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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보가 말하지 않는 것들 - 클래식 무대 뒤, 오케스트라 악보를 둘러싼 세계
김보람 지음 / 사농공상 / 2026년 7월
평점 :
제목 : 악보가 말하지 않는 것들
작가 : 김보람
출판사 : 사농공상
읽은기간 : 2026/09/15 -2026/09/24
재미있는 역할을 하는 분의 책을 읽었다.
악보위원..
이런 역할도 있나?
악보를 복사해서 가져다주는 사람 정도로 생각했는데, 생각보다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었다.
작곡가가 악보를 여러번 바꾸기도 하고, 사람들의 평가에 따라 악보를 조정하기도 해서 생각보다 원본이라는 것이 어느 것인지 정확하지 않을 때가 많다고 한다.
그리고 지휘자가 보는 총보와 연주자들이 보는 악보가 align을 시키는 것도 보통일이 아니라고 한다.
악보를 분석하고 지휘자가 원하는 악보를 찾아 출판사와 협의하고 정리하고 배분하는 일이 모두 악보위원의 일이라고 한다.
사회가 세분화되고 전문화될수록 나도 모르는 새로운 업무와 역할이 계속 생기는것 같다.
재미있는 업무를 알려주는 책이었다.
좋았다.
p12 공연 기획회의에서 한 시즌의 프로그램이 결정되는 순간 악보위원은 바빠진다. 전 세계 악보 출판사를 뒤져 알맞은 에디션을 찾아내는 것부터가 시작이다. 지휘자가 어떤 악보를 선호하는지, 최근 많이 연주되는 악보는 어떤 것이 있는지 등 악보에 관한 거의 모든 것을 조사한다.
p28 악보위원은 리허설과 공연 현장에서 함께 호흡하며 오케스트라와 음악의 흐름을 읽는다. 리허설과 본 공연은 확연히 다르고, 같은 곡도 어제와 오늘의 공연이 서로 다르다.
p69 리허설을 며칠 앞둔 어느날 C.F. 피터스 출판사로부터 선물 하나가 도착했다. 향후 연주에 최신 교정본을 사용해달라는 취지의 프로모션 증정용 총보였다. 오랜 논쟁 끝에 마침내 바로잡힌 안단테-스케르초 버전이었다. 동봉된 편지에는 마에스트로께 전달해달라는 메시지와 함께 서울시향이 원할 경우 언제든 악보를 준비해주겠다고 적혀 있었다. 한 세기에 걸친 논란을 종결짓는 이 악보에는 수십 년 동안 분투해온 학자들의 노고와 출판사의 자부심이 담겨 있었다.
p71 학술적으로는 오염이라는 비판을 받기도 하지만 음악적으로는 가장 풍성하며, 소리의 성당이라 불리는 브루크너 특유의 건축적 아치 구조가 살아 있다는 평가와 함께 여전히 많은 지휘자들이 사랑하는 판본이 하스판이다. 하스의 뒤를 이은 노바크는 훨씬 엄격했다. “부르크너가 그 시점에 그 악보에 사인을 했다면, 그것이 곧 그 버전의 완성”이라는 원칙으로 간 연도별 판본을 철저히 분리하여 출판했다. 오늘날 부르크너 8번 1890년 판본이라고 하면 십중팔구 노바크 에디션을 가리키는 이유다.
p85 해외 오케스트라가 내한 공연을 하는 경우 서울시향에 한국관객들을 위해 앙코르로 아리랑이나 그리운 금강산 악보를 구할 수 있는지 연락이 온다. 또한 연주하고자 하는 특정 곡의 악보를 급하게 빌릴 수 있는지 문의가 들어오기도 한다. 이럴 때는 어떻게든 방법을 찾아 도움을 주려고 한다. 이런 게 바로 클래식 업계의 정이다.
p108 악보를 들여다보기만 한다고 해서 알 수 없는 부분들이 많다. 음악이 자연스러운 흐름인지 아닌지는 결국 연주를 해봐야 정확히 알 수 있다. 리허설은 그 과정에서 오류를 발견하고 바로잡는 시간이며, 사전에 아무리 완벽하게 준비해 놓아도 지휘자의 해석에 따라 다시 수정되고 변경된다. 원래 리허설을 바로 이런 과정을 위해 준비된 시간이다.
p134 한번은 공연을 처음 보러 온 친구가 이렇게 말한 적이 있었다. “왜 현악기들은 모두 똑같이 팔을 움직여? 너무 로봇 같아. 무서워!” 이 말에 “야! 나는 똑같이 안 움직이는 게 더 무서워!”라고 말했던 기억이 난다. 친구 눈엔 연주자가 똑같이 활을 움직이는 모습이 꽤 신기했던 모양이다.
