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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부 2
조세래 지음 / 문예춘추사 / 2023년 12월
평점 :
전편 1권에서 기술했듯이 이 소설은 진실한 승부가 사라진 세상에 진정한 ‘승부’를 열망케 한다. 『승부』는 온전하고 진실한 승부가 존재하지 않는 지금 시대에 진정한 승부가 무엇인지를 깊이 있게 질문하는 소설이다. 승부의 참다운 모습은 외면당한 채 오직 이기는 것만이 승부의 절대적 가치로 인정받고 있는 세태를 비판하고자 작가는 바둑이라는 웅장한 투혼의 장을 기획했다. 이로써 우리나라가 낳은 4대 기성(棋聖) 여목 이상순과 그의 제자 설숙, 추평사, 그리고 추평사의 아들 추동삼, 이들 스승과 제자, 아버지와 아들이 대를 이어 조선의 자존심을 걸고 대륙과 섬을 넘나들며 펼치는 파란만장한 승부의 드라마가 펼쳐진다. 바둑 게임은 중국에서 유래됐다. 중국의 옛 사람들이 바둑을 만들었다. 수천 년 전이라고 하니 정확한 것은 바둑 관계자들은 알고 있겠지만 일반 사람들은 중국에서 온 게임이란 사실 이외에는 잘 알지 못한다. 중국의 문화를 온전히 받아들인 조선시대 이전부터 바둑은 우리 나라에 이미 도입됐던 사실이 기록으로 남아 있다.
바둑의 본디 말은 '바독'이다. 육당 최남선은 ‘바둑’이 돌·방위·옥석·이정표·체스 따위를 가리키는 인도네시아말 ‘바투(batu)’에서 왔다고 했다. 삼국시대에는 바둑을 위기(圍碁) 또는 혁기(奕碁)로 적었다고 한다. 한글이 없던 시대니 아마 바둑을 순우리말로 착각했을 법하다. 독자도 바둑은 순우리말로 알고 있었다. 그러나 고구려·백제·신라 등 삼국시대에 우리는 이미 바둑을 즐겼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 7세기 전반의 『구당서』에 “고구려에서 다른 놀이와 함께 바둑을 즐긴다.”고 적혀 있고(권199 ?고려전?), 『북사(北史)』에도 “고구려사람들은 여러 가지 놀이 가운데 특히 바둑을 가장 좋아한다.”는 기사가 있다(권94 ?고구려전?). 백제도 마찬가지다. 『수서』에 “백제에서 바둑을 즐겨 둔다.”는 기록을 남겼고(권81 ?백제전?), 6세기 중반기의 『주서(周書)』에도 “백제에 투호(投壺)·저포(樗蒲) 등의 잡희(雜戱)가 있으며, 그 가운데 혁기를 첫 손에 꼽는다.”는 내용이 보인다. 아닌게 아니라, 백제 개로왕은 바둑을 지나치게 즐겼다고도 한다. 21년(475) 거짓 죄를 짓고 온 고구려 승려 도림의 바둑 꾐에 빠져 고구려의 침공에 손을 쓰지 못하였고, 결국 목숨까지 빼앗겼다. 이로써 백제는 도읍을 웅진(公州)으로 옮기고 말았다(『삼국사기』 권25 ?백제 본기?). 신라도 예외가 아니었으며, 수준이 중국에까지 알려졌다.(동아시아의 놀이)
이처럼 바둑은 중국에서 유래된 것으로 바둑에서 쓰이는 용어들이 대부분 한자어로 돼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문자를 아는 사람들에 의해 주로 '놀이'로 이어진 것 같다. 같은 보드 게임인 장기 역시 한 번만 보더라도 중국에서 유래한 게임이란 것이 확실하다. 장기판의 말이 한(漢)과 초(楚)라는 왕이 있고 이 왕이 죽으면 게임이 끝난다. 중국의 삼국시대에 유래된 것으로 추측케 하는 증거다. 장기는 전쟁을 묘사한 보드 게임인데 비해 바둑에는 바둑알에 이렇다할 표식이 전혀 없다. 그냥 흑과 백색의 돌을 한 점씩 번갈아 바둑판 위에 놓아서 승부를 가린다. 바둑에 사용하는 용어들은 대개 한자어여서 바둑이 중국에서 유래했다는 추정은 합리적이다. 대부분의 용어가 전쟁에서 사용하는 용어가 주를 이루고 있지만 인간의 삶이나 우주의 원리를 표현하는 용어들도 바둑에 많이 사용된다. 그래서 '인생의 축소판'이란 별칭이 생겼을 것으로 보고 있다. 백과사전에 적인 몇 개의 용어를 예로 들어본다.
