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의 전쟁 - 성스러운 폭력의 역사
카렌 암스트롱 지음, 정영목 옮김 / 교양인 / 2021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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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신의전쟁

 : 카렌 암스트롱

 : 교양인

읽은기간 : 2024/09/24 -2024/11/27


책의 제목이나 표지를 보면 무척 흥미롭고 끌리는 책이다. 

생각보다 오랜 시간동안 읽었다. 그러다보니 읽는 호흡이 자꾸 끊기고, 집중이 되지 않았다.

역시 책은 짧은 시간동안 집중해서 읽어야 하나보다.

요즘 내가 좋아하는 한가지 주제를 가지고 역사를 풀어나가는... 그런 종류의 책이다. 

그런데 그냥 역사책같은 생각이 많이 들었다. 신이나 종교에 대한 내용보다는 역사에다 중간중간 종교가 끼어드는 느낌이었다.

현대사로 넘어오면서부터는 좀 흥미진진했다. 특히, 이슬람, 힌두교와 정치와의 관계는 새롭게 배운게 많았다. 

많은 사람들이 생각하듯이 종교가 전쟁을 지배하고 이끌어왔다는 건 잘못된 생각이라는 이야기를 하고 싶은 것 같다. 

차분하게 다시 읽어야하지 않을까 싶다. 휴가때 가지고 가서 읽고싶은 벽돌책이다. 



p17 파충류에게서 물려받은 핵심 뇌 위에 형성된 변연계는 새끼보호나 양육과 더불어 다른 개체와의 동맹 형성-생존 투쟁에서 매우 유용한 것이다-을 비롯한 온갖 종류의 새로운 행동을 자극했다

p21 우리가 오늘날 종교라고 부르는 것 대부분은 본래 우리 인간의 삶이 다른 생물을 죽이는 일에 의존한다는 비극적 사실을 인정하는 데 기반을 두고 있다

p39 주민 대다수에게 폭력을 행사하는 이런 잔인한 구조가 없었다면 인간은 진보를 가능하게 해준 예술과 과학을 발전시키지 못했을 것이다. 문명 자체가 계발되기 위해서는 유한계급이 필요했으며, 따라서 우리의 가장 훌륭한 성취는 수천 년 동안 착취당한 농민의 등 위에 세워진 셈이다. 수메르인이 문자를 발명한 목적이 사회 통제였다는 점도 우연이 아니다

p43 받아들이기 쉽지 않을지 모르지만 귀족은 대중을 최저 생활 수준에서 살도록 강제함으로써 인구 성장을 억제하여 인간의 진보를 가능하게 했다.

p50 그들은 곧 사라진 동물을 메우는 가장 쉬운 방법은 근처 마을이나 경쟁 부족의 가축을 훔치는 것임을 알았다. 따라서 싸움은 목축 경제에 필수적인 부분이 되었다

p51 “아니, 사실 그들은 피로 얻을 수도 있는 것을 힘든 노동의 땀으로 얻는 것이 비굴하고 어리석다고 생각한다” 그들은 도시의 귀족과 마찬가지로 노동을 경멸하여, 노동이 열등함의 표지이고 고귀한 삶과는 어울리지 않는다고 보았다

p63 종교에서나 정치에서나 충성을 바친다는 표시였다. 이들이 다 참석하지 않으면 축제는 거행될 수 없었고 영토는 위험에 빠지게 되었다. 전례는 요새만큼이나 도시의 안전에 중요했는데, 왕을 모욕하는 의식이 거행되기 바로 전날 민중은 전례를 통해 도시가 얼마나 악한지 상기하는 경험을 했다.

