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쇼펜하우어의 인생 수업 메이트북스 클래식 14
아르투어 쇼펜하우어 지음, 강현규 엮음, 이상희 옮김 / 메이트북스 / 2023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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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자 개인적인 이유로 철학이나 철학자에 대한 관심이 적었다. 특히 고등학교 다닐 때 세계사 수업 시간에 선생님으로부터 들은 이야기 때문에 더욱 그랬다. 이 수업 시간에 독일의 철학자들 몇 명의 이야기를 해주었다. 니체와 쇼펜하우어에 대한 이야기가 가장 많았던 것으로 기억한다. 선생님은 "독일의 철학은 음악이나 문학 등과 함께 독일인이 세계문화에 기여한 것 중 가장 중요한 위치를 차지한다."고 전제했지만, 니체에 대해서는 '독설'로, 쇼펜하우어에 대해서는 '역설'로 잠깐 독자의 흥미를 끌었다. 그러나 쇼펜하우어가 염세주의자·비관론자 등으로 표현하면서 "그의 염세주의적 사상은 수많은 독일 청년들을 '자살'로 이끌었다."는 말씀이었다. 고등학생 시절이라 선생님의 말은 모두 정설로 들었다. 그 뒤에 하신 말씀이 "그리고 그는 90살이 넘도록 살았다."는 비난 섞인 어투로 말을 맺었다. 사실 충격이었다. 그때는 "Boys, be ambious!, 청년이여, 야망을 가져라)가 한창 유행어처럼 회자되고 있을 때였다. 그런데 이 독일 철학자는 자살을 유도하는 학문을 하다니. 어렵기도 했지만 매우 잘못된 학문이고 학자라고 생각했다.

이후로 니체의 책은 여러 권 읽었다. 니체가 쓴 책은 아니지만 그와 그의 철학을 해석해서 나름대로 접근한 많은 저자들이 그를 소개했다. 초인과 독설 등은 모두 공통되게 다루고 있어서 뭔 말인지 정확히 몰라도 겉멋으로 읽기도 했다. 그래도 이 책 저 책 한 철학자에 대한 책을 읽어 어느 정도 그의 철학이 단순한 생각에서 비롯된 것은 아니라고 생각하게 됐다. 그러나 쇼펜하우어의 책이나 그에 관한 책은 전혀 거들떠 보지도 않았다. 독자는 그에 대해 염증을 느끼고 있었던 듯하다. 그러던 것이 요즘에 와서 부쩍 쇼펜하우어에 관한 책이 많이 출판되면서 적잖게 놀랐다. 왜 그럴까? 이 책 『쇼펜하우어의 인생 수업』의 출판사 소개글 때문이었다. 소개글에 따르면 쇼펜하우어에게는 염세주의자, 허무주의자, 비관주의자, 아웃사이더 등의 부정적인 꼬리표가 늘 붙었지만 사실 그 누구보다 인생을 사랑했고 인간을 사랑했으며, 치열하게 인생의 본질을 찾고자 했던 철학자였다. 단지 그는 현실주의자이자 실존주의자로서 우리가 살아가는 현실을 있는 그대로 직시하고, 이를 냉철하게 가감 없이 이야기했을 뿐이다. 그는 이 세상이 고통과 불행으로 가득하며, 인간의 행복은 그 고통과 불행을 얼마나 줄이느냐에 달려 있지, 행복으로 충만한 파라다이스는 현실이 아닌 상상 속에서나 가능할 뿐이라고 단호하게 이야기한다.

 


 

이 책은 그렇게 읽게 됐다. 그리고 고등학교 수업 시간을 다시 생각하게 됐다. 아마 선생님이 했던 말 중에서 독자가 "듣고 싶은 것만 들은 게 아니었나?" 생각됐다. 저자는 쇼펜하우어이지만 엮은이(편자, 編者) 강현규는 〈엮은이의 말〉을 통해 쇼펜하우어에 대해 "행복은 꿈일 뿐이지만, 고통은 현실이다. 이 세상이 결코 아름답지 않고, 우리 인간이 결코 합리적이지 않다는 것을 우리가 우선 인정하고 인간과 세상을 바라볼 때 그(쇼펜하우어)의 철학을 온전히 이해할 수 있게 된다. 그의 이런 생각은 1851년 출간된 이 책 『소품과 부록』에 집대성되어 있는데, 그는 이 책에서 행복과 인생의 의미를 통찰력 있게 풀어냈고, 이 책은 170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많은 사람들에게 여전히 많이 읽히며 위대한 고전으로 평가받고 있다."고 설명한다.

더욱이 편자는 쇼펜하우어의 첫 저서인 『의지와 표상으로서의 세계』에 담아내지 못한 글들을 추려 『소품과 부록』이란 제목으로 출간했던 이 책은 엄청난 호평과 대중적인 성공을 안겨 주었다고 쓰고 있다. 그렇지만 여전히 현대의 독자들에게 완역본을 그대로 읽는다는 것이 결코 쉽지 않은 일이라며 현대 독자들의 이해를 돕고자 원서의 품격을 해치지 않으면서도 현대적 감각에 맞게 핵심 내용만을 뽑아내 칼럼 제목을 새로 달았다고 밝힌다. 쇼펜하우어는 이 책에서 인생은 고통 그 자체지만 이 고통이 살아갈 힘을 준다고, 부와 명예는 행복에 큰 영향을 끼치지 않는다고, 남에게 보여주고 평가받기 위해 인생을 낭비하지 말라고, 덜 불행하고 사는 것이 행복하게 산다는 것의 진짜 의미라고 편자는 해석을 덧붙인다. 특히 이 책에 담긴 그의 철학은 프리드리히 니체, 아인슈타인, 카를 융, 밥그너, 찰스 다윈, 헤르만 헤세, 프란츠 카프카, 카뮈, 톨스토이, 도스토옙스키, 찰리 채플린, 토마스 만, 보르헤스 등 수많은 각계 거장과 명사들에게 큰 영향과 영감을 주었다고 강조한다. 우리가 교과서에서나 접할 수많은 인사의 이름을 나열하고 있을 정도인가? 쇼펜하우어는 이렇게 해서 독자의 관심이 되었다. 앞서 언급한 『의지와 표상으로서의 세계』는 내용이 너무 난해한 데다가 문맥을 잡기가 너무 어려워 출판 후 몇십 년 동안 책이 몇 부 팔리지도 못했고, 그의 존재감은 희미했었다고 한다.

 

 

철저하게 외면 받았던 『의지와 표상으로서의 세계』와 달리 대중들도 이해할 수 있게 쓰여진 이 책의 출간 이후 그의 철학에 대한 추종자들이 생겨나기 시작했고, 점점 유럽을 넘어 세상 사람들에게 알려져 세계적으로 명성을 얻기 시작했다. 당시 『소품과 부록』을 출간한 출판사의 암울한 예상과는 달리 이 책은 얼마못가 쇼펜하우어의 책들 중에서 가장 인기를 끌었고 가장 많이 팔려나갔다고 언급하고 있다. 앞서 말한 독자의 고등학교 때의 추억을 다시 소환하는 대목은 "쇼펜하우어는 젊은 독자들을 염두에 두고 이 책을 집필했다고 한다."이다. 이러한 이유로 이 책이 출간된 이후 독일어권에서 쇼펜하우어의 문장은 최고급 산문이자 탁월한 문학적 글쓰기로 평가받기에 이르렀다.

세계 언어 중 학술 용어로 적당한 것은 역시 독일어라고 한다. 고등학교 때 독일어 수업을 들으면서 선생님이 "독일어는 울고 들어가서 웃고 나온다"고 한 말씀이 아직도 귀에 생생하다. 이유는 세계 언어 중에 예외가 가장 적은 언어라고 했다. 성·수·격에 따라 정관사·부정관사가 변형을 일으키는 복잡한 구조의 언어가 왜 예외가 가장 적을까? 아마 명사에 오기(誤記)가 있을 때 앞에 붙은 정관사·부정관사를 보고 오기를 바로잡을 수 있기 때문일까? 학문을 독일어로 해본 경험이 없어 정확하게는 모르지만 복잡한 구조에서 예외가 없는 이유가 발견될 수 있을 것이란 추정은 가능하다. 역자 이상희에 따르면 독일 고전을 읽는 것은 독서에 익숙한 사람이라 할지라도 문득문득 곤혹스러울 때가 많다. 아무리 읽어도 그것이 뜻하는 바를 이해하기가 쉽지 않을 때가 많기 때문에 책장을 한 장 한 장 넘기는 일 자체가 고역일 때도 분명히 있다. 쇼펜하우어의 저서도 분명 그러한 고전 중 하나로 꼽히지만 그의 책은 조금 다르다. 문장을 길고 길게 늘어뜨리고 비유에 비유를 거듭해 원뜻을 파악하느라 애를 먹었던 다른 작가들에 비하면 그의 문장은 간결하고 명확하다. 그는 자신이 하고자 하는 말을 정확하게 표현하고 비유와 은유를 가져올지라도 어디서 그런 구절을 보았고 읽었는지를 분명히 남겼다. 독자가 접한 독일어에 대한 세 분의 해석이 다른 듯해서 헷갈리긴 한다. 그러나 이 책을 조금 더 읽어보면 세 분의 말이 모두 맞다고 인정할 수 있게 된다. 세 분의 표현이 다를 뿐 모두 같은 말을 하고 있는 데 독자의 수용이 제대로 안 됐을 뿐이다.

