근 교수님은 내가 알고 있는 이런 피렌체의 모습에 피렌체의 역사를 더해주었다.

메디치가가 권력을 잡기 이전의 피렌체의 역사를 상세하게 써내려갔다.

생각보다 심각하게 권력투쟁이 있었다는 걸 알았다.

평민과 귀족, 그리고 부르주아라고 이야기할 수 있는 세력까지...

다른 도시와 달리 왜 이렇게 권력투쟁이 강했을까? 압도적인 세력이 없기 때문일까?

주변의 도시국가의 힘을 빌려야 도시를 유지할 수 있을만큼 연약한 도시가 내부적인 권력투쟁은 어마어마하게 강하게 진행했다는게 아이러니...

권력을 잡고 나서는 다시 억압의 모습을 보이는 걸 봐서 권력의 속성이 억압이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든다.

다음에 피렌체를 방문하게 되면 르네상스 이전의 투쟁의 현장도 들려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p11 2011년, 삼성경제연구소가 매년 발표하는 SERI CEO 여름휴가 추천도서로 선정되어 순식간에 베스트셀러가 도었다. 책을 쓰고 돈을 벌 수 있다는 사실을 그때 처음 알게 되었는데, 아쉽게도 그런 일은 다시 일어나지 않았다.

p17 그가 우리에게 들려줄 피렌체 이야기는 피렌체 사람들의 일상이다. 한 조각 빵을 얻기 위해 부자들의 밥상 밑에 앉아 있었던 가난한 사람들의 이야기, 넘쳐나는 부를 주체하지 못했지만 어떻게든 세금을 적게 내려고 온갖 꼼수를 부렸던 귀족들의 이야기, 죽어도 귀족들의 지배를 받지 않겠다고 절규했던 평민들의 이야기, 질투와 배신으로 마음에 상처를 입은 사람들이 그 분노를 다른 사람들에게 쏟아내다가 결국 자신이 망가지는 이야기 등이 적나라하게 펼쳐질 것이다.

p41 베키오 다리 위에서 벌어진 이 암살사건은 장차 피렌체를 두 진영으로 분열시키는 계기가 되었다. 강남을 대표하던 교황파 부온델몬티 가문과 강북을 대표하던 황제파 우베르티 가문의 반목이 시작된 것이다.

p60 곧 보게 되는 것처럼, 이 행정장관직이 바로 귀족의 몰락을 초래한 원인이 되었다. 왜냐하면 평민들은 이런저럭 구실들로 귀족들을 행정장관직에서 배제했고, 결국 귀족들은 아무런 존중도 받지 못하고 파멸했기 때문이다.

p74 단테는 자신의 많은 책과 저술에서 아내 젬마의 이름을 한 번도 언급하지 않은 것으로 유명하다. 9살 때 만난 동갑내기 첫사랑 베아트리체는 자신을 천국으로 인도하는 천사로 묘사했지만, 불쌍한 아내의 이름은 단 한 번도 언급하지 않았다.

p96 두 사람의 예상치 못한 죽음에서 피렌체 시민들은 교훈을 얻었다. 도시의 분열, 귀족과 평민의 갈등이 결국에는 모두에게 손해를 입힌다는 것이다. 귀족들의 피렌체 입성을 막은 평민들이 속 좁은 판단으로 귀족들의 피렌체 입성을 막고 외국의 왕을 모셨는데, 그것이 그들을 커다란 고통으로 몰고갔다.

p120 이런 일들이 벌어지는 동안, 대기근이 피렌체를 덮쳤고, 귀족과 하층민의 불만은 함께 높아졌다. 왜냐하면 귀족들은 평민에게 밀려 위엄을 잃었고, 하층민들은 식량 부족으로 굶주림에 시달렸기 때문이다.

p133 성당 내부에는 천재들의 무덤이 즐비하다. 단테를 위시해 미켈란젤로, 마키아벨리, 갈릴레이, 건축가 레온 바티스타 알베르티, 레오나르도 브루니, 작곡가 조이카노 로시니 등의 영묘가 안치되어 있다. 이탈리아 영광의 성전으로 불리기도 한다.

