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물관에서 속닥속닥 - 경주박물관 속 신라인 이야기 동원고고미술연구소 동원학술총서 5
이난영 지음 / 진인진 / 2023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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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박물관에서 속닥속닥

 : 이난영

 : 진인진

읽은기간 : 2023/08/17 -2023/08/23


이런 역사책 너무 좋다.. 

왕, 궁궐, 금관 등 화려하고 웅장한 유적과 유물이 아니라 토기나 토우같은 작은 유적에도 깊은 의미가 숨어있음을 배운다. 

저자가 국립경주박물관장을 오래 하신 분이시다. 연세도 꽤 있으시다.

그런데 세대차이를 느끼지 않고, 글에 빠져들게 된다.

내가 늙은걸까?^^

토우 장식을 통해서 이렇게 많은 이야기를 할 수 있다는 게 신기하다. 

신라인들의 의식주와 정신세계도 얼핏 느낄 수 있어서 너무 좋았다. 

특히 금령총 이야기는 추정일 뿐인데도 눈물이 그렁그렁 맺혔다.. 

금령총의 주인공을 이렇게 해석하고 있었다니...

다음에 경주에 가면 금령총과 금령총의 유적을 자세히 봐야겠다.

경주에 갈 이유가 자꾸 생긴다. 경주.. 참 좋다..


p12 소를 끌고 가던 노인이 이러한 헌화가를 바쳤다고 하니, 삼국유사의 기록에 나오는 소를 끌고 가는 노인을 무시할 수 없다. 흥미로운 것은 황성된 석실분에서는 노인과 소가 함께 출토되었다는 점이다. 이 스토리에 매우 잘 어울리는 유물들이 아닌가?

p21 신라에서 가장 잘생긴 남자상은 아마도 경주 용강동 석실분에서 출토된 복두를 쓴 남자상일 것이다. 앞서 이야기한 황성동 출토 수로부인과 함께 신라 제일의 남자상이라고 모두가 칭찬하는 상이다.

p27 서역인이 가진 천문, 수학, 과학에 대한 재능을 인정하면서도 그 재능을 배우고 이용하기 위하여 그 인물됨을 과장하였을 것이다.

p29 현존하는 신라 유물 중에도 서역인과 관련된 형상이 종종 나타나는데, 괘릉의 무인상이나 불교의 사천왕상은 가장 서역적인 인물상을 잘 보여주는 상들이다.

p67 안압지에서 나온 다량의 신라 왕실 문물들은 일본 쇼소인 소장 문물들 중 상당수가 신라 제품이었음을 밝혀 주었다. 안압지라는 명칭은 삼국유사와 삼국사기 등에 나오는 이름으로 오랫동안 안압지라고 불려왔다.

p77 현재 국립경주박물관에는 수백여 점의 장식토우가 남아 있는데. 이들은 대부분 일제강점기에 일본인들이 경주역의 차고를 만들기 위해 흙을 퍼 나르는 과정에서 황남동 미추왕릉지구의 땅속에서 발견되었다고 한다.

p88 고구려의 고분 벽화나 일본의 다카마쓰즈카 고분 벽화의 여인들은 색동으로 길게 주름을 잡은 치마를 입고 있는데, 모양과 길이가 같고 치마폭은 널찍하다. 치마 아래로 살짝 발을 내밀고 있는 점도 비슷하다. 비슷한 시기의 고구려, 신라, 일본이 같은 패션 양식의 치마를 입고 있다는 점이 흥미롭다.

p96 추녀 끝에는 고드름이 주렁주렁 매달렸고, 아침에 눈을 뜨면 작은 유리창에 성에가 하얗게 서려서 재미있는 그림을 그려 보이기도 했다. 부지런을 떨면 저녁 짓는 아궁이에 깨짓 기왓 조각을 구워서 잘 싸두었다가 이불속에 넣어 자리를 덥히기도 했다. 그래 그때는 그랬지!

p109 종종 토우에서는 개도 보이는데, 사냥용이었는지 애완용이었는지는 확실하지 않다. 삼국 시대에 개가 사냥용과 애완용 이외에, 희생제물이나 식용으로 사용되었다는 사실은 고구려 고분벽화에서 찾아볼 수 잇다. 고구려 안악3호분 벽화에는 개가 푸줏간에 매달려 있는 모습이 표현되어 있다.

p124 보통 그릇은 음식을 먹고 마시기 위한 식기가 많지만, 앞에서 살펴본 것처럼 음식을 보관하기 위한 그릇, 음식을 덜어내기 위한 그릇, 제사와 같은 의례를 행할 때 음식을 바치기 위해서 사용하는 재례용 음식을 담는 의례용 용기, 즉 공헌용기 등과 같이 다양한 기능이 있다.

p139 옛날 우리들은 수저의 사용을 밥상머리에서 기본예절로 배워야 했다. 어른보다 먼저 수저를 들어도 안 되고, 먼저 자리에서 일어나도 안 되는 것이다. 어른들이 얘기가 길어져 먼저 일어나도 좋다고 허락이 있어야만 자리를 뜰 수 있었다. 요즈음처럼 거의 앉지도 않고 먹는 둥 마는 둥 먹고, 어린 사람이 숟가락 던지며 먼저 가버리는 일은 동서양 어디에도 없었던 이상한 식사 매너이다.

