잊혀진 나라 가야 여행기 - 내가 사랑한 가야, 2022 세종도서 교양부문 잊혀진 나라 여행기
정은영 지음 / 율리시즈 / 2021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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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잊혀진 나라 가야 여행기

 : 정은영

 : 율리시즈

읽은기간 : 2025/10/11 -2025/10/20


알려지지 않은 나라. 가야..

우리나라 고대사는 알려지지 않은 내용이 많다보니 항상 신화에 쌓여있다. 

그러다보니 얼토당토 않은 사이비 역사가들의 허풍과 거짓말의 잔치가 계속 벌어진다. 

가야는 더더욱 안 알려진 나라.. 임나일본부의 진원지이기도 하다. 

그런 가야를 탐방하는 책이 있다 해서 열심히 읽었다. 

저자는 가야의 영향력이 있는 지역을 매우 넓게 보았다. 

가야의 중심지인 김해, 부산, 고령, 함안 뿐만이 아니라 전주까지도 가야의 영향력 하에 두고 탐방을 했다. 

생각보다 많은 유물과 유적, 그리고 고고학적 성과가 있었다. 

순장이 있었던 고분도 발굴이 됐고, 많은 고분군과 토기, 철제류가 연구됐다. 

이런 역사적 사실들을 구슬에 꿰어 보배로 만들고 있었다. 

반성한다.. 가야에 대해서 더 배워야갰다.. 

좋은 책을 읽어서 즐겁고 행복하다. 


p7 고고학의 목적은 화려한 유물 자체가 아니라 과거의 인간이다. 저자는 역사에 과잉된 내셔널리즘을 투영하는 것을 경계한다. 대신 수많은 무덤에서 사랑하고 때론 다투던 과거 사람들의 외침을 느낀다.

p29 흉노족 후손이 가야뿐만 아니라 신라를 이끌었다는 주장은 두 개의 비석 문무왕릉비와 대당고김씨부인묘명이 발견되면서 주목받았다. 문무왕릉비에는 흉노족 김일제의 후손이 7대를 이어 내려와라고 되어 있고, 대당고김씨부인모명에는 김씨 부인의 선조가 요동지방으로 피난하고 번성해진 김일제의 후손으로 소개되어 있다.

p40 봉황대가 바다였음을 알려주는 유적은 회현리 패총이다. 패총은 사람들이 먹고 버린 조개껍데기 등 쓰레기들이 모여 있는 유적으로 그곳이 옛날에 바다였음을 알려주는 자리다. 봉황대의 회현리 패총은 특히 1907년 우리나라 최초로 고고학 발굴이 이루어진 곳으로 중요한데, 지금도 봉황대 아랫마을 입구에는 이를 기억하는 기념비가 서 있다.

p44 신화는 역사가 놓칠 수 있는 진실을 담고 있다. 오랜 세월 입에서 입으로 전해지며 여러 세대를 지나는 동안 사람들의 소망과 마음이 모여 완성되었기 때문이다. 역사와 함께 신화를 주목해야 하는 이유다.

p51 이곳의 발굴은 1969년부터 2008년 일단락되기까지 40여 년에 걸쳐 이루어졌다. 오랜 시간의 정성스러운 발굴 결과로 무덤만 총 20여기가 발견되었고 가야토기, 철제무기류, 갑옷, 금동관 등 1만여 점이 넘는 유물이 나왔다. 복천박물관은 복천동 고분에서 나온 유물을 보존하기 위해 1996년 개관한 곳이었다. 미지의 왕국으로 남아 있는 가야의 신비를 풀며, 고대 부산에 있었던 가야 문화의 모습을 보여주는 곳이다

p58 덧널무덤의 특징은 덧널의 흔적을 안타깝게도 찾아볼 수 없다는 데 있다. 나무의 특성 때문에 흔적 없이 사라지는 것이다. 껴묻거리만 있고 관의 흔적이 없을 때 고고학자는 이를 덧널무덥으로 추정한다. 덧널무덤을 볼 때면 자신을 자랑하지 않고 모든 것을 주는 아낌없이 주는 나무가 떠오른다.

p69 일본의 역사학자들은 아라가야에 임나일본부가 있었다는 증거를 찾기 위해 함안을 샅샅이 뒤졌다. 1917년 일본의 역사학자 이마니시 류의 첫 발굴, 1918년 야쓰이 세이이치의 말이산 정상 13호분 발굴이 있었다. 이때 발굴된 유물들을 일본인들이 화차로 실어 가 남아 있지 않다며 아쉬워했다

p76 이곳이 일본서기에 기록된 529년 안라고당회의 장소였다는 설이 있다. 안라고당회의는 당시 변화하는 국제정세를 놀의하기 위해 신라, 왜, 아라가야, 백제가 함께 만난 국제회의로 알려져 있다. 그 회의를 위해 고당을 새로 지었다는 이야기다.