p68 종교적 신화는 구조적이고 군사적인 폭력을 승인해주기는 했지만 동시에 계속 문제 제기도 했다. 실제로 메소포타미아 문헌에는 회의주의의 흐름이 강하게 나타난다

p78 아리아인은 그 정도로 정착생활의 권태와 시시함을 증오하여 오직 약탈에서만 완전히 살아 있다는 느낌을 받았다

p83 이런 식으로 찬가들은 새롭게 계층화된 사회가 평등한 과거와의 위험한 결별이 아니라 우주 자체만큼이나 오래된 것이라고 주장했다. 아리아 사회는 이제 네 개의 사회 계급으로 나뉘었고, 이것이 훗날 발전하는 정교한 카스트 체제의 씨앗이 되었다. 각 계급에는 그 나름의 신성한 의무가 있었다

p96 아리아인은 늘 자신이 남보다 본래 우월하다고 생각해 왔다. 제의는 그들의 마음속에서 뿌리 깊은 특권 의식을 길렀고, 이것이 침략과 정복을 부추겼다. 그러나 우파니샤드는 모든 피조물의 본질인 아트만이 브라흐만과 동일하기 때문에 모든 존재는 똑같은 신성한 본성을 공유한다고 가르쳤다.

p99 요가는 자아를 체계적으로 공격하여 수행자의 정신에서 나를 지우고 “나는 최강이다! 나는 최고다!” 하는 전사의 당당한 자기주장을 무가치하게 만들었다

p106 더욱이 불교도와 자이나교는 실용주의자이자 현실주의자였다. 그들은 모두가 수도승이 될 것이라고 기대하지 않았기 때문에 재가 제자들에게 할 수 있는 만큼만 가르침을 따르라고 권했다. 이렇게 해서 이런 영성들은 주류에 진입했을 뿐 아니라 심지어 지배 계급에도 영향을 끼치기 시작했다

p107 기원전 321년 역시 수드라 출신인 또 다른 젊은 모험가 찬드라굽타 마우리아가 난다의 왕좌를 찬탈하여 마가다 왕국은 마우리아 제국이 되었다

p110 아소카의 딜레마는 문명 자체의 딜레마다. 사회가 발전하여 무기가 치명적이 될수록 폭력으로 세워지고 유지되는 제국은 역설적으로 평화를 지키는 가장 효과적인 수단이 된다. 제국의 폭력과 착취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우리가 오늘날 번영하는 민주주의의 표시를 찾듯이 간절하게 절대적 제국주의 군주제를 찾았다

p113 여기에는 제국-시의 용어로 말하자면 세계통치-이 평화에 필수적이라는 암묵적 가정이 있다. 시는 제국의 만행에는 용서가 없지만, 폭력적 세계에서 비폭력은 가능하지 않을 뿐 아니라 사실 힘사(’해’)를 깨칠수도 있다는 통렬한 인식을 드러낸다

p118 그러나 바가바드기타든 마하바라타든 전쟁과 평화의 문제에는 쉬운 답이 없다는 점을 일깨워준다. 탐욕과 전쟁을 자주 찬양한 것도 사실이지만, 인도의 신화와 제의는 동시에 사람들이 그 비극에 직면하는 것을 돕고, 심지어 정신에서 폭력성을 근절하는 방법을 고안하여 사람들이 전혀 폭력 없이 함께 살 길을 개척하기도 했다

p128 이렇게 해서 중국이라는 현실 국가의 체계적 폭력이 출어든 것은 아니었지만 천명은 중요한 종교적, 정치적 발전이었다. 비록 이론적이더라도 통치자가 백성에게 도덕적인 책임을 지고 백성에게 책무를 다하라고 가르쳤기 때문이다. 이 천명은 중국에서 계속 중요한 이상으로 남게 된다

p147 선한 사람을 이용하여 악한 사람을 다스리는 국가는 무질서에 오염되어 파멸에 이를 것이다. 상앙은 그렇게 주장했다. “악한 사람을 이용하여 선한 사람을 다스리는 국가는 늘 평화를 누리며 강해질 것이다”

p154 그들은 덕 있는 유가의 대안이 살아 있도록 유지하고 그것을 정부의 핵심에 자리 잡게 했지만, 자신들의 정책을 밀어붙일 위력이 늘 부족했다