p151 신라인들이 집 안에서 보내는 나날은 어떠했을까? 지금까지 알려진 유적으로 신라인들의 주거지 모습을 상상하기는 다소 어렵고 분명하지 않은 부분이 많다. 특히 뜨듯한 온돌을 깔고 좌식 생활을 했는지 단언하기 어렵다.

p164 삼국시대 백제의 미륵사지에서부터 석등이 사용되기 시작했으며, 통일신라시대의 사찰에는 대부분 석등이 세워져 있다. 통일신라시대의 가장 대표적인 석등은 화엄사 각황전 앞에 있는 석등이며, 부석사 무량수전 앞의 석등도 비슷한 형식으로 역시 통일신라시대의 유물이다. 법주사 팔상전 앞의 쌍사자 석등은 두 마리 사자가 등을 받쳐 들고 있는 독특한 형식으로 너무나 유명하다.

p170 향은 덥고 습기가 많은 인도에서 피우기 시작했다고 하며, 우리나라에는 불교의 전래와 함께 삼국시대 즈음에 전해진 것으로 알려져왔다. 삼국사기에 의하면, 눌지왕 때 승려 묵호자가 향의 사용법을 신라에 알려주었다고 한다.

p176 백제 왕실에서 발원한 불교 사찰인 부여 능산리사지에서 출토된 유명한 백제금동대향로는 삼국시대의 대표적인 거향로중 하나이다.

p214 황남대총의 금동제안교는 한쪽 편에만도 비단벌레 수백 마리의 날개가 장식품으로 사용되었다. 금빛으로 번쩍이는 금속판 아래에 부지갯빛으로 영롱하게 빛나는 비단벌레 날개를 깔아서 장식한 안교의 화려함은 상상 이상이다.

p232 성애의 장면을 나타낸 토우들을 보면 보통 남자보다 여자가 크게 표현되어 있다. 아마도 여자의 생산능력을 위대한 자연의 섭리로 해석했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이러한 성애 장면을 표현한 토우들은 번영을 추구하는 기원과 주술적인 의미를 표현한 것으로, 단순한 본능적인 쾌락을 나타내는 것 이상의 심오한 의미가 담겨있다고 해석된다

p256 현재 남아 있는 신라의 장식 토우들은 앞에서 이야기한 바와 같이 일제강점기에 일제가 경주역의 차고를 만들기 위해 흙을 퍼 나르는 과정에서 발견되었다. 처음 발견 당시에는 토기에 토우들이 다닥다닥 붙어 있었지만, 발견한 일본인들이 토우가 재미있는 것이 많고 신기해서 , 원래 몸체에서 하나씩 뜯어내 버려서 지금과 같이 다 따로따로 전해지게 된 것이다.

p272 서양의 성당이나 교회 종은 종 아랫부분이 나팔꽃 모양으로 떨 벌어져 있어서 소리가 밖으로 쉽게 퍼져나가게 된다. 그러나 동양의 종은 아랫부분을 오므려서 소리가 안에서 한번 모였다가 흩어지며 울려 퍼지는 효과를 살리고 있다.

p278 출토유물이 대부분 작고 귀여운 것이여서, 무덤에 묻힌 주인공은 어린이였다고 추정하고 있다. 작은 공자가 금방울을 허리에 차고 돌아다니면, 그 방울 소리를 들으면서 공자 곁애 있던 부모는 자식의 존재를 실감했을 것이다. 경쾌하게 뛰면 건강할 것이고 느리면 걱정을 했겠지. 일찍 죽은 어린 공자의 허리에 방울을 채워 묻어주면서 그 부모는 얼마나 아프게 오열하였을까?

p284 종 명문 중에서 또 하나 주목할 것은 만든 사람을 주종대박사라고 부르며, 그의 직위는 대나마, 이름은 박종일이라고 밝히고 있다는 점이다. 대나마는 신라의 관직 17등급 중에서 10번째의 관등으로 5두품에 해당한다. 이 명문은 당시 사회에서 장인을 존중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는 좋은 예가 될 것이다.

p287 성덕대왕신종은 30여 년간의 고생 끝에 완성된 대종으로 당시 봉덕사에 봉안되었다고 한다. 그래서 오랫동안 이 종은 봉덕사종이라 불려왔다. 그러나 현재까지도 봉덕사라는 절의 위치가 어디였는지는 확실하지 않다.

p293 현존하는 고려종은 대부분 중형이나 소형종이 많으며, 대종은 그다지 많지는 않다. 세종대왕이 성덕대왕신종과 함께 지켜준 연복사 대종은 개성 남문에 걸려 보관되어 온 고려시대 말기의 대표적인 대형 범종이다. 연복사종은 전통 신라종이나 고려종과는 완전 다른 형식으로, 고려 범종의 형식을 따르고 있는데, 이러한 중국식 범종의 출현은 전통범종 양식에 큰 변화를 불러오는 계기가 되었다.

p300 출토 유물이 대부분인 전시품들은 어두운 무덤이나 땅속에서 오랜 세월 묻혀 있다가 세상으로 나왔기 때문에, 박물관 내부의 지나친 조명과 관람객의 입김 및 눈총에 익숙하지 않아서 매우 곤혹스러워 할 것이다.

p309 나 자신이 그런 다리미를 어렸을 때 실제로 사용했었다는 사실은 이번에 이 책을 쓰면서 새삼스럽게 기억해내게 되어서 스스로도 놀라고 있다. 다만 내가 옛날에 사용하던 다리미는 백제계 형식이 아니라 신라계 형식의 다리미를 사용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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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티움 해전 - 로마 제국을 만든 전쟁
배리 스트라우스 지음, 이종인 옮김 / 책과함께 / 2023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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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악티움 해전

 : 배리스트라우스

 : 책과함께

읽은기간 : 2023/08/03 -2023/08/16


악티움 해전은 옥타비아누스가 안토니우스를 이기고 로마의 초대 황제가 되는 분수령이 된 전쟁이다. 