p137 세계사적 맥락에서 볼 때 피렌체는 단순히 르네상스의 도시나 천재들의 도시가 아니라 근대적 계몽의 도시이며, 자유와 평등을 지향한 인류 최초의 도시였다.

p173 지배하려는 자들이 사라진 곳에서 피렌체 사람들은 자유를 누렸다. 그 자유의 열매가 르네상스다. 이 시기에 피렌체는 르네상스라는 아름다운 꽃의 만개를 목격하게 된다. 미술사가들은 1400년 로렌초 기베르티와 필리포 브루넬레스키가 성 세레자 요한 세례당 청동문 제작을 놓고 경쟁했던 때를 르네상스의 시작 지점으로 잡는다.

p174 그의 눈에 비친 피렌체는 지배하겠다는 욕망을 절대로 포기하지 않는 귀족들의 거만함, 금력과 권력의 경계선에서 계산기를 두드리기 바빴던 그란디들의 욕심, 지배하는 방법은 모르지만 어쨋든 지배받는 것을 죽도록 싫어했던 하층민들의 어리석음이 뒤섞이 곳이었다.

p205 도시 여러 곳에서 확인되는 메디치 가문의 예술 후원은 피렌체 시민들의 심리를 경계심에서 경외감으로 전환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엄청난 권력과 부를 가진 사람이 예술과 공공 건축물들을 위해 아낌없이 돈을 투자하면, 대중들은 일종의 부채 의식과 기대감을 갖게 된다.

p210 코시모의 탁월함은 관후함에서 출발했다. 모름지기 권력과 부를 가진 사람은 관후함을 잃지 말아야 한다. 부자의 인색함보다 졸렬한 것이 없다. 권력을 가진 자의 옹졸함보다 더 볼썽사나운 것은 없다.

p228 200년간 피렌체는 그야말로 격동의 정치 일정을 소화해냈다. 13세기 말 귀족의 통치가 자멸로 끝난 다음, 귀족과 평민, 평민과 평민, 평민과 하층민, 하층민과 하층민 그리고 다시 평민과 그란디가 충돌했던 피렌체는 그야말로 공화국의 실험 부대와도 같았다.

p235 정치적 계산에 능수능란하고 자인한 성품을 가진 아들 필리포 마리아 비스콘티는 1423년부터 피렌체를 포함한 이탈리아 중북부에 대한 공격을 개시했다. 이 전쟁을 롬바르디아 전쟁이라고 부른다. 필리포는 이탈리아반도 전체를 통일하기전, 자기 안마당부터 확실하게 장악하려고 했다.

p249 약 100여년 전 흑사병이 피렌체를 초토화했을 때, 보카치오는 산타 마리아 노벨라 성당에서 데카메론을 쓰기 시작했다. 그러나 코시모는 약 100년 후에 바로 그 성당에서 메디치 가문의 이야기를 본격적으로 시작하게 된다. 앞으로 그 가문에서 교황이 2명 탄생할 것이며, 프랑스 왕비가 2명 탄생할 것이고, 무엇보다 르네상스라는 유럽 역사의 전환점을 메디키 가문이 이끌 것이다.

p266 그러나 무엇보다 마키아벨리가 반복적으로 칭찬하고 있는 그의 덕목은 신중함과 관대함이었다. 그는 경제적으로 어려운 사람을 만나면 신분의 고하를 막론하고 경제적인 도움을 주었다.

p283 신 성구실의 하이라이트는 미켈란젤로가 건축한 메디치 영묘실과 그 안에 전시된 조각 작품들이다. 방문객들은 그 좁은 공간에서 예술이 영혼과 극적으로 소통하는 경험을 하게 된다. 이 작은 영혼의 공간과 조각을 처음 주문한 사람은 교황 레오 10세였다.

p302 피에로의 통찰력 덕분에 메디치 가문은 교황을 배출하고 또 왕족의 반열에 올라갈 수 있었던 것이다.

p323 전설적인 용병 대장이 등장하자 볼테라 시민들은 즉각 항복을 선언했다. 싱겁게 전쟁이 끝나고 말았다. 그러나 몬테펠트로가 이끌고 온 우르비노와 밀라노 연합 용병대들은 성문 앞에서 공격을 멈추지 않았다. 12시간이나 계속된 볼테라 침공으로 도시는 쑥대밭이 되었고, 수많은 볼테라 시민들이 죽임을 당했다.

