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지 클래식 - 버들이가 먹기 좋게 떠먹여주는 음악가의 삶과 클래식 이야기 이지 클래식 1
류인하 지음 / 42미디어콘텐츠 / 2019년 6월
평점 :
구판절판


제목 : 이지클래식

작가 : 류인하

번역 : 

출판사 : 42미디어콘텐츠

읽은날 : 2019/11/21 - 2019/12/16

분류 : 일반


클래식은 아는만큼 들리는건가?

작곡가를 알면 그 음악을 듣는 태도나 감정이 바뀐다.

그래서인지 클래식 음악가의 일생에 대한 책을 꾸준하게 읽는다.

이 책도 그런 의미에서 샀다. 

읽기 쉽게, 그러면서 음악가들의 생애와 그들의 대표곡들을 추천한다. 

유명한 사람들은 다 모였다... 

음악책에서 이름 들어본 사람들은 확실히 뭔가 한방이 있는 사람들이다. 

학교 음악시간이 적어서인지 이런 내용은 안 알려주고, 다짜고짜 외우고 시험만 보니 다들 음악을 싫어하게 된느거 아닌가 싶다.

해마다 올해는 누구의 탄생 몇주기라거나, 사망 몇주기라고 하면서 음악회 티켓을 팔고 음반이 나온다. 

많은 음악가들의 삶과 어려움, 그리고 웃음을 좀더 느끼면서 그 음악에 빠져보고 싶다. 

그래봤자 유명한 몇 곡 듣다 내 삶이 끝나겠지만, 그래도 그정도라도 느껴보고 죽는다는 건 내 삶에서 축복이다. 

두번째 책도 읽어봐야겠다..


P35 모차르트의 <후궁으로부터의 탈출>의 성공은 합스부르크 왕강의 왕 요제프 2세의 후원과 지원이 없었으면 불가능했던 일이었습니다. 요제프 2세는 신동 모차르트를 기억하고 있었고, 호감을 가지고 있었거든요 

P38 최근 연구 결과 모차르트에 대한 작곡가로서의 대우가 좋지 못했다기보다는, 수입보다 더 많은 지출이 모차르트의 경제적 어려움의 원인이라고 분석하고 있습니다 

P42 독주곡을 비롯한 소품곡부터, 실내악곡, 협주곡, 교향곡, 오페라, 종교음악 등 전 분야를 아우르는 작품 세계를 가지고 있는 작곡가는 찾아보기 힘듭니다 

P59 내 가슴속에 있는 창작 욕구를 다 채우기 전에는 세상을 떠날 수 없었다 

P59 베토벤이 가장 왕성하게 창작했던 시기는 1805년을 전후로 4-5년 정도였습니다. 교향곡으로는 영웅, 운명, 전원, 소나타로는 크로이처, 열정, 월광, 베토벤의 유일한 오페라 피델리오 등이 이 시기에 완성된 대표적인 작품이며, 그 외에도 여러 협주곡을 작곡하였습니다 

P61 베토벤은 늘 자신과 신분이 다른 귀족 여인, 그리고 유부녀에게 연심을 푸었기 때문에 일생 결혼도 못 하고 혼자 살아가야 했습니다 

P63 한순간도 순탄한 삶을 살지 못했던 베토벤이 온갖 역경을 이겨내고 만년에 와서 마음의 평화를 기원하며 작곡한 곡으로, 제목 그대로 장엄하며 엄숙한 곡입니다. 지금까지도 바흐의 미사와 더불어 종교음악의 정점으로 평가받고 있습니다 

P65 슈베르트를 만나 그의 악보를 보고 감탄한 베토벤은, 너무 늦게 찾아왔다며 안타까워했고 열심히 하라고 격려해주었습니다 

P75 포르포라는 하이든의 작품을 교정해주면서 작곡을 가르쳐주었습니다. 포르포라에게 사사한 그는 실력이 일취월장하였고, 귀족가문의 음악 선생으로 채용될 수 있었습니다 

P76 많은 음악가의 아내가 남편의 음악 활동을 이해해주고 능력이 있는 이는 남편의 뮤즈가 되어주었던 것에 비해, 하이든의 아내는 음악가의 부인으로서 자격 미달이 여자였습니다. 그의 아내는 남편을 이해할 능력도 없었으며, 이해하려고 노력하지도 않았거든요 