카이사르, 안토니우스, 옥타비아누스, 아그리파, 클레오파트라 등 이름만 들어도 쟁쟁한 영웅들이 활약하던 시기라서 그런지 재미있게 읽었다.

특히 여러 문헌을 비판적으로 그리고 꼼꼼하게 읽어가며 내용을 정리해서인지 조감도를 보는 느낌으로 악티움 해전을 알 수 있어서 좋았다.

아그리파가 멋지게 안토니우스를 이긴걸로 알았는데 사실 해전이 시작되기 전에 이미 전세가 기울어져 있다는 것을 처음 알았다.

그만큼 아그리파가 안토니우스의 아픈 곳을 잘 찔러서 꼼짝을 못하게 해놓았다는 뜻일게다.

그리고, 안토니우스쪽의 장군들과 클레오파트라와의 분쟁도 안토니우스가 바른 의사결정을 내리는 데 악영향을 끼쳤다. 결국 안토니우스는 카이사르가 아니었다. 

클레오파트라의 능력도 매우 뛰어났다는 것을 알았다. 영리하고 멋진 여자인 줄은 알았지만 프톨레마이오스 왕조를 다시 번성하게 하고, 이집트를 다시 이집트로 만들어낸 그녀의 공은 결코 작지 않다. 

남에게 의지하는 병력은 끝까지 잘되기 어렵다는 것도 배운다..

올해의 책으로 꼽는다. 재미있었다. 


p25 후대에 전해지는 문헌은 플루타르코스의 안토니우스의 생애가 유일하며 이것이 가장 중요한 문헌사료다. 뛰어난 저술가인 플루타르코스(서기 120년 이후에 사망한 것으로 추정되는 루키우스 메스트리우스 플루타르코스)의 안토니우스의 생애는 대단한 걸작으로, 그가 집필한 플루타르코스 영중전에 들어 있는 고대 그리스-로마인 50명의 전기 중 백미다

p60 클레오파트라는 전반적으로 매력적인 모습이지만, 정말로 중요한 특징은 위풍당당함이다.

p65 정복 장군과 여왕 사이에는 화학적 결합 이상의 것이 작용했다. 52세 장군과 21세 여왕의 나이 차이, 혹은 이집트 왕조가 알렉산드로스 대왕과 연결되어 있다는 사실만으로는 그들의 관계가 설명되지 않는다. 카이사르와 클레오파트라는 그 시대의 가장 뛰어난 개인들이다. 둘의 만남은 서로를 알아보는 진정한 두 마음의 결합이라는 아주 희귀한 현상이었다. 만난 지 한 달 만에 클레오파트라는 임신했다.

p95 그 이야기는 정적들의 프로파간다였을 것이다. 벤티디우스는 로마로 돌아와 개선식을 거행했다. 그는 그 개선식을 부재중인 사령관 안토니우스와 함게 나누어 받았다. 당시 안토니우스는 여전히 동방에 남아 있었기 때문이다. 벤테디우스 이후 로마의 장군이 파르티아를 상대로 다시 승리를 거두기까지는 150년이 걸린다.

p98 자신의 이익이 중요하다고 해도 능숙한 조정 과정이 없으면 언제나 효력이 나타나는 것은 아니며, 당시 로마에서는 옥타비아 같은 엘리트 여성이 그 같은 중개자 역할을 훌륭하게 해냈다. 옥타비아가 타렌툼 조약의 배후 설계자까지는 아닐지라도 공식 중개인 역할을 한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p107 로마의 과거 역사를 살펴보면 정적들 사이의 평화적 공존은 불가능한 이야기였다. 마리우스와 술라, 카이사르와 폼페이우스, 안토니우스와 옥타비아누스를 보라. 이들의 관계에서 나타나는 양상은 뚜렷하다. 권력자들 간의 파트너 관계는 오래가지 못했다.

p110 옥타비아누스가 3월 15일의 카이사르 암살 사건 직후 한 달 만에 정계에 처음 등장했을 때부터 내전이 종식되는 시점에 이르기까지, 두 정적과 지지자들 사이에서는 중상모략의 비난이 활발하게 오갔다.

p149 옥타비아가 다가오는 전쟁을 슬퍼한 것이 아니라, 자신이 그런 전쟁의 원인인 양 비난받을 것을 슬퍼했다는 데 주목할 필요가 있다. 만약 이 기록이 그녀의 진짜 마음이었다면, 로마인들이 자신의 평판을 대단히 중요시했다는 사실과 부합한다.

p159 홍보전의 관점에서 보자면 이집트 여왕은 거의 완벽한 적이었다. 여자, 외국인, 그리스인, 이집트인, 군주인 여왕은 로마의 편견이 완벽하게 표적으로 삼을 수 있는 좋은 텃밭이었다.

p169 아드리아아해와 이오니아해의 동쪽 해안은 항구, 섬, 지형지물, 좋은 정박지 등이 많은 데다 순풍이 불었다. 이 해역은 이탈리아의 동부 해안이 갖추지 못한 것들이 다 갖춰져 있었다.