p328 수많은 피렌체 예술가들의 작품들이 성당의 내부와 외부를 장식하고 있었지만, 현재는 대부분 복제품을 전시해놓았다. 진품은 성당 광장 뒤쪽에 있는 두오모 박물관에 소장되고 있다. 기베르티의 청동문 2개와 도나텔로의 조각 작품들 그리고 미켈란젤로의 피렌체 피에타가 전시되어 있는 곳이다.

p352 그를 놓아주기에 앞서 왕은 온갖 종류의 친절과 애정의 표시로 로렌체의 마음을 얻으려 애썼으며, 공동의 이익을 유지하기 위해 그와 영구적인 협정을 맺었다. 그 결과 로렌초는 몇 달 전 한 위대한 인물로서 피렌체를 떠났지만, 이제 자신의 목숨을 걸고 조국의 평화를 회복했으므로 훨씬 더 위대한 인물이 되어 피렌체로 돌아왔다.

p362 그는 옛 애인 루크레치아 도나티에게 사랑의 시를 바치기도 했지만, 마키아벨리의 점잖은 표현대로, “베누스의 일에 지나치게 빠져 있던” 바람둥이이기도 했다. 그는 관능적인 삶을 살면서, 동시에 진중한 삶을 살았다. 그래서 마키아벨리는 그를 조합이 거의 불가능한 전혀 다른 두 인간이라고 평한다.

p407 이 책의 들어가며에서 잠시 설명한 대로 마키아벨리는 이곳에서 피렌체의 젊은 지성인들과 정치인들을 가르치면서 로마사 논고와 전쟁의 기술과 같은 명저를 남겼다. 루첼라이 정원은 단순한 고전 강독 모임이 아니었다. 피렌체의 현재 모순을 타파하고 미래의 개혁을 추구하는 정치적인 모임으로 발전해갔다.

p416 싸움을 이어갔지만, 로마는 논쟁을 거쳐 모두가 합의할 수 있는 법을 만들었다. 피렌체는 한쪽의 압도적인 승리를 갈구했지만, 로마는 양보를 통해 양쪽의 승리를 도모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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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령왕, 신화에서 역사로
정재윤 지음 / 푸른역사 / 2021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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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무령왕, 신화에서 역사로

 :정재윤

 : 푸른역사

 : 2022/08/02 - 2022/08/13


몇 번 빌렸으나 시간이 안맞아 읽지 못했던 책을 이번 여름에 읽었다.

역시 여름은 독서의 계절이다. 

백제역사는 밝혀지지 않은게 너무 많다. 우리나라 백제 문화의 진수라고 할 수 있는 무령왕릉을 발굴했지만 정작 무령왕에 대해서 우리는 잘 모른다.

특히 개로왕 이후 무령왕때까지 백제는 매우 혼란스러운 시기를 거쳤다. 

무령왕은 전임 동성왕이 시해를 당한 상태에서 왕이 되었고, 혼란스러웠던 백제를 매우 잘 안정시켰다.

과연 영동대장군이라는 칭호를 받을만하다. 

이 책은 우리에게 잘 알려지지 않은 무령왕의 출생부터 죽음까지를 역사서와 유물, 그리고 상상력을 동원하여 채워나간다. 

사마(무령왕)가 일본에서 건너와 왕이 됐다는 의미를 깊이 생각해보지는 못했었다. 

많은 백제인이 일본으로 건너가 무리를 이루고 있었고 왕족까지 가서 그들을 관리했다는 주장은 충분히 검토해보고 연구해볼만한 내용으로 보인다. 

아직은 유물이나 자료가 부족하지만 계속해서 많은 연구가 이루어지면 백제에 대해서 더 많은 걸 알 수 있지 않을까 싶다.

세계문화유산으로 등록된 백제문화인데 정작 우리는 너무나 모르고 있다는게 부끄럽다.

우리 아이의 역사책에는 더 풍부한 백제사가 담기기를 소망해본다. 

