겸재 정선 - 진경산수를 개척한 우리나라 화성 새로 쓰는 화인열전 1
유홍준 지음 / 창비 / 2026년 2월
평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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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 겸재 정선
작가 : 유홍준
출판사 : 창비
읽은기간 : 2026/04/28 -2026/05/07


취화선같은 영화로 보고, 간송미술관이나 역사책에서 미술작품으로만 봤던 겸재 정선에 대한 평전이다.

양반이었고, 꽤 많은 벼슬을 했고, 말년에는 높은 관직에까지 올랐던 사람이라는 걸 처음 알았다.

역시 아는 듯 하지만 전문가들의 책을 보면 새로운 것을 배우게 된다.

정선의 그림을 여러 점 봤었지만 책에서 시대별로 설명해주니 훨씬 이해가 잘 됐다.

이해가 잘 됐다고 해서 그림을 잘 알게 됐다는 건 아니다.

유홍준 작가님의 설명중 상당수의 내용은 이해하기 어려웠다. 내가 그림을 볼 줄 모르기 때문이다.

아는만큼 보인다고 했는데, 아는게 없으니 설명을 들어도 마음에 확 와 닿으면서 감동을 받지는 못했다.

그게 내 한계이긴 하지만 그림을 볼 때 봐야하는 방법을 하나 더 알게 됐다는 것으로도 만족한다.

다음책도 기대된다.


p25 금강전도는 이처럼 수직과 수평, 선과 점, 흰색과 검은색, 밝음과 어둠, 큰 것과 작으 ㄴ것 등이 대비되면서 조화를 이루고 있다. 대상의 이미지를 극대화시키기 위해 변형과 과장, 필법의 강약, 광선의 대비를 자유자재로 구사하여 보는 이의 눈과 가슴을 압도하는 화면을 창출해냈다.

p51 겸재가 섵불리 자기 개성을 드러내지 않고 이처럼 고전을 차근차근 방작하는 중년의 겸손과 성실성을 거쳤기 때문에 훗날 자신의 개성에 힘과 자신감을 얻을 수 있었던 것이다.

p54 겸재의 득의산수에서는 바로 이 세 가지 요소가 한 화면 속에 공존하는 것을 볼 수 있다. 화면 상단의 암봉과 먼 산은 인조,숙종 연간의 전통 산수화풍이고, 하단의 초가집과 안개 표현은 남종문인 화풍이며 버드나무, 전나무의 수지법과 냇가 암석의 표현에는 겸재가 진경산수에서 사용한 조선 산천의 분위기가 살아 있다.

p64 겸재 그림을 기년작 중심으로 볼 때 겸재다운 필치가 구사되는 것은 환갑 이후이다. 특히 64세때 그린 청풍계도와 65세 대 그린 서원소정도, 그리고 이 즈음 그린 경교명습첩에 이르러야 겸재다운 멋이 흔연히배어나며, 그의 노숙한 필치는 76세에 그린 인왕제색도에서 구사되었으니 그는 확실히 대기만성형이었다고 할 수 있다.

p67 본래 정통 산수화론에 의하면 산수화를 그리면서 기피해야 할 점 16가지가 있는데, 그중에 길을 드러내서는 안 된다는 것이 있으니, 이를 모를 리 없는 겸재가 이와 같이 그렸다는 것은 지도의 구도를 참고하여 그렸다는 방증이기도 하다

p77 신묘년 풍악도첩은 금강산을 사생한 첫 작품인 만큼 화가의 시각이 대상의 성격을 포착하는 데 주력하여 붓끝이 아직 풀리지 않은 인상을 준다. 이에 반하여 해악전신첩은 대상의 포착보다 회화적 재구성에 더욱 힘쓴 것을 확연히 볼 수 있다.

p81 정양사 앞에 일만이천 봉을 배치했다면 한 폭의 분경도에 불과했을 것이나 구름안개로 가려진 모습을 그려서 도리어 공계(허공의 세계)와 다르게 하였다.

