난처한 동양미술 이야기 1 - 인도, 문명의 나무가 뻗어나가다 난생 처음 한번 공부하는 동양미술 이야기 시리즈 1
강희정 지음 / 사회평론 / 2022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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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난처한 동양미술 이야기 1

 : 강희정

 : 사회평론

읽은기간 : 2024/07/05 -2024/07/25


난처한 시리즈로 인기를 끌었다고 생각했는지 사회평론이 또 하나의 주제로 책을 냈다.

이번에는 동양미술이다. 

미술이야기도 읽었고 클래식도 읽었기에 이 책도 한권 사서 읽었다.

동양미술은 낯설어서 그런지 확실히 어려웠다. 

우리나라 미술도 아니고 인도미술에서부터 출발하려니 더욱 어려웠다. 

인도라고 해봐야 마우리아 왕조, 쿠샨 왕조같은 왕조들 이름만 알고 있지, 실제로 그들이 어떻게 살았는지 그 문명이 어땠는지에 대해 잘 모르니 저자가 이야기하는 내용의 상당수는 처음 듣는 이야기였다.

통사로 접근하는데도 모르는 내용이 많다보니 머릿속에 잘 들어오지 않고 정리가 되지 않았다.

그래도 꾸준히 읽다보면 동양미술에 대해서도 기본은 말할 수 있지 않을까 싶어서 계속 읽고 있다.

인도가 사실 나라라고는 하지만 크기가 어마어마하고 지역마다 문명의 색도 다른데 하나로 퉁 쳐서 배우는 게 아닌가 싶다. 시간이 지나 인도에 대해 좀 더 알게 되면 지역별로 어떤 문화가 있었는지 좀 더 자세히 배워봐야겠다. 

힘들지만 끝까지 읽은 나를 칭찬한다. 


p56 오늘날 인도를 정의하는 인도의 국명은 파키스탄에 기원을 두고 있습니다. 파키스탄의 신드주는 인더스 문명이 발생한 곳이에요. 인더스강 할 때의 인더스, 인도라는 이름이 바로 거기서 나왔고요.

p82 인더스 문명의 중요한 유적지로는 하라파와 모헨조다로, 선인더스 문명의 유적은 메르가르가 대표적입니다.

p92 비슷한 테라코타 인형이 아래처럼 인더스 문명과 메소포타미아 문명에서도 나와요, 마찬가지로 지모신이라고 부릅니다. 어떤 학자들은 인더스 문명이 메소포타미아 문명의 지모신을 보고 만든 거라고 주장하기도 했어요

p93 메소포타미아 문명이 인더스 문명을 낳았다는 생각은 교과서에 실릴 정도로 오랫동안 기정사실로 여겨졌습니다. 심지어 인더스 문명을 만든 드라비다인을 메소포타미아에서 이주한 사람들이라고까지 했죠. 하지만 메르가르의 발굴을 통해 드라비다인이 메소포타미아 문명보다 훨씬 먼저 문명을 일궜다는 사실이 밝혀지면서 그 주장은 설득력을 잃게 됩니다.

p145 비슷한 시기에 만든 인더스 문명의 지모신과 비교하면 메소포타미아의 인형은 더 어설프게 느껴진답니다. 인체 묘사에 있어서는 인도를 따를 데가 없었습니다. 누구보다 주변을 잘 관찰하는 사람들이었거든요.

P162 인도에서 아랫배가 나왔다는 건 프리나, 즉 몸의 균형과 중시이 잡힌 건강한 상태를 의미했습니다. 일을 안 해도 먹고살 수 있는 사람이나 실현 가능한 상태였을 테니 부유하거나 신분이 높을수록 배가 나온다고 믿게 된 겁니다.

P176 아리아인이 드라비다인을 관찰한 뒤 전쟁을 벌여 살던 데서 몰아냈다는 내용이라고 해석됐습니다. 즉 인더스 문명은 드라비다인이 아ㅣ아인에게 정복당해 끝났다고 본 거죠.

P208 요점은 불교에서는 뒤엎지 않아도 되는 기존 전통은 모조리 흡수해 작 걸로 만들었다는 거예요. 세계관은 말할 것 없고 불교의 사상을 전하는 이야기도 브라만 사제가 제다를 전하던 방식을 따랐지요.

P229 우리는 아쇼카 석주를 통해 아쇼카 왕이 진정 원한 게 무엇이었는지 알 수 있어요.불교신자든 브라만교 신자든, 신분이 높든 낮든, 모든 백성이 왕의 말을 따르기를 바랐던 겁니다.

P238 이 바퀴는 그냥 바퀴가 아니라 법륜이에요. 법의 바퀴죠. 동쪽에서 떠서 서쪽으로 지는 태양의 움직임을 바퀴에 비유한 겁니다. 태양이 동쪽에서 서쪽으로 지는 건 명백한 우주의 진리, 바로 법이니까요. 수레바퀴는 석가모니가 깨달은 진리를 의미합니다. 바퀴를 굴리는 일은 불교의 진리를 퍼띄는 일인 거에요.

P249 중국 전설에는 명마가 숱하게 나와요. 중국에는 말이 자생하지 않았건만 오래전부터 훌륭한 말을 향한 열망이 강했습니다. 기원전 2세기 한나라 때 장건이라는 사람이 중아아시아에서 말을 구하기 위해 원정을 떠난 게 실크로드 개척의 시작이었을 정도로요

P272 사원이 스투파를 중시으로 만들어졌다는 건 사원이라면 반드시 스투파가 있어야 한다는 뜻입니다. 쉽게 말해 절에는 탑이 꼭 잇어야 한다는 거지요. 절이 처음 생겨나던 순간부터 탑은 절이라는 공간의 핵심이었습니다.