p186 과거에 안토니우스는 굉장히 공격적인 지휘관이었으나, 아무리 호전적인 전사라 할지라도 모든 게 걸린 위중한 상황이라면 조심스러워지는 법이다. 더욱이 경험은 때때로 가혹한 선생이다.

p192 훌륭한 전략은 칼보다는 배고픔으로 적을 압박하는 것이다. 실제로 로마의 사령관들은 이미 기원전 3세기에 카르타고를 상대로 이런 작전을 구사한 적이 있다.

p213 아그리파는 메토네를 점령한 이후 해안에 상륙하러 온 상선들의 움직임을 추적했고, 그리스의 여러 지역에도 기습 공격을 펼쳤다. 이런 일들이 안토니우스를 몹시 심란하게 만들었다

p215 안토니우스는 메토네를 재탈환하지 못했다. 만약 일부 사료들이 말하는 대로 그 성채가 단단한 방어 시설을 갖추었다는 것이 사실이라면, 아그리파가 그 요새를 필사적으로 차지하기 위해 꼼꼼하게 준비한 반면에 보구드는 그렇지 못했다는 것이 함락의 원인이었을 것이다.

p233 기원전 32년 3월과 4월은 아토니우스에게 불길한 달이었다. 그는 옥타비아누스의 도해를 막지 못했고, 그 군대가 남진하는 것도 방해하지 못했으며, 악티움 북쪽의 고지인 미칼리치를 점령하는 것도 저지하지 못했다. 그것은 리더십의 실패였으나 충분히 만회할 수도 있는 실수였다

p258 설사 독자가 이런 선정적인 역사적 해석을 받아들이지 않는다 하더라도 클레오파트라의 존재가 안토니우스 군대의 기강과 사기에 해로웠고 특히 지휘관급 인사들에게 아주 유해했다는 것은 충분히 알아볼 수 있을 것이다.

p290 우리가 알고 있는 한, 악티움은 로마 역사에서 제대군인들의 이름을 밝혀주는 유일한 전투이기 때문이다. 다섯 비석은 망자들 모두가 악티움 전사라고 알려준다. 이들은 옥타비아누스에게서 이탈리아 북부 식민 도시의 땅을 얻었다

p296 양군의 함대가 가까이 다가서면서 첫 단계로 취한 조치는 약간 거리를 두고서 투석기로 돌을 발사하는 것이었고, 좀 더 가까워졌을 때 화살을 발사하고 창을 던졌다. 때때로 화살과 창이 운 좋게도 적선의 조타수나 선장을 죽이는 수도 있었다. 하지만 움직이는 배에서 그런 무공을 올리기는 쉽지 않았다

p301 그리스-이집트 함대가 그런 과감한 이동 작전을 수행할 수 있으리라고는 전혀 예상하지 못했다. 특히 그 함대를 여자가 지휘하고 있었으니 더더욱 그랬을 것이다. 평생 남자들에게 과소평가된 클레오파트라는 그런 방심의 허를 찌를 줄 아는 영리한 여자였다

p329 악티움 이후에 등장한 새로운 문제는 이집트를 어떻게 공격하여 차지할 것이냐였다. 우리는 이 침공 작전을 악티움 해전의 마지막 단계로 보아야 마땅하다. 그러나 로마인들은 이 전쟁을 별개의 것으로 보아 알렉산드리아 전쟁이라고 불렀다

p343 겨울 항해는 가볍게 시도할 만한 일이 아니었다. 그런데도 옥타비아누스가 겨울 바다를 건너가기로 했다는 것은 그만큼 사태가 심각하다는 뜻이다.

p347 그는 여왕을 심각한 위협으로 보았을 것이다. 클레오파트라는 너무 영리하고 적응력이 너무나 뛰어나서 결코 가만있을 사람이 아니었다. 그녀가 율리우스 카이사르와 내연 관계였다는 사실도 그에게 위협적이었다.

p360 기원전 31-30년의 겨울, 클레오파트라는 수에즈만에서 새로운 함대를 건조하게 했다. 그 함대를 건조한 목적은 그녀 자신, 안토니우스, 가족을 해외의 안전한 곳, 가령 인도처럼 멀리 떨어진 곳으로 도피시키려는 것이었다.

p362 클레오파트라는 여왕이었고 그녀의 일차적 의무는 왕국을 지키는 것이었다

p378 일본에서 배를 찔러 전통적인 할복자살의 의식을 거행하는 사무라이는 옆에 있는 참수자에게 도움을 받는다. 사무라이가 배를 깊게 찌른 후에 참수자가 뒤에 있다가 그의 목을 쳐주는 것이다

p399 클레오파트라는 인류 역사에서 가장 위대한 여성 정치인 중 한 사람이었다. 그녀의 조국은 200년 동안 쇠퇴와 패배가 계속되었는데 그녀가 그 운명을 바꾸어놓았다

p419 기원전 30년 이후 서로마 제국의 멸망에 이르는 근 500년 동안 지중해는 간단히 ‘마레 노스트룸(우리의 바다)’으로 불렸다. 온 세상을 자기 것이라고 여긴 로마제국다운 오만한 생각의 표현이었다.

p426 세 번의 개선식은 옥타비아누스에게 생애 최고의 순간이었다. 그것은 그의 승리를 널리 알렸을 뿐만 아니라 내전이 종식되었음을 대내외에 선포하는 의례였다.

