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노래는 왜 금지곡이 되었을까 - 한 시대를 풍미했던 금지곡의 항변
이영훈 지음 / 휴앤스토리 / 2021년 8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 그 노래는 왜 금지곡이 되었을까?

 : 이영훈

 : 후앤스토리

 : 2021/11/01 - 2021/11/08


금지곡에 대한 글이라기보다는 금지곡을 부른 가수에 대한 글이다.

금지곡이 왜 되었는지에 대해 할 이야기가 많지는 않을 것이다.

대부분 왜색, 불온 등의 딱지가 붙은건데 정부가 자의적으로 판단을 내리다보니 다른 이유로 해석되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그만큼 이승만, 박정희, 전두환이 우리나라에 남긴 죄악이 크다.

얼마나 많은 사람이 이런 독재정권 하에서 고통을 받고 어려움을 겪었는지 굳이 책을 읽지 않아도 느껴진다.

이 책에는 정말 유명한 가수들이 많이 나온다. 

오래된 가수들은 사실 잘 모르지만, 이름을 들어본 사람들이 정말 많다.

스타로서 살아가는 가수들이지만 일상이 평안한 사람은 또 그렇게 많아보이지 않는다

사회에 특별한 기여를 하지는 못하지만 조용하게 살아가는 내 삶이 더 멋지지 않나 하는 생각이 든다.

재미있게 잘 읽었다. 


p26 이미자는 동백아가씨 외에도 노래가 히트할 때마다 줄줄이 금지곡 낙인을 받자 가수를 그만두려고 했을 만큼 충격을 받았다

p72 별은 별이어야 합니다. 별은 구름이 조금만 끼어도 안 보여야 합니다. 아무 데서나 볼 수 있는 별은 별이 아닙니다. 별은 하늘에서 반짝반짝 스스로 빛나야 합니다. 빛나려면 항상 닦아야 합니다.

p101 율곡 이이는 인생의 3대 불행 중 하나로 소년등과, 즉 초년 출세를 꼽았다. 젊은 날의 성공이 온전히 자기 실력으로 이루어졌다고 자만하게 만들어 인생의 독이 된다는 지론이다. 김연자는 달랐다. 초년에 크게 성공했지만 자만하지 않았다. 때론 좌절했지만 포기하지 않았다.

p114 그들의 첫 독집 앨범은 1970년 1월 발매되었다. 번안곡 12곡이 수록된 트윈폴리오 리사이틀이라는 앨범이었다. 결과적으로 첫 독집은 은퇴기념 앨범이 되고 말았다. 팀은 해체되었지만 트윈폴리오의 인기는 식을 줄 몰랐다. 공식 활동 기간은 1년 10개월에 불과한데도 사람들의 머릿속에는 아주 오랫동안 활동한 것으로 기억되고 있다

p131 대지를 여자에 비유하는데 데스밸리를 보는 순간 여자의 나신을 보는 듯했죠. 뼈다귀만 남은 산이죠. 청결하고 순수하고 불덩이 같았어요

p168 광기까지 내비치는 김추자의 춤사위와 파격적인 의상은 40년이 지난 요즘 연예판에서도 전위적 시도로 꼽힐 만하다. 끓어오르는듯 한을 내뱉다 어느덧 엉덩이와 어깨를 들썩거리게 하는 독특한 창법은 동서양 어디에서도 듣도 보도 못한 스타일이었다.

p192 무에서, 대한민국의 남진이라는 이름을 아는 사람은 내 식구밖에 없었잖아요. 대한민국에서 남진이라는 이름을 나에게 준 노래가 울려고 내가 왔나이기 때문에 나에게는 가장 큰 대박곡이죠'

p198 성격상 저는 주변 사람들과 소통하고 어울려야 직성이 풀리는 스타일이에요. 그러니 저는 신비주의를 하고 싶어도 못해요. 제 기준으로 보면 사실 부럽기보다는 안쓰럽죠. 이웃과 두루 어울려 정답게 살아도 늘 아쉬운 게 인생인데 삶 자체가 고달프지 않을까요

p241 나라님의 병정이 되자라며 조선의 젊은이들을 전쟁터 총알받이로 내몰며, 2차대전 전점 일왕 히로히토에게 충성한 조명암은 해방이 되자 월북해서는 625 전범 김일성에게 충성했다

p251 왜가리라는 주장의 근거가 높은 것은 이 노래의 2절을 들어보면 더욱 분명히 드러난다. 2절은 아 뜸북새 슬피 우니 가을인가요로 시작한다. 뜸북새 슬피 우니의 뜸북새가 새 이름이기에 그에 대응되는 으악새 슬피 우니의 으악새 또한 새 이름인 것이 자연스럽지 않을까

p259 여수야화는 노래가 나온 지 얼마 안 지난 1949년 9월 1일에 대한민국 최초의 금지곡으로 지정되었다.

p268 이른바 손가락총이 등장한다. 부역자를 색출하기 위해 학교운동장에 모인 사람들의 생명을 좌우하는 것은 손가락질이었다. 이 과정에서 반란군과는 무관한 민간인 상당수가 희생되었다.

p294 내가 학전 배우들한테도 유난히 강조했던 게, 배우는 '모국어를 지키는 최후의 보루'라는 점이었다

p301 김광석 콘서트가 예상 밖의 큰 호응을 거두면서 땡볕 아래 대로변까지 관객들이 줄을 섰다. 김광석은 "나는 벽에 붙어서 노래해도 좋으니 최대한 많이 들이자"라고 고집해서 복도 문짝까지 떼어내고 관객을 받았다

p327 1994년 4월 위헌심판제청과 5월 위헌제청 결정 판결을 거쳐 헌법재판소에서 위헌 여부를 다루게 됐다. 이후 정태춘 등이 앞장서 대중들의 여론을 이끌었다. 결국 1996년 10월 31일 헌법재판소 재판관 전원일치로 위헌판결이 내려진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