 


 

이 책은 위대한 철학자 쇼펜하우어가 날카로운 현실 감각과 직설적인 언어로 글로 옮긴 아포리즘 모음이다. 쇼펜하우어의 사상과 철학에 더 가깝게 가게 해준다. 철학이나 철학 책이 난해하다고 생각하며 거리감을 느끼던 독자에게도 이 책은 철학이 먼 곳에 있는 것이 아니고 바로 내 안에 있다는 생각이 들게 해준다. 특히 역자의 고심에 찬 번역과 편자의 새로 뽑아낸 제목, 이해 가능한 설명으로 엮어낸 스킬 등은 독자 입장에서는 제대로 된 철학 책 한 권을 얻은 셈이다. 이 책을 통해 철학을 어렵게만 생각할 게 아니라, 읽는 것만큼의 시간과 그 시간만큼의 사유를 겸한다면 친근해질 수 있는 학문이라는 것도 배울 수 있다. 편자의 현대어법에 맞는 제목의 재정리에 감사드린다.

살다 보면 누구나 ‘이렇게 사는 게 맞는 건가’ 하는 걱정이 들 때도 있다. 때로는 살아가는 것이 고통스럽고 힘들다고 느껴지기도 한다. 정신 없이 일에 매달려 경제적·사회적 안정을 얻었어도 공허함과 권태감이 여전히 내재해 있다는 사실에 문득 놀라기도 한다. 이런 감정이 잦아지면 우울해질 수도 있다. 이 같은 마음의 위기가 닥친다면 이 책을 펴들 것을 독자는 권유한다. 삶이 만족스럽지 않고, 따라서 행복감과 점점 멀어지는 것이 버릇처럼 몸에 배어 있는 것 같다. 이 책이 필요할 때다. 책을 펴드는 게 익숙지 않다면 일단 아무데나 펼쳐보면 된다. 이 책은 편의상 각 장으로 나뉘었고, 제목을 두었지만 언제 어디를 펴봐도 한결같이 '인생'과 '행복'에 대한 쇼펜하우어의 아포리즘(깊은 체험적 진리를 간결하고 압축된 형식으로 나타낸 짧은 글, 격언·경구·잠언 따위)이다. 대철학자 쇼펜하우어의 직설적인 조언을 담은 인생 지침서다. 쇼펜하우어는 이 책에서 인생은 고통 그 자체지만 이 고통이 살아갈 힘을 준다고, 부와 명예는 행복에 큰 영향을 끼치지 않는다고, 남에게 보여주고 평가받기 위해 인생을 낭비하지 말라고, 덜 불행하게 사는 것이 행복하게 산다는 것의 진짜 의미라고 말한다. 뿐만 아니라 마음의 위기는 부와 명예가 아닌 내면의 풍요로 극복된다고, 불행은 혼자 있을 수 없는 데서 생기기에 인간은 고독해야 한다고, 다독보다는 독창적 사고가 훨씬 더 중요하다고, 새 책이 아닌 과거의 위대한 고전부터 읽으라고 강조한다. 이 책에서 만날 수 있는 현명하고 솔직한 직언으로 세상일이 뜻대로 되지 않아 지친 현대인들이 자신의 모습을 되돌아보며 삶을 온전히 살아갈 힘을 얻을 수 있을 것으로 독자는 믿는다.

 


 

이 책은 2부 15장(章)으로 구성돼 있다. 1부는 〈행복론-삶의 지혜를 위한 아포리즘〉, 2부는 〈인생론-온전한 삶을 위한 아포리즘〉이다. 앞서 언급한 대로 편의상 구분이다. 1부에는 「인간의 행복에 영향을 주는 것에 대하여」, 「인간을 이루는 것에 대하여」, 「인간이 지니고 있는 것에 대하여」, 「인간이 남에게 드러내 보이는 것에 대하여」, 「우리 자신에 대한 우리의 태도에 대하여」, 「타인에 대한 우리의 태도에 대하여」, 「나이가 든다는 것에 대하여」 등 7개 장(章)이 있다. 2부는 「죽음에 의해 소멸하지 않는다는 것에 대하여」, 「생존의 허망함에 대하여」, 「세상의 고뇌에 대하여」, 「박식함과 학자에 대하여」, 「독자적 사고에 대하여」, 「독서와 책에 대하여」, 「교육에 대하여」, 「인생의 본질을 들려주는 비유와 우화」 등 8개 장으로 이루어져 있다.

쇼펜하우어는 「행복론을 시작하며」라는 제목의 〈머리말〉에서 "나는 이곳에서 인생의 지혜를 내재적인 개념, 즉 인생을 가능한 한 즐겁고 행복하게 사는 일종의 기술로 받아들이며, 이것은 또한 행복론에 대한 하나의 지침서라고 명명할 수도 있을 것이다. 따라서 이것은 행복한 존재의 안내서라 할 수 있겠다."고 썼다. 이러한 시각4은 다시 온전히 객관적으로 바라보거나 훨씬 더 냉정하게, 그리고 성숙하게 고찰해보면 이것이 존재하지 않는 것보다 우월하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개념에서 보면 우리 스스로는 단지 죽음에 대한 두려움 때문이 아니라 그 자체를 끊임없이 추구하고 있는 것이라는 결론이 나오며, 또한 그렇기에 우리는 그것이 영원히 계속되기를 바라는 것이다. 인간의 삶이 이러한 존재의 개념에 들어맞는 것인지에 대한 질문을 내게 한다면, 이에 대한 나의 철학적 관점은 부정적이다. 그 반면에 행복론은 긍정적인 결론을 전제로 하고 있다. 이것은 사실 오류를 내재하고 있는 것에 근거한 것으로,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문제 해결을 가능하게 하기 위해서 나는 나의 철학이 궁극적으로 가고자 하는 높은 형이상학적이고 윤리적인 관점을 포기해야만 했다."고 밝힌다.

이어 쇼펜하우어는 행복론이라는 단어 자체가 하나의 완곡한 표현에 불과하므로 그 가치도 제한적일 수밖에 없다고 설명한다. 여기서 더 나아가보면 마찬가지로 완벽함을 요구할 수도 없다. 이 주제는 끝날 수 없는 데다가 어떤 면에서는 이미 다른 사람들이 말한 것을 내가 다시 반복해야만 하기 때문이라고 덧붙이고 있다.

 


 

인간의 행복, 말하자면 자신의 존재를 통틀어 중요한 것은 분명히 그의 내면에 존재하거나 생겨나는 것임이 확실하다. 즉 바로 그곳에 무엇보다 인간의 느낌과 의지, 그리고 생각의 결과인 내면의 편안함 또는 불편함이 분명히 자리 잡고 있다. 즉 외부의 상황 자체는 그저 그러한 감정에 간접적인 영향을 미치는 것에 불과한 것이다. 그러므로 외부의 상황이나 사정이 똑같다고 하더라도 개개인에게는 완전히 다른 영향을 미치는 것이며, 동일한 환경에 살아가는 개개인들은 각각 다른 세계를 살고 있다. 사람은 자신만의 생각, 감정 그리고 의지를 가지며 단지 그러한 것에만 직접적으로 반응하기 때문이다. 외부의 것들은 그저 그러한 것들의 원인이 되는 경우에 한해서만 그들에게 영향을 미친다.(p.31)

 

행복론은 그 이름 자체가 완곡한 표현일 뿐이다. 행복하게 산다는 것은 덜 불행하게 사는 것, 즉 참을 정도만큼 산다는 의미로 이해되어야 한다는 가르침으로 시작해야 한다. 물론 인생은 실제로 즐기기 위해서가 아니라 고통을 견디고 끝내기 위해 있는 것이다. 이것을 라틴어를 표현하면 ‘degere vitam, vita defungi(그럭저럭 살아가며, 삶을 견뎌낸다)’이다.(p.108)

 

보통 젊은 시절을 인생의 행복한 시간으로, 노년기는 슬픈 시간이라고 부른다. 열정이 행복을 가져온다면 그것은 사실일 것이다. 젊은 시절에는 이러한 열정 때문에 이리저리 끌려 다니며 기쁨은 적고 고통이 크다. 차가운 노년기가 되면 열정은 그들을 내버려둔다. 노년기의 삶은 명상의 손길을 얻는다. 인식이 자유로워지고 우월적인 위치를 차지하기 때문이다. 이 인식은 그것 자체로는 고통이 없기 때문에 인식이 의식 속에서 우세할수록 인간은 더욱 행복해진다. 열정이 행복을 가져올 수 없고 어느 특정한 쾌락을 경험하지 못했다고 해서 노년을 한탄할 필요가 없다는 사실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모든 쾌락은 부정적이고 고통은 긍정적이라는 사실을 염두에 두어야 한다. 모든 즐거움이란 어떤 욕구를 만족시키는 것일 뿐이기 때문이다. 욕구가 충족되면 더 이상 즐거움도 없어진다는 사실은, 식사를 한 후에는 더 이상 먹을 수 없고 잠을 푹 자고 난 뒤에는 깨어 있어야 한다는 것처럼 그렇게 한탄할만한 일이 아니다.(p.203)