p433 시인 호라티우스는 아그리파를 가리켜 고상한 사자를 흉내 내는 영리한 여우라고 묘사했다. 아그리파의 교묘한 처신술과 사회적 출세 기술을 잘 요약한 말이다.

p438 그은 9월의 달 이름을 이제 셉템베르에서 아우구스투스로 바꾸려 한다고 대내외에 공지했다. 이는 아우구스투스의 생일이 9월 23일임을 기념하기 위한 조치였다. 그러나 옥타비아누스는 9월보다는 늦여름인 8월(섹스틸리스)에 자신의 이름을 붙이기를 바랐다.

p446 아우구스투스가 임종의 자리에서 했다는 말은 이 도시의 경관을 잘 설명해준다. “나는 벽돌의 도시 로마를 발견했으나 이제 당신들에게 대리석의 도시를 남기노라”

p446 그는 아마도 장엄한 도시의 원형을 제공한 알렉산드리아를 다스렸던 여왕을 떠올렸을 것이다. 탁월한 역설의 감각을 지닌 그런 아마 이런 생각도 했으리라. 악티움 함선들의 충각에도 불구하고, 알렉산드리아를 점령한 긴 칼에도 불구하고, 독사의 물어뜯기에도 불구하고, 클레오파트라는 사후에도 로마에 문화의 영향력을 행사했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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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류 외전 - 설계되지 않은 성공, K컬처산업의 운명을 바꾼 9가지 결정적 장면
김윤지 지음 / 어크로스 / 2023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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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한류외전

 : 김윤지

 : 어크로스

읽은기간 : 2023/07/17 -2023/08/02


재미있는 책을 읽었다. 현대 한국 대중문화에 대한 책이다. 특히 그중에서도 한류에 대해 다룬다.

불과 20년전, 아니 10년전만 해도 현재 불어닥친 한류의 바람을 예상하지 못했다.

이 책에서도 한류는 설계되지 않은 성공이라는 말을 한다. 나도 동의한다.

충분한 능력이 있었지만 그걸 알릴 수 있는 기회는 없었고, 플랫폼과 우연이 함께 작용하면서 전세계에 한류가 알려졌다.

윤여정씨의 인터뷰를 본 적이 있는데 인상적이었다. 우리는 항상 거기에 있었다. 세계가 우리를 지금 발견했다는 것.

딴따라로 취급받으며 하대받던 대중문화가 모든 청소년들의 우상이 되기까지는 엄청난 어려움과 고난을 겪었다.

지금도 한국방식의 가요, 드라마, 영화가 바람직한지는 논의가 되어야 할 문제다.

그러나 우리가 큰 반향을 일으키고 세계를 놀라게 한 것은 분명 사실이다.

내가 살아가면서 역사를 만들어가고 있다는 게 신기하고 즐겁다.

실제 그 영향을 받는 연예인들은 더 즐거울 것이다.

많은 역사가들과 연구가들이 지금 내가 살고 있는 시대를 규정하고 평가하겠지.

좋은 평가를 받았으면 좋겠다..

재미있는 책이었다. 


p13 한류는 설계되지 않은 성공이라는 분석이 이어졌다. 나로서도 가장 마음에 드는 표현이다

p39 우리가 수십 년간 고생해서 겨우 개발해 낸 자동차 150만 대의 부가가치가 겨우 영화 한 편에 맞먹는다는 사실은 당시 주류 여론층에는 충격적이었다. 성실하게 자동차를 만드는 일에 비하면 영화를 만드는 것은 그야말로 놀고먹는 일로 여겨졌기 때문이다.

p53 우리나라 문화산업 지원 체제를 이야기할 때 중요하게 거론되는 거버넌스 원칙 가운데 하나가 김대중 정부가 운영 원칙으로 삼은 팔길이 원칙이다. 문화산업정책 지원시 정책 대상자의 자유와 자율을 존중해 지원은 하되 간섭하지 않는다는 원칙이다.

p61 이명박 정부에서 문화산업을 국익 추구와 국가브랜드 향상을 위한 수단으로 강조했다면, 박근혜 정부에서는 문화산업이 양질의 고용 창출 수단으로 변모한 것이다.

p71 관계자들이 드라마에 대한 정부의 무관심이 드라마 산업에 새롭고 다양한 아이디어를 발현할 수 있는 여지를 제공했다고 회고할 정도로 지원도, 간섭도 없이 방송사 자율에 맡기는 분위기가 조성되었다.

p87 우수 미드 시리즈들에 눈높이를 맞춘 한국 시청자들은 고정된 틀에 갇히곤 하는 한류드라마에 가차 없는 비판을 쏟아부었다. 비슷비슷한 설정과 캐릭터, 유사한 이야기의 반복, 삶은 고구마 같은 답답한 전개 등 한류드라마가 조금만 구태를 보여도 가혹한 비판을 가했다.