재미있었다. 


p36 새 국립공주박물관은 걸어서 무령왕릉에 이를 수 있을 정도로 인접한 곳에 있어서 무령왕릉을 위한 전시관이자, 수장고로서의 역할을 하는 듯하다.

p57 묘지석을 통해 무령왕이 525년, 그 뒤를 이어 왕비가 529년에 왕릉에 안장되었음이 밝혀졌다. 즉 두 번에 걸쳐 유물이 부장된 것이다. 부장품의 절대 연대 확인은 유물 편년의 기준을 제시해주었다. 상대적인 편년차가 심한 고고학계에 기준점이 제시됨으로써 고고학 연구가 발전할 수 있는 계기가 된 것이다.

p74 백제 왕력 기사도 자주 등장하는데, 이는 시기를 파악하는 기준점으로서의 의미가 있다. 시대가 불분명한 여러 기사를 기술하면서 백제 왕력을 중심으로 배치하였기 때문이다.

p88 백제인들이 집중적으로 정착한 곳은 규슈일대와 가와치 지역이었다. 규슈 일대는 무령왕이 탄생하고 성장한 곳이며, 가와치 지역은 동성왕의 탄생과 성장지였다.

p135 사마는 백제와의 해상 교류를 매개한 유력 세력가인 외가에서자란 것으로 보인다. 확언할 수는 없지만, 최소한 사마는 규슈 일대에서 자랐고, 그가 백제계 도왜인들의 세력을 바탕으로 성장하였던 것은 분명하다

p146 장수왕의 전술이 돋보인다. 기다렸다는 듯이 군사를 넷으로 나누어 협공하면서, 마침 불어온 바람을 이용하여 불을 질러 성안을 불바다로 만들었다. 이에 민심이 흉흉해지고, 탈출하려는 자도 속출하는 등 초반에 기선을 제압한 것이다.

p170 웅진 천도 직후 정국은 한성 시기처럼 해씨오 ㅏ진씨의 대결 양상으로 치닫고, 왕은 무력한 존재로 전락했다.

p197 실제 동성왕이 정치를 하면서 사람을 믿지 못하고, 중용된 인물도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나면 지방으로 내친 것이 이를 분명하게 보여준다. 동성왕이 무도하고 포악했다는 평도 그의 정치 운영 방식을 엿볼 수 있는 기록이다

p210 이처럼 동성왕 집권 후반기에 추진된, 사비에 대한 적극적인 정책에 대해 한성에 기반을 가졌던 진씨와 해씨 등 남래귀족들은 반발했을 것이며, 또한 웅진 부근 지역에 세력 기반을 가진 백가 등도 불만을 가졌을 것이다.

p229 정변의 원인으로 백제신찬은 동성왕의 무도와 백성들에 대한 포학을 들고 있다. 이에 반해 삼국사기에서는 백가의 개인적인 불만으로 서술하고 있어 그 내용이 다르게 나타난다

p236 이러한 상황을 이해하면, 백가는 정변에 참여했고 실질적으로 동성왕을 시해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지만, 정변을 주도한 인물이 아니었다는 점이 분명해진다. 오히려 정변 주도 세력에 의해 밀려났으며, 억울하게도 동성왕 시해의 주범으로 몰린 것이다.

p249 주서에 보이는 관리의 복색에 관한 규정이 고이왕 때 기사로 나오지만, 학계에서는 후대에 완비된 규정이 고이왕 때로 소급, 정리된 것으로 보고 있다.

p254 무령왕 대 22담로의 설치와 파견을 생각하면 번쩍 눈이 뜨일 것이다. 22담로에 자제와 종족을 파견한 것은 전국적인 지방 통치의 실현이며, 그 결과 토착 세력의 경제적 지배력이 약화하는 현상이 생겼다고 볼 수 있는 것이다

p291 양직공에 보이는 주변의 소국은 실제 상황이 아닌 백제가 양나라에 과시하기 위해 열거한 나라임을 알 수 있다

p293 양직공도에 보이는 방소국은 대국이 된 백제가 거느린 부용국으로 설명되었다. 한반도에서 고구려에 필적할 만한 대국이 되었으며, 그에 걸맞은 대우를 해달라는 백제의 요청에 양나라는 빠륵 화답했다. 양나라 황제가 동쪽을 편안하게 했다는 영동대장군이라는 작을 내려준 것이다.

