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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문화유산답사기 10 : 서울편 2 - 유주학선 무주학불 ㅣ 나의 문화유산답사기 10
유홍준 지음 / 창비 / 2017년 8월
평점 :
제목 : 나의 문화유산 답사기 10
작가 : 유홍준
번역 :
출판사 : 창비
읽은날 : 2018/02/10 - 2018/03/23
분류 : 일반
꾸준하게 읽어가고 있는 나의 문화유산답사기 시리즈.
서울편의 2번째 책...
도성 외곽과 덕수궁, 그리고 성균관에 대한 내용이 담겨져 있다.
어려서부터 서울에서 자라서인지 서울은 그냥 복잡하고 정신없는 그런 도시로만 알고 있다.
그런데 책을 읽으면서 이렇게 아름다운 자연에 둘러쌓여 있는 곳인지 다시 생각하게 된다.
이 책은 주로 한양 주변의 산세와 숲에 대해서 이야기하지만 난 이책을 읽으면서 내가 사는 서울 동네의 산과 언덕을 떠올린다.
나도 어려서 산에 오르락 내리락 하며 놀고, 산에서 흐르는 물을 받아 밥해먹던 생각이 난다. 예전 선조들도 그런 삶을 살았겠지. 안빈낙도라고 부르면서...
많이 거닐어보지 않았던 부암동이나 석파정을 알게 됐다. 미세먼지가 사라진 맑은 날에 거닐어봐야겠다.
그리고 덕수궁.. 경운궁이라 불렀던 덕수궁의 수난과 아픔을 깨닫는다.
나에겐 덕수궁 돌담길이나 미술관, 석조전등으로 기억되는 덕수궁이 사실 우리나라의 정궁이었다는 걸 알게됐다. 예전에도 알았으니 깨달았다고 해야겠지.
아는만큼 보인다는 말은 정말 진리다. 다시 가게되면 그동안 못봤던 덕수궁의 숨은 유적과 유물을 보게 될 것 같다.
종교와 학문이 하나로 엮여있는 성균관...
아마 우리나라가 이렇게 입시와 공부에 줄을 서게 한 장본인이 아닐까 싶다.
그만큼 많은 역할을 한 것도 사실일테고...
율곡 이이가 얼마나 대단한 양반인지 또 한번 놀란다.
언제나 읽으면서 느끼는 거지만 유홍준 선생님 덕에 보는 눈이 점점 넓어지는 느낌이다.
오래오래 좋은 책 많이 내주셨으면 좋겠다.
P16 우리는 너무도 익숙해 크게 의식하며 살지 않지만 서울처럼 도심의 사방이 산으로 감싸이고 그 남쪽으로 큰 강을 끼고 들판이 넓게 펼쳐져 있는 도시는 지구상 어디에서도 달리 찾아보기 힘들다
p24 새 도읍지 물색과정에서 벌인 열띤 논쟁은 아마도 세계 건축사에서 그 유례를 찾기 힘들 것이다. 당시 학자들이 얼마나 신중한 검토끝에 한양땅을 서울로 삼았는가를 생각하면 서울 사람은 물론이고 대한민국 국민 모두가 조상들의 그 진지한 노고를 돌이켜볼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p32 이 돌들은 바로 제자리에 있을 때 역사적 의의와 문화재로서 가치를 갖는 것인데 이렇게 장소를 잃어버리고 말았으니 그저 돌덩이의 열병식에 불과한 것이었다
p48 단적으로 말해 한양도성은 전란을 대비해 쌓은 성곽이 아니라 수도 한양의 권위와 품위를 위해 두른 울타리다
p49 우리나라는 산이 많다는 지형 특성상 전투가 도성이 아니라 산성을 중심으로 전개되었다
p92 우리나라의 성문은 도성의 통행문이었기에 보초를 서는 망루 정도에 그쳤다. 그래서 문루에 올라보면 전쟁에 대비한 시설이 아니라 사방이 보이는 시원한 전망을 만끾하게 된다
p104 500년간 질좋은 한지를 제작해온 조지서였지만 왕조말기인 19세기에 값싼 양지와 왜지들이 밀려 들어오자 가격경쟁에서 이기지 못해 1882년에는 관영조지서가 폐지되고 민간에게 넘어갔다