p92 대기업이 없었기에 한국 드라마 산업은 누구나 성공할 수도, 누구나 실패할 수도 있는 공정한 경쟁의 장이 되었다. 대기업의 부재 덕분에 운동장은 평평했다. 향후 한류드라마 수준이 빠르게 향상된 데는 평평한 운동장에서 동등하게 경쟁하면서 키운 힘의 영향도 있었다

p105 이들 가운데 일부는 서울극장 중심의 충모로 배급 라인으로 모였다. 이것이 이후 강우석 감독이 출범시킨 영화 제작, 배급사 시네마서비스 등으로 이어지면서 대기업에 맞서는 중요한 토착 세력으로 남는다

p110 김대중 정부는 1999년 500억 원을 출자해 문화산업진흥기금을 설치했다. 이 기금을 통해 문화상품 개발과 시설현대화 등에 대출을 제공하고 문화산업전문투자조합에 출자도 했다. 문화산업진흥기금은 2006년 폐지 결정때까지 1,905억 원 규모로 확대횄는데 규모도 컸지만 우리나라 문화산업정책사에서 갖는 의의가 지대했다.

p126 많은 영화평론가들이 한국영화 최고의 르네상스라 일컫는 2003년은 금융자본 유입으로 제작비 조달 환경이 어느 때보다도 좋았던 해다. 2003년 개봉한 봉준호 감독의 살인의 추억, 장준환 감독의 지구를 지켜라, 박찬욱 감독의 올드보이는 모두 그런 시대의 산물이다.

p137 일반적으로 완벽한 외모를 갖춘 멤버들이 각기 춤과 보컬, 랩 등을 담당하는 시스템을 갖추고, 세계 유행 음악 흐름을 발 빠르게 반영하면서 칼군무가 대표하는 역동적 무대구성을 보여주는 하나의 음악스탈이라고 이야기한다.

p206 이미 조성된 팬덤이 있기에 해외 공연이 성사되는 것이지, 공연 때문에 없던 팬덤이 생겨나지는 않았다는 의미다.

p209 BTS, 블랙핑크 등이 세계적으로 K팝 인지도를 크게 올려놓은 덕에 데뷔 때부터 글로벌 팬덤을 보유했다는 특징이 있다.

p231 OTT, 즉 Over the Top이란 인터넷으로 제공하는 영상 스트리밍 서비스를 말한다.

p237 제작비 30% 정도를 PPL같은 간접광고로 메워야 하기에 전체 드라마를 미리 찍을 수 없었다. 초반 몇 부를 제작한 뒤 후반부 제작은 남겨놓아야 방영하는 동안 광고를 유치할 수 있었다. 높은 인기를 끈 드라마일수록 시리즈 후반부에 각종 PPL 대잔치가 벌어진 것도 이 때문이었다.

p285 성장에 악영향을 줄 수 있는 제도 변화가 나타났지만, 이와 동시에 시장이 성장하는 힘이 작용했고, 이 힘이 더욱 컸기에 제도 변화를 압도한 것이다.

p298 한국인들의 반중 정서가 높아지면서 우리 문화상품에 중국 자본의 투자나 협찬을 받기가 매우 조심스러워졌다. 중국인들이 돈으로 한류의 힘을 이용한다는 비난을 받게 되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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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의 해방일지
정지아 지음 / 창비 / 2022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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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아버지의 해방일지

 : 정지아

 : 창비

읽은기간 : 2023/07/07 -2023/07/11


우리나라에서 빨갱이, 빨치산은 금기어다.

이 낙인이 찍히고 나면 그 어떤 사람도 우리나라에서 정상적인 삶을 살 수 없다. 

대통령까지 되긴 했지만 김대중 전 대통령도 평생을 이 빨갱이 낙인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아니, 사망 이후에도 이 낙인은 두고두고 그를 괴롭힌다. 

빨치산이었던 아버지를 둔 딸..

아빠는 선택이라도 했지, 자신은 선택도 하지 않았는데 태어났더니 빨갱이의 딸이 되어 있었다.

변명할 수도, 해명할 수도 없는 상황에서 평생을 살아간다. 

그리고 이제 아버지의 장례식을 치르고 있다. 

장례식에는 다양한 사람들이 오고, 그들의 이야기가 과거와 어울리며 책은 전개된다. 

빨치산인 형때문에 아무것도 할 수 없어 평생 원망하며 살던 동생인 줄 알았는데 자랑스러웠던 형을 서북청년단 앞에서 자랑하다 아버지를 죽게 만든 자신을 평생 원망했었던 삼촌이야기.

좌익들의 위협속에서 살려준 순경이 좌익에 들어오려고 하자 우리는 이미 졌으니 우익으로 살라고 돌려보내는 장면.

10대 문제아의 이야기를 들어주고 그를 위로했던 것이 고마워 아무도 없는 새벽에 장레식장을 찾아온 10대 문제아의 모습...

시대가 좋았으면 더 훌륭하고 좋은 일을 했을 사람이 빨치산이라는 이름으로 평생 아무도 안보이는 곳에서 살아갔다.

딸은 아버지의 유골을 추억의 장소에서 뿌리며 아버지와 화해한다. 

아버지의 해방일지가 아니라 딸의 해방일지다.

시대의 무게앞에 인간은 너무나 무력하다. 내가 결정하는 것이 아니니까..