 


 

저자 : 아르투어 쇼펜하우어(Arthur Schopenhauer)

 

독일의 철학자이자 사상가. 유럽의 항구 도시인 단치히에서 상인이었던 아버지 하인리히 쇼펜하우어와 소설가인 어머니 요한나 쇼펜하우어의 장남으로 출생했다. 실존 철학은 물론 프로이트와 융의 심리학에 지대한 영향을 끼친, 19세기 서양 철학계의 상징적인 인물이다. 흔히 염세주의자로 알려져 있지만, 인간 삶의 비극적 면면을 탐구한 사상가이며, 그의 철학은 근대 철학에도 큰 영향을 미쳤다. 1788년 단치히에서 부유한 상인의 아들로 태어난 그는 1793년 함부르크로 이주해 성장했고, 아버지의 바람에 따라 한동안 상인 교육을 받았다. 그러나 1805년 아버지의 급작스러운 죽음을 계기로, 자신이 그토록 꿈꾸던 학자가 되기 위해 김나지움에 입학했다. 1811년 베를린대학교에 들어가 리히텐슈타인, 피셔, 피히테 등 여러 학자의 강의를 들었고, 1813년 베를린대학교 철학과에서 박사 학위를 따기 위해 「충분근거율의 네 가지 뿌리에 대하여」를 집필, 우여곡절 끝에 예나대학교에서 박사 학위를 받았다. 1819년 『의지와 표상으로서의 세계』를 출간한 후 1820년부터 베를린대학교에서 교편을 잡았고, 1839년 현상 논문 「인간 의지의 자유에 대하여」로 왕립 노르웨이 학회로부터 상을 받았다. 평생을 독신으로 살았으며, 1860년 9월 21일 자주 가던 단골 식당에서 식사 중 폐렴으로 숨진 후 프랑크푸르트 공동묘지에 안장되었다.

주요 저서로는 『논쟁에서 이기는 38가지 방법』『충족이 유율의 네 겹의 뿌리에 관하여』『의지와 표상으로서의 세계』 등이 있다.

 

편자 : 강현규

 

대학에서 국문학을 전공했으며 대학 졸업 후에 줄곧 출판기획자의 길을 걸어왔다. 최근에는 ‘고전 다시 읽기’라는 취지로 고전들을 원전의 가치를 해치지 않는 범위에서 흥미롭게 재구성해 엮어내고 있다. 엮은 책으로 『키케로의 우정에 대하여』 『혼자 있는 시간이 가르쳐주는 것들』 『반 고흐, 인생을 쓰다』 『지금, 여기, 당신』 『하루에 5번 긍정하면 인생이 행복해진다』 『이순신의 말』 『류성룡의 말』 등이 있다.

 

역자 : 이상희

 

중앙대학교 문예창작학과를 졸업하고 독일로 건너가 본대학교에서 번역학을 전공했다. 이후 출판사 편집팀장을 지내며 다양한 글을 기획하고 옮겨왔으며, 현재 번역 에이전시 엔터스코리아에서 출판기획 및 전문번역가로 활동 중이다. 옮긴 책으로는 『나는 아빠가 좋아요』, 『꼬마 거미의 질문 여행』, 『초등1학년 경제교육을 시작할 나이』, 『데미안』,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 등이 있다.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작성된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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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으로 간 고등어
조성두 지음 / 일곱날의빛 / 2023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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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근대사 중 천주교 박해, 일제 강점기, 한국전쟁 등 참혹한 수난의 시대를 살다간 할머니 어머니 딸 3대가 겪은 한 많은 고등어에 얽힌 삶을 풀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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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으로 간 고등어
조성두 지음 / 일곱날의빛 / 2023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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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작품을 읽을 때는 책부터 읽지만 가끔 출판사 측의 소개글을 먼저 읽는 적이 있다. 소개가 요란할 때다. 이 책에 대한 출판사 소개글은 소설가 황순원의 대표작 중 하나인 「소나기」를 떠올리기에 충분한, 소년·소녀의 순수한 사랑을 이야기한다고 쓰여 있었다. 황순원의 「소나기」와 알퐁스 도테의 「알프스의 소녀 하이디」, 박경리의 『토지』를 언급한다. 학창 시절 교과서에 실렸던 「소나기」는 아름답고 평화로운 느낌이어서 오래 기억에 남아 있다. 물론 그들의 순수한 사랑은 이루어지지 않은 채 비극으로 끝나지만 소설과 함께 '순수한 사랑'의 느낌은 독자의 가슴에 오래도록 남았다. 그때의 그 느낌으로 황순원이라는 작가를 좋아하고 그의 작품을 틈나는 대로 찾아 읽었다. 그 시절 기억이 이 소설 『산으로 간 고등어』를 통해서 다시 떠올랐다. 황순원의 문장은 간결하기로 유명하다. 아마 한국문학사에 길이 남을 간결체 문장으로 대표될 것이라고 생각했다. 『산으로 간 고등어』 역시 간결한 문장이어서 읽으면 읽을수록 소설의 내용이 가슴에 차곡차곡 쌓인다. 「소나기」는 소녀의 죽음으로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이란 비극으로 끝난다. 읽는 내내 가슴 졸일 정도로 순수한 사랑의 감정을 느꼈다.

『산으로 간 고등어』는 시대가 시대니만큼 소년·소녀의 사랑은 피바람을 몰고 온다. 1866년 충청남도 천안시 서북구에서 동남구 북면에 걸쳐 있는 해발 579m 성거산에는 신앙의 박해를 피해 숨어살던 이들이 있었다. 화전과 옹기를 굽고 살던 이 산골 마을에 고등어를 들고 온 소년이 등장하며 피바람이 예고된다. 산골소녀 초향과 봇짐장수 아들이자 간잡이 소년의 순수한 사랑이야기가 소설의 발단이 된다. "아름다운 사랑은 늘 비극이다"는 소설의 전형인 양 이들의 사랑도 아름답지만 비극으로 끝난다. 곧 집안 내부 고발자로 인한 인간 사냥과 가정의 풍비박산이 뒤따르기 때문이다. 소설의 시대적 배경은 '서학', '천주쟁이' 등으로 비하하고 탄압한, 성리학으로 대표되는 조선말 위정자들의 왜곡된 시선을 우리는 역사를 통해 배웠다. 당시의 사건으로 오늘날 무수한 주검이 묻혀있는 제1, 제2 돌무덤이 있는 성거산에 남아 있다고 소설은 전한다.

 


 

이때 박해의 진실을 캐는 듯, 소설의 서사는 1801년 신유년, 1839년 기해년, 1866년 병인년을 오가며 충청남북도와 경상북도 일대에서 벌어진 순교의 현장을 생생히 담았다. 과정에서 소설은 보부상단의 거래를 비롯 사랑의 약속과 신뢰라는 한 측면을 부단히 다룬다. 결국 부모님의 처형과 첫 사랑을 뒤로 하고 초향은 경북 청송으로 숨어든다. 초향은 이곳에서 자신을 두 번이나 구한 새로운 인물 박춘삼과 운명적인 만남을 가진다. 춘삼은 초향보다 스무 살이나 위다. 아버지뻘 노총각과 소녀의 사랑이야기이다. 소설은 경상북도 청송의 구수한 사투리와 함께 전래동화 우렁각시와 우렁 총각의 쫀득한 사랑을 넘나들며 곡절 많은 이야기를 펼쳐 보여준다. 결국 두 남자와 한 여자 사이 가슴 아픈 사연은 두 번째 남자 춘삼과 결혼으로 외동딸 송이가 태어나고 첫 남자 고등어 소년은 가슴에 묻는다.

이후 그 춘삼마저 죽자 초향과 송이 모녀는 서울 경성으로 자리를 옮긴다. 두 번째 주인공 송이는 조기에 신학문과 외국 문물을 접하며 신여성으로 성장한다. 때는 1910년에서 1920년 일제 강점기 시절, 한일 강제 병합으로 조선(대한제국)을 송두리째 집어 삼킨 일제는 곳곳에서 일어나는 의병 등의 저항을 무자비하게 짓밟는 등 강력한 무력을 앞세워 진압해 나간다. 이 시기(1910년~1919년)는 일제가 가장 강력하고 무자비한 탄압을 펼치던 시기다. 의식 있는 일부 지식인들은 탄압을 피해 만주 등지로 가서 독립군에 가입해 무장투쟁을 하고, 일부는 아직 일본의 힘이 미치지 않는 상해 등 중국 내륙으로 피신해 독립운동을 펼친다. 일부 지식인이 친일로 돌아서기 시작한 것도 이 무렵이다. 국내에는 민간인 비무장 저항 세력만 남은 상태로 우리 민족은 암울한 일제 강점기의 시대로 빨려 들어간 것이다. 이런 와중에 송이는 뛰어난 정구 실력과 빼어난 미모로 경성의 화형(꽃처럼 아름다운 여인)으로 주목받는다. 구한말 가톨릭계에 불어닥친 조선 정부의 탄압과 세계 열강들의 식민지 확대 다툼 한가운데로 내몰린다. 1894년 '개혁'이란 이름의 말뿐인 사회 변혁이 일어나지만 진짜 개혁이 필요한 소외 계층이나 신분이 낮은 계층의 개혁은 이루어지지 않는다. 구호뿐인 신분질서의 타파이고 사회 개혁이다. 일제 치하에서도 떠나지도 못한 채 조국에 남아 있던 민초들의 삶이야 오죽했겠는가? 이 소설은 송이 3대의 처절한 삶을 보여준다. 잘 살아도 비극이고, 못 살면 더 큰 비극인 시절이다.