p159 그러나 고고학적 기록은 이 이야기를 확인해주지 않는다. 여호수아에 묘사된 대량 파괴의 증거도 없고, 강력한 외적의 침략을 보여주는 흔적도 없다. 그러나 이 서사는 현대 역사학자들을 만족시켜주려고 쓴 것이 아니었다. 이것은 이스라엘이 이웃들과 구별되는 문화적 정체성을 만들어 나가는 것을 돕는 민족 서사시다

p181 이 모든 것이 너무나 새로운 일이어서 개혁가들은 이런 개혁을 정당화하기 위해 말 그대로 역사를 새로 써야만 했따. 그들은 장차 언젠가 히브리 성경이 될 왕립 문서보관서의 텍스트들을 엄청나게 편집하고 수정하기 시작했다

p185 키루스는 이전의 아시리아 사람들이나 바빌론 사람들과는 달리 새로운 신민을 모욕하거나 추방하는 대신, 그들의 성전을 파괴하고 신상을 모독하는 대신 완전히 새로운 정책을 발표했는데, 이것은 현재 대영박물관에 있는 키루스 실린더에 보존되어 있다

p186 기원전 522년 키루스의 아들 캄비세스가 죽은 뒤 페르시아 왕좌에 오른 다리우스 1세의 비문에서 우리는 모든 성공한 제국의 이데올로기에 되풀이해 나타날 세 가지 주제를 한꺼번에 볼 수 있다. 제국의 선과 그것에 반대하는 악한 자들을 대립시키는 이원론적 세계관, 통치자를 신의 대리자로 보는 선민 사상, 세상을 구한다는 사명.

p219 유대교는 바리새인의 지도자 요하난 벤자카이가 읶는 학자 덕분에 살아남았는데, 그는 성전 예배에 기초한 신앙을 책의 종교로 바꾸어놓았다

p224 북아프리카의 신학자 테르툴리아누스는 불평했다. “티베르강이 담에까지 올라오면, 나일강이 범람하여 들판을 덮지 않으면, 하늘이 비를 내리지 않으면, 지진이나 기근이나 역병이 발생하면, 바로 외치는 소리가 들린다. ‘기독교인을 사자에게’

p236 예수는 따르는 사람들에게 가진 것을 모두 가난한 사람에게 주라고 했지만 기독교인 황제는 엄청난 부를 누렸다. 하느님의 나라에서는 부자와 가난한 자가 같은 식탁에 앉는다고 했으나 콘스탄티누스는 예외적인 고귀한 상태에서 살았다

p242 주교들은 대부분 콘스탄티누스의 비위를 거스릴까 걱정하여 아타나시우스의 교의를 형식적으로 지지했지만 계속 전과 다름없이 설교했다. 니케아는 아무것도 해결하지 못했으며 아리우스 논쟁은 그 뒤로 60년을 더 끌었다

p256 그는 이교도 신전을 파괴하는 일의 의미를 알고 있었다. 황후 아일리아 플라킬라는 이미 로마에서 귀족 여자 무리를 이끌고 이교도 성지를 공격하여 이름을 날렸다. 388년 테오도시우스는 수사들에게 공격 허가를 내렸고, 수사들은 시리아의 마을 성지들을 역병처럼 공격했다. 또 현지 주교와 공모하여 유프라데스강변 칼리니쿰의 회당도 파괴했다

p269 7세기 초에 이르면 페르시아와 비잔티움 모두 제국주의적 지배를 위한 전쟁 때문에 망하게 된다. 참담한 역병 때문에 이미 허약해진 시리아는 궁핍해졌고 페르시아는 무정부 상태로 변해 변경 지대는 돌이킬 수 없이 훼손당했다.

