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도시여행자를 위한 파리x역사
주경철 지음 / 휴머니스트 / 2019년 12월
평점 :
구판절판
제목 : 도시여행자를 위한 파리 역사
작가 : 주경철
번역 :
출판사 :
읽은날 : 2019/12/19 - 2020/01/01
분류 : 일반
파리가 이렇게 역사가 풍성한 도시였나?
오래된 도시인 줄은 알았지만 이렇게 다양한 역사와 이야기를 품고 있는 줄은 몰랐다.
프랑스 대혁명이나 벨 에포크 정도만 알고 있었는데 고대에서부터 많은 이야기를 품고 있다는 걸 이 책을 통해서 알게 되었다.
파리를 걷다가 만나는 분수, 동상들에게 이런 이야기가 숨어있었나 싶다...
이 책을 읽다보니 파리를 거닐어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고루함이 넘치는 곳이면서 동시에 자유롭고 무엇이든 허용되는 곳.
자유와 평등과 박애를 외치며 눈하나 깜짝하지 않고 수천명을 단두대에 보내버린 곳.
이 모순된 동네에서 인간이란 무엇인가를 생각하게 된다.
유럽인 이야기에서 보여준 저자의 이야기 풀어내는 능력 또한 수준급이다.
이해할 수 없는 파리를 한번 더 생각하게 하는 책...
재미있었다.
P6 지난 역사를 반추해보면 파리는 수없이 유혈이 낭자하고 험악했던 혁명의 수도였다
P23 유럽의 매우 넓은 지역에 걸쳐 켈트 문명이 존재하는데, 그중 서쪽 끝인 프랑스 지역에 이주한 일파가 갈리아인이다
P38 드니 성자는 프랑스 전체의 수호성인이고, 파리의 수호성인은 따로 있다
P41 원래 파리 주민의 세련된 문화유산과 '야만족'이 가지고 온 강건한 문화요소가 합쳐지며 프랑스 문화가 형성되어갔다
P44 사실 클로비스 1세의 종교와 관련된 이야기들은 성스러운 거짓말로 가득하다
P49 대체로 5-10세기까지 500년가량은 유럽 문명이 쇠락하는 시기였고, 파리 도한 빛을 발하지 못했다
P56 그리스도란 말의 원뜻은 '기름 부음을 받은 사람'이니, 축성식을 거친 국왕은 제2의 그리스도로서 하느님의 뜻을 지상에 펼치는 신의 대리인이 된다
P61 성당은 그 자체가 중요한 텍스트다. 글을 못 읽는 서민에게 건물과 조각은 교리를 가르쳐주는 교과서와 다름없었다
P66 성당을 흔히 예수의 몸으로 비유하는데, 머리를 동쪽 예루살렘 방향으로 두므로, 성당 입구는 서쪽에 있다
P67 완공된 이후에도 계속 손을 댔고, 특히 프랑스 혁명을 거치며 많이 훼손된 이후 19세기에 외젠 비올레르뒤크가 개축한 결과물이다
P79 정치권이나 종교기관이 압력을 가하고 대학이 거기에 굴복하면 학문 활동은 끝이다
P91 루이 9세는 프랑스 국왕 중에 신앙심 깊기로는 으뜸일 것이다
P94 생트샤펠에 간다면 조그마한 계단을 통해 위층으로 올라가야 한다. 아래층만 있는 줄 알고 그곳만 보고 와서 시시하다고 하는 사람들이 간혹 있다. 위층에 올라가면 홀연 황홀한 빛의 세계를 보게 될 것이다
P103 1307년 10월 5일, 국왕은 프랑스 내 기사단원 2,000여 명을 체포하라고 명령했다. 고문을 받은 단원들은 거짓 자백을 하고 화형에 처해졌다
P105 드 몰레의 저주때문인지는 모르겠으나 필리프 4세는 얼마 안 가 죽고, 며느리들은 다 간통사건에 휘말렸으며, 후손들은 하나같이 어린 나이에 일찍 죽는 등 흉사가 계속되더니 결국 카페 왕조가 막을 내렸다
P120 종교 갈등의 역사에서 최악의 사건 중 하나가 1572년 성 바돌로매 축일의 학살이다
P121 이날 새벽, 루브르 궁전 옆에 있는 생제르맹로세루아 성당의 종이 급박하게 울렸다. 학살 개시 신호였다. 고색창연한 성당의 종소리가 수천 명의 피를 흘리게 만든 신호탄이었다는 게 더욱 끔찍하다
P127 1598년에 마지막으로 국왕 편으로 돌아선 브르타뉴 지방의 대도시 낭트에 있는 브르타뉴 공작성에서 평화를 위한 칙령을 반포했다. 프랑스는 카톨릭 국가이되, 신교도는 예배의 자유를 누릴 수 있다는 관용을 선언했다