p116 봄날 산자락에 개나리가 만발하고 깎아지른 벼랑에 연분홍 진달래가 선연하게 피어날때면 이곳으로 소풍왔던 어린 시절이 절로 떠오르며 짙은 향수에 젖곤 한다. 여전히 내고향 서울이 아련한 여운을 이렇게 간직하고 있다
p130 요새 세상에는 온작 시각적 이미지가 범람하지만, 그렇지 않았던 옛날엔 새 건물이 들어섰다거나, 불이 났다거나, 장마로 냇물이 넘치는 유별난 광경이 큰 볼거리일 수 밖에 없었는데 장마철 세검정의 큰 물이 장관이었던 모양이다
P141 석파정은 다른 주인에게 넘어갔고 2004년에는 소유주의 부채를 집행하기 위해 법원이 석파정을 경매에 부쳤다. 두 차례의 유찰끝에 새 주인을 만났으나 또 소유주가 바뀌다가 마침내 새 주인이 나타나 조선시대 도성 밖 최고의 별서라는 명성을 지닌 석파정을 후광으로 삼아 인근에 서울미술관을 지어서 2012년 개관과 동시에 석파정도 일반인에게 공개했다
p169 현진건은 단 한 편의 친일글을 남기지 않을 만큼 식민지 시대 지식인으로서 지조를 굳게 견지하며 에둘러서라도 저항의 빛을 역사소설에 담아내려 했지마 현실이 더욱더 '술권하는 사회'에로 몰아가면서 해방을 눈앞에 두고 세상을 떠났다
p174 석파정에서도 보았듯이 역시 집은 주인을 잘 만나냐 잘못 만나냐에 따라 팔자가 달라진다
p180 정호승 시인은 '마음이 울적하거든 폐사지로 떠나라'고 했지만, 한적하고 스산한 센티멘틸한 감정이 새삼 그리운 분이라면 백석동천 별서터로 가라고 알려주고 싶다
p197 덕수궁은 계속 줄어들어 오늘날엔 기존궁역의 3분의 1인 약 1마 8천평에 중화전 권역, 함녕전 권역, 석조전 권역 등이 여기저기 별도의 공간인 양 흩어져 있다
p213 흥천사에 걸려있던 범종만은 화마속에서도 살아남아 우여곡절끝에 옛터로 돌아와 지금은 덕수궁 한쪽 구석에 있다. 그래서 나의 덕수궁답사는 이 흥천사 범종에서 본격적으로 시작한다
p215 이는 외래양식을 그냥 받아들인 것이 아니라 불교국가에서 유교국가로 전환하면서 형식에 변화가 일어난 것이다. 극락세계를 찬미하는듯한 전통 불교 범종에 유교적 엄숙성을 담으면서 새로운 형식이 나온 것이다. 이것이 흥천사 범종을 비롯한 조선 전기 범종의 특징이다
p227 궁궐공원으로서 덕수궁을 편안히 즐기자면 때로은 오붓하고 정겨운 서정이 일어나기도 하지만, 답사하는 마음으로 임하면 거부할 수 없는 역사의 우수를 떠롱리게 한다
p232 우리가 꽃나무를 볼 때는 대개 아래에서 위로 올려다보게 마련이지만 여기서는 위에서 아래를 내려다보게 되어 더욱 환상적이다
p234 정확한 대칭을 피해 평면은 대칭을 이루나 입면은 대칭을 피하는 우리나라 전통건축의 특징인 '비대칭의 대칭'을 여기서도 볼 수 있다. 그래야 단조로움을 벗어나면서도 다양의 통일을 이룰 수 있기 때문이다
p235 창덕궁 선정전 답사때도 말한 바 있지만 조선시대 임금의 정무를 '보는 것'이 아니라 '듣는 것'이라 한 것은 재삼 음미해 볼 필요가 있다
p271 광무개혁은 혹자들이 말하듯 '일제에 의해 우리나라가 근대화된 것'이 아니라 일제의 강탈탓에 우리의 독자적인 근대화가 좌절되었을 뿐이라는 사실을 말해준다
p281 본래 궁궐의 정문은 남문이고 그 이름은 될 화자가 쓰인다. 경복궁은 광화문, 창덕궁은 돈화문, 창경궁은 홍화문, 인경궁은 명화문, 경희궁은 흥화문이듯 이 경운궁엔 인화문이 있었다