p273 가주는 모두에게 돌아갈 만큼 물자가 충분하지 않을 지역에서 부를 재분배하는 잔인하지만 단순한 방법이었다

p277 큰 아랍인 부족은 둘이었고-아우스족과 카즈라즈족- 유대인 부족이 스물이었으며, 이들 모두가 늘 서로 싸웠다. 이런 상황에서 중립적 외부작인 무함마드는 중재자가 되었고, 돕는 자들과 이주자들이 모두 하나가 되어 적과 싸우는 하나의 거대 부족-개별적인 사람들은 사라지는 하나의 공동체-으로 통합하는 합의를 만들어낸다

p281 이슬람의 내어줌은 우리의 내재적 이기심에 맞선 끊임없는 지하드를 요구한다. 이것은 때로는 싸움을 포함하지만 시련을 용감하게 견디고 곤경에 빠진 가난한 사람들에게 베푸는 것 또한 지하드로 묘사된다.

p304 무하람(이슬람력 첫째 달)의 10일(아슈라), 이맘 후사인의 죽음을 추도하는 날에 시아파는 공개적으로 그의 피살을 애도하며 거리를 행진했고, 주류 무슬림 생활의 부패에 영원히 반대한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 울며 가슴을 쳤다

p309 카롤링거 왕조의 전쟁은 하느님의 승인을 받은 성전으로 제시되었으며, 그들은 자신의 왕조를 신이스라엘이라고 불렀다. 이렇게 그들의 군사 원정에는 분명히 종교적 차원이 있었지만 물질적 이익이 그것만큼 중요했다. 732년 카롤루스 마르텔은 투르를 약탈하러 가던 무슬림 군대를 물리쳤지만, 승리를 거둔 뒤 즉시 프랑키아 남부의 기독교 공동체들을 무슬림이 그랬다고 생각해도 좋을 만큼 철저하게 약탈했다

p312 기도로 악마의 권세와 싸우는 수사들은 이 세계의 안보에 필수적이었다. 귀족이 하느님을 섬기는 데에는 두 가지 길이 있었다. 싸움과 기도였다

p314 프랑스 역사가 마르크 블로크가 설명한 대로, 전쟁은 기사에게 명예와 영웅주의적 태도를 가져다주는 것 외에 “어쩌면 가장 큰 이윤의 원천으로서 귀족의 주요 산업”이었으며, 따라서 자산이 부족한 사람들에게 평화가 찾아오는 것은 “위신의 비참한 상실만이 아니라 경제적 위기”가 될 수도 있었다.

p321 한 유대인 연대기 기록자는 십자군끼리 하는 말을 들었다. “보라, 여기에 메시아를 십자가에 달아 죽인 유대인이 있는데, 우리는 이스마엘의 자손에게 복수를 하러 가고 있다. 먼저 유대인에게 복수를 하자”

p326 더 죽일 사람이 남지 않자 십자군은 ‘부활의 교회’로 행진하며 찬송가를 불렀다. 그들의 뺨에는 기쁨의 눈물이 흘러내렸다. ‘그리스도의 무덤’ 옆에서는 부활절 전례문을 노래했다

p333 살라딘은 십자군과 마찬가지로 가장 큰 적은 내부에 있다는 말이 자신의 적에게도 해당할 수 있다는 사실을 알았다. 결국 살라딘이 군사적 성공을 거둔 것은 프랑크족 내부의 만성적인 다툼과 서쪽에서 새로 온 사람들이 지역 정치를 이해하지 못하고 내세우는 매파 정책 덕분이었다.

p349 이런 기사도 규약을 지키는 왕들은 자신들도 교회로부터 독립하여 하느님과 직접 연결된다고 믿었으며, 13세기에 이르면 그들 가운데 일부는 교황의 우위에 도전할 만큼 힘을 키웠다고 믿었다.

p350 그들은 교황 군주제가 내세운 십자군 원정이라는 이상의 전형이었기 때문에 사라져야 했다. 수사들은 남색, 식인, 악마 숭배를 인정할 때까지 고문을 당했다. 다수는 이런 자백을 거부하고 화형대에 섰다. 필리프의 무자비함을 보면 왕권이 인노켄티우스 3세의 교황 군주제보다 평화로운 것이 되리라고 생각할 수가 없었다

p361 신학자인 프란시스코 데 비토리아는 콩키스타도르에게는 “적을 그들의 영토에서 몰아내고 그들의 재산을 약탈할” 권리가 없다고 말했다. 그러나 르네상스 인본주의자들은 식민지 기획에 깊이 공감했다.