일수불퇴 (一手不退) : 바둑 헌법 1조 1항은 ‘일수불퇴’부터 시작된다. 이건 격언이라기보다는 규정이지만, 거역 못할 엄격함을 담고 있다. 무를 수 없는 건 인생도 마찬가지란 점에서 둘은 시작부터 닮아있다.
기자절야(棋者切也) : 바둑의 맛은 역시 끊음에 있다. 돌들이 끊어지면 쫓고 쫓기는 공방 속에 무궁한 변화가 생성되고 박진감이 증폭된다. 이 격언은 승부에 도움을 준다는 다른 격언들과는 달리 대국에 임하는 바람직한 자세를 권하고 있다.
특히 바둑인들의 바이블로 통하는 위기십결(圍棋十訣)은 아예 군대식 구호 일색이다. 부득탐승(不得貪勝), 사소취대(捨小就大), 신물경속(愼勿輕速), 기자쟁선(棄子爭先), 세고취화(勢孤取和)까지는 별 설명이 필요치 않다. 입계의완(入計宜緩, 적의 세력권에 들어갈 때 무모하게 서둘지 말라), 공피고아(功彼顧我, 적을 공격할 때 자신의 능력과 결점을 먼저 살펴라), 봉위수기(逢危須棄, 위험에 처할 경우 버려라), 동수상응(動須相應, 행마를 할 때 서로 유기적으로 전개하라), 피강자보(彼强自保, 주위의 적세가 강한 경우에 내 돌부터 보호하라)까지가 전체 내용이다.
우리나라 바둑 실력은 지금 여러 개의 세계 대회가 있어서 동아시아 3국이 자국의 바둑이 가장 강하다고 말하지만 지금은 아무래도 한국과 중국의 양대 세력으로 인정되는 형국이다. 한때 일본의 바둑이 세계에서 가장 강하다는 주장을 했고 훌륭한 전문기사들이 일본 바둑을 세계 최고의 자리에 올려놓았지만 실력은 명성만큼 따르지 않았다. 다만 일본 바둑이 가장 강하다는 주장은 일본이 아시아에서 가장 선진 부강한 나라로 떠오르면서 자신들이 주장한 이야기일 뿐이라는 사실은 바둑인들도 모두 인정하는 듯하다. 실제로 세계 대회 우승자는 1990년 응창기배(4년에 한 번씩 개최) 이후 각종 세계 대회가 생기면서 뚜렷하게 한국과 중국이 거의 대부분 우승자로 떠올랐다. 일본이 바둑이 강한 것은 일부 일본 바둑 기사들의 대단한 실력을 보였고, 새로운 바둑 원형을 계속 연구 개발해 냈기 때문일 것이다. 우리 바둑 전문 기사들도 일제강점기는 물론 해방 후 1970~1980년대까지는 일본으로 바둑 유학을 갔던 사람들이 대부분 우리 바둑사를 이끌어왔다는 점에서 일부 일본 바둑을 인정해주는 것일 뿐이다.
바둑이란 게임은 복잡 무쌍해 보이는 인생사와 신통하게도 닮았다. ‘바둑이 인생의 축소판’이란 말에 확신을 갖게 하는 것이 바둑 동네에서 회자되는 무수한 격언, 명구(名句)들이다. 반상(盤上)의 ‘공자말씀’들은 실제 사회에서도 삶의 지표로 훌륭히 적용된다. 강의 준비를 못한 인생 카운슬러 선생님들은 급한 대로 ‘바둑 격언집’ 들고 강의실 들어가도 절대 망신당하지 않는다. 앞서 용례를 든 한자어 투성이도 실제 한국 바둑의 위상이 올라가면서 우리말로 많이 바뀌었다고 한다. 독자도 이후 세대이기 때문에 한글로 풀어쓴 바둑 용어 서너 개쯤은 알고 있다.
‘미생마(아직 살지 못한 말)는 동행하라’ : ’단곤마는 몰지 마라’, ’양곤마를 만들지 마라’. 이 3개는 말만 다를 뿐 서로 일맥상통하는 동일 주제다. 적의 곤마(困馬: 생사가 불분명해 쫒기는 말)가 하나일 때 직선 공격을 가하는 것은 성공 확률이 매우 낮다. 하지만 두 개의 미생마가 뜨면 대마 하나가 잡히거나 상당한 대가를 지불해야 한다. 단곤마도 홀로 떠다니면 피곤한데, 상대 곤마와 같이 움직이면 공동부담이 돼 발걸음이 훨씬 가벼워진다.