 

 

『산으로 간 고등어』는 구한말부터 일제 강점기까지 삼대(3代)에 걸친 한 여인의 삶에 대한 150년의 기록이다. 배경 무대는 구한말 조선과 중국, 근대 한국을 종횡으로 몰리고 내쫒긴 유랑민 삶의 서사다. 신분 사회에서 피지배 계급, 하층민의 한스러운 상처들을 고스란히 감내해야 했던 여인들의 여정 이야기를 한 가정의 삼대에 걸친 서사로 담아냈다. 조선의 어머니와 딸들, 그녀들의 고단한 인생사라고 보면 맞다. 그러나 비극의 연속이지만 저자 조성두의 간결한 문체는 흐름을 빠르게 전개시켜 독자들의 지루함을 달래기에 충분하다. 비극은 감동을 자아내고, 눈물 짓게 하는 힘을 가졌다. 비극은 눈물로서 독자들에게 카타르시스를 주는 것 같다. 책을 펼치면 따라가야 하는 3대에 걸친 이야기는 물살을 가르는 시간과 공간은 잇댄 영화 속 파노라마를 보는 듯한 생생함이 살아 있다. 무엇보다 3대에 걸친 주인공 여인들의 강한 모습이 한몫한다. 딸 송이를 살리기 위해 이토히로부미와 함께 조선합병의 주역이었던 하야시 곤스케(はやしんすけ) 앞에서 고등어 회로 담판을 벌이는 장면도 자연스럽게 담아낸 저자의 능력은 이미 기성 작가들의 수준을 넘보는 듯하다. 2대 주인공 송이가 정구를 통해 펼치는 역동적 몸짓들은 하나같이 강렬하고 자주적인 캐릭터로서 읽는 이를 사로잡는다. 3대 주인공 유화(송이의 딸) 역시 전생과 피난사를 훑으며 인동초의 여인으로서 아려하면서도 끈질긴 인상을 준다. 이 소설이 개성 강한 주인공들의 이야기에 의해 독자들에게 깊이 각인되는 이유이기도 하다. 3대 주인공 유화는 독백처럼 말한다. "긴급한 피난이었다. 그렇게 떠난 피난 생활은 길 위에서 약 4년. 중국이라는 대륙을 종으로 북상했던 고등어 떠살이 가족이었다. 거리는 바다에 인접한 상하이에서 중국 서쪽 깊은 내륙인 충칭(重慶)까지 무려 1만 2천 리(약 4,700 킬로미터)."(p.226)

소설 속에서 고등어는 1대 주인공 ‘초향’과 봇짐장수의 아들인 ‘원이’와의 사랑의 계기가 된다. ‘원이’는 고등어를 염장해 파는 어머니가 간잡이기 때문이다. 또 이야기 흐름 내내 주인공들은 고등어를 각별히 자신들의 처지로 빗대고 있다. 또 지방에서 혹은 중국에서, 일본에서 불리는 명칭 그대로를 사용하며 시대성과 사실성을 높였다. 고등어 요리 역시 간고등어만 나오는 것이 아니라 '회로 먹는 고등어' 등 여러가지 요리법도 나온다. 모두 저자가 '고등어'를 염두에 두고 소설을 구상했고, 고등어에 대해 많은 듣고 먹었던 경험이 글을 쓰는 데 도움이 됐던 듯하다.

 


 

저자는 〈작가의 말〉을 통해 집필의 계기를 밝히고 있다. "십수 년 인연을 맺고 있는 이도우 대표가 운영하는 한식당이 계기가 됐다. 식당 이름이 '산으로 간 고등어'이다. 워낙 맛집으로도 유명한 데다 올곧은 외식 철학을 갖춘 그와 어느 덧 형·동생 하는 사이로 발전했는데, 문득 그 집 이름에 꽂혔다. 특히나 그의 가계가 정성으로 차리는 '고등어와 고향', '고등어와 어머니'는 마치 맨삶이 맛처럼 이 이야기의 본류를 움직였던 것 같다. 그렇게 책의 중심이 되는 재료를 갖췄다."고 말한다. 저자는 이와 함께 본격적인 착상은 익투스(ΙΧΘΥΣ)였다고 말한다. 익투스는 '물고기’요, 초기 기독교 신자들이 비밀스럽게 사용했다고 전해지는 기독교의 상징이다. 이 향기는 아픔이자 탄식 그리고 순명이며 의지이다. 왜 우리의 지금은 이러한가?를 밝혀 들어가기 위해 쓰기 시작했다는 말이다.

고등어는 못 먹고 없이 살던 시대의 대표적인 단백질 공급원이었다. 특히 깊은 산골에서 먹었던 간 고등어는 산야채와 더불어 그리운 어머니의 손맛이요, 고향의 향수를 상징한다. 소설은 이렇듯 시종 고등어와 어머니, 또는 ‘어머니와 고향’으로의 고등어 모녀들의 변주곡이다. 1대 초향의 멋진 고등어 변주는 이렇다. “송이야. 엄마는 고등어를 구울 때 갸들의 고진 사연을 함께 굽지. 조림을 할 때는 방아잎으로 녀석의 소중한 기억을 싸서 올리고. 다른 아이들도 매한가지. 사실 손님들은 그들의 이야기를 먹는 게야. 향기를 넣어 아그들의 속살까지 배어든 각각의 바다 이야기를 먹는 게야. 향기를 넣어 아그들의 속살까지 배어든 각각의 바다 이야기를 먹으면서 떠올리는 거지.”(p.136)

소설 시작 부분에서 고등어 요리를 두고 초향의 아버지 배문호(베드로)가 했던 말도 다시 떠오른다.

“우리는 방앳잎처럼 세상에 거부된 자들이오나 기실은 향기를 가진 사람들로 하늘을 사모하는 사람들입니다. 또 이 고데이(고등어의 경상도 청소 사투리)가 그렇습니다. 바다에 사는 이들이 어찌하여 산으로 올랐습니다. 천주여. 저희가 바로 산에 오른 고등어가 맞습니다. 또 당신께서도 베드로에게 너희는 사람을 낚는 어부라 하셨던 그 말씀처럼 저희가 바로 물고기이니 또 이런 고데이가 아닐 수 없습니다.”(p.36)

 


 

소설 『산으로 간 고등어』는 사라진 우리 산하의 아름다운 생태들과 고어, 그리고 사투리를 인상적인 시적 묘사로 맛깔스럽게 풀어낸 점도 돋보인다.

“여 어딩교? 아즈메, 우예 산만디(산마루)에 구디(구덩이)요? 아, 우얄꼬! 그 고운 얼굴로 우짜 껄뱅이(거지)처럼 사시려 하우?”(p.67)

·“아서! 와 니는 그카노? 개골창(깊은 도랑) 도째비 멀꺼디(머리카락) 서는 야심한 밤에! 내 짝지(작대기)라도 들고 따라 나서꼬마!”(p.71)

·“으으 저! 아망시(똥고집) 참 마티다(고집스럽다) 마텨. 도시 해거름(해질녘)도 아니고 칠흑에 칭계(계단) 없는 만대이(산 정상)까지. 그러다 방구(바위)에 미끄리다 다치면 어찌하우? 소까지(관솔, 송진이 많이 엉긴 소나무 가지)나 아궁이 깔비(솔가리, 소나무 가지를 땔감으로 쓰려고 묶어 놓은 것)라도 챙기자고 암만 그캐도!”(p.72)

·“말세라! 시대가 일패의 끝에 있으니 이 시국은 풍랑이요. 아기씨, 이 바닥도 기예를 받을 자는 없어지고 권번으로 내몰리니 세류가 혼탁하지요.”(p.152)

·“눈이 먼 하얀 세월이 가을이면 눈앞에서 성성일 것만 같은 이곳은 바람결에 묻어나는 어느 소년의 눅눅한 비린내와 함께, 그의 열린 앞섶에서 나오던 허기진 인내를 맞았던 소녀의 고즈넉한 슬픔이 담긴 하얀 시간의 둔덕이다.”(p.205)

이 소설을 읽고 나면 조선시대 말부터 일제 강점기를 거쳐 광복까지 우리 근대 역사에 새겨진 여인들의 가슴 아픈 향기와 함께 잔잔한 박동과 여운이 남는다. 그건 인간으로서 품위를 지키며 또한 믿음을 사수하며, 자신과 가족을 지켜낸 우리의 어머니, 또 그 딸들로 이어지는 사랑과 헌신이 오롯이 느껴지기 때문이다.