P85 영국 시인 존 밀턴의 서사시 실락원과 성서 창세기에 기초한 대본으로, 하이든은 오라토리오 작곡에 들어갔습니다. 이때 작업한 것이 바로 위대한 오라토리오 천지창조입니다 

P86 훗날 하이든이 지난 시간을 회고할 때, 오라토리오 천지창조를 작곡할 때가 그의 일생 중 가장 행복했던 순간이라고 언급했을 정도로, 이 시기는 그의 일생 중 신앙심과 음악적 영감이 충만하던 때였습니다 

P91 밖에서는 실력과 인성 모두 인정받으며 함께 일하는 사람들이 좋아하는 사람, 그러면서도 잡다한 구설에 오르지 않으며 무리하게 욕심을 내지 않고 정도를 알았던 사람인 점은 진정으로 닮고 싶은 모습입니다 

P100 이 무렵 비발디가 작곡한 <열두 개의 트리오 소나타> 비롯한 소나타 곡들이 베네치아에서 출판되었으며, <열두 개의 협주곡 화성의 영감>은 음악 출판업자 에스티엔 로제에 의해 암스테르담에서 출판되었습니다 

P107 동서 냉전 시대의 종식을 알린 성지와도 같은 자리에서 평생을 교회 음악 작곡가로 살아갔던 바흐의 곡을 연주한 노신사, 그는 세계적인 첼리스트이자 지휘자인 므스티슬라프 로스트로포비치였습니다 

P108 음악의 아버지라고 불리는 요한 제바스티안 바흐는 독일의 튀링겐주의 아이제나흐에서 태어났습니다. 1685년 3월 23일에 바흐가 세례를 받았다고 기록되어 있는 아이제나흐의 성 게오르크 교회의 옛 문서를 근거로, 3월 21일에 태어났다고 추정하고 있습니다 

P110 기껏해야 초등학교 1학년 정도의 어린아이가 교회 합창단 일을 해서 손을 보태야 할 정도로 바흐 집안의 형편은 그리 좋지 않았지만, 음악 소리가 끊이지 않고 행복과 웃음이 넘쳤습니다 

P112 바흐의 음악인생은 그가 살았던 장소에 따라 구분됩니다. 일반적으로 아른슈타트와 뮐하우젠 시기, 바이마르 시기, 쾨텐 시기, 라이프치히 시기로 크게 네 시기로 나뉩니다 

P115 안정적인 보수와 대우 덕분이었는지 <오라 성령이여, 주 하느님이여> 비롯한 바흐가 작곡한 것으로 전해지는 오르간곡의 절반 이상이 이때 작곡되었고, 이 시기를 바흐의 오르간곡의 시기라고 부르기도 합니다 

P117 이 시기의 바흐는 칸타타나 종교음악보다 궁정에서 연주될 협주곡이나 실내악곡을 주로 작곡했습니다. <브란덴부르크 협주고><무반주 바이올린을 위한 소나타와 파르티타><무반주 첼로모음곡> 등 그의 대표적인 기악곡으로 손꼽히는 곡들이 이때 작곡된 것입니다 

P134 프리드리히는 할레의 한 성당을 찾아 견습 오르간 연주자가 되었고, 오르간의 대가로 유명했던 뤼베크의 디트리히 북스테후데를 찾아가 음악을 배웠습니다 

P154 요한 제바스티안 바흐와 모차르트의 이야기를 해주는 등의 지브니식 교육은 쇼팽 평생의 음악 활동에 큰 영향을 미쳤습니다. 어느 정도였느냐 하면 바흐의 <평균율 클라비어곡집>을 죽을 때까지 연구했고, 모차르트를 존경했습니다 

P161 그와 대조적으로 빈 시민은 그의 민족적 갈등에 관심이 없었으므로, 빈의 대중적 코드와 쇼팽의 음악적 코드 사이의 간극은 좁혀지기는 커녕 점점 벌어질 뿐이었습니다 