남의 집이 커 보이면 바둑 진다 : 난데없는 시력(視力) 타령처럼 보이지만 승부에 임하는 자의 바람직한 자세를 포괄적으로 압축하고 있다. 정확한 형세 판단의 중요성을 일깨우는 말이다. 아닌 게 아니라 충분히 둘만 한 형세임에도 몇 칸 안 되는 남의 집을 깨러 들어갔다가 몽땅 죽이는 일이 얼마나 많았는가.
일본 바둑에 대한 가장 오랜 기록은 7세기 초에 나온 『수서』에 있다. “왜인은 기박(?博)·악삭(握?)·저포(樗蒲)를 즐긴다.”는 내용이다(?왜국전?). 일본의 한문시집 『회풍조』에도 “속성(俗姓)이 진씨(秦氏)인 변정법사는 성격이 쾌활하고 말도 잘 하였다. 어린 적에 출가하여 노자와 장자를 잘 알았다. 대보(大寶) 연간(701~703)에 당으로 유학을 가서 왕자 이융기와 바둑을 잘 두어 후한 대접을 받았다.”고 쓰였다. 진씨가 4세기말에서 5세기 초, 가야에서 건너간 사람인 점에 대해서는 일본에도 널리 알려져 있으므로 길게 설명할 것이 없다. 당시 일본에 대한 그들의 영향력은 절대적인 것이었다. 『진씨의 연구(秦氏の硏究)』 저자가 한 단원의 이름을 ‘일본 안의 조선인 왕국 ?진왕국?’이라고 붙인 것만 보더라도 이 사실이 충분히 짐작되는 것이다. 오늘날에도 12개소의 신사에서 진씨네 지도자였던 진하승(秦河勝)을 신으로 받들고 있는 점도 기억해둘 일이다. 또 『일본서기』 22권에 “백제에서 낙타 등의 동물을 보내 왔다.”는 기록이 있다. 낙타는 본디 일본에 없는 것으로, 티베트에서 백제를 거쳐 일본으로 들어간 바둑의 전파 경로를 알리는 것으로 볼 수도 있을 것이다.
초기 바둑판의 화점은 모두 아홉 개로 처음에는 백제식의 순장바둑을 두다가 당과의 교류에 따라 16점 배석에서 8점으로 바뀌고, 이것이 16세기에 이르러 현대 일본 바둑의 바탕이 된 것으로 보인다. 나라시대에는 궁정에서도 바둑을 즐겨 두었다고 한다. 『속일본기』 738년조에 궁에서 바둑을 두던 사람이 말다툼 끝에 상대를 칼로 찔렀다는 기사가 있다. 승부에 집착해 생명을 빼앗았다는 말이다. 8세기 후반부터 바둑에 관한 기록이 점차 나오고, 9세기 중반에는 천황이 대신들을 모아 바둑대회를 열기도 하였다. 701년에 나온 『대보령(大寶令)』 ?승니령(僧尼令)?에서도 “승니가 음악과 박희를 즐기면 백 일의 고역에 처한다. 그러나 기금(碁琴)은 예외”라 하여, 바둑을 우대하였다. 이어 11세기에는 귀족뿐 아니라, 여유를 누리는 계층 사람들도 큰 관심을 가졌다고 한다. 일본의 바둑은 백제와 가야를 통해 들어갔다는 사실이 명백하다.
2권의 이야기는 '동남기원'의 독립군(기원에서 거의 살다시피 하는 사람으로 아마 내기바둑을 두는 사람들의 이야기인 듯하다. 그들은 어느 정도 수준의 바둑을 두는 사람들로 바둑의 길을 걷다 중도에 하차한 사람들을 일컫는 속어)들의 이야기로부터 시작된다. 이들은 소설 속 화자의 역할을 하는 박 화백의 젊은 시절 이야기와 맞물린다. 이야기 줄거리는 송강, 마공, 허인 등의 유명한 이름들이 스치듯 지나가며 박 화백의 시선은 목적인 추평사의 아들 추동삼으로 향한다. 추평사는 생의 끝자락에서 아들 추동삼을 동문인 설숙에게 맡겼다. 그리고 설숙의 문하에서 자란 추동삼은 아비 추평사처럼 정명운과 또 다시 얽힌다.
세월이 흘러 정명운은 국수 10연패를 이룬 당대 최고가 되고 전문기사가 되고, 추동삼은 내기바둑을 두는 방랑기객이 된다. 이들의 이야기가 서로 교차하며 펼쳐지고, 마지막에에는 박 화백과 벽송이 남는다.