가슴이 먹먹하다. 내가 던져진 이 시대에 내가 어떻게 살아야 할까 생각하게 한다. 


p11 뼛속까지 사회주의자인 아버지의 피를 받고 그런 아버지의 교육을 받았지만 나는 어디까지나 현실주의자다. 남들에게는 빼도 박도 못하는 빨치산의 딸이겠지만

p13 열일곱의 나는, 방물장수 하룻밤 재우는 일에 민중을 끌어들이는 아버지나 그 말에 냉큼 꼬리를 내리는, 꼬리를 내리다 못해 죄의식에 얼굴을 붉히는 어머니나, 그때 읽고 있던 까뮈의 이방인보다 더 낯설었다

p40 탓을 하는 인생은 이미 루저다라고 아버지 닮아 냉정한 고등학생쯤의 나는 판단했고, 그 이후 작은아버지를 소 닭 보듯 보았다

p61 아버지와 달리 인간을 신뢰하지 않는 나는 어쩐지 미덥지 않았다. 비쩍 마른 아버지가 시래깃국을 먹을 때 그 여자는 아버지 돈으로 삼겹살을 배불리 먹었을 거라는 추측이 차라리 믿을만했다

p68 고통이든 슬픔이든 분노든 잘 참는 사람은 싸우지 않고 그저 견딘다. 견디지 못하는 자들이 들고일어나 누군가는 쌈꾼이 되고 누군가는 혁명가가 된다.

p76 아버지는 선택이라도 했지, 나는 무엇도 선택하지 않았다. 나는 빨갱이가 되기로 선택하지 않았고, 빨갱이의 딸로 태어나겠다 선택하지도 않았다.

p90 한편으로 아버지는 입만 열면 옳은 말하는 잘나고 똑똑한 양반, 또 한편으로는 잘나서 빨갱이짓 하다가 집안 말아먹은 양반이었다. 그러니까 아버지는 고씨 집안의 자랑인 동시에 고씨 집안 몰락의 원흉인 것이다.

p102 또 그놈의 오죽하면 타령이었다. 사람이 오죽하면 그러겠는냐는 아버지의 십팔번이었다.

p148 무엇에도 목숨을 걸어본 적이 없는 나는 아버지가 몇마디 말로 정의해준다 한들 이해할 수 없었을 것이다. 결과적으로 옳았든 틀렸든 아버지는 목숨을 걸고 무언가를 지키려 했다.

p181 질 게 뻔한 싸움을 하는 이십대의 아버지는 어떤 마음이었을까? 목숨을 살려주었던 사람을 위해 목숨을 걸려 했던 이십대의 그는 어떤 마음이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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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국유사와 신비로운 이야기 - 삼국유사의 인물, 신령, 괴물들
최희수 외 지음 / 바오 / 2022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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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삼국유사와 신비로운 이야기

 : 최희수

 : 바오

읽은기간 : 2023/07/02 -2023/07/06


유명한 책이긴 하지만 제대로 읽어본 적이 없는 삼국유사.

이번에 제대로 읽어보리라 하고 이 책을 빌려서 읽었다. 

삼국유사의 원본을 읽고 싶었는데 이 책은 삼국유사의 이야기를 현대식으로 해석한 책이다. 

삼국유사에 실린 이야기가 나오고 그 이야기를 해석하고, 현대적인 의미를 부여한다. 

원전을 읽고 싶었던 지라 약간 실망하긴 했지만 재미있게 읽었다.

일연은 우리나라의 스토리텔러라고 최태성 선생님이 이야기했었는데 책을 읽으면 읽을수록 그런 느낌이 든다. 

즐겁게 읽었다..  


p36 탈해이사금 대 백제와의 관계가 이렇듯 치열했던 것은 백제는 이미 영역 국가로서 영역 확장을 대대적으로 이루저고 했던 시기였고, 신라는 소국에서 점차 그 영향력을 주변 소국으로 확대해나가던 시기였기 때문이다.

p49 무왕의 무덤은 익산에 있는 쌍릉으로 추정된다. 고려시대에 이미 도굴이 되었는데, 일제 강점기에 조사된 바에 의하면 사비시대 능산리 고분의 무덤 양식과 일치한다고 한다. 최근 실시된 정밀 발굴조사에서 인골이 출토되어 비상한 관심을 끌기도 했다.

p54 일종의 미스터리이다. 선화공주가 백제의 대성인 사택씨 가문에 입적이 되었을까? 선화공주와 사택황후는 전혀 다른 인물일까? 그렇다면 서동설화는 지어낸 이야기인가? 전혀 알 수 없다. 다만 선화공주가 백제에 와서 무왕의 왕비로 있었으나 사망 등의 사유로 왕비에서 물러나고, 이어 백제 유력가문인 사택왕후와 혼인을 했을 가능성, 아니면 선화공주와 사택왕후가 동시에 무왕의 왕비로 존재했을 가능성 등 여러 가능성이 존재한다. 고대의 경우 여러 명의 왕비가 동시에 있는 것이 전혀 없었던 일이 아니기 때문에 그 가능성 또한 남아 있다.

p71 혜공왕은 신라 중대를 마감하고 신라 하대가 시작되는 시기의 왕이다. 신라 중대가 전성기라면 신라 하대는 쇠퇴기라고 할 수 있는데, 그 시대를 연 왕이 바로 혜공왕이다. 기록에도 나오듯이 “정사가 다르셔지지 못하고 도적이 벌떼처럼 일어”났다는 표현처럼 신라는 혼란 속으로 빠져들게 된다.

p93 신문왕은 재위기간 내내 삼국을 통일하여 영토가 크게 확장된 국가의 통치체제를 재정비하는 데 총력을 기울였다. 즉위 직후에 장인인 김흠돌이 난을 일으켰으나 진압하고, 이를 계기로 귀족세력을 대대적으로 숙청하였다. 즉 왕권 도전세력을 과감하게 처단한 것이다. 왕비 또한 폐비되었고, 당시 상대등이었던 김군관은 김흠돌의 난을 사전에 알고도 알리지 않았다는 이른바 불고지죄로 처형되었다

p105 물계자가 참전한 포상팔국 전쟁은 3세기 전반기 동아시아 국제 정세의 변화를 반영한 전쟁이었다.