P190 두 사람이 남녀 사이로 엮인 것은 아니었습니다. 어디까지나 펜팔 친구였고, 후원자와 후원을 받는 예술가 사이였습니다 

P195 팟캐스트 이지클래식 차이콥스키 편을 준비하면서 그의 성적 취향을 알게 되었고, 시대가 품어주지 못했을 그의 아픔이 음악에 고스란히 묻어서 차이콥스키 음악이 그렇게 특별해졌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P213 일찍부터 그 재능이 뛰어났음에도 불구하고 비제는 프로 피아니스트로 연주하는 것, 특히 많은 사람이 보는 앞에서 연주하는 것을 죽기보다 싫어했습니다 

P218 여기저기 떠돌아다니는 집시가 극의 주인공으로 나오고 무대에서 몸싸움을 벌이다가 마지막엔 여주인공이 죽는 것으로 마무리하니, 관객이 보기엔 수준 이하의 작품이었던 셈이죠 

P219 유해는 페르라셰즈 공동묘지에 안장되었고, 쇼팽, 들라크루아로시니에디트 피아프, 오스카 와일드, 이브 몸탕 등의 인사와 함께 오늘날까지도 관광객을 맞이하고 있습니다 

P242 팟캐스트 이지클래식 베르디 편을 업데이트했을 때 청취자가 남겨주신 청취 후기에도 대부분 베르디에 대해서는 잘 몰랐지만 이전에 좋다고 생각했던 음악들이 베르디가 작곡한 음악이었다니 놀랍다였으니까요 

P251 아버지는 파니의 음악 공부를 전폭적으로 지지해주고 응원해주긴 했지만 딸이 직업 음악가로 살아가는 것은 반대했습니다 

P253 그는 동명의 세익스피어 희극 한여름밤의 꿈을 모티브로 삼아, 17세의 나이에 서곡을 완성했고, 17년 이후 몇 곡의 음악을 덧붙여 곡집으로 완성했습니다 

P258 멘델스존은 탁월한 곡 해석으로 객석에 감동을 주었으며, 이 공연 한 번으로 여태까지의 슈베르트에 대한 평가를 완전히 뒤집어버렸습니다 

P271 정확히 이야기하면 시와 음악이 결합되는 가곡, 특히 슈베르트로 대표되는 독일 가곡인 리트에 관심이 많았죠 

P279 아내 클라라가 마지막 면회를 갔을 때는 음식을 삼키는 것조차 힘들어했고, 클라라는 와인을 손가락에 찍어 남편이 빨아먹을 수 있게 해주었습니다. 그때 슈만이 클라라를 껴안고 했던 "나도 알아"는 그의 유언이 되었습니다 

P298 바흐와 모차르트, 베토벤과 같은 독일과 독일 주변에서 태어나 활동했던 범독일권 음악가들의 음악 구조를 가르쳐줬고, 이 교육은 앞으로 요하네스가 걸어갈 음악적 방향을 잡아주었습니다 

P296 리스트나 쇼팽과 같은 기교가 강조되는 낭만주의 음악이 인기 있었던 시기였기 때문에 브람스가 좇고자 했던 베토벤이나 하이든의 음악은 사람들의 관심과는 동떨어져 있었죠 

P302 1868년 3월, '이 시대의 진지한 음악을 쓰는 가장 유명한 독일 작곡가'라는 문구가 쓰인 학위 증서를 받은 브람스는 브레슬라우 대학교 측에 감사를 표하기 위해 답례로 <대학 축전 서곡>을 작곡하여 헌정했습니다 

P303 그는 브람스에게 실험 녹음을 권했는데, 이때 브람스는 자신의 피아노곡 <헝가리 무곡>의 첫 축약 버전을 연주했습니다. 이 녹음은 나중에 LP판으로 나왔는데, 작품을 소개하는 음성은 꽤 깨끗하지만, 피아노 연주 소리는 잡음이 심해 잘 들리지 않습니다. 하지만 이 녹음본은 음악가가 남긴 최초의 녹음으로 클래식 역사에 기록되었습니다 

P318 프라하 유학 시절에 드보르자크는 경제적으로는 곤궁하고 힘들었지만, 여러 친구들의 도움 덕택에 그리고 무엇보다도 음악적인 목마름을 달랠 수 있었기 때문에 불행하지만은 않았던 시기였을 겁니다 

P319 하지만 이때를 기점으로 선배 스메타나의 곡을 듣고 연주하며 연구했고, 체코 민족을 위한 음악을 만들겠다는 의욕을 고취시키는 계기도 되었습니다 