p87 소가야라는 이름의 유래에 대해서는 의견이 분분하다. 대가야에 비해 상대적으로 작았다는 의미의 작은 가야라는 설도 있고, 철이 많이 나는 쇠가야가 잘못 전해야 소가야가 되었다는 설도 있다. 소가야가 언제 멸망했는지는 정확히 알 수 없으나 대가야 멸망했다는 562년경으로 짐작되고 있다.

p105 해 지는 광경의 아름다움이나 신의 아름다움 앞에서 문득 걸음을 멈추고 아! 하고 감탄하는 사람은 벌써 신의 일에 참여하고 있는 사람이다.

p117 해인사에는 대가야 시조 신화의 주인공인 산신 정견모주를 모신 국사단이 있다. 해인사의 국사단은 절을 구성하는 단순한 전각이 아니라 대가야를 지탱했던 성소이다.

p125 지방 박물관들은 흔히 고분을 끼고 있다. 고령의 대가야박물관, 김해의 대성동박물관, 고성의 고성박물관의 입지가 다 그러하다.

p143 일본서기에 512년 있었다는 임나4현 할양 기사는 조심스레 읽어내릴 필요가 있다. 임나 4현은 상다리, 하다리, 사타, 모루인데 호남 동부를 아우른다. 백제가 왜에 조공하며 임나 4현을 달라고 해서 주었다는 기록이다. 백제와 왜의 조공과 할양 부분은 왜곡되었지만, 6세기 초 호남 동부가 가야에서 백제로 넘어가는 일단의 과정을 시사한다.

p153 기억나는 것은 청정한 장수의 밤을 강타하는 시원한 물소리였다. 알고 보니 장수는 물의 마을이었다. 금강의 발원지이자 조선 태조 이성계의 우물지인 뜬봉샘이 바로 장수에 있다. 그날 밤 내가 들은 물소리는 깊은 소나무를 뚫고 나오는 세찬 빗소리 같았다.

p162 순천의 가야는 인디언 서머처럼 짧고 굵은 시간이었다. 순천의 가야는 5세기에서 6세기까지 채 100여 년이 되지 않은 시간이었다. 이 시기를 제외한 대다수 시간은 마한과 백제 문화권에 속했다.

p165 순천은 6세기 백제가 조공을 바쳐 임나5현을 요청하니 왜가 이를 허락했다는 문제의 임나4현으로 거론되는 곳이다. 일본서기의 기록이 맞다면 상다리, 하다리, 사타, 모루의 4현이 왜의 땅이었다는 얘기다. 상다리와 하다리는 여수, 모루는 광양으로 비정되고 사타가 바로 순천이었을 것이라고 많은 학자들이 추정하고 있다.

p168 우리의 근대에 간송 전형필이 있다면,. 우리의 현대에는 한창기가 있다. 전시실의 카피가 말하듯, 한창기는 흉내 낼 수 없는 사람이다. 뿌리깊은 나무 박물관이 있어서 순천은 더욱 그리운 곳이 될 것 같다.

p192 우리나라 국보로 지정된 유물의 10퍼센트가 리움미술관 소장이다. 고미술은 4층 청자, 3층 분청사기, 2층 고서화, 1층 불교미술과 금속공예 전시실로 구성되어 있고, 4층에서부터 한 층씩 계단을 내려오면서 관람하는 동선으로 구성되어 있다. 모든 층을 다 보는 것도 좋지만, 관심이 있는 층을 집중적으로 보는 것도 괜찮다. 한 번이 아니라 여러 번에 거쳐 나눠보기 방식이다. 4층은 국보와 보물 천지다. 3층에는 호랑이의 눈빛과 털이 생생한 김홍도의 송하맹호도가 있다.

p202 국립김해박물관은 가야와 관련된 모든 것을 수집하고 보존하고 전시하는 것을 목적으로 탄생한 박물관이다. 가야가 생경했던 1998년 개관했으니 어느덧 20년이 지났다. 가야인의 삶과 생업, 전쟁과 사랑, 철의 제국과 해상강국 등의 모든 이야기를 다 담아놓았다. 김해, 함안, 부산, 창년 발굴 가야 유물들을 전부 포함하고 있다. 금관가야, 아라가야, 비화가야 등 가야 소국들의 유물을 함께 관람하며 서로의 양식과 특징을 비교해볼 수 있어 가야 문화 전반에 대한 조망이 가능하다.

p210 굴가마라는 토기 기술의 혁신을 이끌어낸 가야인들의 과학정신도 대단하지만, 가야토기는 다양성에서 더욱 빛난다. 여러 가야 소국이 연맹과 네트워크로 작동한 정치체를 운영했던 것의 문화적 결과다. 서로의 다름을 인정하고 공존하는 데서 창조성과 다양성이 꽃핀다.

p226 5세기 죽막동은 대가야가 중국으로 가는 길목에 있었으나, 그 땅의 주인은 백제였다. 그 백제 땅에서 주변국의 토기들이 다양하게 출토되었다. 백제, 가야, 왜의 토기, 금세공품, 철기들이다. 이 유물들이 서로 섞여 투명박스 안에 전시되어 있었다. 국적이 다른 유물들이 한꺼번에 나오면서, 이곳은 국제 해양 제사가 열린 곳으로 알려지게 된다. 풍어와 해상의 안전, 나라의 평안에는 국경이 따로 없다.