p95 이 북원수회도는 훗날 단원 김홍도가 개성의 60세 이상 어른의 경로잔치를 그린 기로세련계도(일명 만월대계회도)의 선구로 삼을 만한 기념비적인 계회도이다

p108 조유수가 시중호만은 꼭 그려달라고 한 것으 ㄴ시중호가 흡곡현에 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리하여 겸제는 결국 삼부연, 불정대, 삼일호, 시중대 4폭을 그려서 조유수에게 보내주었고, 이듬해 조유수는 흡곡현령을 사임하고 서울로 돌아왔을 때 이 그림을 받고는 너무도 기뻐서 그림마다 시를 지어 부친 것이 그의 문집 후계집에 전해지고 있다.

p128 겸재는 훗날 60대 때 인곡유거도를 그렸는데, 이 그림을 보면 초가 대문 안 마당에 고목이 두 그루 있고 겸재가 사랑채에서 밖을 내다보고 있는 모습이 있다.

p196 겸재의 진경산수는 인왕제색도에서 보이듯 짙은 먹을 사용한 웅혼한 필치의 작품이 많다. 그러나 그의 한강 그림들은 은은한 담채를 사용한 아주 부드러운 그림이다. 그래서 학자들은 겸재는 산을 그릴 땐 남성적, 강을 그릴 땐 여성적인 필치를 보여준다고 말하고 있다.

p214 능숙한 필묵법을 구사하여 60대와는 또 다른 화풍으로 원숙한 경지를 보여주며 제2의 전성기를 맞이하게 되니 겸재느 ㄴ그야말로 대기만성의 화가였다.

p224 겸재의 취성도는 화견이 극상품이어서 조금도 변색되지 않고 마치 엊그제 그린 것처럼 선명하고 영롱하다.

p240 이처럼 앞 시기와는 확연히 다른 겸재의 70대 이후 필법의 중요한 특징을 이동주는 우리나라의 옛그림에서 강한 필세, 겹쳐진 먹빛의 묵직한 중묵, 바위의 양감이라고 하였다. 이느 ㄴ겸재가 즐겨 그린 장동8경에 잘 나타나 있다.

p260 관아재 조영석은 겸재의 진정한 예술적 동반자이고, 예리한 비평가이고, 전폭적인 지지자였다.

p293 영조는 이날 승지들을 입시시깉 가운데 인사 발령 명단을 본 뒤 특별히 배려해야 될 사람이나 관심이 가는 인사들에 대해 궁금한 점을 점검하다가 겸재의 이름을 보고 몹시 반가웠던지 “정선이 아직도 있느냐”고 물었다. 그러자 우부승지 한광조가 “나이가 거의 80입니다”라고 대답했다. 영조가 “요즈음도 아직 그림을 그릴 수 있느냐”고 물으니, 우부승지는 “그렇습니다”라고 대답했다.

p301 영조는 이렇게 겸재를 중용한 것이 단순히 그림을 잘 그리기 때문이 아니라는 사실을 강조하였다. 결국 이 일은 영조의 비호 속에 겸재는 살아나고 오히려 정술조는 다른 사건과 연계되어 파직되고 끝났다.

p315 이 말년작 장동8경첩은 앞의 두 화첩과는 필치가 완연히 다르다. 대상을 소략하게 표현했고, 필치는 스스럼없이 그어간 스케치풍으로 노필이 주는 간명함이 역력하다

p322 겸재가 이룩한 진경산수의 세계는 진실로 위대한 것이었다. 그는 조선적 산수화를 창시하고 완성했다. 그는 당대의 문화적 성숙에 힘입어 이를자신의 숙명적 과업으로 알고 신분을 떨쳐버리고, 남들이 천하다고 비웃는 소리에 괘념치않고 “내 비록 환쟁이라 불릴지라도” 화인으로 살아가겠다는 열정과 의지로 이와 같은 위대한 성취를 이루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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