P343 단악장, 즉 하나의 악장 형식을 가진 교향시라는 새로운 형식이자 새로운 장르의 음악을 만들어냈습니다 

P346 레슨 기록에 따르면, 리스트는 젊은 날의 자신을 경계라도 하듯, 학생이 기계적으로 손가락만 움직이는 연주를 할 때마다 호되게 꾸짖었으며 음악적인 면을 강조했다고 합니다 

P358 그렇게 세태를 따라가지 못하는 자신을 촌스러운 작곡가로 스스로 인정하기도 했습니다 

P360 스페인뿐 아니라 유럽 전역 그리고 북아프리카와 동남아시아, 남미로도 떠나갔습니다. 그는 죽을 때까지 27개국으로 179번의 여행을 떠났습니다 

P392 푸치니는 이 <마농 레스코> 한 편의 오페라로, '베르디를 계승할 이탈리아 오페라 작곡가'라는 호칭을 얻었습니다 

P397 당시 대부분의 음악가가 그렇듯, 푸치니에게도 애인이 많았습니다. 그리고 남편의 외도를 알고 그냥 넘기기에는 엘비라의 성격이 너무나 불같았고요 

P413 마틸데의 시에 바그너가 곡을 붙인 <베젠동크 가곡집>도 완성되었지만, 마틸데의 남편 오토는 바그너에게 힘을 실어주는 많지 않은 후원자 중 한 명이었고, 바그너와 마틸데의 부정을 알았음에도 계속되는 후원에 그도 마틸데를 포기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결과적으로 그의 불륜은 새로운 창작의 원동력이 되어주기만 했을 뿐, 사랑의 결실은 이루지 못했습니다 

P423 바그너느 히틀러가 태어나기 전에 사망했고, 바그너의 후손과 미망인의 친나치 행보와 바그너의 음악을 의도적으로 오남용한 나치 정부로 인해 바그너=나치 공식이 만연해졌습니다 

P437 실제로 라으마니노프의 곡은, 난곡으로 유명한 리스트나 쇼팽의 곡만큼이나 어렵기로 정평이 나 있습니다. 한 손을 다펴보 쉽게 칠 수 없는 화음이 자주 등장하고, 연주자의 에너지를 바닥까지 소진시키려는 듯 광폭하죠 

P446 호로비츠의 <피아노 협주곡 3번> 연주에 대해, 라흐마니노프가 "내 피아노 협주곡은 바로 이렇게 연주되어야 한다고 항상 꿈꿔왔지만, 살아서 이런 연주를 들을 줄은 기대하지도 않았다"며 극찬했다는 에피소드는 아주 유명합니다 

P459 정부가 도끼눈을 뜨고 그의 작품을 트집 잡으려고 하면, 쇼스타코비치는 정권의 입맛에 맞는 것들을 내놓으면서 몸을 사렸습니다. 그런 방식으로 스탈린의 대숙청 속에서 그 자신은 무사히 살아남았지만 많은 친구를 잃는 슬픔을 겪었습니다 

P463 대한민국 정부 수립 이후 쇼스타코비치를 비롯한 수많은 소련 작곡가의 음악이 금지곡으로 지정되기도 했고 음반 수입도 막혀서 소위 마니아들이나 해외에서 몰래 LP를 들여와 숨어서 듣는 정도였기 때문에, 쇼스타코비치의 이름이나 음악이 다른 작곡가에 비해 덜 알려진 것이었죠 

P475 이때부터 그의 음악은 발표만 하면 논란의 대상이 되었습니다. 특히 <피아노 협주곡 1번>이 대표적이었죠 

P477 선배인 스트라빈스키나 라흐마니노프는 정부 몰래 탈출을 하다시피 했다면, 프로코피예프는 정부의 허가를 받아 출국했습니다 

P481 그의 대표적인 <피터와 늑대> 같이 어린이를 위한 곡을 쓰기도 했습니다. 정권의 입맛에 부합하는 음악이 아닌 다른 음악은 형식주의적이라며 매도당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으니 비판에서 안전할 수 있는 장르를 찾은 것입니다 

P500 아버지를 보내고, 피아졸라는 더는 자신만의 음악을 고집하지 않기로 결심했습니다. 대중이 원하는 것과 자신의 음악을 함께 녹여내고자 했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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