p106 물계자는 남 탓을 하지 않고, 자신을 잊고 목숨을 다할 수 있는 용기가 없었던 자신을 탓하며 끝내 조정에서 물러나 산으로 들어가 칩거하게 된다.

p119 위 설화에서 극랑왕생하는 데 인간의 성욕이 금기로 제시되고 있어서 색욕이 수도 생활에 얼마나 방해가 되는지도 알려주고 있다.

p130 김주원은 하슬라로 피신을 했고, 거기에 머물렀다. 2년 후에 김주원은 하서주 도독에 임명되고, 명주군왕에 책봉되었다. 원성왕도 김주원의 강릉 지역 세력에 대해 인정을 하고 김주원을 제후로 책봉을 했던 것이다.

p135 아들이 없던 진평왕의 뒤를 이어 즉위하였다. 선덕여왕은 최초의 여왕이었기 때문에 신라 내 많은 진골 귀족들의 도전을 받았으며, 국제적으로도 이웃나라들로부터 업신여김을 당하기도 했다.

p139 명랑이 중국에서 배워온 밀교는 비밀의 가르침이란 뜻이다. 즉 경전 중심의 사상이 아니라 이를 초월한 가르침을 의미한다. 진언종이라고도 한다. 밀교는 금강승이라고도 하는데 오늘날 티베트 불교의 대부분을 차지한다.

p144 그런데 거타지가 활로서 그 늙은 여우를 제압하였다. 거타지가 늙은 여우를 처리하자 서해의 신은 자신의 딸과 혼인을 해달라고 청하고, 딸을 꽃으로 변하게 하여 거타지의 품속에 넣어주었다.

p152 설총은 고려시대 일연이 한국 유교의 시조라 일컬었던 인물이다. 기존 불교계에서 승려가 계를 어기는 것은 금기사항이었다. 그러나 원효는 그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고 생각했다.

p160 환웅의 아들 단군은 태백산 신시를 떠나 평양에서 조선을 세웠다. 바로 단군왕검이다. 단군왕검은 훗날 도읍을 구월산으로 옮겼고 무려 1,500년간 나라를 다스렸다. 그러나 은나라의 기자가 조선에 들어오자 그에게 나라를 맡기고 자신은 구월산에 들어가 산신이 되었다.

p170 김대성의 이야기에서도 곰은 흉폭하고 잔인한 존재이다. 곰은 김대성을 씸어먹겠다고 했고, 이에 놀란 김대성이 곰을 위해 절을 세우게 된 것이다. 결과는 좋았지만 그 결과로 인도하는 길은 폭력으로 이루어져 있는 셈이다

p170 아르테미스의 수하인 칼리스토가 곰이 된 부분이 흥미롭다. 아르테미스라는 이름은 인도유럽어의 hartkos에서 유래한 것으로 이 뜻은 곰 여인, 즉 웅녀이기 때문이다.

p183 일시적으로 인간과 결합한다고 해도 결국 인간이 될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던 호녀는 다음 생에 사람이 되기를 기원하고 김현에게 절을 세워달라고 요청하게 된 것이다.

p193 마한은 고조선의 마지막 왕인 준왕이 위만에게 나라를 빼앗기고 남쪽으로 달아나서 세운 나라이다.

p199 하백이 준 술을 마시고 취하면 7일이 지나야 정신을 차릴 수 있었는데, 해모수는 천제의 아들인지라 바로 정신을 차리고 말았다. 하지만 하백이 만든 가죽 가마를 뚫고 나올 수는 없었다. 이때 해모수를 안타깝게 여긴 유화가 자신의 황금 비녀를 빌려주어 해모수가 가죽을 뚫고 빠져나올 수 있었다. 그런데 해모수는 유화는 버려두고 혼자 하늘로 돌아갔다.

p219 우리가 이 이야기를 이해하지 못하는 것은 이 이야기가 만들어지던 당대에는 별 의문 없이 이해되던 것이 세월이 지나서 무슨 의미인지 상실해버린 경우라 할 수 있다. 삼국유사에 이렇게 간략히 이야기가 남은 것도 이야기의 의미가 뭔지 잊어버렸기 때문에 벌어진 일일 것이다.

p245 이 이야기에서 산신이 불교의 신으로 바뀌었다는 것을 분명히 알 수 있다. 아마도 원래는 다른 이름이 있었을 것인데, 자신의 이름을 잃고 불교의 신 이름으로 바뀌었을 것이다. 남은 것은 여신이었다는 점뿐인 셈이다.

p252 김유신은 10여 일이 지나기 전에 병이 났고 회복하지 못하고 세상을 떠났다. 김유신이 수로왕의 후손이라는 것을 생각하면 음병이 보호한다는 것이 또 다른 의미로 읽힐 수도 있을 것 같다.

p268 5층으로 된 석탑은 옅은 무늬의 돌로 기묘한 조각이 되어 있었다. 석탑을 싣고 바다로 나가자 수신이 더 이상 방해하지 못했다. 이 석탑은 금관가야 8대 질지왕 때 왕후사를 세우고 그곳에 두었다. 석탑은 왜의 침략을 방지하였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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