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도시여행자를 위한 노르망디×역사
주경철 지음 / 휴머니스트 / 2024년 7월
평점 :
제목 : 도시여행자를 위한 노르망디x역사
작가 : 주경철
출판사 : 휴머니스트
읽은기간 : 2024/11/20 -2024/11/29
책이 나오면 꼭 읽게되는 주경철 선생님의 신작읽기...
이번에는 노르망디다..
노르망디하면 역시 몽생미셀.. 책은 몽생미셀부터 시작한다.
그리고, 노르망디의 역사가 나온다..
그저 바이킹들이 내려오고 프랑스 왕이 땅을 주고 봉신으로 삼았다는 정도만 알고있는 나에게 재미있는 역사이야기가 쏟아졌다.
노르망디에 가본 곳은 몇 곳 없지만 이 책을 통해서 가보고 싶은 곳이 많이 생겼다..
다시 놀러가야지. 그때는 렌트해서 다녀야지..
주경철 선생님 책은 가보고 싶게 만든다..
빨리 다시 가봐야지..
p18 이 가운데 지금껏 남은 가장 유명한 곳이 몽생미쉘 수도원이다. 이곳이야말로 세상과 동떨어져 기도하기에 딱 좋은 곳이다. 수동원이 되기에 알맞은 세 가지 요소를 지니고 있으니, 성스러운 섬이면서 사람을 피하는 동굴이면서 하늘과 가까운 산이 그것이다.
p26 큰 변화가 시작된 계기는 966년 루앙 백작 라사르 1세의 주도로 이곳이 베네딕트 수도원이 된 것이다. 이후 수도사 약 50명이 거주하는 제법 큰 규모가 되었다. 이시기에 처음으로 로마네스크 양식의 교회 건물을 축조했다.
p28 메르베유는 수도사들이 거주하는 공간으로서 크고 작은 공간들이 미로를 이룬다. 이곳은 다시 두 부분으로 구분되어서, 동쪽 부분에는 예배당, 손님맞이 방, 수도사들이 모두 모여 식사하던 대식당이 있고, 서쪽 부분에는 포도주 창고, 백년전쟁 당시 기사들이 모여 살았다고 하는 기사의 방 그리고 회랑이 있다.
p35 이 섬의 DNA에는 사람을 잡아 가두는 형질이 들어 있는 모양이다. 수도사든 학자든 혹은 범죄자든.
p46 역상의 풍상을 겪으며 앙상한 뼈대만 남아 있지만, 그 뼈대 자체가 너무나도 인상적이다. 그래서 보통 프랑스에서 가장 아름다운 폐허로 알려져 있다. 유홍준 선생은 역사 답사의 백미는 원래의 건물이 사라진 터라고 하지 않았던가.
p50 1795년에 피에르 레퀴에, 1802년에 장바티스트 르포르라는 사업가가 수도원을 구입한 다음 건물을 허물고 목재와 석재를 채취하여 팔아넘겼다. 말하자면 수도원 전체가 채석장으로 변한 것이다.
p73 현재는 행정적으로 노르망디에 속해 있지도 않고 거의 아무런 역사 유적도 남아 있지 않은 작은 마을에 불과하다. 그런데 이 마을이 역사적으로 노르망디의 탄생지가 된 것은 911년 이곳에서 프랑크 왕국의 국왕과 바이킹 무리의 수장 사이에 맺어진 생클레르쉬르엡트 조약 때문이다.
p77 이 기록에 따르면 원래 신하가 될 사람, 즉 롤롱이 국왕의 발에 키스를 해야 했다. 바이킹 전사가 다른 사람 발에 키스를? 그런 일을 하면 바이킹이 아니지! 롤롱이 부하에게 대신 하라고 지시하자 부하는 국왕의 발을 번쩍 들어 넘어뜨린 다음 키스를 했고, 모든 사람이 한바탕 웃었다고 한다. 이 정도는 되어야 바이킹 전사라 할만하지 않겠는가
p93 노르만 정복에 관한 가장 흥미로운 자료 중 하나가 <방디와 태피스트리>다. 바이외 태피스트리 박물관에 소장된 이 유물은 노르만 정복 사건을 생생하게 묘사한다. 프랑스사와 영국사에서 워낙 중요한 사료이므로 이 박물관은 늘 많은 방문객들로 붐빈다.