 

저자 : 조성두

 

“식물과 친해 웬만하면 죽이지 않고 오래 키운다. 27년째 동거 중인 녀석도 있다. 이런 친구들과의 이야기를 시와 함께 글을 써왔는데 문득 내 안에도 글나무가, 나의 시편들이 크고 있었음을 자각했다. 세상에! 내가 좋아하는 것이 무엇인지 이제야 깨닫다니! 나는 너무 늦은 사람이다. 대학에서 불문학을 전공했다. 철학도 잠깐 했고 교육과 방송 미디어쪽에서 주요 이력 이후 몇 가지 사업을 했다. 생명과 섭리, 그리고 소망, 소명에 대해서 앞으로 꾸준히 쓰고 싶다.”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작성된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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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부 2
조세래 지음 / 문예춘추사 / 2023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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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편 1권에서 기술했듯이 이 소설은 진실한 승부가 사라진 세상에 진정한 ‘승부’를 열망케 한다. 『승부』는 온전하고 진실한 승부가 존재하지 않는 지금 시대에 진정한 승부가 무엇인지를 깊이 있게 질문하는 소설이다. 승부의 참다운 모습은 외면당한 채 오직 이기는 것만이 승부의 절대적 가치로 인정받고 있는 세태를 비판하고자 작가는 바둑이라는 웅장한 투혼의 장을 기획했다. 이로써 우리나라가 낳은 4대 기성(棋聖) 여목 이상순과 그의 제자 설숙, 추평사, 그리고 추평사의 아들 추동삼, 이들 스승과 제자, 아버지와 아들이 대를 이어 조선의 자존심을 걸고 대륙과 섬을 넘나들며 펼치는 파란만장한 승부의 드라마가 펼쳐진다. 바둑 게임은 중국에서 유래됐다. 중국의 옛 사람들이 바둑을 만들었다. 수천 년 전이라고 하니 정확한 것은 바둑 관계자들은 알고 있겠지만 일반 사람들은 중국에서 온 게임이란 사실 이외에는 잘 알지 못한다. 중국의 문화를 온전히 받아들인 조선시대 이전부터 바둑은 우리 나라에 이미 도입됐던 사실이 기록으로 남아 있다.

바둑의 본디 말은 '바독'이다. 육당 최남선은 ‘바둑’이 돌·방위·옥석·이정표·체스 따위를 가리키는 인도네시아말 ‘바투(batu)’에서 왔다고 했다. 삼국시대에는 바둑을 위기(圍碁) 또는 혁기(奕碁)로 적었다고 한다. 한글이 없던 시대니 아마 바둑을 순우리말로 착각했을 법하다. 독자도 바둑은 순우리말로 알고 있었다. 그러나 고구려·백제·신라 등 삼국시대에 우리는 이미 바둑을 즐겼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 7세기 전반의 『구당서』에 “고구려에서 다른 놀이와 함께 바둑을 즐긴다.”고 적혀 있고(권199 ?고려전?), 『북사(北史)』에도 “고구려사람들은 여러 가지 놀이 가운데 특히 바둑을 가장 좋아한다.”는 기사가 있다(권94 ?고구려전?). 백제도 마찬가지다. 『수서』에 “백제에서 바둑을 즐겨 둔다.”는 기록을 남겼고(권81 ?백제전?), 6세기 중반기의 『주서(周書)』에도 “백제에 투호(投壺)·저포(樗蒲) 등의 잡희(雜戱)가 있으며, 그 가운데 혁기를 첫 손에 꼽는다.”는 내용이 보인다. 아닌게 아니라, 백제 개로왕은 바둑을 지나치게 즐겼다고도 한다. 21년(475) 거짓 죄를 짓고 온 고구려 승려 도림의 바둑 꾐에 빠져 고구려의 침공에 손을 쓰지 못하였고, 결국 목숨까지 빼앗겼다. 이로써 백제는 도읍을 웅진(公州)으로 옮기고 말았다(『삼국사기』 권25 ?백제 본기?). 신라도 예외가 아니었으며, 수준이 중국에까지 알려졌다.(동아시아의 놀이)

 


 

이처럼 바둑은 중국에서 유래된 것으로 바둑에서 쓰이는 용어들이 대부분 한자어로 돼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문자를 아는 사람들에 의해 주로 '놀이'로 이어진 것 같다. 같은 보드 게임인 장기 역시 한 번만 보더라도 중국에서 유래한 게임이란 것이 확실하다. 장기판의 말이 한(漢)과 초(楚)라는 왕이 있고 이 왕이 죽으면 게임이 끝난다. 중국의 삼국시대에 유래된 것으로 추측케 하는 증거다. 장기는 전쟁을 묘사한 보드 게임인데 비해 바둑에는 바둑알에 이렇다할 표식이 전혀 없다. 그냥 흑과 백색의 돌을 한 점씩 번갈아 바둑판 위에 놓아서 승부를 가린다. 바둑에 사용하는 용어들은 대개 한자어여서 바둑이 중국에서 유래했다는 추정은 합리적이다. 대부분의 용어가 전쟁에서 사용하는 용어가 주를 이루고 있지만 인간의 삶이나 우주의 원리를 표현하는 용어들도 바둑에 많이 사용된다. 그래서 '인생의 축소판'이란 별칭이 생겼을 것으로 보고 있다. 백과사전에 적인 몇 개의 용어를 예로 들어본다.

일수불퇴 (一手不退) : 바둑 헌법 1조 1항은 ‘일수불퇴’부터 시작된다. 이건 격언이라기보다는 규정이지만, 거역 못할 엄격함을 담고 있다. 무를 수 없는 건 인생도 마찬가지란 점에서 둘은 시작부터 닮아있다.

기자절야(棋者切也) : 바둑의 맛은 역시 끊음에 있다. 돌들이 끊어지면 쫓고 쫓기는 공방 속에 무궁한 변화가 생성되고 박진감이 증폭된다. 이 격언은 승부에 도움을 준다는 다른 격언들과는 달리 대국에 임하는 바람직한 자세를 권하고 있다.

특히 바둑인들의 바이블로 통하는 위기십결(圍棋十訣)은 아예 군대식 구호 일색이다. 부득탐승(不得貪勝), 사소취대(捨小就大), 신물경속(愼勿輕速), 기자쟁선(棄子爭先), 세고취화(勢孤取和)까지는 별 설명이 필요치 않다. 입계의완(入計宜緩, 적의 세력권에 들어갈 때 무모하게 서둘지 말라), 공피고아(功彼顧我, 적을 공격할 때 자신의 능력과 결점을 먼저 살펴라), 봉위수기(逢危須棄, 위험에 처할 경우 버려라), 동수상응(動須相應, 행마를 할 때 서로 유기적으로 전개하라), 피강자보(彼强自保, 주위의 적세가 강한 경우에 내 돌부터 보호하라)까지가 전체 내용이다.

 

 

우리나라 바둑 실력은 지금 여러 개의 세계 대회가 있어서 동아시아 3국이 자국의 바둑이 가장 강하다고 말하지만 지금은 아무래도 한국과 중국의 양대 세력으로 인정되는 형국이다. 한때 일본의 바둑이 세계에서 가장 강하다는 주장을 했고 훌륭한 전문기사들이 일본 바둑을 세계 최고의 자리에 올려놓았지만 실력은 명성만큼 따르지 않았다. 다만 일본 바둑이 가장 강하다는 주장은 일본이 아시아에서 가장 선진 부강한 나라로 떠오르면서 자신들이 주장한 이야기일 뿐이라는 사실은 바둑인들도 모두 인정하는 듯하다. 실제로 세계 대회 우승자는 1990년 응창기배(4년에 한 번씩 개최) 이후 각종 세계 대회가 생기면서 뚜렷하게 한국과 중국이 거의 대부분 우승자로 떠올랐다. 일본이 바둑이 강한 것은 일부 일본 바둑 기사들의 대단한 실력을 보였고, 새로운 바둑 원형을 계속 연구 개발해 냈기 때문일 것이다. 우리 바둑 전문 기사들도 일제강점기는 물론 해방 후 1970~1980년대까지는 일본으로 바둑 유학을 갔던 사람들이 대부분 우리 바둑사를 이끌어왔다는 점에서 일부 일본 바둑을 인정해주는 것일 뿐이다.

바둑이란 게임은 복잡 무쌍해 보이는 인생사와 신통하게도 닮았다. ‘바둑이 인생의 축소판’이란 말에 확신을 갖게 하는 것이 바둑 동네에서 회자되는 무수한 격언, 명구(名句)들이다. 반상(盤上)의 ‘공자말씀’들은 실제 사회에서도 삶의 지표로 훌륭히 적용된다. 강의 준비를 못한 인생 카운슬러 선생님들은 급한 대로 ‘바둑 격언집’ 들고 강의실 들어가도 절대 망신당하지 않는다. 앞서 용례를 든 한자어 투성이도 실제 한국 바둑의 위상이 올라가면서 우리말로 많이 바뀌었다고 한다. 독자도 이후 세대이기 때문에 한글로 풀어쓴 바둑 용어 서너 개쯤은 알고 있다.