P133 예술 후원자이자 빈민을 돕는 자애로운 인물로, 그리고 신심 깊은 여인으로 명예를 누리며 살아갔다. 시인, 철학자, 학자 들이 그녀 주변으로 모여들었다. 그러니까 너무 그녀의 성적 분방함만 강조하는 건 온당치 못한 평가다
P135 앙리 4세의 애민 정신을 보여주는 말 가운데 하나가 "짐은 일요일에는 모든 프랑스 백성의 그릇속에 닭이 들어 있기를 바라노라"이다
P153 도와주어야 할 사람이 급증하다 보면 그런 고상함이 더는 설 자리가 없다. 중세에서 근대로 넘어오며 부와 빈을 바라보는 시각이 크게 바뀌고, 빈민에 대해 부정적으로 인식했다
P154 이들은 기적궁이라 불리는 시내의 일정 구역에 모여 살았다. 그런 이름이 붙은 이유는 이곳 주민이 시내에 나가서 불구인 척하며 구걸을 하다가 저녁에 돌아오는 순간 맹인이 눈을 뜨고, 절름발이가 뛰어다니는 기적이 일어나기 때문이다
P159 프롱드의 난은 기이한 방향으로 끝났다. 처음에는 귀족부터 서민까지 모든 사람이 국왕에게 저항했다가 끝판에는 너나 할 것 없이 누구나 국왕에게 복종을 약속하는 이른바 '복종의 전염병' 사태가 벌어졌다. 모든 권위가 실추한 가운데 왕권만 홀로 강력해졌다. 이른바 절대주의는 루이 14세의 작품이기 이전에 국민이 원하는 바였다
P178 화강암 지대인 우리나라의 경우 그 단단한 돌을 다듬어 건물을 짓기 힘들다 보니 목조 주택이 대세일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우리나라를 비롯한 아시아 지역은 목재문명, 유럽은 석재 문명이라 말하곤 한다. 틀렸다고 할 수는 없지만, 다만 한 가지 사실을 유념해야 한다. 유럽에서도 근대에 들어와서야 돌집이 많이 늘었지, 그 이전에는 중요한 건물들을 제외한 서민의 집은 대부분 목재로 지었다
P187 글을 쓰는 이유는 '행동하기 위해서'이다. 그는 홀로 깊은 사색에 빠지는 부류가 아니라, 문제 의식을 가진 현실참여적 지식인이었다
P195 18세기 프랑스는 가난한 사회가 아니라 불평등한 사회였다. 이 문제가 결국 국가와 사회를 뿌리째 흔들었다
P206 힘찬 멜로디와 살벌한 가사가 그 이상 잘 맞아떨어질 수 없다. "조국의 아이들이여, 가자. 혁명의 날이 왔도다"로 시작하여 "적들의 더러운 피로 우리의 땅을 적시자"로 끝나는 이 노래는 프랑스 국가가 되었다. 아마도 세계에서 가장 살벌한 국가일 것이다
P217 혁명 주체들은 권력을 쥐고 있긴 했지만 질서를 잡지도, 혁명 방향을 제시하지도 못했다
P220 나폴레옹은 대포를 모아 생토노레 거리의 생로슈 성당 앞에 설치해놓고는, 봉기 군중이 몰려오자 바로 공격하여 진압했다. 무자비한 공격으로 왕당파 반군 1,400여 명이 무참히 죽었다
P223 유럽사에서 자주 벌어진 갈등이 교황과 황제 중 누가 최고 권력자인가 하는 문제였는데, 이때는 교황이 황제를 임명하는 게 아니라 나폴레옹 1세가 스스로 황제가 되는 의식을 치러 이 문제를 깔끔하게 처리했다
P232 처음에 이 개선문 위에는 베네치아의 산마르코 성당을 장식하던 청동 사두마차상의 말 조각들을 올려놓았다.(베네치아에서는 '산마르코의 말들'이라 부른다). 1797년 나폴레옹이 이탈리아 원정에서 승리를 거둔 후 약탈해온 것이다
P234 나폴레옹은 루브르 궁전을 일반인에게 공개하는 박물관으로 만든 장본인이다. 그동안 왕실이 소장하고 있던 작품들에다가 자신이 전쟁 중에 훔쳐 온 장물들을 더해 엄청난 컬렉션을 만들었다
P241 상드의 아들 모리스는 쇼팽을 싫어했다. 반대로 딸 솔랑주는 쇼팽을 좋아했는데, 상드는 그 아이를 증오했다. 결국 솔랑주 문제로 이들은 헤어진다. 모녀간 갈등에서 쇼팽이 솔랑주를 편들자 상드는 두 사람이 바람피우고 있다고 비난한 것이다. 1847년 쇼팽이 떠나자 상드는 곧 새 연인을 만났다.