p371 근대 이전의 신앙이 공동체의 신성함-상가, 움마, 그리스도의 몸-을 강조한 반면 루터에게 종교란 완전히 개인적이고 사적인 문제였다

p375 잉글랜드의 헨리 8세와 엘리자베스 1세는 모두 카톨릭교도를 배교자가 아니라 국가의 반역자로 보고 박해했다.

p382 프로테스탄트 제후들은 몰수한 카톨릭회 재산을 소유하는 것이 허락되었고, 이후 유럽에서는 지역 통치자의 종교적 충성이 신민의 신앙을 결정했다. 훗날 이 원칙은 “영토에 속한 자는 종교도 영토에 따라야 한다”는 격언에 담겼다.

p392 스웨덴이 30년 전쟁에 참여하도록 배후에서 조종한 총리 악셀 옥센셰르나는 스웨덴 추밀원을 상대로 이 전쟁은 “종교의 전쟁이라기보다는 공적인 일을 수행하는 문제로서 여기에 종교도 포함된다”고 말했다.

p371 근대 이전의 신앙이 공동체의 신성함-상가, 움마, 그리스도의 몸-을 강조한 반면 루터에게 종교란 완전히 개인적이고 사적인 문제였다.

p375 잉글랜드의 헨리 8세와 엘리자베스 1세는 모두 카톨릭교도를 배교자가 아니라 국가의 반역자로 보고 박해했다. 토마스 모어는 헨리 8세의 대법관이었을 때 정치적으로 위험한 이교도에게 가혹한 판결을 내렸지만, 그 자신도 헨리를 성공회 수장으로 섬기는 지상권 승인 선서를 거부하여 처형되고 만다

p382 프로테스탄트 제후들은 몰수한 카톨릭교회 재산을 소유하는 것이 허락되었고, 이후 유럽에서는 지역 통치자의 종교적 충성이 신민의 신앙을 결정했다. 훗날 이 원칙은 영토에 속한 자는 종교도 영토에 따라야 한다라는 격언에 담겼다.

p392 스웨덴이 30년 전쟁에 참여하도록 배후에서 조종한 총리 악셀 옥센셰르나는 스웨덴 추밀원을 상대로 이 전쟁은 “종교의 문제라기보다는 공적인 일을 수행하는 문제로서 여기에 종교도 포함된다”고 말했다.

p400 하느님이 텅 빈 세상을 식민지로 만드 ㄴ아담과 노아의 자손에게 원래의 주민에게 사거나 허가를 구하지 않고도 비어 있는 자리에 들어가 살 자유를 주었다는 것을 보여준 뒤 바로 다음 주장으로 자연스럽게 나아갔다. 비어 있는 땅에서는 그 땅을 소유하는 자, 그곳에 문화와 농업을 전해주는 자가 곧 그 땅의 권리를 가지는 것이 자연의 원리다

p410 1730년대와 1740년대 대각성운동은 미국의 첫 대중운동이었다. 이 운동은 많은 보통 사람들에게 역사의 경로를 바꿀 수 있는 전국적인 사건에 참여하는 첫 경험을 안겨주었다. 많은 미국인이 이후 독립 혁명 지도자들의 세속적 경향에서는 쉽게 자신과의 관련성을 찾을 수 없지만, 무아경에 빠지게 되는 부흥회는 그들이 자유라고 부르는 행복한 상태의 기억을 남겨주었다.

p429 우리는 프랑스 혁명을 실패로 보는 것이 아니라 긴 과정의 폭발적 출발로 보아야 할지도 모른다. 수천 년의 전제 정치를 뒤집은 그런 엄청난 사회적, 정치적 변화는 하룻밤 새에 이루어질 수 없다.

