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의 손 - 나를 이끄시는
박관태 지음 / 두란노 / 2011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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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를 이끄시는 하나님의 손」


사람들은 많은 일을 하기를 좋아한다. 물론 크리스천들도 마찬가지이다. 하나님의 일을 하는데 어떻게 하면 더 많은 일을 감당하여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까에 초점을 맞추고 스스로 일을 찾아 분주히 살아간다. 그것이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일이라고 스스로 판단을 하고 말이다. 그러나 박관태 선교사님을 마르다처럼 스스로가 분주히 하나님의 일을 하려고 움직이는 가운데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다. 모든 것을 내려놓으라고 말이다.

많은 사람들이 분주히 많은 일을 하는 가운데 스스로는 하나님을 위해서 일한다고 하지만 자신을 다시 한 번 되돌아보아야 할 것이다. 혹, 자신의 의를 위해서 일하고 있지는 않는지에 대해서 점검할 필요가 있다는 말이다. 물론 모든 사람이 그렇지는 않을 것이고, 대부분의 사람들은 하나님의 뜻을 따라 순종하는 사역이겠지만, 아무튼 박관태 선교사님을 하나님의 음성을 통해 자신이 하는 일이 아닌, 하나님께서 일을 하신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아마도 그래서 「나를 이끄시는 하나님의 손」이라고 책 제목을 정하지 않았나 생각해 본다.

책을 읽으면서 박관태 선교사님은 참으로 선교를 즐기면서 하시는 분이라는 생각이 많이 든다. 아마도 모든 사역이 즐기지 않으면 고역일 것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선교에 대해서는 특정한 사람만이 사명을 받은 것이고, 힘들고 어려운 길이라고 생각을 한다.

물론 나 역시도 선교는 특별히 하나님으로부터 선교사의 사명을 받은 몇몇 사람의 몫이라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그런데 선교사님의 사역을 통해서 나의 생각이 잘못되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물론 선교사님의 국내의 병원에서의 안정된 생활보다는 환경은 비록 열악하다고 할지다도 몽고에서의 생활이 더 좋은 이유로 국내 병원이나 대학에서의 강단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끊임없이 논문을 써야하고 연구하고 발표하는 일을 반복함으로써 받는 스트레스를 벗어나기 위해서라고는 하지만 선교사님에게 있어서 선교사역이 고난만을 가져다준다고 하면 결코 쉽게 결정하지는 못했을 것이다.

선교사님의 책을 읽으면서 참으로 많이 준비한 분이고, 준비된 분이라는 생각이 든다.

얼마 전에 전철에서 중국 선교사 한 분을 만났는데, 선교 비전을 갖고 있는 많은 사람이 중국으로, 혹은 다른 나라로 단기 선교나 중장기 선교를 온다고 한다. 그런데 대부분의 선교사들이 준비가 되어 있지가 않아서 오히려 현지 선교사의 선교 사역에 방해가 된다는 말을 들었다. 그런데 박관태 선교사님은 이미 북한에 대한 선교의 비전을 품고 몽고에 누가회를 통한 아웃리치, 그리고 선교를 준비하면서 필요한 의료기기까지 준비하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물론 도중에 심재학이라는 동역을 잃은 아픔을 겪기도 하고, 의료사고를 통해서 하나님의 온전하신 뜻을 발견하기도 했지만 선교사님의 선교 사역을 통해서 많은 사람들이 새롭게 도전받으리라 생각한다. 처음부터 선교사님을 이끄셨던 하나님의 손길은 지금 이시간에도 하나님을 위해 그저 헌신하겠다고 다짐하는 많은 사람들을 이끌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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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도처럼 - 삶 속에서 예수님의 성품을 닮아가기
앤드류 머레이 지음, 유재덕 옮김 / 브니엘출판사 / 2011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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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도처럼」


하나님께서는 태초에 세상의 모든 만물을 창조하시고 그 창조물 중에 가장 늦게 인간을 만드셨다. 그리고 그 인간으로 하여금 하나님의 창조물을 마음껏 누리며 살아가게 하셨다. 이렇게 하나님의 모든 창조물을 정복하고 다스리며 누리도록 만드신 인간을 무작정 만들지 않으셨다는 것이다. 바로 하나님의 형상에 따라 만드셨다는 것이다. 그 이유는 하나님께서 인간과 늘 함께 하시기를 원하셨고, 또한 교제하며 살아가기 위해서였다.