p115 대표적으로 런던탑은 윌리엄이 1070년대 지시하여 캉의 석재를 들여와 지었다. 그 외에 캔터베리 대성당, 웨스트민스터 사원 등도 부분적으로 캉의 석재를 써서 건축했다. 일단 이 돌로 지은 이상 후대에 보수할 때도 같은 둘이 필요하다. 그렇지 않으면 색상과 질감이 달라 보기가 안좋다. 그래서 이후 시기에 보수할 때도 캉의 석재를 들여와야 했다. 19세기에도 웨스트민스터 궁전의 시계탑 빅벤을 다시 캉 석재로 지었다.
p123 이 성은 중세 군사용 성채의 걸작이며 시대를 앞서간 혁신적 요새였다. 성 앞에는 삼각형 모양의 외보가 있고, 그 둘레는 폭 20미터, 깊이 10미터의 해자가 둘러싸고 있다. 다시 말해 본성 바로 가깥에 보호 장치를 하나 더 설치하고, 주변에 깊은 구덩이를 파서 적이 접근하지 못하게 만든 것이다.
p136 사형을 선고받은 잔 다르크는 루앙 시내 비와마르세 광장에서 화형에 처해졌다. 5월 30일 아침 8시, 그녀를 끌고 나와 형 집행 의식을 행했다.
p144 중후한 고딕 건물인 법원 건물은 내부로 들어갈 수는 없지만 장대하고도 멋진 외관은 감상할 수 있다. 그런데 그 잘생긴 얼굴에 흉한 자국들이 가득하다. 제2차 세계대전 당시 격렬한 총격전이 벌어져 건물 벽에 총탄을 맞은 흔적이 많이 생겼는데, 시 당국은 이 또한 역사의 일부라 판단하고 그대로 보존하고 있다.
p152 모네가 우리가 아는 그런 화가가 된 데는 1856년에 만난 외젠 부댕의 역할이 크다. 모네 자신도 화가가 된 것은 부댕 덕분이라고 이야기하곤 했다. 자연에서 그려라. 이것이 부댕이 모네에게 해준 말이다. 후일 한 기자가 모네에게 화실을 보여달라고 했을 때, 센강을 가리키며 이곳이 나의 화실이오 하고 말했다고 한다.
p162 저녁이 오면 마치 모네가 처음 집을 보러 왔던 그날처럼 본래의 조용한 시골 마을로 돌아간다. 마을은 사실 몇 집 안 된다. 마을 한복판을 가로지르는 큰기을 따라 가면 곧 마을 전체를 볼 수 있다. 저녁 혹은 아침 일찍 일어나 산보하면 신선한 노르망디 마을 분위기를 느낄 수 있고, 그 범용한 시골 마을이 어떻게 모네의 눈과 손을 거쳐 아름다운 그림으로 화했는지 느껴볼 수 있다.
p168 장례식에 온 클레망소의 이야기가 전한다. 장례식에서 관 위에 검은 천이 덮혀 있는 것을 보고 클레망소가 그것을 치워버리며 ‘모네에게 검은색은 안 돼’하고 소리쳤다고 한다.
p177 인상파 화가들을 사회 현실에서 유리된 존재로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그럴 리가 있겠는가? 인상파의 효시를 알린 모네의 그림 <인상, 인출>만 해도 그렇다. 그냥 수평선이 아니라 르아브르 산업 단지의 공장 굴뚝들 위로 태양이 떠오르고 있다. 사회 변화에 완전히 눈감고 순수하게 미학적 태도만 견지하는 화가란 없다.