p446 남부의 설교자 제임스 헨리손힐은 노예제가 노동을 조직하는 선하고 자비로운 방법이라고 주장한 반면, 뉴욕의 헨리 위드 비처는 노예제가 나라가 저지른 죄의 가장 놀랍고 가장 비옥한 원인이라고 주장했다.

p458 내가 연구한 운동은 하나도 빠짐없이 그 뿌리에 공포가 있었는데, 바로 현대 사회가 자신의 신앙을 파괴하려 한다는 확신이다.

p466 간디의 영혼의 힘이 실제로 세상에서 유효한 현실이 되기 전에는 개인이나 민족 양쪽에 내재한 타고난 공격성이 오늘날 우리가 보는 것처럼 짓밟고 부수고 학살하고 태우고 오염시킨다. 간디는 자신이 폭력을 버림으로써 싸움에 의지한 사람들만큼이나 많은 생명의 파괴를 가져왔다는 사실을 깨닫게 될지도 모른다

p477 그는 프랑스 기술자들에게 수에즈 운하 건설을 위탁했고, 철로를 약 1,450킬로미터 깔았고, 이제까지 경작되지 않던 땅 약 4,050제곱킬로미터 이상에 관개를 했고, 남녀 아이를 위한 근대적 학교를 세웠고, 카이로를 우아한 근대도시로 바꾸었다. 그 과정에서 나라는 파산하여 결국 1882년에 영국인이 필요로 하던 구실을 만들어주었다. 그들은 주주의 이익을 보호한다는 명목으로 군대를 보내 이집트를 점령했다

p479 세속주의는 그들의 국민에게 해방이나 평화로 다가오지 않았다. 오히려 세속화를 추진하는 지배자들이 익숙한 제도를 파괴하여 알아볼 수 없는 세상을 만들어놓아 결과적으로 그들을 공포에 떨게 했다

p482 서양에서는 종교의 폭력을 제어하기 위해 세속 민족 국가가 세워졌다. 중동의 수많은 사람들에게 세속적 민족주의는 그들의 닺줄이었던 영적 지원을 박탈하는 피에 굶주린 파괴적 힘이었다

p485 형제단은 완벽하지 않았다. 이들은 반지성적으로 흐르는 경향이 있었고, 그들의 발언은 종종 방어적이고 독선적이었으며, 서양관은 식민지 경험으로 왜곡되어 있었고, 지도자들은 반대를 용납하지 않았다. 가장 심각한 문제는 이곳에서 테러리스트 분파가 발전해 나왔다는 것이다.

p491 국제법이 전쟁 중에 정복한 땅의 영구 점유를 금지했는데도 이스라엘의 유엔 대표 압바 에반은 예루살렘이 “모든 정치적이고 세속적인 고려를 넘어 그 위에, 그 앞과 두에 놓여있다”고 주장했다

p493 고대 이스라엘은 맨 처음부터 국가 폭력을 수상쩍게 보았다. 그런데 이제 쿠크주의자들은 그것에 최고의 지지를 보내고 있었다. 민족 국가가 일단 지고의 가치가 되면 액턴 경이 예측했듯이, 국가가 할 수 있는 일에는 한계가 없다. 말 그대로 무엇이든 가능하다

p498 서양인은 외향적이고 군중의 비위를 맞추는 정치가에게 익숙하기에 호메이니의 호소력을 이해하기 힘들지만 이란인은 그의 과묵한 태도, 내면을 바라보는듯한 눈길, 단조로운 연설이 감각을 완전히 통제한 정신 맑은 신비주의자의 표시라고 인정했다

p504 그날 저녁 카터는 캠프데이비드에서 샤에게 전화를 하여 지지를 약속했고, 백악관은 인명 손실을 유감으로 여기면서도 이란과의 특별한 관계를 재확인했다. 미국 혁명가들이 쟁취한 자유와 독립은 모두를 위한 것이 아닌 게 분명했다