p148 조악기란 악보에 적힌 음(기보음)과 실제로 들리는 음(실음)이 서로 다른 악기를 말한다. 만약 도레미솔 음표가 적힌 악보를 F조 호른으로 부른다면 완전5도 낮은 파솔라도 음이 연주된다. 오케스트라에서는 다양한 이조악기가 함께 연주되기 때문에 각 악기의 조성과 이조 방식을 정확히 이해하지 않으면 총보를 읽는 데 혼란을 겪을 수 있다.
p153 연주자들은 막중한 책임을 짊어지고 있지만 호른은 가장 불기 어려운 악기로 기네스북에 오를 만큼 까다로운 악기다. 긴 관과 좁은 배음 간격 때문에 입술과 호흡이 조금만 흔들려도 의도한 음에서 이탈하기 쉽고, 벨 안의 오른손 위치에 따라 음색과 음정까지 달라지기에 신경쓸 일이 많다. 또 곡 전반에 걸쳐 화음과 색채를 채우기에 많은 연주량을 담당한다. 오죽하면 한 거장 지휘자가 “호른 주자들에게 뭐라고 하지 마라. 그들은 목숨 내놓고 연주하는 중이니”라고 변호했을까
p166 처음엔 테오르보 연주자가 온다는 말을 듣고는 적잖이 당황했다. 테오르보는 별도의 파트보가 없어서 무슨 악보로 대체해야 하나 고민에 빠진 것이다. 하지만 연주자는 그냥 총보만 있으면 충분하다고 말해주어 다행이었다. 그렇다면 ‘연주가 매번 즉흥으로 이루어지는 걸까?’ 하는 궁금증이 들었는데 실제로 그러했다.
p173 제본 방식도 연구를 거듭했다. 스테이플러를 사용할 경우 페이지가 잘 넘어가지 않고 다시 원위치로 되돌아오는 문제가 있었다. 결국 시중에 파는 돼지본드를 이용해 제본하고 종이테이프로 마무리하는 방식이 최적임을 확인했고, 이것이 훗날 돼지본드 제본법으로 자리잡게 되었다.
p199 초창기에는 “이게 바로 현대음악이다”라고 외치는 듯한 소위 쎈 곡들이 주를 이루었다. 무대 위는 100명에 가까운 연주자와 방대한 타악기들로 꽉 찼지만, 객석은 무대 위 연주자 수만큼만 겨우 채워질 정도로 휑하기 일쑤였다. 텅 빈 객석의 공기와 익숙하지 않은 음악 사이의 괴리는 낯선 풍경이었다. 진은숙 선생님은 관객과 연주자 모두가 조금 더 익숙해질 수 있도록 프로그램을 조율하기 시작하셨고 이후 점점 매 시즌을 기다리는 마니아층까지 생겨나면서 객석도 서서히 활기를 띠기 시작했다.
p213 수많은 소리를 정확히 이해하고 거짓 없이 전하는 사람들이 만드는 결과물이었다. 프로가 프로를 만났을 때 부딪치는 긴장과 높아지는 완성도, 그리고 서로에 대한 존중이 연주곡과 뮤직비디오에 모두 담겨 있었다.
p243 악보위원으로서 인상적이었던 것은 악보를 대하는 그의 태도였다. 그는 서울시향의 한 인터뷰에서 “가장 소중한 것도 악보, 제일 잃어버리기 싫은 것도 악보”라고 말하며, “잃어버리면 다시 살 수는 있지만, 정성이 담긴 가치가 좋다”라고 이야기했다.
p249 서울시향 협연에 있어 내게 가장 기억에 남는 장면은 단연 바이롤리니스트 정경화 선생님과 함께한 무대다. 정명훈 감독님과 정경화 선생님이 리허설을 하던 중 의견이 엇갈렸는지 한참 대화를 나누시더니, 갑자기 정명훈 감독님의 등짝을 탁 하고 내리치는 게 아닌가
p253 한번은 경회루 야간음악회 때 힘차게 부는 바람에 악보가 하늘로 날아가 버린 적이 있다. 멋진 클라이맥스 구간에 날아가서 보긴 좋았다. 음악과 어울리는 명장면이었지만 한 사람은 웃을 수 없다. 그게 나다. 악보가 경회루 앞 호수에 빠진 것이다.
p272 나는 무대를 준비하는 시간, 빈 무대에 혼자 덩그러니 있는 순간을 즐긴다. 조용하고 고요한 그 순간이 마치 마음을 정리해주는 시간처럼 편안하다. 악보를 자리에 놓고 단원들이 들어오긴 전까지의 이 고요함을 지금도 좋아한다.
p306 클래식은 처음엔 소음처럼 들린다는 말이 있다. 그건 감수성이 부족해서가 아니라, 우리 뇌가 한꺼번에 쏟아지는 거대한 정보량을 감당하지 못해 내리는 일종의 항복선언이라고 한다. 그런데 들으면 들을수록 서서히 리듬과 멜로디가 들리고, 어느 순간 화음과 음색까지 들리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