그런데 인간이 죄를 지음으로 하나님의 창조목적을 상실해 버렸고, 더 이상 하나님과는 교제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이러한 인간을 가만 내버려두시지 않으셨다. 회복을 원하신 것이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를 이땅에 보내셨고, 인간이 지은 모든 죄를 짊어지고 십자가에 돌아가게 하셨다. 이제는 우리 인간의 선택만이 남은 것이다.

인간이 하나님과의 관계가 회복되고 다시금 교제가 이루어지기 위해서는 하나님의 창조의 질서가 회복되어야 한다. 하나님의 형상에 따라 지으신 그 모습이 회복되어야 한다는 말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해서 보내주신 예수 그리스도를 닮아야 한다.

물론 믿음으로 구원을 받는 것은 변할 수 없는 진리이다. 그래서 우리는 예수님을 닮아야 하는 것이다.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닮아가기를 원하고 예수님처럼 살아가기를 원한다.

그럼에도 실제의 삶에 있어서는 전혀 예수님을 닮아가지도 못할뿐더러 예수님처럼 살아가기 도 힘겨워한다.

여기에 대한 해답이 바로 이 책에 있다.

늘 앤드류 머레이의 책을 읽을 때마다 머레이의 내면의 세계가 과연 어떤 모습일까? 궁금해 진다. 역시 이 책도 마찬가지이다. 그저 평범하기 그지 없는 명제를 통해 많은 사람에게 소방을 제시해 준다.

한마디로 말하면 예수님처럼 살아가기 위해서는 예수님의 발걸음 하나하나를 되새겨야 한다. 그리고 그 발걸음을 동일하게 걸어가야 한다. 말로만 따르고 닮겠다고 다짐만 하지 말고 실제로 그 발걸음을 따라가야 한다는 말이다.

때로는 무고함을 당할지라도, 나에게 도저히 감당하기 어려운 환난이 다가온다할지라도 하나님의 부르심을 묵상하며 예수님의 삶, 예수님의 발걸음 하나하나를 되짚어봐야 한다.

그리고 나의 삶을 통해 예수 그리스도가 전파되도록 해야 한다. 나를 통해서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보게 된다면 이것이야말로 얼마하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이 되는 일인가?

이것이야말로 우리의 존재이유이고, 또한 우리가 그리스도처럼 되는 목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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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유년의 역신들 - 계유정난과 사육신
한국인물사연구원 지음 / 타오름 / 2011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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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유년의 역신들」


우리의 역사 가운데 비극적이고 많은 아픔을 갖고 있는 한 장면을 보는 듯하다.

마침, 「공주의 남자」라는 드라마가 함께 있어서 책을 읽는 동안 생동감이 더했는데, 처음부터 장자계승이라는 원칙이 없었다고 하면, 조선 초기의 왕자의 난이라든가, 숙부가 조카를 몰아내고 왕위를 빼앗는 계유정란 같은 것은 없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왜 정치는 자신을 반대하는 사람을 무조건 죽여야만 하는가? 함께 아우르고 함께 갈 수는 없는가? 아마도 정통성을 잃었고, 명분을 상실했기에 자신의 부정적인 면을 덮고자 더욱 숙청이라는 것을 많이 실시했는지도 모른다.

정치적인 역량이나, 조선왕조에 있어서 많은 업적을 쌓은 세조인 수양대군의 왕위 계승 과정, 그에 따른 간신들의 무차별적인 살상.

드라마에서 보아도 너무도 사람을 죽이는 장면이 많이 나와 아들들과 함께 보기에 눈살을 찌뿌리게 했는데, 아마도 책을 읽으면서 느낀 것은 드라마보다도 더 많은 사람들이 죽지 않았난 생각해 본다.

어느 누군가가 역사는 승자의 몫이라는 말을 들은 적이 있다. 그래서인지 계유정란 역시 수양대군의 입장에서 쓰여져 왔던 것이 사실이었다. 그런데 많은 시간이 흐르고 역사에 대한 새로운 사실들이 밝혀지면서 지금까지 정설로 여겨졌던 사실들이 뒤집히는 경우도 많은 것같다.