p183 루앙에는 좋은 미술관과 박물관이 많은데, 루앙 미술관은 반드시 가볼 곳이다. 인상파 작품들이 많을 뿐 아니라 푸생, 다비드, 들라크루아, 제리코, 코로 등 프랑스의 대가들, 그리고 베로네제, 벨라스케스, 카라바조, 루벤스 등 외국 대가들의 작품도 다수 보유하고 있다. 게다가 입장료가 화끈하게 무료다.
p196 밀레 생가를 찾아 이 먼 땅끝 마을까지 일부러 찾아갔다면 간김에 코당탱반도의 경관을 둘러볼 만하다. 매우 높은 절벽들, 작은 모래사장, 매력적인 소항구들이 이어지는 곳이어서 드라이브를 해도 좋고 차에서 내려 해변 모래언덕을 올라가 보는 것도 멋진 일이다.
p208 거의 무한의 느낌을 줄 정도로 반복되는 작은 네모 모양의 빛의 조각들이 공중에 그득하다. 오직 그뿐, 성당 내부에는 아기 예수를 안은 마리아와 성 요셉 동상만 있고 그 외 다른 장식, 조각, 그림 같은 것이 없다. 그래서 더욱 깔끔하다.
p258 말하자면 바이킹 선조들의 배 만드는 기술이 전수되어 온 것인데, 이들이 배를 건조하는 방식을 원용해서 목조 성당을 지은 것이다. 과연 성당 내부에서 보면 선체를 거꾸로 뒤집은 듯한 모양이 확연하다.
p266 보들레르의 의부는그가 법률가가 되기를 바랐으나 그에게는 그런 마음이 눈곱만큼도 없었따. 아들로부터 정녕 시인의 길을 가고자 한다는 말을 들은 어머니의 반응이 애처롭다. “가슴 아픈 일이야. 샤를이 아버지 뜻을 따랐다면 경력이 완전히 달라졌을 텐데. 그러면 문학사에 이름을 올리지는 못했겠지만 우리 모두 훨씬 더 행복했을걸”
p273 청중들에게 부담 없이 자유롭게 듣기를 권하는 그의 음악은 간결하고 쉽고 감미로우며, 반복되는 동기의 연주로 현대 미니멀리즘의 선구라고 불리기도 한다. 그의 음악이 오늘날 더욱 사랑받는 것을 보면, 그는 자신의 말대로 ‘너무 늙은 시대에 너무 젋게 세상에 온 사람’인지 모른다
p291 쿠튀리에의 직업을 건축가 및 화가의 직업과 같은 수준으로 끌어올려, 드레스를 만들 때 구조와 건축의 개념을 자신의 것으로 만들었다는 식의 설명도 듣고 보니 수긍이 된다. 하여튼 내가 H라인, 뉴룩혁명 같은 내용을 유심히 살펴볼 줄은 몰랐다. 여행하다 보면 몰랐던 내용을 조금씩 알아가는 기쁨이 있다. 늙은 개도 새로운 재주를 배울 수 있고, 중늙은이도 패션에 눈뜰 수 있다.
p308 푸홀은 어찌나 연기를 잘했는지 1944년 히틀러에게 알라릭 요원으로서 철십자훈장을 받았다. 몇 달 후에는 영국 정부가 가르보요원에게 연합군에 지대한 공헌을 했다는 이유로 영제국 기사훈장을 수여했다. 이중간첩 후안 푸홀 가르시아는 나치와 연합군 양측으로부터 훈장을 받은 극소수 인물 중 한 명이다.
p328 이 지역 전투가 얼마나 끔찍했는지 말해 주는 사실이 하나 있다. 미군 90보병사단이 코탕탱에 도착하고 6주가 지났을 때 중대마다 100-400퍼센트의 손실을 입었다. 400퍼센트의 손실은 중대원이 전부 죽어 새로 갱신하고 그 중대원들이 또 모두 죽어 다시 갱신하는 식의 일이 네 번 있었다는 의미다.