p300 대한제국은 결코 맥없이 쓰러진 나라가 아니었다. 비록 일제의 강압으로 꿈을 이루지 못했지만, 외세에서 독립된 근대국가로 나아가고자 안간힘을 썼던 그 몸부림을 덕수궁이 이렇게 증언하고 있다
p342 벼룩시장의 분위기에 묻혀보면 재미도 있고 낭만도 있고 의미도 있다. 사람에 따라서는 여전히 이 거리가 지저분하다고 흉볼 지 모르지만 정비해야 할 것은 도로와 주변의 허름한 건물이지 벼룩시장이 아니다
p347 아무리 보아도 동관왕묘의 정전은 건축적으로 성공한 문화유산이라는 생각이 든다. 무묘다운 기상이 있고, 관왕묘라는 새로운 형식을 조선식으로 재해석해냄으로써 우리 건축의 또다른 면을 보여주고 있기 때문이다
p359 이 동네의 역사성을 되살려내기 위해 문화유산 답사도 실시하고 있는데 현재 가장 많이 시행되는 코스는 단종의 왕비인 정순왕후의 자취를 따라가는 것이다
p371 나는 백남준이 동료인 요노요코의 남편이 부른 이 노래에는 각별한 정이 있을 것 같아 백남준에게 달려가 예스터데이가 나왔으니 부르자고 청했다 그러자 백남준은 나에게 "I don't like yesterday"라고 대답하며 부르지 않았다. 백남준이 사랑한 것은 확실이 어제가 아니래 내일이었다
P381 성이란 그 행동의 이지러진 것을 바르게 하는 것이고, 균이란 습속의 치우침을 균형있게 하는 것이다
p383 조선왕조는 쉽게 말해 지식인 관료사회였는데 나라에서 엘리트 관료를 양성하기 위해 성균관을 세운 것이다
p389 정조의 '100리길을 갈 때 90리를 절반쯤으로 생각하라'는 말에 나는 그간 80리만 가도 다 간 기분으로 살았던 것 같아 조금 뜨끔했다
p442 일제 강점기 아무런 희망이 보이지 않던 시절에 소나기를 만난 핑계김에 스트리킹으로 쌓였이는 스트레스를 발산했던 폐허 동인들의 호기에 웃음이 나오고, 식민지 시절을 이런 파격이 없었으면 어떻게 헤쳐나갈 수 있겠느냐는 동정도 든다
P452 얼핏 생각하면 문짝이 비틀렸다고 오해하기 쉽지만 이는 성현의 혼이 드나들 수 있도록 일부러 살짝 비껴 열리게 한 것이다. 제례공간의 문짝들에 공통적으로 나타나는 형식인데 대성전의 문짝도 마찬가지로 틈이 벌어져 있고, 종묘의 신실대문도 똑같다
p460 결국 불교나 유학이나 도를 찾아가는 것은 매한가지라며 "솔개 날고 물고기 뛰는 이치는 위나 아래나 같은것 / 이는 색도 아니요 공도 아니라네"라는 연비어약이라는 시를 짓고 하산했다
p464 천리마 꼬리를 잡고 가는 파리도 천리를 간다.
p466 나는 그동안 그것이 천리마의 꼬리인지 아닌지 상관없이 문화유산의 꼬리에만은 파리가 아니라 진드기처럼 달라붙어 살아왔던 것 같다
P473 문묘제례악은 산 사람을 위한 음악이 아니라 넋을 기리는 음악이니까 산 사람을 감동시킨다는 것은 차후의 문제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음악 감상의 차원이 아닙니다
p480 번암과 연암과 다산과 단원이 위대하다면 이들을 낳은 정조시대도 위대한 것이다
p480 우리나라 역사에서는 8세기 3분기 석굴암, 불국사, 에밀레종으로 상징되는 신라 경덕왕 때, 12세기 2분기 고려청자의 전성기인 고려 인종때, 15세기 2분기 한글을 창제하고 종묘제례악을 정비한 세종대왕때, 그리고 18세기 후반기 영,정조시대의 문예부흥기였다
p481 영조시대 그림엔 새로운 것을 시도하는 예술적 고뇌가 서린 내용상의 깊이가 있고, 정조시대 그림엔 정교한 테크닉이 두드러지는 형식상의 완결미가 돋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