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인 이야기 1 - 전쟁과 바다 일본인 이야기 1
김시덕 지음 / 메디치미디어 / 2019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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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 일본인 이야기1

작가 : 김시덕

출판사 : 메디치 미디어

읽은날 : 2021/01/19 - 2021/02/03


옆나라 일본과 중국은 크게 관심이 없다.

어려서 유럽과 서양이 최고라는 교육을 받아서인지 유럽에 대해서는 관심이 많은데 일본은 관심이 안간다. 

좋다, 싫다가 아니라 그냥 관심 자체가 없는 나라다.

이 책을 일본이라는 나라에 대해서 새롭게 많은 걸 배웠다.

우리나라와는 다르게 일본은 꾸준히 서양과 교류가 있었다. 완전히 개방한 것은 아니지만 스페인, 네델란드, 영국과 교류하며 중국외에도 큰 문명권이 있다는 걸 알고 있었고, 그 나라들을 통해 무역도 하고 문물도 받아들인다. 

임진왜란때 선봉장인 소서행장이 카톨릭 신자였다는 건 알고 있었지만 이렇게나 많은 카톨릭 신자들이 있었고, 탄압을 받는 와중에서도 신자들이 꾸준이 늘었었다는 건 이 책을 통해서 처음 알았다.

우리나라야 중국을 통해서만 문명을 받아들였지만, 일본은 중국 뿐만이 아니라 유럽 심지어 아메리카에 대한 지식도 이미 가지고 있었다.

쇄국정치를 써도 우리나라와는 달랐구나 하는 걸 깨닫는다...

지금이야 망해가고 있는 나라지만 결코 만만히 볼 나라는 아니라는 걸 다시금 깨닫는다. 



2% 저는 이 책에서 전국시대의 통일, 유럽과의 관계 설정, 조선 문제 이 세 가지를 가능한 한 비슷한 분량으로 다루면서, 세 가지 포인트를 되도록 유기적으로 엮어서 이야기하려고 노력했습니다

3% 현지에서 무역할 만하다고 생각되면 무역을 하고, 자신들에게 유리한 방향으로 무역이 이루어지지 않는다고 판단되면 거리낌 없이 군사력을 동원해서 뜻을 관철해 나갔습니다

3% 그러한 네델란드 동인도회사의 태도를 상징하는 것이 바로 이 "전투 없이 거래 없다"라는 캐치프레이즈입니다

7% 재능만 있으면 본국에서 차별받느니 외국에서 대접받으면서 살겠다는 것과 같은 이치죠. 도자기 굽는 재능이 있던 조선인 도공들이 그러했고, 일본어를 가르칠 능력이 있던 선원 덴베이가 그러했습니다

9%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이번에는 조선인 노예가 일본인 노예들이 수출되던 것과 마찬가지 방식으로 부산과 일본을 거쳐 전 세계로 수출되었습니다

10% 한마디로 일본은 실력과 운에 의해 간신히 유럽의 군사적 진출을 막을 수 있었습니다. 그중에서도 실력보다 행운에 의해서 식민지가 되지 않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14% 중화 문명이나 인도 문명과는 전혀 다른 성격을 띤 유럽 문명을 정면으로 상대하면서, 일본인들은 중화 문명 이외에도 또 하나의 거대하고 독립적인 세계관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배우게 됩니다

14% 오다 노부나가는 유럽인 선교사가 선물한 지구의를 돌려보면서 세계 정복을 꿈꾸었습니다. 그 꿈을 이어받아 명나라와 인도까지 정복하려 한 것이 토요토미 히데요시였고, 그 꿈을 포기하고 일본 국내의 안정을 꾀한 것이 도쿠가와 이에야스였습니다

16% 왜왕 스스로 백제까지 지배하고 있다는 주장을 했다는 데서 이 호칭이 과장되어 있음을 알 수 있고, 백제만 뺀 호칭을 남조 측이 인정해주었다는 데서 당시 백제가 남조 측에 무시할 수 없는 존재였음을 짐작하게 합니다

19%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쇼군으로 일본을 통치하던 시절에는, 일본 안의 덴노나 쇼군보다 바다 바깥 로마에 살고 있는 교황에게 충성하는 주민이 수십만 명이나 존재하고 있었습니다