소설에서 주요 인물의 무게는 설숙과 정명운 보다는 추평사와 추동삼에 좀 더 기울어져 있다. 더 극적이고 승부를 겨루는 승부사의 기질에 더 걸맞아서일 것으로 추정된다. 벽송의 주인은 여목에서 설숙, 설숙에서 정명운으로 이어지지만 박 화백을 통해 그 주인이 실은 추평사와 추동삼이었음을 말하고 있다. 그러나 결국 벽송은 추평사와 추동삼으로 이어지지 못하고 끝내 박 화백의 손에서 그 운명을 마감한다. 소설 서사의 주위에만 자리 잡고 있던 박 화백이 실은 서사의 중심에 있는 구성이 소설적 재미를 더하는 데 분명 한몫했다고 독자는 생각한다.
우리나라 사람이면 다 아는 전문기사 조훈현도 이 책에 대한 추천평에서 "소설 『승부』는 나에게 승부라는 화두를 다시 한 번 일깨워준 작품이다."고 썼다. 또 그의 제자이자 한국 2세대 바둑 황제 이창호도 "이 책은 한중일 근현대사를 배경으로 대를 이은 두 승부사의 파란만장한 대서사극이다. 이름 없이 사라져간 승부사들을 처연하게 다루지만 승자와 패자가 나뉘는 승부의 특성만큼 장쾌한 소설적 재미를 더하였다. 소설 『승부』와 더불어 바둑의 시대가 다시 한 번 도래하기를 기대해본다."고 평가했다.
소설 『승부』는 저자 조세래 삶의 철학이 온전히 담겨 있고, 저자의 삶의 굴곡은 영화 〈스톤〉에 담겨 있다고 말한다. 그가 바둑과의 인연과 심취한 과정을 영상으로 담아낸 영화가 〈스톤〉이다. 글로 바둑을 통해 자신의 인생 철학을 말한 것이 『승부』라면, 저자의 영화 감독 데뷔작이자 유작이 된 〈스톤〉은 영상으로 인생과 바둑 철학을 표현했다고 평가받고 있다. 독자가 〈스톤〉을 본 적이 없어 〈위키백과〉의 힘을 빌어 영화 스토리를 짧게 옮긴다.
“왜 깡패가 됐어요?” 프로기사의 꿈을 접고 내기 바둑으로 하루하루를 살아가는 천재 아마추어 바둑기사 ‘민수’(조동인). 그는 우연한 기회에 조직 보스 ‘남해’(김뢰하)의 바둑 선생이 되면서 새로운 세상에 눈뜨게 된다. “인생이 바둑이라면 첫 수부터 다시 두고 싶다” ‘민수’는 ‘남해’에게 바둑을 가르치면서 인생을 배워간다. 하지만 ‘남해’의 권유로 다시금 프로 입단 시험을 준비하는 ‘민수’와 조직을 떠날 준비를 하면서 마지막으로 건설 용역에 뛰어든 ‘남해’의 결정적 한 수 앞에 예상치 못한 위험이 다가오는데… 361개의 선택점, 이제 그들의 이야기가 시작된다. 그러나 아쉽게도 조세례는 영화가 개봉되기 전 2013년 11월 25일 57세의 나이로 타계했다.
1991년 시나리오 작가로 충무로에 입성한 조세래 감독은 전지영 감독과의 인연 이후로 점차 시나리오 작가, 조감독으로 자리 잡게 된다. 그리고 기획한 바둑 영화 〈명인〉은 상업성이 부족하다는 이유로 제작이 무산됐고, 조세래 감독은 영화계를 떠난다. 영화계를 떠난 조세례는 소설 『역수』를 선보이고, 개정판이 나온 10년 뒤 영화계로 복귀하여 〈스톤〉을 내놓는다.
소설 『승부』는 2권 박 화백이 벽송을 해봉처사가 입적할 때 다비식 불에 던짐으로써 끝난다. "벽송 주위로 불길이 모여드는 싶더니 삽시간에 그 불길은 반면을 그슬리며 벽송 위로 번졌다. 불길은 이내 피어올라 주위를 밝히고 밤하늘에 찬연히 불타오른다. 벽송이 타고 있었다. (중략) 여목의 웅혼이 타고 있었다. 설숙의 심혼이 타고 있었다. 평사의 슬픔이 타고 정 국수의 고뇌가 타고 있었다."(2권, p.402~403)
저자 : 조세래
소설가, 시나리오 작가. 1957년 경상북도 예천에서 태어났다. 20대 중반에 영화계에 진출, 〈산산이 부서진 이름이여〉(1991)로 춘사영화제 각본상 수상, 〈하얀전쟁〉(1992)으로 제5회 동경국제영화제 작품상 수상, 제31회 대종상 각색상을 수상했다. 영화 〈스톤〉(2014) 각본, 감독으로 부산 국제영화제, 로카르노 국제영화제 등 국내외 유수 영화제에 초청, 수상했다.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작성된 리뷰입니다.>