‘미생마(아직 살지 못한 말)는 동행하라’ : ’단곤마는 몰지 마라’, ’양곤마를 만들지 마라’. 이 3개는 말만 다를 뿐 서로 일맥상통하는 동일 주제다. 적의 곤마(困馬: 생사가 불분명해 쫒기는 말)가 하나일 때 직선 공격을 가하는 것은 성공 확률이 매우 낮다. 하지만 두 개의 미생마가 뜨면 대마 하나가 잡히거나 상당한 대가를 지불해야 한다. 단곤마도 홀로 떠다니면 피곤한데, 상대 곤마와 같이 움직이면 공동부담이 돼 발걸음이 훨씬 가벼워진다.

남의 집이 커 보이면 바둑 진다 : 난데없는 시력(視力) 타령처럼 보이지만 승부에 임하는 자의 바람직한 자세를 포괄적으로 압축하고 있다. 정확한 형세 판단의 중요성을 일깨우는 말이다. 아닌 게 아니라 충분히 둘만 한 형세임에도 몇 칸 안 되는 남의 집을 깨러 들어갔다가 몽땅 죽이는 일이 얼마나 많았는가.

 


 

일본 바둑에 대한 가장 오랜 기록은 7세기 초에 나온 『수서』에 있다. “왜인은 기박(?博)·악삭(握?)·저포(樗蒲)를 즐긴다.”는 내용이다(?왜국전?). 일본의 한문시집 『회풍조』에도 “속성(俗姓)이 진씨(秦氏)인 변정법사는 성격이 쾌활하고 말도 잘 하였다. 어린 적에 출가하여 노자와 장자를 잘 알았다. 대보(大寶) 연간(701~703)에 당으로 유학을 가서 왕자 이융기와 바둑을 잘 두어 후한 대접을 받았다.”고 쓰였다. 진씨가 4세기말에서 5세기 초, 가야에서 건너간 사람인 점에 대해서는 일본에도 널리 알려져 있으므로 길게 설명할 것이 없다. 당시 일본에 대한 그들의 영향력은 절대적인 것이었다. 『진씨의 연구(秦氏の硏究)』 저자가 한 단원의 이름을 ‘일본 안의 조선인 왕국 ?진왕국?’이라고 붙인 것만 보더라도 이 사실이 충분히 짐작되는 것이다. 오늘날에도 12개소의 신사에서 진씨네 지도자였던 진하승(秦河勝)을 신으로 받들고 있는 점도 기억해둘 일이다. 또 『일본서기』 22권에 “백제에서 낙타 등의 동물을 보내 왔다.”는 기록이 있다. 낙타는 본디 일본에 없는 것으로, 티베트에서 백제를 거쳐 일본으로 들어간 바둑의 전파 경로를 알리는 것으로 볼 수도 있을 것이다.

초기 바둑판의 화점은 모두 아홉 개로 처음에는 백제식의 순장바둑을 두다가 당과의 교류에 따라 16점 배석에서 8점으로 바뀌고, 이것이 16세기에 이르러 현대 일본 바둑의 바탕이 된 것으로 보인다. 나라시대에는 궁정에서도 바둑을 즐겨 두었다고 한다. 『속일본기』 738년조에 궁에서 바둑을 두던 사람이 말다툼 끝에 상대를 칼로 찔렀다는 기사가 있다. 승부에 집착해 생명을 빼앗았다는 말이다. 8세기 후반부터 바둑에 관한 기록이 점차 나오고, 9세기 중반에는 천황이 대신들을 모아 바둑대회를 열기도 하였다. 701년에 나온 『대보령(大寶令)』 ?승니령(僧尼令)?에서도 “승니가 음악과 박희를 즐기면 백 일의 고역에 처한다. 그러나 기금(碁琴)은 예외”라 하여, 바둑을 우대하였다. 이어 11세기에는 귀족뿐 아니라, 여유를 누리는 계층 사람들도 큰 관심을 가졌다고 한다. 일본의 바둑은 백제와 가야를 통해 들어갔다는 사실이 명백하다.

 


 

2권의 이야기는 '동남기원'의 독립군(기원에서 거의 살다시피 하는 사람으로 아마 내기바둑을 두는 사람들의 이야기인 듯하다. 그들은 어느 정도 수준의 바둑을 두는 사람들로 바둑의 길을 걷다 중도에 하차한 사람들을 일컫는 속어)들의 이야기로부터 시작된다. 이들은 소설 속 화자의 역할을 하는 박 화백의 젊은 시절 이야기와 맞물린다. 이야기 줄거리는 송강, 마공, 허인 등의 유명한 이름들이 스치듯 지나가며 박 화백의 시선은 목적인 추평사의 아들 추동삼으로 향한다. 추평사는 생의 끝자락에서 아들 추동삼을 동문인 설숙에게 맡겼다. 그리고 설숙의 문하에서 자란 추동삼은 아비 추평사처럼 정명운과 또 다시 얽힌다.

세월이 흘러 정명운은 국수 10연패를 이룬 당대 최고가 되고 전문기사가 되고, 추동삼은 내기바둑을 두는 방랑기객이 된다. 이들의 이야기가 서로 교차하며 펼쳐지고, 마지막에에는 박 화백과 벽송이 남는다.

소설에서 주요 인물의 무게는 설숙과 정명운 보다는 추평사와 추동삼에 좀 더 기울어져 있다. 더 극적이고 승부를 겨루는 승부사의 기질에 더 걸맞아서일 것으로 추정된다. 벽송의 주인은 여목에서 설숙, 설숙에서 정명운으로 이어지지만 박 화백을 통해 그 주인이 실은 추평사와 추동삼이었음을 말하고 있다. 그러나 결국 벽송은 추평사와 추동삼으로 이어지지 못하고 끝내 박 화백의 손에서 그 운명을 마감한다. 소설 서사의 주위에만 자리 잡고 있던 박 화백이 실은 서사의 중심에 있는 구성이 소설적 재미를 더하는 데 분명 한몫했다고 독자는 생각한다.

우리나라 사람이면 다 아는 전문기사 조훈현도 이 책에 대한 추천평에서 "소설 『승부』는 나에게 승부라는 화두를 다시 한 번 일깨워준 작품이다."고 썼다. 또 그의 제자이자 한국 2세대 바둑 황제 이창호도 "이 책은 한중일 근현대사를 배경으로 대를 이은 두 승부사의 파란만장한 대서사극이다. 이름 없이 사라져간 승부사들을 처연하게 다루지만 승자와 패자가 나뉘는 승부의 특성만큼 장쾌한 소설적 재미를 더하였다. 소설 『승부』와 더불어 바둑의 시대가 다시 한 번 도래하기를 기대해본다."고 평가했다.

 


 

소설 『승부』는 저자 조세래 삶의 철학이 온전히 담겨 있고, 저자의 삶의 굴곡은 영화 〈스톤〉에 담겨 있다고 말한다. 그가 바둑과의 인연과 심취한 과정을 영상으로 담아낸 영화가 〈스톤〉이다. 글로 바둑을 통해 자신의 인생 철학을 말한 것이 『승부』라면, 저자의 영화 감독 데뷔작이자 유작이 된 〈스톤〉은 영상으로 인생과 바둑 철학을 표현했다고 평가받고 있다. 독자가 〈스톤〉을 본 적이 없어 〈위키백과〉의 힘을 빌어 영화 스토리를 짧게 옮긴다.

“왜 깡패가 됐어요?” 프로기사의 꿈을 접고 내기 바둑으로 하루하루를 살아가는 천재 아마추어 바둑기사 ‘민수’(조동인). 그는 우연한 기회에 조직 보스 ‘남해’(김뢰하)의 바둑 선생이 되면서 새로운 세상에 눈뜨게 된다. “인생이 바둑이라면 첫 수부터 다시 두고 싶다” ‘민수’는 ‘남해’에게 바둑을 가르치면서 인생을 배워간다. 하지만 ‘남해’의 권유로 다시금 프로 입단 시험을 준비하는 ‘민수’와 조직을 떠날 준비를 하면서 마지막으로 건설 용역에 뛰어든 ‘남해’의 결정적 한 수 앞에 예상치 못한 위험이 다가오는데… 361개의 선택점, 이제 그들의 이야기가 시작된다. 그러나 아쉽게도 조세례는 영화가 개봉되기 전 2013년 11월 25일 57세의 나이로 타계했다.

1991년 시나리오 작가로 충무로에 입성한 조세래 감독은 전지영 감독과의 인연 이후로 점차 시나리오 작가, 조감독으로 자리 잡게 된다. 그리고 기획한 바둑 영화 〈명인〉은 상업성이 부족하다는 이유로 제작이 무산됐고, 조세래 감독은 영화계를 떠난다. 영화계를 떠난 조세례는 소설 『역수』를 선보이고, 개정판이 나온 10년 뒤 영화계로 복귀하여 〈스톤〉을 내놓는다.