p298 무령왕이 공들인 갱위강국 선언의 이면엔 주변 나라와의 관계가 뒤틀어진 양면성을 엿볼 수 있다. 이를 고뇌한 무령왕은 죽음을 앞두고 마지막까지 한성으로 순무하여 고구려의 침입에 대비하고자 했다. 얼마나 무령왕이 노심초사하였는가를 보여주는 실례이다

p299 무령왕의 묘지석 첫 구절이 바로 영동대장군 백제 사마왕이라는 점은 영동대장군이라는 작호에 대한 그의 애착을 보여주는 것이다

p305 내용을 구체적으로 살펴보면 검소하되 누추하지 않고 화려하되 사치스럽지 않다는 말은 서로 대구가 된다. 검소를 강조하였으나 누추하지는 않아야 된다는 점을 이야기하고 있다. 이는 백제 문화가 소박함을 지향했음을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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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럽 도시 기행 2 - 빈, 부다페스트, 프라하, 드레스덴 편 유럽 도시 기행 2
유시민 지음 / 생각의길 / 2022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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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유럽 도시 기행2

 :유시민

 : 생각의 길

 : 2022/07/31 - 2022/08/07


유시민 아저씨의 유럽 도시 기행기..

정치하느라 고생 많으셨는데 이제 이렇게 편안한 책을 쓰시면서 사는 모습을 보니 참 좋다.

누군가는 더 정치로 봉사해야 한다고 하지만 난 반대다.

문재인 대통령 정치하는 것도 반대였다.

그만큼 수고했으면 이제는 자신의 삶을 즐겨야 한다. 

이번에 방문한 도시는 빈, 부다페스트, 프라하, 드레스덴이다.

드레스덴을 빼고는 내가 갔었던 곳이다. 특히 빈과 프라하는 여러번 방문했었고, 다시 가고 싶고, 살고 싶은 도시다.

돈만 있으면 이런 도시에서 어슬렁거리며 살고 싶다.

겹치는 동선도 있고, 나에겐 생소한 곳도 있다. 

다음에 가게 된다면 방문해야지 하고 스크랩을 해놓은 곳들도 있다.

같은 곳을 방문했는데 이렇게 다르게 보는구나 하는 생각도 든다.

역시 아는 만큼 보인다...

여행가고 싶다. 


p14 텍스트를 보지 않은 사람은 콘텍스트의 가치를 알기 어렵다

p33 2021년 기준 1인당 국민소득 5만 달러를 넘은 오스트리아는 제약,엔진,석유화학을 비롯한 제조업이 GDP의 30%를 생산하는 강소국이며, 금융, 유통, 의료, 복지 등 서비스 산업 선진국이다

p35 알프스의 겨울 추위를 견디지 못해 철수한 적군의 요새에서 청동 대포를 3백 개 넘게 노획한 빈 사람들은 그것을 녹여 18톤짜리 종을 만들었다. 그게 빈의 대표 볼거리 가운데 하나인 폼메린이다

p48 성벽을 해체한 이후 50년 동안 빈의 인구는 네 배가 넘는 200만 명으로 급증했다. 소수의 왕족과 귀족, 신흥 자본가들과 그들을 위해 일하는 사람들이 살았던 중세도시는 없어졌다

p51 제1차 세계대전 패전과 혁명, 제정 철폐와 공화정 수립, 독일 합병과 제2차 세계대전 패전 등 정치적 격변이 벌어질 때마다 심한 우여곡절을 겪은 끝에 국립시설이 된 예술사 박물관은 호프부르크 구왕궁의 보물 전시실과 노이에부르크 신왕궁의 에페소스 박물관 등과 묶어 운영한다

p57 예술사 박물관이 더러 오아시스를 만날 수 있는 광할한 사막이었다면 제체시온은 제 성정대로 자란 오솔길 같았다. 예술사 박물관에는 견줄 수 없을 정도로 작은 공간이었지만, 어느 작품도 다른 것과 같지 않아서 그런지 내가 느낀 감정은 훨씬 더 풍성했다. 예술사 박물관에서 수백 년 동안 빈을 지배했던 낡은 문화를 보았고, 제체시온에서는 19세기 후반 등장한 새로운 예술과 사상을 만났다