P289 4사자 주두를 소개하면서도 언급했지만 베다에서는 순환을 중요하게 여겼습니다. 태양의 움직임은 순환의 근본이자 가장 자연스러운 이치에요. 시계 방향으로 도는 건 우주의 이치를 따르는 신성한 일이었지요.

P313 우리나라 들판에서도 볼 수 있고 슈베르트 가곡 겨울나그네 가사에도 나오는 게 그 보리수나무입니다. 석가모니 이야기 속의 나무는 종으로 따지면 피팔나무예요. 열대 지방에서나 볼 수 있는 나무입니다. 참고로 석가모니 말고도 깨달음을 얻은 모든 존재는 다 각자의 보리수나무가 있답니다. 예를 들어 구나함모니불의 보리수나무는 우담바라 나무죠.

P352 약시와 약사는 불교가 탄생하기 한참 전부터 숭배받던 자연신이에요. 지모신에서 발전해 풍요의 상징으로 잘 알려진 신이었지요. 불교는 약사와 약샤처럼 민간에서 인기가 있던 다양한 신들을 포용했어요. 지역에서 신도를 모으기 위해서는 그보다 좋은 방법이 없죠

P385 이 작은 불당을 장식하는 데만 비단벌레 1500마리의 날개를 사용했기 때문입니다. 비단벌레의 날개가 제법 화려하거든요. 빛을 받으면 오색영롱한 갖가지 색이 나죠. 당시 최고급 재료였습니다. 신라에서뿐만 아니라 고구려 금동관 장식엗 비단벌레 날개가 붙어 있었어요

p407 황금빛 스투파는 동남아시아에서 표준으로 자리를 잡아요. 근처 태국과 캄보디아, 라오스에서 미얀마 스투파를 본으로 삼았죠. 그러나 미얀마를 포함해 이 나라들은 굴곡 많은 역사를 보냈기에 사원 대다수가 파괴되거나 작게 개축됐습니다.

p415 선덕여왕은 신하들과 논의 끝에 뛰어난 기술을 보유한 백제에 사람을 보내달라고 부탁했습니다. 백제에선 그 요청을 무시하지 않고 아비지라는 사람을 파견했지요. 신라는 아비지를 기술 감독 삼아 645년에 황룡사 목탑을 구층으로 올리는 데 성공합니다.

p445 지금 우리가 주목하려는 부분은 그 월지족이 흉노족에게 패한 후, 우여곡절을 겪다 인도 북부에 쿠샨제국을 세웠고 그리스 로마 주화와 비슷하게 생긴 금화를 만들었다는 사실입니다.

p492 인도에서 만든 사리기에 그리스 로마인같이 생긴 사람이 나와서 합장하고 있으리라고는 상상도 못 했어요. 머릿속에 잘 안그려지죠. 멀리 떨어진 인도와 유럽이 이토록 일찍부터 만나고 있었다니 말이에요.

p496 몇백 년 전이 19-20세기의 일본에서였지요. 일본 근대미술사를 말할 때 빼놓을 수 없는 인물인 오카쿠라 덴신이 최초로 동양이란 세계를 정의하고 퍼뜨린 사람입니다. 오카쿠라 덴신은 영어로 동양의 이상이란 책을 집필해 불교로 묶인 아시아는 하나다. 그 아시아를 이끄는 게 일본이라다라고 서양에 주장했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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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어른을 위한 최소한의 미술 100 요즘 어른을 위한 최소한의 시리즈
이은화 지음 / 빅피시 / 2024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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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요즘 어른을 위한 최소한의 미술 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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읽은기간 : 2024/07/11 -2024/07/18


재미있는 책이다.

유명한 그림과 이야기를 함께 읽을 수 있어서 좋았다. 

100편의 그림이 최소한인지는 모르겠지만 쉬우면서도 즐겁게 읽을 수 있었다. 

내가 좋아하는 그림들이 많이 포함되어 있어 어느새 나도 유명한 그림들은 꽤 많이 아는구나 하는 생각도 들었다. 

매번 모나리자 이야기만 할 수는 없으니까.. ^^

요즘 미술책을 많이 읽고 있는데 예전의 나를 생각하면 정말 격세지감이다. 

여전히 그림은 못그리지만 보는 즐거움은 생긴 것 같다.. 


p15 오필리아 주변에는 그녀의 운명을 상징하는 다양한 식물과 꽃들이 그려져 있다. 쐐기풀은 고통, 데이지는 순수, 팬지는 허무한 사랑, 버드나무는 버림받은 사랑, 그리고 오필리아 손 근처에 그려진 붉은 양귀비는 죽음을 상징한다. 사실 양귀비는 세익스피어의 원작에 없는 꽃이지만 죽음을 강조하기 위해 화가가 추가한 것이었다.

p17 외국 여행 한 번 가본 적 없던 루소에게 박람회는 큰 충격이자 세계를 향한 도전의식을 심어주기에 충분했다. 화가는 자신의 모습을 300미터가 넘는 에펠탑이나 하늘에 떠 있는 열기구보다 훨씬 크고 높게 그렸다. 자신이 세계의 중심지 파리의 화가이고, 머지않아 프랑스를 넘어 세계적인 예술가가 될 것이라는 꿈과 포부를 밝히고 있다.

