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상이 고고학, 나 혼자 강원도 여행 일상이 고고학 시리즈 7
황윤 지음 / 책읽는고양이 / 2022년 10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 나 혼자 강원도 여행

 : 황윤

 : 책읽는 고양이

읽은기간 : 2023/01/05 -2023/01/11


대중교통으로 답사를 다니는 새로운 여행방법을 제안한 황윤님의 새책을 읽었다.

이번에는 강원도다.

나에게 강원도는 관광지일 뿐인데 이 책을 읽어보니 생각보다 역사적 유적지가 많았다. 

강릉 김씨의 시조 김주원님을 위시하여 신라가 강원도에 어떤 힘을 가지고 있었는지, 헌화가의 주인공 수로부인 이야기, 이사부 이야기, 마지막으로 마의 태자에 대한 이야기까지...

스토리텔링을 삼아야 할 게 너무나 많았다.

이런 역사들을 어떻게 이렇게 꿰차고 있지? 하는 생각이 들었다.

나의문화유산 답사기 이후로 재미있게 읽는 답사기(여행기?)다.

이번에도 아주 좋았다. 


p24 여기서 한 가지 알 수 있는 것은 통일신라 시기에도 왕릉을 만들 때 음과 양을 따지는 등 조선 왕릉 조성 때 풍수지리처럼 일정한 기준이 있었다는 점이다. 결국 토의 끝에 사찰이 옮겨지고 그곳에 원성왕릉이 조성된다.

p27 통일신라 시기 왕릉을 조성할 때 관련 관청에서 의견교류 —> 좋은 위치 선정 —> 땅 구입 —> 봉분 조성 —> 노동력을 동원하여 묘역 정리 —> 백성을 이주시켜 능 관리라는 엄격한 순서가 있었음을 보여준다.

p41 한반도 역사를 보니, 왕위 계승권 1위임에도 원성왕이 권력을 잡자 조용히 물러난 김주원이 있었는데, 지금의 조선은 이미 왕이 된 조카를 물러나게 하고 삼촌인 수양대군이 왕이 되다니, 안타깝다는 의미였다

p63 강릉에 가면 명주가의 여주인공이 물고기를 통해 서생에게 편지를 보낸 연못 자리가 정말로 존재한다. 그리고 1930년 그 장소에 월화정이라는 정각이 세워졌다.

p85 세 개의 기록을 종합해보면 법흥왕은 520년에 법률 반포와 더불어 관복 위계를 처음 제정하였고, 521년에는 양나라로 사신을 보냈다.

p100 법흥왕까지만 해도 신라 왕은 신라를 대표하는 권력자이면서도 하나의 부에 소속된 이중적 지위였으나, 다음 진흥왕에 이르자 신라 왕은 경주 6부를 초월한 존재로서 인식된 것이다.

p119 백제, 고구려 멸망 이후에도 세계 최강국이었던 당나라까지 사회 지도층인 진골들이 죽음을 각오하고 싸웠기에 최종 승리를 이끌게 된다. 아무래도 이 시기가 한국사에서 노블레스 오블리주 정신이 가장 높았던 시대가 아니었을까?

p130 관동팔경 중 하나에 꼽힐 정도니까. 삼척의 죽서루 이외에 고성의 청간정, 고성의 삼일포, 강릉의 경포대, 양양의 낙산사, 울진의 망양정, 통천의 총석정, 평해의 월송정 등이 그것이다.

p140 삼척을 배경으로 한 헌화가라는 제목의 향가로 단순히 한자만 봐서는 해석이 거의 불가능하다. 겉으로 보기에는 일반 한문처럼 보이지만 향찰로서 뜻으로 읽는 글자와 음으로 읽는 글자가 섞여있기 때문.

p169 촛대바위와 능파대는 1788년, 김홍도가 정조의 명에 따라 금강산과 관동팔경 등 60여곳을 그린 화첩인 금강사군첩에 등장하는 것으로 잘 알려져 있다.

p175 수로 부인이 어떤 장소에서 기이한 일을 경험하였는지는 명확하게 기록되어 있지 않으므로 이사부때와 마찬가지로 여러 주장이 있지만 말이지. 그 결과 수로 부인 관련한 장소 역시 삼척에서 이사부처럼 여러 곳에 조성하였다.

p183 신라의 무력과 행정력을 통한 평양 이남 통치는 676년 이후 쭉 이어졌으나, 이를 국제적으로 인정받은 시점은 735년에 이르러 완료되었음을 의미했다.

p187 수로부인은 남편이 김춘추 후손으로서 뼈대 높은 진골 귀족이며, 딸과 손녀를 경덕왕과 결혼시킨 데다, 아들으 ㄴ당나라와의 외교에서 신라에 큰 열매를 가져왔고, 손자는 신라 왕의 외삼촌으로서 신라 최고의 권력자로 올라서기에 이른다. 뿐만 아니라 외증손자는 신라 왕인 혜공왕이었다. 말 그대로 8세기 시점 최고의 진골 가문이 된 것이다.

p194 제왕운기는 다른 역사서에 비해 내용이 간략하여 누구나 쉽게 이해할 수 있으며, 이는 이승휴가 노래처럼 쉽게 따라 부르며 역사를 공부할 수 있도록 구성한 것이다.

p197 한국 사찰 역사를 따라가다보면 7세기 활동한 자장, 의상, 원효 세 분이 창건했다는 내용이 유독 많이 남아 있다. 이에 학자들은 해당 내용 대부분이 후대에 사찰 역사가 오래되고 높은 고승이 만들었음을 강조하기 위하여 슬며시 넣은 이야기로 판단한다.

p204 글자는 마치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거울 글씨처럼 거꾸로 뒤집혀 새겨져 있었으며, 한자 역시 이두 문자로서 우리말 어순에 맞추어 표기했다.

p242 당시 내가 초당동 유적에 관심을 보인 이유는 사실 간단하다. 이곳에서 다름 아닌 5세기 신라 금동관이 발견되었으니까. 신석기, 청동기, 철기 시대, 삼국 시대에 이르는 주거지와 고분 유적이 함께하는 초당동 유적지를 발굴하며 찾아낸 성과였다.

p276 별연사고적기는 본래 신라 시대부터 이어오던 명주가 스토리에 새로운 살을 붙여 지역의 명사인 김주원 가계를 설명하는 이야기로 변모시킨 결과물이었다.

p285 공신 가문 가계일지라도 고려 이전의 조상에 대해서는 올바른 기록이 아닐 가능성이 존재하는 것이다. 이를 미루어볼 때 고려 시대 역시 당시 분위기상 크게 터치하지 않는 신라 시대 선조에 대해서는 조선 시대처럼 윤색과 포장이 어느 정도 일어났음을 알 수 있다.

p293 태대각간까지 오른 이는 신라 역사상 단 두 명밖에 없었으니 김유신과 김인문이 그 주인공. 즉 김유신과 김인문은 당나라 공과 신라 태대각간을 함께 얻은 신하로서 신라 역사상 가장 최고의 위치까지 오른 인물이었다.

p295 조선 시대 사람들이 족보로 조상의 가계를 정리할 때 근거로 본 기록 역시 고려 시대 묘지명처럼 고려 기준으로 적힌 기록이 대부분이었다. 덕분에 조상이 신라인임에도 고려 관직과 작위로 가득 포장될 수밖에 없었던 것

p330 당시 경주로 가서 왕사가 된다는 것은 어마어마한 권위와 명예를 얻는 일임에도 불구하고 이를 과감히 거절하고 강릉에만 머문 그에 대한 존경심은 그가 열반한 뒤로도 강릉에서 쭉 이어졌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