p228 순장은 원래 스키타이, 흉노 등 북방 유목민들의 풍습이었다. 역사의 아버지 헤로도토스는 역사에서 스키타이족의 순장을 자세히 소개하고 있다. 스키타이 왕이 죽으면 왕의 시신을 안치한 후 왕의 후궁, 술따르는 사람, 요리사, 마부, 집사를 각 한 명씩 죽여 순장했다. 그 왕의 1주기가 되면 왕의 시종 50명과 말 50필을 죽여 이들을 서로 연결해 무덤 주위에 빙 둘러 배치한다. 마치 50명의 기마병이 죽은 왕을 호위하고 있는 느낌이다.

p243 아요디아가 아유타국으로 지목된 데는 쌍어문과 허황옥을 일생에 걸쳐 좇은 두 연구자의 공이 크다. 아동문학가이자 삼국유사 연구자인 이종기와 고고학자이자 한양대학교 교수였던 김병모다. 이종기가 펜클럽대회 참석차 들른 아요디아에서 쌍어문을 발견했듯이, 김병모 또한 아요디아에서 쌍어문을 찾았다.

p257 아내이자 엄마로 살면서 나라가 부를 때 갑옷과 투구를 쓰고 참전한 주체적인 가야 여성을 대성동박물관에서 만났다. 특히 57호분 순장녀들이 여전사들이었음을 보다 실감 나게 느낄 수 있는 홀로그램을 만날 수 있었다.

p262 죽음을 앞두고 그는 나라를 구하지 못한 몸이 어찌 흙 속에 묻힐까. 차차리 돌로 덮어라라는 유언을 남겼다. 그의 자손은 구형왕의 유지를 받들어 돌무덤을 만들었다. 돌을 차곡차곡 쌓아올려 7층의 돌무덤이 되었다.

p273 그는 1961년 북한 노동당의 기관지 로동신문에 우륵의 음악 활동이라는 글을 남겼다. 진흥왕이 낭성에 이르러 우륵과 제자를 불러 하림궁에서 연주를 들은 해 551년을 기점으로 1410년이 되는 해를 기념하여 글을 썼다고 한다. 진흥왕과 우륵의 역사적 만남이 북한 땅에서도 기억되고 있다.

p287 무엇보다 가야를 하나로 묶는 기능은 건국신화가 했을 듯하다. 가야에는 두 개의 건국신화가 있다. 금관가야 중심의 것은 삼국유사에 수록된 수로왕의 구지봉 신화다. 지금의 김해 땅에 있는 얕은 언덕, 구지봉에 6개의 황금알이 하늘에서 내려왔다. 그 알에서 6명의 동자가 깨어났다. 그 중 가장 먼저 깨어나온 동자가 금관가야의 수로왕이 되고, 나머지 다섯 동자는 다섯 가야의 왕이 되었다. 또 하나는 대가야 중심의 건국신화인데 조선시대 진증동국여지승람에 신라 말기 최치원이 쓴 석이정전의 내용으로 소개되었다. 가야산의 여신 정견모주와 하늘에서 내려온 천신 이비가지가 만나 형제를 낳는다. 뇌질주일과 뇌질청예다. 뇌질주일은 대가야 시조 이진아시왕이고 뇌질청예는 금관가야 시조인 수로왕이다.

p304 하워드 카터가 왕의 계곡에서 투탕카멘의 무덤을 발굴했을 때 수천년의 시간 동안 마른 한 묶음의 꽃다발을 만나게 되었다. 무엇일까. 어린 나이에 홀론 된 왕비가 남편인 투탕카멘에게 바치는 마지막 선물이지 않을까. 이렇듯 무덤은 남은 자들이 사랑했던 사람을 떠나보내는 마지막 선물이 그윽한 곳이다.

p314 고고학자 강인욱은 고고학 여행에서 무덤은 살아 있는 사람들이 죽은 사람들에게 보내는 사랑이라고 했다. 작별을 준비하면서 가야인들은 토기를 만들어 사랑하는 사람들을 떠나보냈다.

p321 신라의 탈해왕이 된 석탈해는 철기 집단의 수장이라는 추정이 우세한데, 기록에 보면 석탈해가 가야에 와서 수로왕과 술법을 겨루는 장면이 있다. 이 술법 싸움을 석탈해와 수로왕의 철기 집단 사이의 패권 다툼으로 보는 해석이 우세하다. 캄차카반도에서 이주한 석탈해 중심의 철기 집단이 먼저 이주해온 김수로왕의 철기 집단에 싸움을 걸었다가 패배하고 결국 신라로 갔다는 해석이 있다.

p341 1970~1980년대 한국 고고학은 일제강점기의 어둠을 넘어 빛나는 성취를 보여준다. 가장 드라마틱했던 발굴은 1977년 고령 지산동 고분이다. 우리나라에서 처음으로 대규모 순장이 이루어졌음을 알게 한 고고학계 일대 사건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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