p65 물론 빈 시민들만 시씨를 사랑하는 건 아니다. 오스트리아 국민, 심지어 이웃 헝가리 사람들과 발칸 지역 사람들도 시씨를 사랑한다. 시씨는 프란츠 요제프 황제의 부인 엘리자베트 아말이에 오이게니 또는 엘리자베트 폰 비텔스바흐의 애칭이다

p82 확실히 축제라는 건 어디서나 모여서 먹고 마시고 떠들고 춤추는 행사임이 분명하다. 모듬 생선구이, 감자볶음, 연어 철판구이와 치킨을 안주 삼아 맥주와 적포도주를 마시며 마지막 밤을 보냈다

p89 그 조형물이 공화국 수립을 기념하는 데 적합한지를 두고 격렬한 찬반논쟁이 벌어졌다는 사실과 찬반논리의 요지를 알리는 텍스트였다. 더 특별한 것은 그 안내문을 만든 것이 시의회의 결정에 따른 조처임을 알리는 마지막 문장이었다. 빈 시의회는 다수파의 지배를 승인하면서도 그런 방식으로 소수파의 주장을 존중한 것이다. 이런 것을 가리켜 성숙한 민주주의라고 하던가? 부러우면 지는 거라지만, 그래도 부러운 건 어쩔 수 없었다

p92 훈데르트바서는 자연의 곡선과 자연의 색을 존중했고, 흙, 숯, 돌, 벽돌과 같은 자연의 재료를 사용해 예술적 감정을 표현했다. 인간이 만든 직선의 경계를 버리고 자연의 곡선에 녹아들도록 집을 지었으며 지붕에 숲을 만들고 발코니에 나무가 자라게 했다

p104 머저르 민족주의와 기독교 문화를 상징하며 예나 지금이나 부타페스트에서 가장 높은 건물이다

p108 지하철 M1은 대중교통 수단이라기보다는 문화유산 또는 관광상품이었다. 언드라시 거리는 지금도 교통체증이 없는데 그 옛날에 왜 굳이 지하철을 만들었는지 모를 일이다. 하지만 노선길이가 4킬로미터 남짓밖에 되지 않는 M1은 요즘 보기 드문 저심도 지하철이라 타고 내리는 재미가 있었다

p117 동유럽에서 독일 번호판을 단 자동차는 절도단의 표적이라는 말을 들었지만 그렇게 낡아빠진 차까지 가져갈 줄은 몰랐다. 찻값은 나중 보험사에서 받았지만 빈의 제체시온에서 산 클림트 그림 포스터, 치킨전문점 비너발트 본점에서 어린이 손님 선물로 준 헨젤과 그레텔의 과자 오두막, 부다페스트 리스트 기념관에서 구입한 클래식 음악 CD, 여행 내내 찍었던 사진 필름은 되잦을 길이 없었다

p120 리스트는 헝가리에서 태어났지만 헝가리 사람이라 하기 어려웠고 음악도 헝가리 음악이 아니었다. 빈, 파리, 런던, 로마 등 유럽 전역의 여러 도시에 장기 거주하면서 다양한 장르의 음악을 섭렵하고 자신만의 음악 세계를 구축한 유럽인이었다

p122 자기네가 당했던 부당한 억압의 역사는 분명히 드러내면서도 이중제국 시절 크로아티아를 비롯한 발칸 민족들의 독립투쟁을 오스트리아와 손잡고 짓밟은 일이나 영토를 회복하려는 욕심에 나치 독일과 손잡았던 사실은 입에 올리지 않는다. 개인이든, 집단이든, 과거사를 일관성있는 태도로 소화해 내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p130 합스부르크제국의 수도였던 빈과 헝가리왕국의 수도 부다페스트가 그렇게 다를 줄은 몰랐다. 빈이 정장을 입고 반듯하게 걷는 신사라면 부다페스트는 청바지에 티셔츠를 걸치고 아무데나 앉아서 노는 청년 같았다