p23 이 그림은 고흐가 밤하늘의 별을 그린 첫 그림이다. 오르세 미술관에 있는 론강의 별이 빛나는 밤은 이 그림 직후에 그렸고, 세계에서 가장 많이 복제된 그림인 별이 빛나는 밤은 이듬해 생레미 정신병원에서 기억에 의존해 그린 것이다. 밤의 카페테라스는 이어지는 두 별 밤 그림의 원조이자 예고편인 셈이다

p31 거대한 캔버스 그림은 일주일도 안 되는짧은 시간에 완성됐다. 흥이 나서 몰입하지 않으면 물리적으로 절대 불가능한 일이었다. 습작이었지만 마티스는 이 그림이 너무 마음에 들어 춤1이라고 이름을 붙였다. 그러고는 본 작업에 착수해 춤2를 완성했다

p35 페르메이르는 세계 최고의 박물관 벽에 작품이 걸린 위대한 거장의 반열에 올랐고, 17세기 네델란드 황금기를 대표하는 화가로 우뚝 섰다.

p45 프랑스 정부는 7월 혁명으로 시민의 왕이 된 루이 필리프를 기녀하기 위해 3,000 프랑에 이 그림을 구입해 왕실 컬렉션에 추가했다. 그러나 진짜 의도는 전혀 달랐다. 언제든 민중을 선동할 수 있는 위협적인 그림이었기에 대중의 눈에 안 띄게 치워버린 것이었다. “이 그림은 너무 혁명적이어서 다락방에 숨겨져 있었다”

p55 극적인 빛의 연출과 역동적인 인물들의 움직임, 강렬한 상징으로 채워진 화면은 마치 연극의 한 장면처럼 생생하다. 램브란트는 인물들을 나열해 그리는 단체 초상화의 규범을 과감히 깨버리고, 역사에 남을 독창적인 명작을 완성시켰다. 하지만 시대를 앞선 그의 그림은 당대 사람들에게 비웃음거리가 됐고, 의뢰인들에게는 충격과 분노를 안겨주었다. 최고조에 달했던 램브란트의 명성도 이 그림때문에 막을 내린다

p63 시대에 뒤떨어진 양식일지라도 미국 대중들은 이웃 같은 두 인물의 매력에 푹 빠졌다. 아이오와의 척박한 환경을 이겨낸 성실하고 근면한 농부, 노력으로 소박한 성공을 이뤄낸 미국인, 완고하고 보수적인 시골 사람, 악의적인 감정을 간신히 억누르는 부부, 허세 가득한 집에 사는 사람들 등 다양한 해석과 함께 수많은 패러디와 복제화가 쏟아졌고, 지방 출신 무명 화가의 그림은 미국인의 상징으로 떠올랐다.

p64 그림속 유디트가 손에 쥔 십자가 모양의 칼은 이것이 개인적 복수가 아닌 신의 이름으로 불의를 응징하는 행위임을 암시한다. 젠텔레스키의 그림 때문에 타시는 화가가 아닌 세기의 강간법으로 화폭에 영원히 박제됐다. 칼이 아닌 붓으로 한 완벽한 복수였다.

p75 소장품을 처분하고 후원금을 보태 마련한 재원으로 결국 2년 만에 아비뇽의 아가씨들은 뉴욕 현대미술관의 소장품이 되었다.

p87 루브르 아부다비 분관에 전시돼 있을까? 2019년 여름까지는 빈 살만 왕자의 초호화 요트 안에 있다고 알려졌으나 지금은 행방이 묘연하다. 스위스의 미술 창고 또는 아랍 에미리트의 비밀 장소에 보관돼 있다는 소문만 무성할 뿐이다. 결국 그림 속 구세주는 누구도 구원하지 못하고 권력자의 요트나 창고 안에 갇힌 신세가 되고 말았다. 사람들은 여전히 묻는다. 구세주여 어디에 계시나이까?

p105 다비드는 상당히 정치적인 화가였다. 루이 16세의 궁정 화가로 명성을 누렸지만, 혁명이 일어나자 주군을 단두대로 보낸 혁명정부의 공식 화가가 되었다. 이 그림을 포함해 혁명 정신을 담은 그림들을 잇달아 발표하며 혁명 시대 예술의 최선봉에 섰다. 이후 혁명 세력을 처단하고 나폴레옹 보나파르트가 집권하자 다시 나폴레옹 황제의 선전 화가로도 활약했다. 이렇게 보면 미술사에서 가장 정치적인 행보를 보여준 화가였다. 그는 혁명, 반혁명 세력 모두가 원하는 그림을 이상적으로 그려내는 재능 덕에 정권이 바뀌어도 계속 활동할 수 있었다.

p107 페르메이르는 17세기 네델란드 미술을 대표하는 가장 유명한 화가이지만 남긴 작품은 겨우 36점뿐이다. 43년 을 델프트에서 살았던 그는 칸타리나라는 여성과 결혼해 14명의 자녀를 낳았고 장모와 함께 살았다는 것 외에 알려진 바가 많지 않다. 게다가 사후 2세기 가까이 잊혔다가 19세기에 재발견됐다.