 

소설 『승부』는 2권 박 화백이 벽송을 해봉처사가 입적할 때 다비식 불에 던짐으로써 끝난다. "벽송 주위로 불길이 모여드는 싶더니 삽시간에 그 불길은 반면을 그슬리며 벽송 위로 번졌다. 불길은 이내 피어올라 주위를 밝히고 밤하늘에 찬연히 불타오른다. 벽송이 타고 있었다. (중략) 여목의 웅혼이 타고 있었다. 설숙의 심혼이 타고 있었다. 평사의 슬픔이 타고 정 국수의 고뇌가 타고 있었다."(2권, p.402~403)

 

저자 : 조세래

 

소설가, 시나리오 작가. 1957년 경상북도 예천에서 태어났다. 20대 중반에 영화계에 진출, 〈산산이 부서진 이름이여〉(1991)로 춘사영화제 각본상 수상, 〈하얀전쟁〉(1992)으로 제5회 동경국제영화제 작품상 수상, 제31회 대종상 각색상을 수상했다. 영화 〈스톤〉(2014) 각본, 감독으로 부산 국제영화제, 로카르노 국제영화제 등 국내외 유수 영화제에 초청, 수상했다.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작성된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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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부 1
조세래 지음 / 문예춘추사 / 2023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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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둑은 옛날 중국에서 전해져 온 하나의 '놀이'다. 남녀노소 즐길 수 있는 게임이다. 바둑을 두기 위해서는 바둑판과 바둑돌(바둑알)만 있으면 된다. 대부분의 게임이 그렇듯 승패를 가르는 게임이다. 바둑이 끝나면 승자와 패자가 있기 마련이다. 바둑돌은 흑과 백이 있으며, 가로 19줄 세로 19줄의 그어 교차점에 흑부터 한 수 한 수 벌갈아 둔다. 가장 기본적인 게임의 법칙은 흑부터 한 수씩 번갈아 둔다는 것이다. 흑 혹은 백이 직선으로 뻗어 있으면 '이어진' 것이고, 대각선으로 뻗어 있으면 이어지지 않은 형태다. 서로 번갈아 두기 때문에 항상 선수(先手)가 유리하다. 바둑은 살아남은 돌들로 지은 집의 수를 합쳐 승부를 가른다. 이 때문에 '덤'을 후수인 백에게 미리 준다. '덤 4집 반' 덤 5집반' '덤 6집반'이란 말을 들어본 사람이면 왜 백에게 미리 집을 주는지 알 것이다. 반상 위에는 '반집'은 존재하지 않는다. '반집'은 비기는 경우를 없애기 위해 마련된 가상의 숫자일 뿐이다. 가령 흑백 집의 수를 가려 흑이 5집의 차이로 이겼으면 '덤 4집반'의 경우 반집을 이긴 셈이 된다. 덤 5집반이라면 반집을 진 것으로 계산해서 승패를 가린다. 덤 제도는 언제 처음 시작했는지 모르지만 바둑이 발전하면서 선수의 중요성과 유리함을 감안해서 계속 1집씩 올렸다. 지금 우리나라와 일본에서 6집반, 중국에서는 7집반의 덤 제도가 있다.

바둑을 전쟁이나 인생에 비유하는 경우가 많다. 이기기 위해서 집을 많이 차지해야 하는 게임이기 때문에 집이 부족하다고 판단되면 상대의 집을 줄이거나 내 집을 늘려야 한다. 이때 서로 죽이고 살리는 수법이 전쟁처럼 변화무쌍하다는 점에서 전쟁에 사용하는 용어들이 수없이 많다. 또 전략도 따른다. 때로는 몇 개의 돌을 희생해가며 요충지를 확보해 집을 늘리거나 상대의 돌을 죽이기도 한다. 게임에서 승부는 불가피하다. 평화롭게 해결하자고 서로 비기는 작전을 쓸 수도 없다. 아예 비기는 일을 차단하기 위해 '반집' 제도를 두었기 때문이다. 전쟁에 이기거나 삶의 경쟁에서 목숨 걸고 싸우듯이 바둑판 위의 싸움도 그 모든 것을 담아내고 있다. 그래서 바둑판을 '인생의 축소판'이라고도 한다.

 


 

이 책 『승부』는 바둑두는 기사(棋士)들의 이야기다. 기사는 바둑을 두는 사람을 일컫는 말로, 생업으로 바둑을 두는 기사를 '전문기사' 또는 '프로기사'라고 한다. 놀이가 생업이 될 수 있나?라고 의문을 가진 사람은 우리나라에는 없을 것이다. 동양 특히 한국·중국·일본 등 동아시아 3국은 중국에서 유래한 바둑을 오래동안 두어 왔기 때문에 대단한 실력을 갖춘 바둑의 천재들이 많다. 그들은 엄격한 바둑 수업을 거쳐 혹독한 훈련과 노력으로 프로기사가 되기까지 얼마나 많은 눈물과 땀을 흘렸는지 바둑 애호가들은 잘 알 것이다. 요즘의 바둑기사는 전문직으로 고액연봉자 못지 않은 돈을 벌 수도 있다. 물론 모든 기사들이 다 그럴 수는 없지만. 대회에서 상금을 받지 못하더라도 일부 기사들은 기원을 개업해 후진 양성 겸 생업으로 삼을 수도 있다. 그만큼 바둑을 좋아하고, 두는 사람들이 많기 때문이다. 우리나라의 경우 바둑 동호인이 500만 명이 넘는다고 하니 어쩌면 축구 다음으로 많은 팬을 갖고 있지 않나 싶다. 독자는 동네 아저씨들이 바둑 두는 것을 어깨 너머로 보다가 겨우 바둑의 초급 수준인 10급 정도이니, 굳이 군대 계급으로 치면 '기졸(棋卒)'쯤 될 것 같다. 그마저도 그 정도라고 하는 게 정식으로 호칭을 받은 것이 아니라서 너무 자신을 내세운 게 아닌가 부끄럽기도 하지만. 훈련도 안 거친 게 어떻게 계급을 부치려나 욕이나 안 먹을지...

바둑의 세상은 놀이로 하기에는 호락호락한 곳이 아니다. 승부를 겨루는 게임이고, 요즘 대부분의 게임이 '승자독식' 구조라 패자는 모든 것을 잃고 승자가 모든 것을 가져가는 승부로 변질되어 지나치게 승리에만 집착한다는 비판도 일부에서 제기된다. 바둑은 일종의 도(道)라고 생각하는 정통 바둑인들에게는 기리(棋理)에 따르지 않고 변칙과 술수로만 이기려는 사람들이 마땅치 않을 터다. 그러나 게임엔 이겨야 한다는 것은 전쟁에서 하는 말이다. 전쟁을 하지 않아야 하지만 불가피한 전쟁에 뛰어들었다면 당연히 이기고 난 다음에 할 말을 할 수 있다는 논리를 가진 사람의 말에도 귀를 기울여야 이는 세상 탓을 할 일이지, 사람 탓을 하지 말아야 한다는 항변도 설득력은 있다.

 


 

이 소설은 진실한 승부가 사라진 세상에 진정한 ‘승부’를 열망케 하는 소설이다. 앞서 독자가 언급한, 전쟁에서 얻을 것(전리품)을 미리 앞세우지 않고 '승부' 자체를 겨루는 일을 극화한 것이다. 소설의 모델이 되는 사람이 있는지는 저자 조세래만 알 일이다. 혹시 바둑에 깊이 관여한 프로 기사들 사이에는 알지 모르겠지만 우리처럼 바둑을 놀이로 즐기는 애호가들로서는 알지 못하는 인물들이 소설의 주요 인물들이다. 독자의 경우 옛날 바둑에 대해서는 "조선말이나 일제강점기 시절, 바둑 잘 두는 사람이 천하를 주유하며 바둑을 두었지만 적수가 없었다. 그러나 세상을 떠돌던 그가 다시 세상이 안정돼 국내 프로 기사와 바둑을 두어 형편 없이 졌다던데..." 하는 전설 같은 이야기는 들었다. 정작 이 소설의 주인공이 되는 사람들은 그런 모습과도 다른, 저자가 창조한 캐릭터일지도 모른다. 이 때문에 이 소설은 온전하고 진실한 승부가 존재하지 않는 지금 시대를 비판하는 속뜻을 담은 진정한 승부가 무엇인지를 깊이 있게 질문하는 소설이기도 하다. 승부의 참다운 모습은 외면당한 채 오직 이기는 것만이 승부의 절대적 가치로 인정받고 있는 세태를 비판하고자 저자는 바둑이라는 웅장한 투혼의 장을 기획했다고 밝히고 있기 때문이다. 책에서는 우리나라가 낳은 4대 기성(棋聖) '여목 이상순'과 그의 제자 '설숙', '추평사', 그리고 추평사의 아들 '추동삼', 이들 스승과 제자, 아버지와 아들이 대를 이어 조선의 자존심을 걸고 대륙과 섬을 넘나들며 펼치는 파란만장한 승부의 드라마가 펼쳐진다. “새는 새장을 벗어나야 님을 찾고, 고기는 통발을 물리친 후에야 대해로 나아가며, 승부사는 승부를 떠나야 진정한 승부사가 된다”는 〈작가의 말〉은 『승부』 전편에 장엄하게 흐르는 기상이다. 바둑으로 펼쳐진 뜨거운 삶, 삶으로 은유된 위대한 바둑이 실로 『승부』의 서사인 것이다.