p134 언드라시는 10년 넘게 총리직을 수행한 후 일선에서 물러나 의원으로 활동하다가 1890년 세상을 떠났고 두 아들이 뒤를 이어 정치인이 되었다. 그는 유럽의 정치정세에 큰 영향력을 행사한 최초의 헝가리 사람이었고 머저르공화국의 기초를 만든 정치인이었다. 미학적으로는 칭찬하기 어려울 정도로 큰 언드라시 기마상은 그가 헝가리 국민의 마음에 심어준 민족 자부심의 크기를 반영한 것이다

p139 1989년 6월 부다페스트에서 치른 너지 총리의 뒤늦은 장례식에는 수만 명의 시민이 참석해 애도했다. 햇빛을 받아 하얗게 빛나는 국회의사당 마당에서 아무 걱정 없는 얼굴로 도나우를 구경하는 관광객들을 보면서 김춘수 선생의 시를 떠올렸다. 내가 태어나기도 전에 벌어졌던 그 정치적 참극을 나는 그 시로 배웠다

p145 부다페스트에는 바실리카보다 높은 건물이 없어서 도시 전체를 볼 수 있는 데가 없다. 부다페스트 전체를 조망하고 싶은 사람은 반드시 치터델러에 가야 한다

p158 궁이라고 하고 성이라고도 하지만 괴델레는 궁도 성도 아니었다. 황후가 즐겨 찾은 시골 별장이라고 하는 게 적당할 법했다. 집도 가구도 정원도 호프부르크나 쇤부른 궁전에는 비할 수 조차 없을 정로도 작고 소박했다

p160 그 도시는 스스로를 믿으며 시련을 이겨내고 가고자 하는 곳으로 꿋꿋하게 나아가는 사람 같았다. 1천 년 전 말을 타고 거기 왔던 머저르의 후예들이 지난 150여 년 동안 무엇을 성취했는지 보여주었다. 나는 부다페스트에서 대한민국의 현대사를 보면서 느끼는 것과 비슷한 감정을 맛보았다. 부다페스트는 슬프면서 명랑한 도시였다. 별로 가진 게 없는데도 대단한 자신감을 내뿜었다. 오늘의 만족보다 내일에 대한 기대가 큰 도시였다. 나는 그런 사람 그런 도시가 좋다.

p172 브라헤는 망원경이 없던 시대에 천문학자로 활동하면서 믿기 어려울 정도로 정교한 관측 자료를 작성했다. 브라헤의 조수였던 요하네스 케플러는 그 자료를 활용해 태양계 행성의 타원형 구조, 공전속도, 공전주기에 관한 이론을 정립함으로써 보편적 물리법칙을 세운 뉴턴의 시대를 예비했다. 지구가 우주의 중심이라고 믿었던 카톨릭의 세계관을 무너뜨린 외국인 과학자를 왕실 성당에 안장했으니, 프라하 사람들은 확실히 남다른 데가 있었다고 해야 마땅할 것이다

p176 후스의 동상은 보헤미아 민족주의와 더 나은 세상에 대한 민중의 열망을 담고 있다. 그는 스스로 옳다고 믿는 방식으로 살았고 죽음 앞에서도 신념을 버리지 않았다. 그럴 의도가 있었는지는 확실하지 않지만, 그의 삶과 죽음은 보헤미아와 유럽의 역사를 바꾸었다

p182 19세기 후반 보헤미안의 뜻이 달라졌다. 유럽 사회의 주류로 지위를 굳힌 부르주아 계급의 틀에 박힌 도덕 규범이나 행동 양식을 거부하고 스스로 선택한 가치관에 따라 자유분방하게 활동하는 지식인과 에술가를 가리키는 말이 되었다

p186 13세기에 초기 고딕 양식으로 지은 이 시너고그는 유럽에 남아 있는 유대 예배당 중에서 제일 오래되었다. 여러 차례의 화재와 박해, 추방, 재개발, 나치 점령 등의 시련을 견디고 살아남았다. 박물관으로 바뀐 다른 예배당과 달리 지금도 프라하의 유대인들이 여기서 예배를 본다

p193 카렐교는 다리가 아니라 광장같았다

p195 굴라쉬는 두껍지 않게 토막 친 쇠고기를 졸인 음식으로 으깬 감자와 함께 먹는데 매운 파프리카를 넣고 국물을 넉넉하게 만드는 부다페스트의 굴라슈와는 이름만 같을 뿐 완전 다른 음식이었다

p199 바츨라프의 기마상을 광장에 세운 것은 그가 대단한 업적을 남긴 위대한 군주여서가 아니라 고대 신화에 나올법한 비극의 주인공이었기 때문이다.