24% 센주로 선생이 <요안인장서>에 포함된 조선 의학 서적이 지니는 중요성을 강조하고 있듯이 임진왜란을 전후한 시기에 조선의 의학과 문화, 특히 조선 책이 일본에 준 영향은 이제껏 언급되어온 것 이상으로 컸습니다

25% 시장경제가 발전하면 자본주의가 발전하고 기계와 증기기관을 이용한 산업혁명으로 이어지리라는 보장은 어디에도 없다는 것입니다

26% 비숍은 한반도의 피지배민들이 가난했던 것은 그들의 민족성이 게을러서가 아니라 국가 시스템이 잘못되어 있었기 때문이라고 말합니다

28% 포르투갈이 동남아시아 해상 항로의 핵심 지역이자 이슬람 국가인 말라카 왕국을 점령합니다. 이로부터 동남아시아 역사에 인도, 중국, 이슬람에 이어 유럽이라는 또 하나의 플레이어가 등장하게 됩니다

28% 처음에 이들은 동중국해 연안 지역에서도 군사력으로 자신들의 뜻을 관철시키려 했지만, 명나라와 일본이 지닌 군사력에 눌려 무역에 치중하는 쪽으로 방향을 바꿀 수 밖에 없었습니다

30% 기계 제작은 외국에서 건너온 책을 본다고 되는 게 아니라, 실제로 외국에서 그 기계르 ㄹ만들 줄 아는 사람이 건너와서 지도해주어야 한다고 말입니다

32% 중세 동중국해와 남중국해 연안 지역에서 유럽이 상업, 군사적으로 접근했을 때 명과 일본은 군사적 도전에는 대처하면서도 상업적인 이익은 취하는 방향을 채택한 반면, 조선은 능동적, 수동적 측면에서 일체의 교류를 거부했던 것입니다

34%제가 받은 충격이 어떤 것이냐 하면, 조선 후기 학술 연구의 제일선에 서 있는 한문학자 정민 선생이 "정약용은 조선에서 자체적으로 발생한 카톨릭 교단의 신부였다"라는 사실을 밝혀냈을 때 받은 충격과 같은 정도였습니다

35% 이이화 선생은 민란의 시대에서 양반 출신 의병장 유인석이 동학 출신 의병들을 골라내서 처형한 것을 지적하며 "이것은 초기 의병의 이율배반성을 단적으로 드러낸 사건"이라고 논평합니다

37% 우연이 찾아오기를 끈질기게 기다렸다가 책략을 부려서 이를 행운으로 바꾸는 것에 주저함이 없는 것. 제가 16-17세기 일본 역사에서 가장 인상적으로 느끼는 것이 이러한 모습들입니다

42% 신분에 상관없이 불교 세력은 오다 노부나가를 괴롭히고, 오다 노부나가는 카톨릭 세력을 보호하고, 역시 신분에 상관없이 카톨릭 세력은 절과 산사를 파괴하는, 그야말로 절과 아군을 구분하기 힘들 정도로 서로 물고 물리는 종교적 난맥상이 이 시기 일본에서 펼쳐졌습니다

44% 유력한 적장들의 잇따른 갑작스러운 죽음, 적들의 분열을 유도하는 책략, 이른바 우연을 행운으로 바꾸고 필요할 때에는 주저 없이 책략을 펼친 것이 노부나가가 전국시대의 승자가 된 가장 중요한 요인이라 할 수 있겠습니다

53% 규슈 곳곳이 예수회령으로 되어 있고 카톨릭 신자들이 절과 신사를 파괴하고 있으며, 포르투갈 상인들이 일본인 노예들을 구입해서 나라 바깥으로 데려라고, 카톨릭 다이묘들이 자기 영지 내의 주민들을 강제 개종시키는 모습을 보고 충격을 받았기 때문일 것으로 짐작됩니다

58% 1596년 양측이 오사카성에서 면담할 때에도 자신이 명나라의 책봉을 받는 것에는 이의가 없었지만, 한반도 남부르 ㄹ할양해달라는 요구가 받아들여지지 ㅇ낳아 정유재란을 일으킨 것으로 추정하고 있습니다

62% 말라카와 일본은 모두 자체적으로 잘 무장되어 있었지만, 두 나라가 처한 지정학적 위치가 달랐기 때문에 말라카는 식민지가 되고 일본은 살아남은 것입니다