p117 남들이 뭐라 하든, 쿠르베는 부자가 예술가를 존경하고 후원하는 것은 당연하다고 믿었다. 세상의 잣대는 부자와 빈자로 나누지만, 그는 천재성을 지닌 자와 아닌 자로 구분했다. 그만큼 예술가로서의 자부심이 대단했다.

p125 메두사호의 끔찍한 비극이 그림으로 재현돼 공개되자 사람들은 충격에 빠졌다. 사건에 대한 분노와 젊은 화가에 대한 찬사가 동시에 쏟아졌다. 사건을 은폐하려 한 국왕과 정부관료들은 당혹스러웠다. 정부가 애써 덮었던 3년 전 조난 사건을 다시 재정화했기 때문이다.

p135 영국 컬렉터 손으로 넘어간 후 1902년 마침내 런던 내셔널갤러리에 기증되었으나 창고에서 73년 동안 은폐됐다. 1975년 그림이 처음으로 공개되자 영국인들의 반응은 폭발적이었다. 십대 여왕의 억울한 죽음을 다룬 그림은 특히 젊은 관객들에게 큰 반향을 불러일으켰다. 어느 나라 역사건 권력 다품의 끝은 피를 부르기 마련이다. 그레이도 어른들의 권력욕이 낳은 희생양이었다. 살려달라고 애원하거나 개종하면 살 수도 있었을 소녀가 당당하게 죽음을 택하는 모습이 그저 애처롭고 감동스러울 따름이다. 단지 9일이었지만 그레이는 자신이 썼던 왕관의 값을 치룬 것이다.

p143 살롱전은 마네에게 명예 대신 희대의 스캔들 메이커라는 지위를 안겨줬다. 시대를 앞선 예술가의 운명이 그렇듯, 마네는 공개적 모욕과 가혹한 비난을 견뎌야 했다. 하지만 사후에는 전통과 규범에서 회화를 해방시킨 혁명가이자 모더니즘의 여명을 연 근대 미술의 아버지로 칭송받았다.

p151 부도덕한 사랑의 대가는 지옥행이었다. 하지만 로댕은 이들이 지옥에 있기에는 너무도 관능적이고 아름다운 연인의 모습이라 여겼던 듯하다. 이 연인상만 따로 떼서 대형으로 여러 점을 만들었다. 그중 하나가 1898년 파리에서 처음 공개되자 인기는 끌었지만 너무도 외설적이라는 비판을 들어야 했고, 1914년 영국에서 전신됐을 때는 방수포로 가려 마구간에 숨겨졌다.

p169 4.8미터 높이의 대형 속고 조각 <하프>는 행사 기간 동안 수많은 미니어처 복제품과 엽서로 제작돼 인기리에 판매되었다. 그런데 큰 인기를 끈 조각은 박람회가 끝나자마자 파괴됐다. 보존해야 할 예술 작품이기보다 행사를 위해 제작된 임시설치물로 취급된 것이다.

p175 티 없이 깨끗한 피부, 온화한 눈빛, 부드럽게 모은 두 손, 우아한 의상과 자태 등 헌신적이면서도 이상적인 천상의 여인 이미지 그대로다. 이미 120년 전에 사망한 라파엘로를 연상케 하는 시대착오적인 그림이었지만, 오히려 그 때문에 라파엘로를 대체할 화가로 주목받았다.

p183 평생 가난가 질병에 시달리다 비극적인 최후를 맞은 모딜리아니는 사후에 명성이 치솟았다. 뛰어난 재능, 가난과 고통, 열정적인 삶과 사랑, 젊은 나이에 요절. 천재 화가로서의 요건을 다 갖춘 비운의 화가 모딜리아니는 훗날 빈센트 반 고흐에 버금가는 신화적 인물이 되었다.

p191 영하베 광장에서 노는 아이들은 그가 살던 코펜하겐 영하에 과장에서 노는 아이들의 모습을 묘사하고 있다. 어느 맑은 날 오후, 손에 손을 잡고 한 줄로 선 소녀들은 상대 친구들을 잡으려고 앞으로 돌지하고 있다. 아이들의 해맑은 얼굴에는 웃음과 장난기가 넘친다. 푸른 나뭇잎과 가벼운 옷차림으로 봐서는 봄에 그린 것으로 보인다.

p197 퇴폐 미술전 : 나치 당국이 퇴폐 미술로 규정한 모던 아프 650점이 전시됐는데, 여기에는 반 고흐, 피카소, 모딜리아니, 샤갈, 클레 등 저명한 화가들의 작품도 대거 포함됐다. 나치 정권은 이들을 미치광이, 정신병자 또는 불구자로 취급하며 전국 미술관에서 이들의 작품을 마구잡이로 몰수하거나 소각해 버렸다.

P206 그중 기근과 역병을 담당하는 신이 가장 힘이 셌기에, 나라에 기근이 들면 산 사람을 제물로 바쳤다. 의식을 진행 중인 제사장 앞에는 하얀 포대가 놓여 있다. 산 채 끌려온 희생양이 있을 것이다. 붉은 망토의 집행작 칼로 찌를 준비를 하자, 왕이 벌떡 일어나 스스로 옷을 벗는다. 백성을 더 이상 희생시킬 수 없으니 자신을 죽이라고 명하는 장면이다. 왕이 나체로 등장하고 인신 공양이라는 끔찍하고 미신적인 주제를 다룬 그림은 논란이 될 수밖에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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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에나에서의 한 달
히샴 마타르 지음, 신해경 옮김 / 열화당 / 2024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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읽은기간 : 2024/07/07 -2024/07/09


제목이 매력적이라서 책을 빌렸다. 