p202 카렐 4세가 실제적 국가 창설자라면 성 바츨라프는 정신적 국가 창설자이다. 생일이 확실치 않아서 사망한 날을 정신적인 국경일로 삼았다. 통치자로서 거론할 만한 업적오 없고 재위 기간도 짧았지만 도덕적 정치적 비난을 받을 일을 하지 않았다는 게 중요하다. 게다가 보헤미아의 자존을 지키려고 외세에 대항하다가 사악한 동생의 손에 목숨을 빼앗겼다

p204 두브체크와 개혁파 지도자들이 모스크바로 잡혀가고 체코슬로바키아공산당이 굴복했는데도 끝까지 무기를 들고 싸운 시민 백여 명이 목숨을 잃었다. 밖에서 응원한 것은 동독 시민들뿐이었다. 소련의 침략을 규탄하고 체코슬로바키아 시민들을 응원하는 시위를 하다가 1천 명이 넘게 체포 구금되었다

p231 프라하의 마지막 일정은 블타바 재즈보트였다. 저녁 여덟 시 반, 아직 어둡지 않은 시각에 시내 선착장에서 출발한 재즈보트는 우리나라의 관광버스 비슷했다. 아래층 선실에서 밴드가 두 시간 반 내내 공연을 했다

p241 누구나 알지만 아무도 내놓고 말하지 않는 사건이야. 우린 그보다 더 못된 짓을 훨씬 많이 했거든. 홀로코스트만 있었던 게 아니야. 코번트리 같은 곳도 한두 군데가 아니었어. 혹시라도 그 사건 가지고 막 떠드는 사람 만나면 조심해야 해. 올드나치거나 네오나치일지 모르니까

p256 2005년 2월 13일 성모교회느 ㄴ공식 부활했다. 안에서는 60년 전 그날의 폭격 희생자 추모 행사를 열었고 광장에는 6만여 명의 시민이 모였다. 전쟁의 참상을 증언하던 폐허가 시민의 자유와 독일의 통일을 상징하는 교회로 다시 태어난 것이다

p261 문화궁전의 외벽에는 사회주의체제의 유산임을 바로 알아볼 수 있는 초대형 벽화가 있었다. 1969년 동독의 저명한 예술가들과 드레스덴 미술대학 학생들이 그린 벽화의 제목은 <1849-1969: 드레스덴혁명 세력의 진보와 사회주의를 향한 120년의 투쟁>인데, 노동계급의 해방은 노동계급 스스로만 할 수 있다든가 우리가 역사의 승자라는 등 마르크스주의자들이 암송하던 문장을 적어두었다

p271 1871년 통일할 무렵부터 나치가 집권한 시기까지 독일은 과학 분야의 세계 최강국이었다. 나치가 사상과 학문 연구의 자유를 극단적으로 억압하고 유대인을 학살함으로서 걸출한 과학자들을 미국으로 망명하게 하지 않앗다면 지금도 그럴지 모른다

p279 드레스덴은 공정왕 아우구스트 시대에 바로크 도시 또는 엘베의 피렌체라는 별칭을 얻었다. 그때는 엘베 양안에 화려한 바로크 스타일 집이 빼곡했다. 하지만 구시가지의 역사적 건축물과 볼거리를 만든 지배자는 다른 아우구스트 1세였다. 프리드리히 아우구스트 데어 슈타르케, 원조 아우구스트 1세다

p291 도대체 무슨 축제인지 알 수가 없었다. 모두가 남이 뭐라 하든 제 하고 싶은 것을 하는 듯했다. 여긴 독일인데 이럴 수가, 독일 사람들이 질서와 규칙이라고는 그림자도 비치지 않는 행동을 하다니! 놀라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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