P248 루이 필리프는 여덟 번이나 암살 대상이 되었다. 1835년 7월 26일자 <르 샤리바리>에는 이런 기사가 실렸다. "국왕 전하가 암살당하시지 않고 가족과 함께 파리에 도착하셨다"
P280 카톨릭 교회는 몽마르트르 언덕에 사크레쾨르 대성당을 짓기로 했다. 파리 코뮌 당시 급진 좌파의 파괴에 대해 속죄하는 의미라고 한다
P282 여성이 자전거 의상으로 바지를 입고 모자를 쓰는 것이 부도덕 하다며 비난하는 일도 있었다. 1895년 일부 여성이 자전거를 타지 않고도 이런 복장으로 거리를 활보했는데, 경찰이 이를 제지하기도 했다
P298 설사 드레퓌스가 무죄라 하더라도 이를 인정하면 군의 실수를 인정하는 꼴이 된다. 심지어 혹시라도 재심이 열릴 때를 대비해 위조문건도 만들어놓았다
P301 낙선전은 고상하고 우아한 그림을 선호하던 국가와 살롱의 아카데미즘에 불만을 품은 화가들이 1863년 살롱 심사에서 낙선한 작품들을 모아 따로 개최한 전시회다
P306 콜레트는 햇볕 잘 드는 아파트에서 '내 몸이 생각할 때 내 모든 살에는 영혼이 있다'고 느끼며 유명 작가로서 살아갔다
P310 1893년 물리학 석사 시험을 통과하고, 다음 해 수학 석사도 통과했다
P312 세상에는 뒤꽁무니에서 남을 비난하는 낙서나 하고 돌아다니는 저열한 인간들이 넘쳐난다. 그래도 마리는 흔들리지 않고 두 번째 조국을 위해 헌신한다고 생각하며 연구를 지속해서 1911년에는 두번째 노벨상을 받았다
P313 아인슈타인은 "그녀는 유명 인사 중에 유명세로 인해 타락하지 않은 유일한 사람"이라고 표현했다. 퀴리 부부는 1995년 팡테옹으로 이장되었다. 그녀의 딸 이렌과 사위 프레데릭 졸리오 역시 1935년 노벨 화학상을 받았다
P317 앞으로 얼마나 끔찍한 살육이 벌어질지 아직 모르는 때라 즐거운 분위기 속에서 영웅 심리를 느끼며 전쟁터로 향했다
P325 파리는 보헤미안의 중심지였다. 생제르맹 거리의 카페와 몽마르트르 언덕의 카바레, 몽파르나스 지구에 부르주아 관습을 혐오하는 많은 작가와 예술가가 모여들었다
P327 에스파탸 전시관에는 파시즘을 비판하는 피카소의 <게르니카>가 전시되었다. 독일 대사 오토 아베츠가 그림을 보고 피카소에게 물었다. "이 끔찍한 걸 만든 게 당신이오?" 그러자 피카소가 답했다. "아니오, 당신이오" 이미 전쟁 분위기가 물씬 풍기는 중이었다
P332 헤르만 괴링은 레스토랑 막심에서 캐비아를 먹으면서 파리 비즈니스를 돕는 경제적 서비스를 제공하겠다고 선언했다. 구체적 조치는 사실 별것 아니고 군인들이 가게를 돌아다니며 사치품을 싹쓸이하고 돈은 점령군 화폐로 지불하는 식이었다
P338 그는 세상이 부조리하지만, 의미 없는 이 세상에 의미를 부여하는 것은 인간이라는 휴머니즘 철학을 가지고 있었다
P346 프랑스 레지스탕스 운동의 문제점은 공산주의자, 카톨릭, 사회주의자, 우파 등 여러 지하 조직이 서로 경쟁하고 싸웠다는 것이다. 이들을 결속시키는 건 기적에 가까웠다. 그런데 물랭이 그 기적을 이루었다
P361 로버트 프로스트가 시는 기쁨에서 시작해 지혜로 끝난다고 말했는데, 여행도 그렇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