제주에서의 한 달 살기도 아니고 무려 중세도시 시에나에서의 한 달 살기라니...

낭만적이다.

그런데 책 내용은 낭만적이지 않았다. 

저자는 리비아에서 살다가 반체제인사였던 아버지로 인해 영국에서 살게 된다.

아버지는 행방불명되는데, 이로 인해 저자는 아버지의 생사를 모르고 살아가는데 대해서 죄책감 같은걸 느낀다. 

그는 내셔널 갤러리에서 봤던 시에나의 그림을 보고 홀리듯 시에나에서 한 달을 머물게 된다. 

그리고 그는 몇몇 그림을 보며 시에나에서 생활을 한다. 

저자의 상황에 내가 녹아들이 못하니 그가 왜 시에나에서 홀리듯 한 달을 살아가는지가 공감이 되지 않았다. 

그렇다고 시에나를 구석구석 돌아다니지도 않는다. 같은 그림을 계속 보고 있는 저자를 보면 왜 시에나에 가고 싶었는지 이해가 잘 되지 않는다. 

좋은 장소, 좋은 소재가 있어도 너와 나를 공감시킬 수 있는 스토리로 엮지 않으면 생각보다 책이 재미가 없다는 것을 배운다.. 


p11 언젠가는 맞닥뜨려야 하는 일이니 죽는 건 상관없지만 아직은 준비가 안 됐다고, 지금껏 사는 법을 배우느라 그렇게 많은 시간을 들였는데 지금 죽는 건 아깝다고 생각했던 기억이 난다.

p25 시민 통치를 선호했다는 점에서 시에나는 독특하다. 1125년에 탄생해 사백 년간 이어진 시에나 공화국은 시에나 화파의 전성기를 목격했다. 이 도시는 활기찬 경제적 상품 교환의 현장이었다.

p38 진짜 즐거움은 과녁을 맞히는 것이 아니라 과녁을 겨냥하는 데에 있으니 말이다.

p69 나는 이리저리 돌아다니며 도시가 깨어나 분주해지는 것을 지켜보았다. 몇 사람을 멀찍이서 따라다녀 보기도 했다. 이 이상하고 남부끄러운 행동을 나는 현지인들이 시에는 누비는 방법을 알아보고 그들의 일상을 일별하려는 거라고, 말하자면 현지인들을 따라 살아 보려는 거라고 스스로에게 설명했다.

p76 눈 아래로 드럽은 묘역들이 펼쳐졌다. 일개 대대 수준의 묘석들이 층층이 이어졌다. 규묘를 헤아릴 수가 없었다. 한 무덤을 깊이 생각하는 것과 끝을 모르는 죽음의 식욕을 일별하는 것은 다른 문제다 망자들의 숫자가 산 자들을 압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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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야기 미술관 - 우리가 이제껏 만나보지 못했던 '읽는 그림'에 대하여
이창용 지음 / 웨일북 / 2024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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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야기 미술관

 : 이창용

 : 웨일북

읽은기간 : 2024/07/01 -2024/07/03


가볍게 읽을 수 있는 책..

내용도 어렵지 않고, 작품과 작가의 에피소드들이 많아 잘난척 하기 좋은 책이다. 

미술이나 음악이 배경을 알면 더 이해하기가 쉬워서인지 이런 종류의 책들이 쏟아지고 있다.

재미있기는 한데 너무 많이 나오다보니 좇아가며 읽기가 버겁다.

그래도 내일은 또 어떤 책이 나올지 궁금하다..

재미있었다. 


p6 이를 위해선 감상 전 반드시 사전 지식이 필요하죠. 만약 고전주의 작품들로 전시되고 있는 루브르 박물관을 방문하면서 아무런 사전 지식이 없다면 우리가 그곳에서 느낄 수 있는 것은 오직 하나, ‘아 생각보다 모나리자는 작구나’뿐일 것입니다.

p38 외젠 마네는 베르트에게 완벽에 가까운 사람이었는데요. 그는 베르트가 요구했던 조건뿐만 아니라 결혼 이후에도 그녀가 작품에 베르트 모리조로 서명할 수 있도록 자신의 성을 강요하지 않았다고 합니다. 그뿐만 아니라 훗날 두 사람 사이에서 사랑스러운 딸 줄리가 태어나자, 법무부 일을 그만두고 본격적으로 베르트의 내조를 하죠

p54 명상 또는 1848년의 이탈리아라고 불리는 작품을 먼저 살펴볼까요? 이 작품은 1848년 3월에 일어나 밀라노의 5일이라는 사건을 배경으로 하고 있습니다. 1848년은 유럽 전역에서 혁명이 들끓던 민족의 봄이라 불리는 해였습니다.

p71 훗날 이 작품에 영향을 받은 마네와 피카소는 학살당하는 자와 맞은편에 일렬로 서 있는 학살자의 구도에 착안에 걸작을 남깁니다. 마네의 막시밀리안 황제의 처형, 피카소의 한국에서의 학살 등이 대표적이죠. 또한 피카소는 레이나 소피아 미술과에서 볼 수 있는 게르니카를 그려냅니다.