또 하나는 좋은 것이 항상 좋은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정도전이 주장했고, 펼치고자 했던 정치적인 이념이 물론, 군주제 보다는 신하들에 의해 정치가 이루어져 지나친 권력 집중을 막을 수는 있지만, 시대적으로 조선의 역사에서는 조금 이른 것이 아닌가 한다.

고려를 거친 조선의 정치적인 성향으로 보아서는 정통성을 이어온 것이 아니기 때문에 초기에는 강력한 정권이 필요했었을 것이다. 그래서 강력한 지도력을 바탕으로 나라를 안정시키고 정치의 안정을 기하는 것이 더 옳았을 것인데, 물론 태종과 세종을 거치면서 그러한 안정을 찾아가는 것같았다. 그러나 문종 때에 들어서면서부터 많은 권한을 신하들에게 이양함으로 그 힘을 악용하는 신하들이 있었고, 그러한 권력의 쏠림 현상을 보다 못해 또다른 견제 세력이 등장함으로 오히려 정치적인 안정보다는 불안한 상황을 만들고 만 것이다.

물론, 이러한 현상에 편승해 지나치게 많은 생명을 희생시키고, 자신의 정치적인 야망을 실현하는 결과를 가져왔지만, 아마도 수양대군도 이러한 정치적인 환경으로인해 자신의 정치적인 야망과 주변 사람들의 부추김으로 계유정란같은 일을 만들지 않았나 싶다.

계유정란을 되짚어보면서 우리는 우리의 정치도 명분을 가져야 된다고 생각한다. 좋은 것이 좋은 것이 아니라 옳은 것이 좋은 것이라는 것을 정치인들은 분명히 인식해야 한다. 정당의 목적이 정권창출에 있다고 하지만, 국익을 무시해 가면서까지 정권의 창출에만 매달리는 요즘의 정치를 반성해야 할 것이다. 조금 더 역사적인 발굴이 이루어져 우리 역사를 바로 세우고 반면교사로 삼아 우리 모두가 바른 역사 세우기에 동참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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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안의 죄 죽이기 - 삶 속에서 죄를 죽이기 위한 9가지 방법, 개정판
존 오웬 지음, 김창대 옮김 / 브니엘출판사 / 2011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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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안의 죄 죽이기」


이 책은 로마서 8장 13절을 통해 우리 안에 있는 죄의 문제를 어떻게 해결해야 하고 죄를 어떻게 다루어야 할지에 대해서 말하고 있다.

우리는 죄라는 것을 무서워하면서도 너무도 무감각하게 살아가고 있지는 않는지 되돌아본다. 우리의 삶에 있어서 죄는 항상 우리 안에 존재한다. 그런데 많은 사람들이 죄와 함께 살아가다 보니, 죄에 대해서 별로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거나, 죄에 대한 인식조차도 잃어버리고 살아간다. 죄라는 것은 우리에게 있어서 아주 커다란 존재로 다가오는 것이 아니다. 어쩌면 모든 사람들로 하여금 죄가 들어오는지도 모를 정도로 은밀하게 들어와서 우리를 속이고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 안에 죄라는 것은 항상 존재한다는 인식아래, 죄를 대적하기를 게을리 하지 말아야 한다.

죄는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과의 관계를 가로 막는다. 교제가 끊어져서 점점 하나님과 멀어짐으로 결국에는 사망에 이르도록 하는 것이 죄의 최종적인 목표이다.

그런데 좀처럼 우리 힘으로 죄를 이기기는 쉽지가 않다. 죄를 이긴다는 것이 쉽다고 하면 뭐가 문제이겠는가?

그래서 존 오웬은 이 책을 통해 죄를 죽이고, 죄를 이기기 위한 방법을 제시하고 있다.

먼저 죄를 이기기 위해서는 죄라는 존재를 인식하는 것이 필요하다. 죄에 대한 인식이 없다고 하면 우리는 늘 죄와 함께 더불어 살아감에도 불구하고 죄가 우리와 함께 있다는 것을 알지 못하게 될 것이다. 죄에 대한 인식이 시작되면 본격적으로 죄를 대항해야 한다. 이때의 저항은 인정사정 볼 것 없이 결사적인 대항이 필요하다. 일단 죄가 자리를 잡게 되면 우리 안에서 움직이는 것을 멈추지 않는다. 그러므로 처음부터 죄를 막고 죄에 대해서 철저히 대항함으로 죄가 우리 안에 자리잡지 못하도록 해야 한다.