p335 이 영화는 코르시카 해안에서 촬영했다. 촬영을 시작하려는 데 웬 이타리아 남자가 나타나서 자신의 해변을 이용하려면 1만 5,000달러를 내야 한다고 요구했다. 만일 돈을 주지 않으면 자동차를 몰고 촬영장 여기저기를 돌아다니겠다고 협박했다. 제2차 세계대전을 다루는 전쟁 영화인데 1960년대 자동차가 왔다 갔다 하면 큰일 아닌가. 별수 없이 돈을 주고 영화를 찍었는데, 코르시카 해변에는 개인 사유지가 없다는 사실을 나중에 알게 되었다. 사기꾼에 걸려든 것이다.
p343 사실 할머니 집은 창녀 집이었다. 동네 아이들이 에디트에게 돌을 던졌다. 그 집에 기거하는 창녀 언니들만이 그녀를 귀여워했다. 그러던 중 심한 각막염으로 거의 실명 위기에 빠지자, 할머니와 언니들이 아이를 데리고 리지외 성당으레 찾아가서 기도하고 테레즈 무덤의 흙을 가져다가 매일 밤 눈에 그 흙을 대주었다. 기도가 통한 걸까. 에디트는 눈을 번쩍 떴다. 기적을 경험한 그녀는 평생 테레즈 성녀에게 기도하고 특히 공연 전에는 꼭 성녀의 메달을 걸고 지냈다.
p353 개인적 경험의 소산이기도 하고 많은 사람들이 말하는 바는 뵈브롱앙오주(오주 지방의 뵈브롱이라는 의미) 마을이 특히 아름답다는 것이다. 캉과 리지외의 중간 지점에 위치한 이곳은 노르망디에서 아름다운 마을로 손꼽히는 것은 물론 프랑스의 가장 아름다운 마을들이라는 타이틀도 얻었다.
p356 프랑스인들은 사는 법을 압니다. 이들은 즐거움에 정통합니다. 나도 그 의견에 공감한다. 프랑스인들은 요리도 맛있게 하고 진정 즐거움을 위해 살아간다.
p365 프랑스인들은 하여튼 먹는 데에는 진심이어서, 온갖 방법을 만들어 낸다. 혹시 소맥처럼 칼바도스+시드로 같은 것은 없을까? 물론 있다. 이름하여 포모 드 노르망디. 사전적 정의와 설명은 이렇다. “오크통에서 최소 14개월 이상 숙성한 시드르용 사과즙과 칼바도스를 블렌딩한 혼합주인 포모는 대개 식전주로 차게 마시며 푸아그라, 멜론 및 몇몇 디저트에 결들이기도 한다.
p368 병을 개봉해서 조앙에게 한 잔 따라주자, 조앙이 조금 마시더니 놀란 표정을 짓는다. “나는 여태까지 이런 것을 마셔본 적이 없어요. 이건 마시는 게 아니라… 그냥 숨만 쉬면 되는군요” 라비크는 이렇게 답한다. “당신은 낭만주의자가 될 거요. 칼바도스적 낭만주의자”
p379 비무티에에는 카망베르 기념관도 있다. 건물자체가 카망베르 통 모양이라고 주장하는 데, 솔직히 그렇게 이상적이지는 않다. 그리고 기념관이라고 하기에는 너무 소박하다. 이곳을 찾아가니 직원 세 사람이 모여서 밥을 먹고 있다가 ‘손님 왔다’ 하면서 밥 먹다 말고 카운터로 가서 표를 파는 식이다.
p395 프랑스 속담은 이렇게 말한다 “자기 나라만 보고 산다면 이 세상은 첫 장만 읽은 책과 같다” 잠시 우리 사는 세상을 벗어나서 다른 사람들 사는 세상은 어떤지 보고 오도록 하자. 여행을 마치고 돌아올 즈음이면 우리 마음의 공간이 조금 더 커지고 우리 생각이 조금 더 지혜로워져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