p520 그런 과점을 지닌 다수는, 놀라운 일이 아니지만, 스스로 비합리성의 전형이나 다름없다고 여기는 종교가 폭력의 궁극적 원인이라고 생각한다. 가장 저명한 예가 리처드 도킨스인데, 그는 “오직 종교적 믿음만이 다른 때에는 멀쩡하고 품위 있는 사람들에게서 그런 완전한 광기를 일으킬 만한 강한 힘이 있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이런 위험하고 과도한 단순화는 종교와 테러리즘 양쪽을 오해하는 데서 비롯된다.

p527 테러리즘은 이슬람 세계에서 식민지 권력이 국가로 설정해놓은 경계가 민족의 경계와 일치하지 않을 때 자주 발생했다

p539 유대주의에는 여러 메시지가 있는 것이 아니다. 오직 한 가지뿐이다. 하느님은 그저 유대인이 “이 땅에 와서 유대인 국가를 건설하기”를 바란다는 것이다. 이스라엘은 다른 모든 나라와 분리되어 거룩한 나라가 되라는 명령을 받았기에 “하느님은 우리가 고립되어 우리끼리 이 땅에 살면서 이질적인 것과 가능한한 접촉하지 ㅇ낳기를 바란다”

p569 이슬람에 대한 상투적 관점과 유럽의 입구에 이슬람 국가가 생길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은 당연히 서양이 개입을 머뭇거리는 요인으로 작용했을 것이다. 자신들이 방어벽이라는 세르비아의 수사는 일부 유럽인과 미국인에게 그리 나쁘지 않게 보였을 것이다. 그럼에도 1995년 8월 북대서양조약기구가 마침내 개입을 하여 보스니아의 세르비아 거점들에 연달아 공습을 감행했으며, 이 곳읍으로 마침내 이 비극적 갈등은 끝이 났다

p589 니얼 퍼거슨 같은 신제국주의 지식인들의 응원을 받은 부시 정권은 해방을 목적으로 삼아 식민주의적 침공과 점령 방법을 이용할 수 있다고 믿었다. 미국은 강제로 이라크를 자유 세계 경제에 편입하려 하고, 자유주의적이고 민주적인 친서방 아랍 국가, 즉 이스라엘을 지지하고 시장 자본주의를 포용하는 동시에 미국에 군사 기지와 방대한 유전에 접근할 권한을 제공하는 국가를 창조하여 중동의 정치를 바꾸려 한다

p593 일부 자원자들은 신임을 얻고 중요한 작전 무대로 파견도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알카에다 지도부를 찾아 나서기도 하지만 파키스탄의 훈련자들은 그들을 고향으로 보내 서양 국가들의 불안정을 유도하는 쪽을 더 좋아하는 듯하다

p595 미국 정부는 공격 이후에 철저한 평가를 수행한다고 주장하지만, 한 번도 사과하지 않았고 피해 가족에게 보상을 하지 않았으며, 심지어 일어난 일을 자국민 앞에서 인정하지도 않았다

p597 우리는 지금까지 종교가 날씨와 마찬가지로 아주 많은 일을 하는 것을 보았다. 종교에 단일하고 변함없는 고유의 폭력적 본질이 있다는 주장은 부정확하다. 똑같은 종교적 믿음과 관행이 완전히 정반대의 행동 경로의 영감이 되기도 했다

p598 사람들이 종교가 다른 어떤 제도보다 많은 전쟁과 억압과 고통에 책임이 있다고 주장할 때 우리는 물어야 한다. 무엇보다 많은가?

p605 서양에서 세속주의는 이제 우리 정체성의 일부다. 이것은 그동안 유익했다. 특히 종교가 정부와 긴밀하게 결합하면 신앙 전통이 심하게 훼손될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세속주의에도 그 나름의 폭력이 있었다. 혁명 프랑스는 강요 강압 유혈에 의해 세속화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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