64% 정유재란의 발발입니다. 이 전쟁의 목적은 명 정복이 아니라 이미 일본의 영토라고 생각했던 한반도 남부 지역에 대한 지배권을 무력으로 확보하여 명과 조선으로부터 인정받는 것이었습니다

65% 히데요시와 같은 인생을 산 사람은 자기가 시작한 거짓말을 스스로 믿고, 그에 따라 더 큰 거짓말을 만들어 이를 실행에 옮기는 것이 가능한 것 같습니다

68% 마치 한국의 어떤 사람들이 사업에 필요한 인맥을 마련하기 위해 프로테스탄트 교회에 다니듯이, 일찍이 상인 출신으로서, 정치적 기반을 마련하기 위한 목적으로 카톨릭을 믿은 고니시 유키나가가, 인생 말기에는 신앙을 위해 무사로서의 정체정까지 버린 것은 상당이 극적인 변화입니다

70% 마카오의 포르투갈, 마닐라의 스페인, 히라도의 네델란드, 그리고 이 3대 유럽 세력이 충돌하는 무대인 타이와. 이런 구도가 1600년대 초의 북동 유라시아의 동해안에 만들어진 것입니다

70% 서구 세력은 청나라와 일본 양쪽 모두와 교류를 가졌지만, 청나라는 이들을 통해 서구 문명을 배운다는 태도를 좀처럼 취하지 않은 반면, 일본인들은 나가사키 데지마의 네델란드 동인도회사 상관을 통해 유럽과 세계에 관한 지식을 배웠습니다

75% 카톨릭을 받아들인 피지배층이, 이를 자신의 정치적 이데올로기로 삼아 반란을 일으키거나 대규모로 순교하는 일은 중국이 아니라 일본에서 먼저 일어났습니다

78% 고대 로마에서 그랬듯이, 카톨릭 신자들의 죽음이 또 다른 죽음을 부르는 모습을 보고 막부와 다이묘들은 이들에 대한 경계심을 더욱더 키웠을 터입니다

78% 아무리 뜻이 좋고 의지가 강하고 외부 상황이 도와준다고 해도, 시대의 물결이 갑자기 바뀌면 그 모든 것이 순식간에 헛되이 될 수도 있음을 잘 보여주는 사례입니다

79% 조선인 포로들 가운데에는 이미 일본에서 삶의 기반을 마련했다거나, 고국으로 돌아가봤자 오히려 더한 냉대를 받을 수 있다는 이유로 귀국을 포기하고 일본에 정착한 사례가 많습니다. 이들 상당수는 카톨릭을 믿다가 순교했다고 합니다

80% 포르투갈, 스페인, 네델란드, 영국, 중국, 일본이 북동 유라시아 동해안 지역의 군사적, 상업적 이익을 확보할 수만 있다면 상대편을 학살하는 것쯤은 아무렇지도 않게 생각하던 시기였습니다

83% 후미에 제도란 아기 예수를 안고 있는 성모마리아가 새겨진 동판을 밟음으로써 스스로 카톨릭 신자가 아님을 증명하는 절차입니다

86% 당시 일본은 쓰시마를 통해서는 조선과, 나가사키를 통해서는 유럽 및 청나라와, 사쓰마를 통해서는 류큐왕국과, 훗카이도 최남단의 마쓰마에를 통해서는 아이누 및 북방 민족들과 활발한 교섭을 가졌습니다.

87% 이 과정을 보면서 저는,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망상에 빠져서 망쳐놓은 국가를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수습했다기보다는, 오다 노부나가와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치세 덕분에 한껏 넓어진 일본의 국제적 활동을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제한함으로써 무사 집단의 이익을 지키려 했다고 생각합니다

90% 에도시대 2백 년간 외부로부터 고립되어 있던 가쿠레 기리시탄들은, 16-17세기에 대양을 건너 일본으로 온 카톨릭 신부들이 가르쳐준 성경의 내용을 입에서 입으로만 전승해오다가 본래 뜻을 잊어버렸습니다

90% 17-19세기 일본에서 다양한 사상이 나타날 수 있었던 것은 무엇보다 당시 일본에 획일적인 교육을 지향하는 과거제도가 없었고 경제 상황이 괜찮았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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