그런데 이러한 것들도 우리 힘으로는 결코 할 수 없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성령께서는 죄를 깨닫게 해주시고 우리로 하여금 죄로부터 벗어날 수 있도록 도와 주신다. 그러므로 우리는 철저히 성령님을 의지하는 습관을 가져야 한다. 우리가 성령의 충만할 때, 죄를 우리 안에 발도 붙이지 못할 것이며, 한 길로 왔다가도 일곱 길로 떠나게 될 것이다.

우리 자신을 거룩하게 하는 것은 우리가 해야 할 당연한 의무이다. 이 의무는 우리 가운데 역사하는 죄를 죽이지 않고는 결코 완성할 수 없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의 의무를 수행하기 위해서도 우리 안에 거하는 죄를 죽여야 한다. 예수님께서는 우리로 하여금 죄로부터 자유로워지기를 원하셔서 십자가를 지셨다. 십자가를 의지하여 죄를 멀리하고 도저히 우리 안에 발붙이지 못하게 함으로 날마다 성령님과 동행하며 하나님 아버지를 기쁘시게 하는 우리 모두가 되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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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성애에 대해 교회가 입을 열다
어윈 W. 루처 지음, 홍종락 옮김 / 두란노 / 2011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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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성애에 대해 교회가 입을 열다」


동성애에 관한 문제는 전 세계적으로 이슈가 되고 있고, 동성애를 어떻게 바라보고 있으며 받아드리느냐, 아니면 배척해야 하느냐에 관한 문제로 뜨거운 논쟁을 벌이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과거에는 동성애에 대해서 드러나기를 꺼려하고 감추기에 급급했는데, 이제는 스스로를 동성애자라고 밝히는 커밍아웃이 행해지고 있으며, 공개적으로 동성애 대상자를 선정하고 상대방이 원하든 원하지 않든 공개함으로 심각한 인권 문제를 야기하고 있는 실정이다.

이는 비단 사회에 있어서만 문제가 되는 것은 아니다. 교회 안에서도 어느덧 동성애에 관한 문제가 심각성을 더해가고 있을 법도 한데 좀처럼 교회 안에서는 동성애에 관한 문제가 불거지지 않고 있다. 사실 드러나 있지는 않지만 교회 안에도 많은 동성애자들이 있을 것이다. 그러한 사람들에게 대해 교회는 과연 무엇이라고 말해야 할까? 아니면 언제까지 침묵으로 일관해야 할까? 그리고 침묵하고 있는 이유는 과연 무엇인가?

주님께서는 교회를 향하여 소금이라고 말씀하고 계시고 있으며, 또한 빛이라고 말씀하신다. 이는 교회의 역할에 대해서 언급하신 것이다.

주님의 뜻에 어긋난 잘못된 길고 가고 있는 성도들에 대해서 교회는 그냥 침묵만 하고 있으면 안되는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한 남자와 한 여자가 합하여 한 가정을 이루라고 명하고 계신다. 그런데 동성애를 통해 결혼관이 바뀌어지고 있으며, 가족이라는 개념이 바뀌고 있다.

이러한 문제에 대해서 교회는 결코 방관해서는 안될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정죄하고 쫓아낸다는 것은 더욱 안되는 말씀이다. 하나님께서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와 똑같이 사랑하고 계시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한다. 그래서 그들로 하여금 돌이킬 수 있도록 권면하고 가르쳐야 한다. 교회가 지나치게 정치적인 것에 관심을 갖고 관여하는 것에는 문제가 없다고 할 수는 없지만, 구원에 관한 문제, 하나님과의 관계에 대해서는 한치도 양보해서는 안된다. 그래서 그들이 돌이킬 수 있도록 권면하고 관심을 가져주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렇다고해서 그들의 삶을 인정하라는 말이다. 만약에 그들이 교회에서 내쳐짐을 당한다고 하면 그들의 문제는 어디에서도 다루어줄 곳이 없다는 것을 알고 교회가 하나님 아버지의 마음을 갖고 그들이 돌이킬 수 있도록 적극적인 역할을 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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