p106 카라바조를 악마의 재능을 가진 화가라고 이야기하는데요. 이는 재능이 너무도 뛰어나서이기도 했지만, 그는 미술사상 가장 많은 형사사건을 일으켰던 인물이었죠

p120 두 번째 추측에 관해서는 재미난 이야기가 전해지기도 하는데요. 미켈란젤로가 피에타에 서명을 남기고 성당을 유유히 빠져나와 문뜩 밤하늘을 올려다보는데 그날따라 별빛이 아름답게 빛나고 있었습니다. “아! 신께서는 아름다운 세상을 만드시고도 그 어느 곳에 자신의 이름을 남기지 않으셨는데, 나는 고작 조각 하나를 만들고 거만하게 성모님의 가슴에 이름을 남겼구나”라며 경솔했던 행동을 반성하고 두 번 다시 작품에 서명을 남기지 않았다고 합니다.

p143 이렇게 빈센트가 자신의 이름을 물려받은, 사랑하는 조카를 위해 그렸던 그림이 바로 꽃 피는 아몬드 나무입니다. 아몬드꽃은 가장 먼저 꽃망울을 터뜨리며 추운 겨울이 끝나고 희망과 생명으로 가득찬 봄이 왔음을 알리는 정령과도 같습니다.

p158 샤갈은 유대인 가정에서 태어나 평생 종교에 쉬치해 있었고, 성서학자 못지않게 성서에 해박한 지식이 있었습니다. 자연스레 이를 바탕으로 다양한 작품을 남기게 되는데요. 최초 샤갈 미술관은 성서를 바탕으로 한 작품 열일곱 점으로 시작해서 성서 메시지 미술관이라는 이름으로 불리기도 했습니다.

p162 결국 딸 이다는 아버지의 결혼을 받아들이게 되는데요. 목적과 의도가 의심되긴 하지만 아버지가 바바를 이미 너무 사랑하고 있었고, 노년인 아버지의 행복을 누구보다 바랐기 때문입니다. 아버지가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알았기에 모든 것을 포기하기로 하죠

p171 밀레는 자신을 대신해 고생하고 계시는 할머니와 어머니를 생각하며 단 하루도 쉬지 않고 그림을 그려왔습니다. 단 순간도 허투루 붓을 놀리지 않았죠. 그렇게 20여 년을 버텨왔지만 밀레는 이번에도 고향에 찾아갈 여비를 마련하지 못해 끝내 어머니 장례식에 참석하지 못합니다.

p194 밀레이는 욕조에 따뜻한 물을 한가득 담아두곤 시달의 드레스가 서서히 젖어 들어가는 모습을 관찰했습니다. 욕조 안 물이 차갑게 식어버렸지만 그는 오로지 작업에만 몰두했죠. 작업을 방해하고 싶지 않았던 시달은 그 추위를 견디다 이후 심한 독감에 들어 고생했다는 이야기가 전해지기도 합니다.

p204 작품 속에 등장하는 여인은 우리에게는 조금 생소할 수 있지만 영국인들이라면 누구나 다 알고 있는 인물로, 흔히 9일의 여왕이라 불리는 레이디 제인 그레이입니다.

p224 미술비평가들은 그의 작품을 두고 시대에 뒤떨어진 옛날 그림이라며 앞다투어 비난하기 일쑤였습니다. “그의 작품에는 어떤 철학도 가치고 없으며 어쭘잖은 교훈만이 담겨 있다” “그저 머리가 텅 빈, 아름답게 분칠한 인형 같다”라는 자극적인 비난까지 쏟아졌습니다.

p225 그런데 타데마의 작품을 볼 때마아 이런 생각이 들곤 합니다. 과연 모든 작품이 다 철학적이고, 세상을 비판하고, 변화를 추구해해야만 하는가? 때로는 그저 직관적으로 그림의 아름다움만 탐해도 충분한 가치가 있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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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랜드투어 이탈리아 : 고전학자와 함께 둘러보는 신화와 문학의 고향
강대진 지음 / 도도네 / 2024년 1월
평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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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그랜드투어 이탈리아

 : 강대진

 : 도도네

읽은기간 : 2024/06/20 -2024/06/30


그랜드투어 이탈리아나 그랜드투어 그리스 2권 모두 읽었다.

봐야할 곳도 많고 유적도 많고, 설명할 내용이 많아서인지 책이 나열형으로 씌여있다. 

중간중간 나오는 유적지의 약도를 보며 따라가기는 하지만 너무나 많은 지식을 쏟아내다 보니 다 머리에 들어오지 않았다. 

대신 이탈리아를 남부에서부터 차근차근 공부할 수 있어서 좋았다. 

과거 영국이나 프랑스의 부유한 자제분들은 이런 코스로 공부를 했을까?

생각보다 배우고 알아야 할 내용이 많아서 쉽지 않았을 것 같다. 