저자는 〈작가의 말〉을 통해 이 소설을 쓰게 된 취지를 밝히고 있다. "승부(勝負)는 승과 패를 나누는 것으로, 사회가 빈곤하다거나 인간이 외로울 때 더욱 빈번해진다. 그런 것이니만큼 투철하고 용맹스러우며 때로는 안타깝고 슬픈 것이기도 하다. (중략) 언제부턴가 시중에는 승부란 단어가 무수히 나돌고 있다. 세상이 다각도로 변모하면서 매사가 승부 혹은 승부 정신으로 연관되어 있어 흡사 승부의 시대를 방불케 한다."(1권, p.5)

 

 

〈작가의 말〉에 따르면 승부는 인간에게 숙명적인 것일 수도 있다. 우리는 살면서 수많은 승부를 만난다. 남을 이기기 위한 승부, 자신을 지켜야 하는 승부, 정도에 벗어난 승부, 경우에 따라선 피치 못할 승부, 자신을 버려야 하는 승부 등 승부는 늘 우리 주변에 있다. 이렇듯 승부는 일상사가 되어버렸는데 아직까지 승부에 대한 올바른 인식이 부족하고 그 뜻조차 변질되고 오도되어 가는 것이 작금의 현실이다. 승부의 참다운 모습은 외면당한 채 오직 이기는 것만이 승부의 절대적 가치로 인정받고 있다.

오늘날 진정한 승부사는 찾아볼 수 없고 사이비 승부사만이 득실거리는 것도 승부의 도(道)를 망각한 채 욕(慾)을 다스리지 못하고 교만과 독선에 빠진 극단적 개인주의의 팽배 때문일 것이다. 한 나라를 경영하는 자들이 승부사로서의 자세가 정직하지 못하면 그 나라꼴이 어떻게 되겠는가. 사회 지도층이란 자들이 올바른 승부 정신은 없고 간교하고 비열한 승부에만 물들어 있다면 세상 꼴이 또한 어떻게 되겠는가. 혹세무민하는 자도 승부사가 아니요, 잡사(雜事)에 연연하는 자도 승부사일 수 없다.

승부사는 맑고 정직해야 하며 강직하고 깊어야 한다. 그것이 승부가 끝나는 날까지 지켜야 할 승부사로서의 도리다. 저자의 승부관과 세상관, 인간관이 모두 드러나는 말들이 〈작가의 말〉을 통해 드러나고 있다. 이는 모두 이 소설에 반영되었을 것이고, 이런 그의 인생관은 이 소설이 주는 흥미만큼 풍요롭고 간명하다. 독자들이 이 작품을 통해 느끼는 점이 있다면 저자는 혼신의 힘을 다한 집필의 보람이 클 것으로 독자는 추정한다.

이 소설은 승부로 전 생애를 불사른 인간들의 삶을 이야기하고 있다. 역사가 이긴 자의 기록이듯 승부 역시 이긴 자의 축제인지 모른다. 저자는 각계각층의 수많은 승부사들을 잊지 말아달라는 부탁을 독자들에게 말하는 이유는 그들이 남긴 숭고한 승부 정신을 헛되이 하지 말고 후세 사람들이 본받아 앞날의 지표로 삼기를 바라는 마음에서다. "인간은 결국 승부에 땅에서 태어나 승부의 저자거리를 헤매다가 승부의 강을 건너 비로소 승부가 망각된 피안(彼岸)의 세계로 간다."는 저자의 문장이 오래 기억에 남는다.

 


 

이 소설 작품 『승부』는 1, 2권 두 권으로 이루어져 있다. 1권의 이야기는 박민수 화백과 정명운 국수의 만남으로부터 시작된다. 국수란 명칭은 우리나라에서 바둑을 제일 잘 두는 사람에 대한 존칭이다. 박 화백은 남종화 계열의 화가로 거장의 반열 문턱에 자리 잡고 있다. 화단 바둑계에서 일인자로 통하는 인물이다. 그런 박 화백에게 정 국수의 며느리인 김 여사가 화단을 통해 정 국수의 초상화를 의뢰했다. 박 화백은 고민 끝에 정 국수를 만나고, 정 국수와의 만남에서 벽송(碧松·벽송이 제작한 바둑판)을 전달받는다. 추동삼이란 이름과 함께. 망설임 끝에 정 국수의 사망을 뒤로 하고 박 화백은 추동삼을 추적해 들어간다. 바둑은 게임이기 때문에 자칫 잘못 사용하면 도박으로 오용되기도 한다. 앞서 말한 승리에 집착하는 이유다. 당연히 정통 바둑계는 이를 엄격히 구별한다. 돈 내기 등 일체의 '내기 바둑'을 금지한다. 그러나 공식 바둑계가 아닌 사사로이 자기들끼리 모여 바둑 두며 하는 내기나 어떤 전문 기사가 맞붙을 경우 자기들끼리 돈을 낸다든지 하는 것까지 막을 수는 없을 터다.

그러나 바둑을 통해 내기를 하는 일은 법에서 '도박'으로 분류하기 때문에 정식으로 돈을 걸거나 내기를 하는 것은 용인되지 않는다고 한다. 현재 우리나라에서 진행하는 두세 개의 세계바둑대회는 돈 내기가 아닌 가장 바둑을 잘 둔 기사에게 주는 상금이고 공인된 대회다. 이런 국제 규모의 대회에서 활동하는 전문 기사들은 각국이 인정한 전문기사, 프로기사들이다. 상금액수가 큰 것은 그만큼 협찬사들이 돈을 많이 내주기 때문이다. 바둑팬이 많은 탓에 광고 효과가 엄청나다고 알려져 있다. 1권에선 박 화백이 추동삼을 찾아가는 과정에서 일반 기원 분위기와 또 거기서 자기들끼리 내기 바둑을 두는 사람들이 등장하지만 일부 기원에서 하는 일이지 전체 기원의 분위기는 아닌 듯하다. 이야기가 진행되면서 저자 조세래는 한국 바둑의 근원을 조선 말기로까지 끌고 간다. 이때의 바둑 고수 여목으로부터 이야기가 시작되는 것이다. 책에 따르면 여목은 원세개와의 인연으로 중국으로 건너가 그 땅에 짙은 족적을 남기고, 이후 정통성을 상징한 벽송을 받는다. 여기서부터 이야기는 여목의 제자 설숙과 추평사로 이어지며, 이 둘의 서사는 극렬한 대비를 이룬다.

 


 

여목의 적통을 이은 설숙과 달리 추평사는 모종의 사건으로 떠돌이 내기꾼이 되어 고단한 여정을 이어간다. 그리고 그 끝에 일본 내기바둑계 최고 승부사로 꼽히는 시라이시와 생명을 건 승부를 펼친다. 그리고 이렇게 1권의 이야기가 끝난다. 이처럼 이 소설 『승부』는 박 화백을 중심으로 하여 시간과 공간을 오가며 여목으로부터 뻗어간 그 제자들의 승부를 다룬다. 승부의 서사는 치열하고 처절하다. 특히 백돌과 흑돌처럼 배열된 설숙과 추평사의 삶의 대비에서 이러한 서사의 색채는 더욱 도드라진다.

“뜨겁게 타오르다 아름답게 스러져간” 바둑 영웅들의 이야기를 담은 『승부』의 서사는 바둑 애호가들에게는 매혹 그 자체다. 등장인물들의 투혼이 사뭇 애절하고 지독히 고통스러우며 지나치게 아름답다. 한마디로, 일단 읽기 시작하면 잠시도 눈을 뗄 수 없는, 몰입감이 탁월한 소설이다. 소설이라는 장르가 갖는 힘, 소설의 숭고한 목적이 가장 적극적으로 구현된 서사가 아닐 수 없다. 저자의 표현력도 매우 뛰어나 마치 눈앞에서 펼쳐지는 광경을 보는 듯 생생하고 한 편의 영화 장면을 설명하든 정교하다. 어쩌면 영화계에 몸담은 영향을 받은 것 아닌가 추정되기도 한다.

저자는 바둑이라는 대결이 갖는 옹골찬 승부의 세계에 천착해 바둑을 소재로 한 영화 〈스톤〉을 감독했다고 한다. 저자는 바둑이야말로 삶의 희로애락을 가장 극적으로 담고 있는 스포츠라고 여기는 것 같다. 바둑의 본질은 승부이고 승부의 본질은 인간이라고. 그래서 바둑과 인간의 삶을 등치한 것이다. 소설 『승부』는 삶이라는 승부의 장에서 우리들 각자가 어떤 승부의 모습을 끌어안을 것인지를 숙고하게 하는 소설이다. 그 숙고의 힘이 독자들 각자의 ‘오늘 이후’를 보다 생명력 있는 승부의 세계로 나아가게 할 것이다.

1권의 마지막 장면에 일본 내기바둑 사상 최고의 승부사로 손꼽히는 시라이시와 추평사와의 대국 장면이 펼쳐진다. 공식 바둑 대결이 아닌 승부를 건 도박 행위지만 바둑으로 승부를 가리는 것이다. 극적 장면을 연출하기 위한 표현력을 가리키는 좋은 문장으로 보인다. "웅크리고 있던 평사의 상체가 서서히 펴진다. 평사의 눈이 반상을 비스듬히 쏘아본다. 순간, 그 찌든 눈에서 살기 같은 것이 쏟아진다. 얼굴은 간데없고 눈만 살아 있는 기이한 형상이다."(p.405)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작성된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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