이탈리아라는 나라의 숲과 디테일을 모두 아우룰 수 있어서 좋긴 했는데 너무 많은 정보가 나오니 잘 취사선택을 해야 할 필요가 있다. 


p35 로마 멸망 이후 계속 춥던 기후가 서기 1000년경부터 갑자기 좋아지고(중세 온난기), 그렇게 해서 조금씩 쌓이기 시작한 부가 1080년 팔라티나 예배당의 구건물을 짓게 만들고, 그로부터 약 50년 지나서 팔라티나 예배당이 확장되고, 다시 약 50년 지나 몬레알레 성당이 지어졌다고 생각하면 정리가 잘 된다.

p44 공항을 지나 다시 한 30분 달리면 세게스타 신전에 도착한다. 이 신전은 장식이 전혀 없어서 대체 어떤 신에게 바쳐진 것인지 알 수 없다. 게다가 내실도 조성하지 않아서, 그냥 바깥 테두리 기둥만 남아있다. 일설에 따르면, 이 신전을 포에니 전쟁 직전에 짓기 시작했는데 전쟁이 발발해서 사람들이 떠나고 그냥 잊혀져 이렇게 공사를 마치지 못한 상태로 남았다고 한다.

p50 이 전쟁에서는 아테나이가 패배하고 말았는데, 투퀴디데스는 그 원인이 페리클레스가 전쟁 초기에 죽고 그의 원칙이 지켜지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본다. 페리클레스는 전쟁을 확대하지 말고, 적이 육전에 강하니 보병 전투를 피하고 해군을 이용해서 배후를 치자는 지침을 갖고 있었는데, 그 전략이 유지되지 못했다는 것이다.

p79 어떤 자료에는 신화적으로 아주 중요한 유물이 이곳에 소장되어 있다고 나온다. 바로 아킬레우스의 절친한 친구 파트로클로스가 전사하여 동료들이 그의 시신을 옮기는 도기 그림이다. 하지만 이 부근에서 출토되었을 분 소장처는 다른 곳인 모양이다. (거기 있다고 들은 유물이 막상 현장에 가면 그곳에 있지 않은 경우가 많다)

p82 조각상은 오른손을 하늘로 뻗고 서있으며, 그의 왼쪽 겨드랑이 쪽에서 두 인물이 옷 주름 사이로 얼굴을 내밀고 있는데, 4원소를 규제하는 사랑과 미움을 표현한 것이라 한다. 그 대좌에는 이탈리아어로 ‘그들은 전에도 있었고, 앞으로도 영원히 시간 속에 늘 있을 것이다’라고 적혀 있다.

p87 우리가 시칠리아섬 중앙으로 이동한 주된 이유는 그곳에 멋진 로마 모자이크가 있어서다. 헨나 남쪽에 있는 도시인 피아차 아르메리나의 남쪽에서 로마시대 대저택 빌라 로마나 델 카살레가 발굴되었는데, 모자이크 규모가 엄청나다.

p109 쉬라쿠사가 로마에게 함락될 때 로마군에게 죽임을 당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모래 바닥에 뭔가를 그리며 계산하던 중에 젊은 군인이 그것을 밟고 지나가자 노인은 역정을 냈고, 화가 난 군인이 그만 이 대학자를 쳐서 죽였다는 것이다. 그 옛날에도 노인들은 화를 잘 내고, 젊은이들은 욱하는 마음을 잘 참지 못한 모양이다

p130 자연현상을 설명하는 신화를 원인설화라고 한다. 이것은 말하자면 오늘날 과학이 하는 역할과 같은 것이다. 그래서 황금가지를 쓴 제임스 프레이저는 신화가 잘못된 과학이라고 규정하기도 한다.

p148 이탈리아를 여행할 때면 늘 느끼는 것이, 이 나라의 근현대 예술이 수준급이어서 어느 도시를 가나 기회 있을 때마다 근현대 미술과도 함께 들러보면 참 보람이 크다는 점이다.

p152 오비디우스는 누마가, 아직 생겨나지도 않은 도시를 찾아가서, 아직 태어나지도 않은 철학자의 강의를, 죽은 자들과 함께 듣고선, 선생의 가르침과는 반대되는 행동을 했다고 말도 안 되는 얘기를 펼쳐 놓은 것이다. 현대 독자라면 사정을 잘 모르니 그냥 그런가 보다 하고 지나가겠지만, 고대의 학식 있는 독자들은 시인의 농담에 남모르는 웃음을 지으며 즐거워했을 것이다.

p166 이탈리아에서는 로마에 가면 다시 퓌타고라스상을 만날 수 있는데, 그곳에는 이분 뿐아니라 이탈리아와 연관이 있는 모든 위인들을 다 조각으로 만들어서 공원을 가득채웠다. 보르게게 공원 서쪽에 있는 핀치오 테라스 주변이 그곳이다.

p193 요약하자면 폼페이의 역사는 희랍 식민 시대(기원전 8세기)-에트루리아 시대(기원전 6세기)-희랍 도시 시대(기원전 5세기)=삼니움 시대(기원전 4세기)-로마시대라고 보면 되겠다

p217 이 집이 유명한 이유는 이 조각상보다는 여기서 발견된 놀라운 모자이크 때문이다. 바로 알렉산드로스 모자이크이다. 알렉산드로스 대왕이 페르시아의 다레이오스 3세와 전투하는 정면인데, 그 둘이 처음 맞붙었던 잇소스 전투(기원전 333년)를 그린 것으로 여겨진다.

p222 이제까지는 대체로 6구역을 돌아보았는데, 그 남쪽 7구역에 꼭 들러야 할 곳이 하나 있다. 옛날 사창가였던 곳이다. 포룸 북쪽에 있는 제우스 신전 옆의 네로 문을 통과하자마자 우회전하여 크게 두 블록을 지나 다시 우회전, 한 블록이 끝나느 곳의 모서리 삼각형 건물이 바로 그 집이다. 그 바로 동남쪽에 스타비아 목욕장이 있으니, 영업하기에 좋은 위치라고 해야할 것이다.

p241 이 도시에는 현재 희랍과 로마의 유적이랄 게 거의 없다. 우리가 이곳에 가는 이유는 박물관 때문이다. 나폴리 국립고고학박물관이 소장품 수준은 이탈리아 전체에서 고대 관련 박물관을 셋만 꼽으라면 거기 들어갈 정도다(나머지 둘은 로마의 카파톨리움 박물관과 바티칸 박물관이 될 것 같다. 내가 보기에 마시모 팔라초는 카피톨리움보다 못하다)

p270 다시 시골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자객들과 마주치는데, 키케로는 저항하는 그의 종들을 만류하고 스스로 목을 내밀어 죽음을 받아들였다고 한다. 한편 안토니우스는 그 밉살스러운 연설문을 적었던 손을 잘라, 그의 머리와 함께 로마 포룸의 연단에 걸어놓았다고 한다.

p272 이 무덤은 특별한 볼거리라기보다는 서양 문화의 기초를 놓은 인물을 기리기 위해 방문해 볼 만한 곳이다. 한때 한국에서 엄청난 인기를 얻었던 시오노 나나미는 키케로를 아주 하찮은 인물로 평가했지만 오늘날 서양에서 쓰는 고급 어휘는 거의 다 키케로가 만든 것이다.

p280 지상에서 그리스도의 권위를 대표하던 인물이 속인에게 뺨을 맞은 초유의 사태를 당하고 충격을 받았던지 교황은 한 달 뒤에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단테는 보니파키우슨 8세를 극히 혐오했지만(이 교황이 발루아의 샤를을 보내 피렌체의 흑백 갈등에 간섭하게 하였고 그 여파로 단테가 축출되었다). 교황이 이런 봉변까지 당해서는 안 된다며 매우 개탄한다. 그는 이것을 그리스도께서 교황의 몸을 입고 다시 한번 십자가에 달리신 것으로 간주한다.(연옥편 20곡 86행 이하)

p292 빌라 부근에서 발견된 많은 미술품이 외국 박물관으로 가버렸는데, 가장 뛰어난 작품이 루부르에 있는 사슴과 함께 있는 아르테미스 석상이다.

p324 이런 사정을 설명하고 표결에 붙이면 대다수가 그래도 들어가보는 쪽을 선택한다. 아마 로마제국의 유적 중 원래 모습에 가까운 외형을 유지하고 있는 게 이것뿐이어서이리라.(사실은 몇개 더 있다. 나로서는 로마대표 건축물은 판테온이라고 생각한다)

p333 현재는 교회(성 코스마와 다미아노교회)의 일부가 되어 있지만 원래는 로물루스 신전이었다. 한데 여기서 섬겨지던 분은 로마 건립자 로물루스가 아니라 막센티우스의 일찍 죽은 아들 로물루스다. (현재의 포룸에는 막센티우스의 영향이 막강하다) 그리고 이 건물이 이렇게 멀쩡하게 보존된 이유는 늘 그렇듯이 일찌감치 교회로 이용되었기 때문이다.

p362 다음으로 꼽고 싶은 것이 헤라클레스로 분장한 콤모두스 흉상이다. 겸손한 스토아 철학자였던 아버지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와는 정반대로 과대망상증이 있던 이 황제는 자신을 헤라클레스의 화신으로 생각해서 야수 몇마리를 죽이는 것으로 일과를 시작했다고 한다.

p381 마르켈루스 극장에서 서쪽으로 800미터쯤 떨어진 테베레 강변에 파르네제궁이 있다. 나폴리 국립박물관에 소장된 많은 유물들이 머물던 곳이다. 지금은 프랑스 대사관으로 쓰이고 있는데, 그 안에 안니발레카라치가 그린 디오뉘소스의 개선등 신화를 소재로 한 벽화가 꽤 많다.

p402 북쪽(피오 클레멘티노관)에 이 박물관의 핵심 유물들이 있다. 벨베데레 아폴론, 라오콘 군상, 티베리스강의 신, 안토니오 카노바의 페르세우스 등 신화 소재도 있고, 소크라테스, 플라톤, 펠리클레스 등의 초상조각도 많이 있다.

p405 빌라 줄리아에서 보르게제 미술관을 가자면 동남쪽으로 보르게제 공원을 한참(약 1.5킬로미터) 가로질러야 한다. 중간에 국립현대미술관 앞을 지나가게 되는데 들어가 보면 더 좋다. 데 키리코, 자코메티, 모네, 고흐, 클림트, 심지어 잭슨 폴록 작품까지 소장하고 있다. 그동안 옛것만 보느라 침침하던 눈이 시원해지는 느낌이 든다.

p422 아카데미아에서 동쪽으로 약 100미터에는 피렌체 국립고고학박물관이 있는데, 거기에 두 개의 명품이 있다. 하나는 발견자의 이름을 따서 프랑수아 도기라고 불리는 커다란 항아리이고, 다른 하나는 아레초에서 발견된 청동 키마이라상이다.

p440 베로나에서 베네치아로 가는 길에 파도바에 들러 스크로베니 성당에 있는 조토의 프레스코를 보면 좋다. 예수의 생애를 자세히 그렸다

p447 베네치아의 미술관들 중에서 이른바 가성비를 고려하여 딱 세 군데만 꼽으라면 나로서는 구겐하임, 페사로궁, 그리고 황금궁전을 선택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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